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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동명천제단입니다.
대한제국 애국가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사
성수무강하사
해옥주를 산같이 쌓으시고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
오천만세에 복록이 일신케 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고려왕조(高麗王朝), 우리는 고려를 고려제국(高麗帝國), 즉 대고려제국(大高麗帝國)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역사적으로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첫 번째 법통 계승자(法統繼承者)로 일컫는 장자(長子)이며 적자(嫡子)가 바로 고구려(高句麗)이고, 또 여기서 다시 두 번째 법통 계승자이며 후계자(後繼者)로 마지막 건국된 것이 고려(高麗)라는 것을 우리가 깊게 인식(認識)한다면, 우리 동이족(東夷族)의 법통적 명예와 정체성을 국호로 서양에 처음 알린 이름 고려(高麗)는 진실로 오랜 세월 중국 대륙(中國大陸)을 상대로 끝까지 독립성(獨立性)을 유지하며 동이족의 가장 뜨거운 명예를 드높인 우리의 자랑스러우며, 자존(自尊)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국호(國號)라는 것을 본 카페(cafe)를 통해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현재까지도 과거 소련(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에서 독립한 국가들에서 흔히 우리 민족을 가리켜 고려인(高麗人)으로 호칭하고 있다는 점을 보면, 얼마나 고려라는 이름이 오랫동안 갖는 독창적인 명성(名聲)에 대해 세계가 인정하고 있는 가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며, 더불어서 우리 고려가 우리 지구(地球) 전체를 덮고도 남을 뿌리깊은 우리의 독보적(獨步的)인 살아있는 명예(名譽)이며 자존라는 것 또한 재차(再次)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영어로 COREA였고, 현재는 일본제국 치하(日本帝國 治下)에서 KOREA로 바뀌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Corea와 Korea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대부분 대수롭지 않게 일본제국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또 단순히 나라별로 부르는 방식에 따른 결과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 물론, 저희 재건회도 이러한 대체적인 의견에 대해 부정을 하거나 큰 비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먼저 전제(前提)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현재 그리고 지금, 전 세계의 언어에서 국제어(an international language)로서 거의 독보적으로 국제 통용어(bridge language)로서 쓰이고 있는 언어는 바로 영어(English)라는 점입니다.
영어는 인도 유럽어족(languages stemmed from the Indo-European family) 게르만 어파(Germanic languages)의 서게르만 어군(West Germanic languages)에 속하는 언어로 오랜 세월 수많은 국가에서 사용하면서 변용(變容)된 후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현재의 언어로 역사적인 관계처럼 굳어진 다양한 문화와 언어가 마치 현재의 미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 모습과 같이 매우 중첩적(重疊的)이고 광범위(廣範圍)하게 적용된 언어가 바로 영어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어는 특히 모든 언어의 언어적 요소(言語的要素)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할 정도로 한마디로 말 자체가 국제 통용어로서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굉장히 놀랍고도 불편한 문제가 있는데, 언어에도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위, 갑을관계(甲乙關係)가 있다는 점은 우리가 쉽게 간과(看過)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 언어(world language) 중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서양 언어(western language) 중에서 크게 분포를 보면, 게르만어파(Germanic languages), 