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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성 선생 인터뷰
* 일시 : 2004. 5. 7. 금. 오후 4시 40분-6시 30분, 날씨 : 화창
* 장소 : 권선생댁 정원에서
* 내용 : 류자명 선생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면서 충주관련 인물들에 대한 당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주 대상은 정태희, 정석희, 정상희씨 형제들과 1932년 LA올림픽에 마라톤 선수로 출전했다던 권태하(영호 선생의 6촌 형)씨에 대한 기록이 조금 더 찾아져 그 부분을 놓고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 분위기 : 오전부터 전화를 했으나 통화가 되지 않다가 4시 경에 통화가 됐다. 하우스에서 소일하고 계시다고 했고, 방문을 허락받고 4시 반에 약속하고 찾아갔다. 하시던 일을 정리하시고 대문을 열고 기다리고 계셨다. 날씨가 따뜻해 정원에 앉아 인터뷰를 시작했다. 마실나갔던 개가 돌아와 짖어대는 통에 녹음상태가 시끄럽지만, 전체 내용을 파악하고 정리하는데는 크게 지장을 주진 않았다. 지난 월요일에 뵙지 못했는데, 마침 선생께서도 작년에 받았던 수술의 정기검진 관계로 학다방에 못나오셨다고 했다. 다음주에도 MRI촬영이 있다고 했다. 요즘 확실히 근력이 쇠잔해 짐을 느끼겠다고 하시며, 지팡이가 이젠 절친한 친구가 돼가고 있다고 한다. 단편적인 자료들을 놓고 이야기를 풀어가며 궁금했던 부분들을 여쭤봤다. 비교적 소상히 말씀해 주셔서 오늘 목적한 바에 대해서는 정리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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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찬 : 몇 가지 찾다보니까 그때 말씀하셨던 권태하(權泰夏)씨에 대한 기록들이 좀 나오는 게 있더라구요.
권태성 : 기록에 나와?
김희찬 : 예, 누가 정리를 했더라구요. 몇 군데서 올라와 있는게 있는데, 어느 고등학교 교감선생님이 조회시간에 일화(逸話)로다 얘기한 경우도 있고. 또 뭐 한국 마라톤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이름이 보이기도 하고요. 제일 그래도 좀 자세하게 써 놓은 게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라는 분이 정리해 놓은 게 있는데요. 거기 보면, 32년 LA올림픽에 출전해서 3등으로 들어오다가, <어?> 3등으로 들어오다가 넘어져 가지고 기다시피해서 9등으로 들어온, 그렇게 소개를 해놨구요. <어, 그래> 예, 그리고 여기 보면은 청주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청주?> 예, <아니여.> 여기 충주가 고향이죠?
권태성 : 저기 집이 있는데.
김희찬 : 아, 여기가 고향이죠? 이건 잘못된 거구나. (부인께서 음료수를 내오심, 짧게 인사드리고) 그 다음에 여기 이제 보면은, 그때 '츠다'라고 말씀을 하셨던, <응?> 츠다라고. <응, 쓰다> 그런 관계들은 자세히 설명이 돼있어요, 여기 보니까.
권태성 : 어, 그래? <그리고,,,> 가만, 저 쓰다하고, 김... <예, 김은배> 응 김은배.
김희찬 : 예, 김은배. 이 분이 6등으로 들어왔다 그러고, 쓰다가 5등으로 들어오고. 그렇게 기록이 돼있는데. 그 다음에 그 뭐 이제 쓰다를 보조해서 열심히 뛰어라. 길 트는 역할하고, 이런 것들에 불만은 품고, 결국 여기에는 미국에서 공부를 계속 했다라고 기술이 돼있거든요. 이 후에 그럼 미국에 머물러서 공부를 하다가 들어오신 건가요?
권태성 : 그때 캘리포니아 대학에... <캘리포니아 대학에?> 어.