발트어파(Baltic languages), 슬라브어파(Slavic languages), 로망스어군(languages romanes), 우랄어족(Uralic) 등 많은 어군들이 속하고 있지만, 유독(惟獨) 다양한 전세계의 언어중 크게 게르만어파에 속하는 특정 영어의 구체적 사용 빈도(頻度)나 비중(比重)에 따라 각 나라 특유의 자체적 특정 지명(地名)이나 특정 언어, 또는 국호(國號)조차도 해당 나라의 독자적 입장이나 사정과 전혀 무관(無關)하게, 오직 영어의 사용 빈도와 또는 열강(列强)들의 일방적 결정에 따라 그대로 국제적 표준어(international standard language)로 통용되는 것이 국제적인 관례(international practices)로서 지금까지 이어져왔다는 점에 대해 우리는 너무 무관심하고 있습니다. 마치, 19세기(the 19th century) 이후의 서양 열강들(Western powers)의 횡포(橫暴)이기도 했던 사안이 지금까지 관례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각 국가간 주권(主權)과는 전혀 무관한 오직 힘에 의해 영구적(永久的)인 갑과 을의 일방적 관계(一方的關係)였고, 불행하게도 현재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관계라고 정의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지금도 대한민국 공화국(Republic of Korea)의 외교에서 여전히 큰 문제중 하나인 동해(東海), 원래는 한국해(韓國海)가 정식 이름으로 맞습니다만, 일본제국 통치기(日本帝國 統治期)를 거치면서 일본해(日本海)로 표기된 것이 현재까지 미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측의 선호(選好)에 따라 이어지고 있거나 또는 독도(獨島)를 다케시마(Takeshima)로 지칭(指稱)하면서 가끔 불리하면, 기껏해야 리앙쿠르 암(Liancourt Rocks)으로 표기하는 경우 등이 가장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대한민국 공화국 정부에서 나름대로 변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고 하고 있지만, 여전히 국제적으로 바뀌지 않고 통용되고 있는 현실속에 우리는 나약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만큼, 국제 관례적으로 한번 정해진 지명이나 명칭은 어떤 심각한 전쟁 등, 큰 사건이 아니라면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 외교적 상례(外交的常例)라는 점에서 역시 우리는 우리의 영어식 국호, Korea에 대해서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관련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저희 재건회는 최대한 다른 주관적(主觀的)인 입장을 배제하고 객관적(客觀的)으로 독자들이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논술(論述)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들의 많은 이해 부탁드립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처음 한국이 외국에 공식적으로 소개되어 표기 시작된 이래 고려왕조의 국호인 고려를 주로 Corea의 이름로 조선왕조 후기(朝鮮王朝後期)까지 쓰이다가, 구한말(舊韓末) Korea란 이름으로 Corea와 잠시 혼용되어 한일합방때까지 쓰였고, 이후 미국 국무성(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에서 정확히 시점이 언제인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사례는 없지만, 한국의 국호를 Korea로 통일 확정지은 이래 국제적으로 통용하게 되었다라고 일반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치, 동해(東海)의 이름이 한국해(the Sea of Corea)에서 일본해(the Sea of Japan)로 완전히 바뀐 것처럼 말입니다.
확인되는 바는 1893년의 일이라고 국내 학자들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한민국 공화국 정부(Republic of Korea government)나 학자들은 이와 같은 주장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대마도(對馬島)조차 해방 이후 일본에 헌납(獻納)하다시피 영유권(領有權)을 포기한 사례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며, 현재의 일본 정부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계속적으로 주장하고 있지만 정작 한심스러운 대한민국 공화국 정부는 대마도에 대한 맞대응 형태의 영유권 조차 주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한심하고 무능한 절멸(絶滅)해야 할 공화국 정부입니까?
그런데, 관련하여 소위 국내 학자들이 납득(納得)할 수 있게 제시한 근거와 단서라는 것이 단순히, 중국 국호인 China와 헷갈릴 수 있는 염려가 있어서 Korea로 했다는 설명인 것이 전부입니다. 마치, 이러한 설명을 보면 서양 열강들이 아프리카 식민지(African colonies) 경영 시절에, 문화와 인종, 국가에 대한 기준이나 배려가 없이 그냥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마치 칼질하듯 아프리카(Africa) 나라들의 경계선을 마구 직선으로 설정해 놓은 모습을 지금도 볼 수 있으며, 비슷하게 미국이나 캐나다(Canada) 역시 당시 아메리카 인디언들(American Indians)의 땅을 무단 점령하기 위해, 무참하게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도륙(屠戮) 및 살육(殺戮)하면서 만든 칼질 경계선을 지금도 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듯이, 실상(實狀) 한국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이 부르기 쉽게 소위, 군사적 개념(軍事的槪念)으로 오직 점령 사업(占領事業)에서 상대국(相對國)과 혼동(混同)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이유로 그냥 일방적으로 국호를 멋대로 정했다는 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통설인 점을 감안한다면, 약소국(弱小國)으로서의 불운(不運)과 비운(悲運)이 너무 마음아프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더욱이, 영어식 국호가 정해지는 시점이 바로 한국의 주권이 일본제국에게 넘어간 시점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자체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는 비운적 안타까움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내용처럼 일본제국이 한국의 영어식 국호를 바꿨다는 주장은 우리의 입장을 자체적으로 주장할 목소리가 사라진 상황에서 일본제국 정부측 입장, 즉 당시 조선(朝鮮)이라고 호칭했던 일본제국 측에서 본다면, 의도적이고 고의적으로 Corea를 Korea로 바꾸는데 노력은 하지 않았겠지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서양의 열강이 어떤 결정이 되더라도 그대로 방치하고 또 국제적으로 지명이 결정되더라도 일본제국 정부 자체적으로는 크게 관심 자체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결국 지금의 Corea가 Korea로 결정되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론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즉, 대한제국의 국권이 피탈되기 전까지의 공식적인 국가적 상징물에는 Corea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이후 한일합방 이후의 일본제국 통치기(日本帝國統治期)에는 모든 공식적인 한국을 상징하는 영문에 Corea가 모두 사라지고 대신 Korea로 모두 대체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대한제국 조정의 공식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현재까지 나온 많은 자료들을 보면, 한일합방(韓日合邦)전까지의 상황에서 대체적으로 Corea와 Korea는 혼용되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자료로 발견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대한제국 당시 서양 국가들과 수교(修交)한 대다수 국가들의 근대 조약문(近代條約文) 중 거의 유일하게 독일(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을 제외한 대다수 국가들이 Corea로 우리나라의 국호를 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되는 사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 재건회의 입장은 한국의 영어식 국호의 최초 기록을 먼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저희의 입장이라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한국의 영어식 국호인 Corea냐, Korea냐의 국호 선정(國號選定) 문제가 국호에서 그냥 머무는 문제가 아닌, 한일합방 이후 발생되는 동해, 일본해 문제와 이후 독도 및 대마도 문제(對馬島問題), 그리고 간도문제(間島問題)까지 모두 연결된다는 점이기 때문에 더욱 큰 문제의식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정말 개념없고 아둔한 학자들은 영어식 국호를 Korea로 하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동문서답식(東問西答式) 답을 하고 있다는 점은 너무 한심합니다.