* 개가 심하게 짖어 잠시 진정 시키고, 보청기를 착용하신 후에 다시 시작.
권태성 : 캘리포니아 대학에, 그때 운동 선수로서 올림픽에 해가지구선 거기서 인제 9등을 했거던. <예> 이제 9등을 했는데, 그 이유는. 이제 예선때, 일본서 예선때 쓰다가 3위고, 1위가 권태하씨고, 2위가 김은배구. 쓰다가 3윈데. 거기를 작전을 갖다가서 하기를 쓰다를 1등 시키기 위해서 둘은 보조역할을 하는, 그러한 그 작전으로 나갔다 이 말이거던. 그러니까 이제 그 권태하씨가 좀 화가 났지, 이제. 화가 나니까 가다가서 자기 페이스를 갖다 오바페이스를 한거여. 그가 그 갈등이 있어가지구. 그래가지구 경련이 일어나가지구 결국 뭐 엎어졌는지 자뻐졌는지, 그렇게 난 알구 있거던.
김희찬 : 이분이 그 올림픽 끝나고, 마라톤 끝나고 캘리포니아 대학을 다니신 거예요?
권태성 : 그렇지. 캘리포니아 대학을 다녔는데. 어, 어떻게 미국을, 내가 직접 들은 얘기지만은, 캘리포니아 대학선 일전에, 그 캘리포니아는 비 안오잖아. <예> 비가 잘 안오거던. 그렇기 땜에 그 운동장에 그땐 잔디가 아니거던. <예> 그러니까 운동장에다 물을 뿌리줘. 그런 그 아르바이트를 해가지고서 대학을 다녔다 이 말이거던. 그래 그 다음에 문제가 나오기를, 올림픽에 선수로서 미국 들어왔다가, 주저앉어서 학교를 다니니까, 그때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은 여권에 기한이 넘어간다 이 말이여. <아, 여권 기한이 걸렸구나?> 여권 기한이 넘어가니까 학교에선 뭐라 그런고 하니, 그러니까, 시방두 멕시코 사람들이 그런 걸 갖다 하는 거루 알고 있어. 한번 들어오면 얼마를 여서 체류한다. 그런데 그 기한을 갖다 넘어갈 적에 다시 미국에 있고싶으면 멕시코 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거여. <예> 재입국하면 이게 또 느는거야. <예, 비자 연장하고> 어,,, 그래 인제 그 당시에 내가 들은거는, 이제 그러한 때 네가 학교를 다닐라면 멕시코로 가거라. 가면 이렇게 해서 인제 연장을 하면 다닐 수 있다. 이제 그랬는데, 내가 알기는 멕시코를 갔다왔다할 여비가 없다 이 말이여, 아르바이트하는 사람이. 그 당시는 여기엔 이제 한국에서는 어머니 아버지 다 읎어. 형님만 살아있고 한데, 거기서 그 어떤 비용을 댈 여유는 읎었구. 그러니까 이 분이 엣다 모르겠다 그냥 들어간다 그러고 들어온거야. <음, 다시 귀국을 하신 거예요?> 응, 귀국을 한 거야. 그래 가지구선 그래가지구 그 교수가. 뭐랄까, 일본이 대륙을 침략하는데 그 제일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 남만주철도회사야. <아, 남만철도?> 응, 그게 소위 만주 먹는데 전초기지야. 그래 이 분이 거길 들어가. <아,,,> * 개짖는 소리가 심해서 다시 진정시키고.
김희찬 : 그래서 이 분이 만주로 들어가시게 된 거구나!
권태성 : 그렇지. 그러니까 그 양반이 그래가지구서 거기서 그, 그거를 뭐라 그러나, 시방. 그 일본에 낭인(浪人)이라는 거 들은 적 있나?