즉, 우리나라 우정총국(郵征總局)이 최초의 우표(郵票)를 만든 1884년 11월 18일의 기록을 보면 공식적으로 Corea로 쓰고 있다는 점이며, 이것은 국내 학자들이 주취자(酒醉者)처럼 줄곧 되뇌이며 주장하는 미국 국무성 결정 운운하는 내용과 전혀 무관하게 우리나라가 처음 국가가 공식적이며, 대외적으로 만든 최초의 우표 이름에 Corea를 계속 썼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고 이후,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모든 제국의 상징적 우표에 Corea라는 이름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주권이 가장 많이 상징적으로 담겨져 있는 대상이라면 바로 대표적인 것이 화폐(貨幣)를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재미있는 것은 1910년을 경계로 하여 이전 대한제국 시기에 발행된 지폐인 일본제일은행권(日本第一銀行券)에는 영문 국명이 Corea로 표기된데 비해 이후 일본제국 시대로 넘어온 이후에 구한국은행인 조선은행(朝鮮銀行)에서 발행된 지폐의 영문 국명은 Korea로 바뀌게 됩니다. 과연 이것이 일본제국 정부에 의한 영문 변경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물론, 당시 멸망했던 대한제국의 조정 자체는 전 왕조의 국호인 고려라는 이름을 영어식으로 쓴다는 것에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이야기처럼 만약 대한제국의 조정이 고려라는 이름이 아닌 대한(大韓)의 영어식 표기를 계속 주장하고 홍보했다면 지금의 Korea 사용은 결과가 또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지금의 시점에서 Korea를 Corea로 바꾸자고 주장을 해도 국내 여론은 말할 것도 없고, 국제적으로도 통용되기는 불가능하다는 점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진실에 대해서 조차 최소한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 우리가 무관심으로 그냥 넘어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마치, 일본제국의 엄청난 대규모 생체실험(unethical human experimentation) 부대(部隊)인 731부대(Japanese Imperial Army Unit 731)에 대해 우리 국민이 엄청난 피해를 받았음에도 솔직히 현재의 공화국 국민 대다수는 잘 모르기 때문에, 최소한 731부대의 용도(用途)는 알고 있어야 하거나, 또는 최소한 우리 국민이 생체실험으로 살해되었던 장소라는 것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진실 자체를 감춰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후, 해외에 동해에 대한 최초 서양 지도에서 등장하는 이름을 보면 명칭이 동해도 아닌, 한국해(Sea of Corea)의 명칭으로 호칭되고 있음을 우리는 매우 오래된 서양의 지도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대부분 최초의 서양 지도는 모두 Sea of Corea의 이름으로 정의되어 있으며, 지금의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의 구 명칭이었던 간도(間島) 역시 한국해라는 이름으로 명칭되었던 서양지도에서 간도가 조선의 영토로 국호가 Korea가 아닌 Corea라는 점을 명심한다면, 만약 현재처럼 계속 원래 우리의 영어식 국호가 Korea라고 주장하면, 과거의 모든 우리의 고유 주권을 포기해야 하는 자충수(自充手)를 둔다는 점에서 부디 현명하고 합리적인 국민의식이 반드시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사례는 현재 독도가 국제적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일본측 주장에 그대로 당하며, 이른바 국제적으로는 각국에 불필요하게 많은 혼선(混線)을 주며 국제적으로 영토분쟁처럼 보이는 이유도 사실, 독도라는 명칭 자체가 원래의 구 명칭인 우산(于山)이 아닌 근대에 새로 설정된 신 명칭의 이름이라는 점, 그리고 동해 역시 원래 이름인 Sea of Corea의 한국해를 포기하고 엉뚱하게 자꾸 쓸데없이 동해(東海) 운운하면서 쌍으로 웃기며 벌어진 참담한 촌극(寸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Corea의 고유 영어식 한국 명칭을 대한민국 공화국 정부는 국내 학자들을 동원하여 저주하며 험담까지 하는 것일까? 우리가 Korea라는 이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국익은 과연 무엇일까? 서양에서 특히, 미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에서 Korea는 한국전쟁(the Korean War)을 통해 결정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만약, 우리가 끝까지 1945년 해방 이후라도, Corea라는 이름을 주장하고 고집했다면 지금처럼 Korea로 굳어지는 계기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현재 국민의힘(the People Power Party)에 비해 더불어민주당(the liberal Democratic Party)을 보면, 일본에 대해서 이른바 무법천지(無法天地)의 성지(聖地) 대종교(大倧敎)처럼 이상하게 히스테리(hysterics)처럼 매우 적대시(敵對視)하고 있는데, 오히려 역설적(逆說的)으로 일본제국 통치시대(日本帝國 統治時代)의 치욕적 잔재(恥辱的殘滓)라고 할 수 있는 영어식 이름(anglicized name of country) Korea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고 조용한지 조금 신기하기도 합니다. 정작 말해야 할 것은 못하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신나게 떠드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매우 가식적(假飾的)이다라는 생각도 가지게 되는 것, 비단 저희 재건회(再建會) 뿐이겠습니까?
아무튼, 금일은 고려왕조에서 유래한 영어식 국호인 Corea와 관련한 이야기를 먼저 언급하면서 다소 숭의전에 대한 설명이 늦었습니다만, 지금부터 본래의 내용인 고려태조(高麗太祖)의 고귀한 신위(神位)를 모시고 있는 경기도 연천의 숭의전(崇義殿)에 대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고려왕조 역대 임금들의 신위를 모신 종묘(宗廟)는 개경(開京)에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만, 현재 개경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지역에 있는 관계로 실제 유적지에 대한 고증과 확인은 불가한 상태로 있습니다. 매우 안타까운 현실인데, 정사(正史)에 의하면 조선왕조에서 왕조 개창 후 전 왕조였던 고려왕조의 종묘에 대해 고려의 종묘를 완전히 철거를 한 후, 그대로 원래의 자리에 다시 조선왕조 종묘를 세웠던 것으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초기 조선왕조 종묘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매우 안타깝습니다.
아무리 전 왕조라고 하더라도, 고려왕조의 종묘까지 철거하고 터까지 파서 다시 조선왕조의 종묘를 다시 자리에 세웠다는 이야기는 너무 지나친 처사(處事)가 아닐 수 없으며, 이후 조선왕조가 정통성있는 왕조로 뿌리내리기 위한 방침으로도 매우 부족한 방향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에서 이렇게 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의 종묘 터가 서운관(書雲觀)에서 고려왕조의 종묘터가 가장 좋은 터라고 주청(奏請)을 드리면서 결정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이렇게 개경의 조선왕조 종묘는 한양(漢陽) 천도 후 한성으로 이전하면서 철거 또는 폐쇄되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만, 이후 개경의 조선왕조 종묘는 어떻게 처리가 되었는지 확인은 안되고 있습니다. 즉, 고려왕조의 전 종묘를 철거하고 다시 지었다면 오랫동안 사용되었어야 했지만, 결국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원래 종묘 자리는 폐허가 되었다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위한 정책이었는지 의심할 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 의문은 왜 숭의전이 개경이 아닌 지금의 연천(漣川) 지역에 특별히 고려왕조의 종묘 개념으로 세운 것인지 뚜렷한 설명이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 일설에는 고려태조 임금의 원찰(願刹)인 앙암사(仰巖寺)가 있었던 자리에 고려왕조의 종묘인 숭의전을 세웠다고 전하고 있으나 이러한 설명도 과연 고려태조의 원찰이 앙암사밖에 없었는지는 역시 확인이 안될 뿐만 아니라, 개경이 아닌 굳이 연천과 같이 먼 곳에 있는 원찰에 특별히 세웠는지 충분하고 정확한 안내라고 하기에는 많은 의문과 부족함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태조의 공식적 원찰은 고려 광종대왕(光宗大王) 2년인 951년에 개경 남부에 세운 봉은사(奉恩寺)가 대표적이며 고려 역대 임금들이 가장 많이 참배하며 행차하던 사찰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후에 고려태조의 어진을 모신 봉안처로 지목되고 있는 사찰은 원찰이었던 봉은사를 비롯하여, 영통사(靈通寺), 양산사(陽山寺), 용천사(龍泉寺), 봉업사(奉業寺), 대안사(大安寺) 등 확인되는 사찰만 7개에 이르지만, 정작 앙암사는 당대 사찰 명단에 확인이 안되고 있습니다. 즉, 고려태조의 원찰인 앙암사는 고려왕조의 왕실에서 창건한 정식 원찰도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개경이 아닌 연천에 고려왕조의 종묘인 숭의전을 세운 것일까?
물론, 일설에 의하면 앙암사는 고려 태조가 태봉국(泰封國)의 궁예대왕(弓裔大王)을 만나기 위해 송악(松嶽)에서 철원(鐵圓)으로 가는 중간의 사찰이었던 앙암사에 자주 들렸다는 이야기 때문에 원찰로 지명이 되었고, 숭의전 건축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려 태조의 원찰이며 동시에, 고려왕조의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종묘의 대안으로 건축되는 숭의전의 터로 앙암사가 결정되었다는 것은 500년 왕조의 왕업에는 크게 못미치는 매우 미흡한 배려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앙암사라는 절의 터 규모가 매우 협소할 뿐만 아니라, 교통도 임진강을 통하지 않는다면 지금도 찾아가기가 불편한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고려태조 왕건은 개경에 도읍을 정하면서 도성내 십대 사찰(十大寺刹)을 세웁니다. 바로 자운사(慈雲寺), 법왕사(法王寺), 왕륜사(王輪寺), 내제석원(內帝釋院), 사나사(舍那寺), 천선원(天禪院), 신흥사(新興寺), 문수사(文殊寺), 원통사(圓通寺), 지장사(地藏寺)가 있었습니다.