김희찬 : 예,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권태성 : 낭인이라고 그러는게, 일정한 직업 없고, 그 국가에 대해서 운운하고, 이런 대망(大望)을 품고 있는 걸 낭인이라 그래. 이제 거기서 낭인하구 접촉이 있어. 그래가지구선, 뭐라 그럴까, 낭인들은 만주를 갖다 들어서서, 일본의 국철이 들어가는데, 조직체로선 남만주철도회사고, 또 따라서 거기에 낭인도 많이 침투돼. 그래서 이 냥반은 그런 사람들하고 접촉이 있는 관계로서, 한국에서 들어간 사람들, 예를 들어서 최남선, 이제 그런 분들이 있거던. 최남선씨하고 또, 이(李), <이광수?> 아니 이광수는 아니여. 그런 사람들하고 접촉을 하게 되고. 거기서 문제는 그 뭐라고 할까, 아주 델리케이트한 문젠데. 이광수가 친일파루 몰리게 된 원인은, 이광수가. 이광수가 한국의 삼재사(才士)야. 그 다음에 이광수, 또 최, 저 탄금대 비 쓰고 한 사람, 최, <육당이요?> 어, 육당. 최하고, 또, 이광수, 최하구 저,,, 뭐야 임꺽정 쓴 사람. <아, 벽초> 응, 벽초. 그 셋을 갖다 한국의 아주 그 제일 머리좋은 사람으루 일반적으루다 얘기가 됐었지. 그래서 인제 그 얘긴 뭐라느냐. 이광수가 한국의 그, 그 당시에 소위 글 쓰는 사람 중엔 일인자야. 그래 돼있어. 난 그 몇 가지 안읽었지마는, 그때 농촌 뭐니, 계몽운동이니 많이 그런 걸 갖다 시사한 바가 많이 있거던. 그런 사람 사고는, 왜 그 사람이 친일파로 몰린고 하니, 우리가 일본 국민으로서 할 일을 다 하자. 그러니까 혈세(血稅)다. 그러니까 (전쟁에) 나가라. 이걸 갖다 명치대학 강당에서 그냥 막 그냥 흥분하구 그냥 서루 학생과 더불어 흥분해가지구 대성통곡을 하고, 거기서. 그게 난 직접 그거를 갖다가 그 당시에 명치대학에 다니다가서 여기 검사(檢事)로 온 사람이 있어. 그 사람한테 들었거던, 직접. 이광수가 뭐이라고했는지 난 그 친구한테 직접 그 당시에 들었기 때문에, 이제 그가 원 지론은, 일본한테 세금을 내고, 군대 거시기 혈세를 내고, (그러니까) 일본사람하고 똑같은 대우를 해달라, 요는 그거거던. 똑같은 대우를 해달라. 거기 델리케이트한 문제가 뭐가 있는고 하니, 일본 사람이 옳고 그르고 한 바로메타, 우리는 삼강오륜이야, 우리나라에선. 일본서는 뭔고하니 일본 명치천황의, 소위 그 문제가 있지마는, 일본의 막부 정부가 쓰러지고 명치천황 당시 유신정권이 이루어 진거거던. 그 당시에 명치천황의 칙어(勅語). <예, 칙어.> 그거는 우리나라로 얘기하면 윤리(倫理) 관계일거야. 거기 뭐라고 써있는고 하니, 모든 국민에게 자기가 있음직한 자리에 있지 못한다면은 곧 이것은 나의 죄다. 이런 말을 한 게 있어. <예> 한국사람은 그걸 갖다 이용하는 거야. 그런데 한국 사람을 갖다 그렇게 못살게 굴지 말어라. 적어도 일본 천황은 교육칙어에, 각자 제 맡,,, 능력껏 자기의 위치에 있지 못하면 곧 내의 죄라 그랬으니, 느히 일본 사람 위정자가 한국을 갖다 착취한다는 건 일본천황에 대해서 반대되는 거다. 이래가지구 역습을 하는 거야. 