모두 지금은 고려왕조 멸망 후 빈터로 존재하는 사찰입니다만, 남북이 통일되고 새로운 대한제국의 재건과 복원이 이루어진다면 우선적으로 십대 사찰은 복원되고 새로운 제국과 왕업의 터로 길이 보존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숭의전이 처음 조선왕조에서 세운 시기는 1399년 정종대왕(定宗大王) 원년에 고려 태조(高麗太祖)를 비롯하여 혜종대왕(惠宗大王), 성종대왕(成宗大王), 현종대왕(顯宗大王), 문종대왕(文宗大王), 원종대왕(元宗大王), 충렬왕(忠烈王), 공민왕(恭愍王)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 것으로 전해졌으나, 조선 문종대왕(文宗大王) 때 고려왕조 팔대 임금(八代國王)을 사대(四代)만 모시는 정책으로 바뀌어 태조대왕, 현종대왕, 문종대왕, 원종대왕의 위패만 모시고 나머지 고려의 충신(高麗忠臣) 16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변경이 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역대 왕조 종묘 특히 전국 팔전(全國八殿) 중 단군조선(檀君朝鮮), 기자조선(箕子朝鮮),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가야(伽倻)의 종묘가 모두 시조대왕(始祖大王)의 위패(位牌)만 모시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숭의전은 다소 크게 우대가 되고 있는 측면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조선왕조의 역대국왕 위패보다 더 많은 대왕의 위패를 모실 수는 없다는 견해로 팔왕(八王)이 아닌 사왕(四王)만 모시는 숭의전으로 모신다는 점에서는 매우 큰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이미 조선왕조의 현재 태묘(太廟)가 정전(正殿)의 경우 십구대(十九代)까지 모시고 있으므로, 숭의전 초기 건립의 기준이었던 팔왕의 위패를 모시는 일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으로 저희 재건회는 사료(思料)합니다.
따라서, 제국의 재건과 복원이 이루어진다면 숭의전도 원래 건립의 모습처럼 다시 복원하는 것도 올바른 일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고려왕조는 조선왕조의 개창과 더불어서 많은 왕족과 귀족의 몰살과 대규모 살육이 이어져 지금은 개성 왕씨의 자손들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부분에서 고려왕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리고 무슨 문제 때문에 조선왕조 개창과정에서 개성 왕씨들이 대규모 살육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와 근거가 제시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간절하게 가집니다.
중국의 예를 본다면, 왕조의 교체 시기에는 의례적으로 전왕조의 흔적이 모두 사라지고 왕손들의 멸절이 이루어지는 것은 상례인 것은 우리가 중국의 역사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하여 반란도 없었고, 복위 운동을 일으킬 의도도 없었는데 무조건 도살시키고 살육했다는 것은 누가봐도 쉽게 납득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대한제국의 복원과 재건이 이루어진다면 지난 3월 25일에 기재했던 "帝國 二百六十六: 팔전 중 네 번째 신전 숭혜전"의 글에서 언급한 바 있는 것처럼 신라(新羅)의 화백회의(和白會議)와 같이 각 왕조 전국 팔전의 후손들이 모여 모든 대소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회의체의 주체로 참여하여 왕위계승과 같은 중대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 존숭의 의미로 모시는 문제도 반드시 차기(次期) 대한제국 조정에서 검토되어야 할 당위성은 충분하다고 언급드리는 바입니다.
대한제국 만세! 존왕양이 만세!
감사합니다.
대한제국 재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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