일본에 대해서. 그건 이제 한국에서 무서워한 검사(檢事)가,,, 아이구 내 잊어버렸네... 그래 나는 왜 이런 얘기를 허느냐. 난 학교를 나오구 하니까, 권태하 그 형님이 날 보구서,,, 아, 스즈끼 유스혼가? 하여튼 일본에 대한 한국 사람 사상가를 잘 다뤘어. 이 친구랑 술자리를 갖다가서 마련해 놓은 거야. 나두 그러면 거기 배석해라. 그래 인제 나중에 술두 못먹구 하지만 거서 학교 졸업맞구 나서 배석을 한 때지만, 거서 얘기하기를, 권태하씨가, 일본 천황의 말은 한국 사람 뉘기던지 같은 거시기다. 해놓구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거기에 해당한 대접을 못받는다면은 곧 이것이 나의 죄다 했으니, 총독정치가 뭐냐? 총독정치가 곧 막부정치다 그랬단 말이야. 그거 기가 맥힌 위험한 얘기야. <그렇죠> 그거 내가 직접 들었으니까. 그러니까 그가, 아휴 스즈끼 유스호지 아마, 이름이. 그 사람이, 이제 권태하씨는 그때 창씨를 했거던. 그래 일본 사람 부인을 데리구 살었어. 그래니까 후꾸가와상이라 그래지 인제. 그래니까 스즈끼 검사가, 후꾸가와상 당신이 그런 얘길 하면은 그건 불경죄다 이거야. 역습을 한다 이 말이야. 그 내가 그 옆에 있었는데. 그래 이제 끔찍했지, 나로선 말이지. 그래 그건 여담이지만, 자네가 그 당시에 그 사회구조라는게 그렇게 복잡하게 얽히고 섥히고 그런거여.
김희찬 : 그 두 분 다 맞는 말이네요, 제가 보기에는.
권태성 : 그러니까 일본의 야인이라고 하는거는, 일본의 야인정치는, 일본 애덜이 여 와서 취직하는 데 두 가지가 있어. 하나는 한국 사람들을 착취하려는 계급이 있고. 또 일면에는 같은 뿌리에서, 동근동조(同根同祖)다. 이러한 이념에서 형제로서 대접을 할려는 이러한 것이 일본의 야인이 가지고 있었다 이 말이여. 그런데 그런 속에서 태하씨는 한번, 그래 나는 왜 자세히 아는고 하니, 날보구, 그래 너는 집에 가서 뭐 하느냐? 그냥 만주로 오너라. 그 냥반이 극구 오라구 그래서 취직을 시켜주고, 그 양반하고 일본 부인하고 살림하는데, 난 거기서 아파트에서 같이 지냈어. 그래서 그걸 내가 잘 알지.
김희찬 : 그, 다시 앞으로 얘기가 돌아가면은요. 권태하씨가 32년도에 캘리포니아 대학에 남아가지고 공부를 하다가, 그 해에 다시 들어온 건가요?
권태성 : 어. 내가 알기론 제대로 여객선도 못타고, 그 석탄 실은 화물, <아, 화물선으로?> 화물, 거시기루다가서 거저 빗대구 거서 아르바이트 하면서 석탄 꽤나 갖다 붇구 그랬겠지 뭐. 그래서 나온 거루 알어.
김희찬 : 그래서 바로 여기, 한국. 조선으로 온거고, 일본으로 간 게 아니고요?
권태성 : 만주로 갔지.
김희찬 : 바로 만주로 갔어요? 들어와서 간게 아니고, <들어와서> 이제 바로 만주로 가고. 그러면은 만주로 가고. 그때 이미 결혼 해가지고 가신 건가요?
권태성 : 그럼. 결혼 해가지고 갔지, 일본 사람하고.
김희찬 : 결혼, 뭐 그럼 올림픽에 나가기 전에 결혼 한거네요 그럼.
권태성 : 올림픽에 나가기 전엔 아니야.
김희찬 : 그럼 그해 들어와서...
권태성 : 이제 그해 와서 있다가서 동경에 있었지 아마, 동경에 있어가지구, 내가 한국 그 초창기의 군인. 채병덕이 김종열이 이종찬이, 이런 친구가 이제 일본 육사출이거던. 일반 이제, 권태하씨는 그 당시에, 아! 맞었다. 동경에 낭인생활하면서 내가 알기룬 정치자금 먹은거야. 그래서 이 한국 사관학교 출신을 갖다가서 계림회(鷄林會), 회를 조직했어. (메모를 하면서 듣는 조사자에게) 뭐 그까짓건 뭐 그건 적을 것 읎구. 계림회란 회를 조직해가지구 소위 그 당시에 이종찬이, 채병덕이, 김종열이, 음,,,, 뭐 공군참모장 김모씨, 뭐 이런 사람이 그때 계원인데. 일부러 그걸 갖다 계원으로 모아가지고, 이 양반은 그때 일본 사람 그 낭인들하고 접촉이 있기 때문에 자금을 그걸 쓴거야. 그래 식사를 대접하고 그래구. 그것이 아주 그런 행동이, 여기 저 내 형님이 있어, 작고하셨지만. 형님도 동경 오너라. 세상 좀 넓게 바라봐라. 그 내 형님도 집에 가만 있는데 거길 갖다 끌어다가서 거기다 그 일본 낭인하고의 접촉을 시켜. 뭐 그런데 그 친일파구 그런덴 뭐 확실히 친일파구.
김희찬 : 그 휘문고보를 나오셨다 그랬지요? <그렇지> 그 박재륜 선생하고는 동문이면서 선후배 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두 분이?
권태성 : 어 그 양반이 위지.
김희찬 : 박재륜 선생님이요.
권태성 :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시지(市誌)에 그런걸 안썼는냐 그게 이상하다 그런거야. 그걸 그 사람이 잘 알거던.
김희찬 : 그리고 32년, 이때면은 정상희(鄭商熙)씨가 명치로 유학을 가있을 그때쯤 아닌가요?
권태성 : 아니야. 나왔어.
김희찬 : 이 분이, 정상희씨가 35년도에 졸업을 하고, 선생님 서울 재동에서 같이 하숙할 때가 35년도, 이쪽에 식산국에 와가지고 근무했다고 돼있는데. 36년도엔 베를린 올림픽, 그 유럽 이렇게 나가고.
권태성 : 그 시방 그, 정상희씨 하고, 이걸 내 설명하기를, 정상희씨하고 권태하씨는 같은 마라톤으로써, 고향 사람이고. 그럼 그 당시에 정상희씨는 졸업 맞고 나와서 서울 우리 집에 있 었어. 재동이라고, 정신여고 앞인데. 그때 취직, 그러니까 사랑채를 내줬어, 솔직히 얘기해서. 그럼 거저 먹고. 그 왜그런고 허니, 그 사람하고 우리집하고는 소위 그 세교(世交)가 있단 얘기가 있거던. 그거니까 이제 정상희씨하고도 그런 사이고, 하니까 나는 자동적으로 그 사람들하고 같이 했넌데. 그때 시대적으로는 정상희씨가 조선총독부 광산과에 있을 당시에 그 재동 우리집에서 댕기는 동시에, 그 당시에 태하씨는 만철, 만철,,,
김희찬 : 아,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린 거는, 일본에 유학을 갔을 때, 32년도에 올림픽 출전할 때면은 학생 신분이잖아요? <태하씨?> 예. <그럼, 학생 신분이지.> 그때가 이제 정상희씨 같은 경우에도, <정상흰 그 후고> 예, 그런데 35년도에 명치 법학부를 졸업을 했다라고 돼있는데, 그럼 그 앞에 수학기간이 있잖아요. 그 사이에 한 1-2년 정도가 권태하씨하고 시간이 겹쳐지는 것 같거든요.
권태성 : 그건, 모르지. 아 이런, 내가 기억이 나는건. 태하씨가 그 한국 나오면은, 그 큰집 있구, 우리집두 있구 한데, 거 안 자. 반도호텔에 떡 버티고 있지. 그래민서 정상희씨하구 만내면서 명월관에서 에헤라 데헤 그냥 먹구 놀구 그랬거던.
김희찬 : 정상희씨는 보니까, 이게 그 언제야. 81년 돌아가셨을 때에, 이성구라고 하는 대한체육회 이사를 지내셨던 분이 쓰셨던, 그 추도사 같은 거거든요. 만사(輓詞) 이런건데.
권태성 : 알어. 이성구란 사람 있어.
김희찬 : 이 분이 하키를 했어요? <어?> 아이스하키? <응. 누가?> 가만 있어봐, 뭘 했다고 나왔는데....
권태성 : 이제 아이스하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정상희씨는 거기 하고 관계는 뭔고하니, 그 당시에 빙상 선수로는, 거기도 나왔는지 모르지만, 김정연(金正淵)이라고 있어. <김정연> 어, 그 아주 스케이트는 일본서 그냥, <안중희(安重熙)> 그렇지, 안중희. 또,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다 나하구 같이 한때 거기 일본서 있던 사람이야.
김희찬 : 아, 그때 일본에 가셨을 때 같이,,,
권태성 : 어, 안중희도 그렇고. 그래서 그 사람들이 명치대학에서 인제 김정연이니 그런 사람들이 그냥, 뭐, <펭귄구락부를 만들었다 그러는데..> 그렇게 나와? <예.> 맞어. 그 펭귄구락부를 만들어 가지구서, 거기에 김정연이니, 좌우지간 신의주 평고야, 그 당시에는. 얼음 관계는 신의주하고 평양이 오래 그냥 얼음이 얼기 때문에 선수는 거기서 나오고.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가지고 명치대학에서 모두 다니는데, 그냥 뭐 한국 사람이 전부 그냥 쥐었지 뭐.
김희찬 : 하기사 일본은 얼음이나 뭐 그런 조건이 좀 그러니까. 그럴 수 있겠네요.
권태성 : 어.. 어..
* 또 짖는 개를 쫓으신다.
김희찬 : 좌우지간 정상희씨 약력을 보니까 그 시기가 그렇게 겹쳐져 가지고, 그 권태하씨도 명치를 나오셨나요? <그럼.> 그래서 동문 관계, 선후배 관계 속에서 그 시간대가 겹처서 거기서 그런 만남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드라구요.
권태성 : 그렇지. 그러니까 그게 인제 스포츠계에서 정상희하고 권태하씨는 같은 대학이고, 또 시대적으로다 정상희가 몇 년 아래지만은 그때 한국의 육상에 손기정이가 베를린 올림픽 갈 적에 정상희는 총독부에서 가고, 또 권태하씨는 만철서 가고.
김희찬 : 아, 거길 다 가셨어요?
권태성 : 그럼, 권태하씨도 거길 갔지, 베를린을. <아, 같이들 가셨구나!> 그래 거기서 다 그냥 손기정이 하고, 남승룡이, 김은배. 이런 사람들하고 선후배 관계루다가서 꽉 뭉쳐있지. 그래서 이제 베를린에서 그렇게 되니까, 이제 손기정이는,,,
김희찬 : 그렇게들 같이 가셨구나!
권태성 : 그런데 이제 태하씨가, 태하씨가 솔직히 얘기해서 한국에서 한국밥을 먹은 건 을마 안돼. 성인이 돼가지구. 아 독일이구 뭐 돌어댕겼다 이 말이거던. 그래 인제 마라손두 하구 뭐하구 해서 그 당시에 교류가 장택상이 하구, 뭐. 장택상이 또 이렇게 뭐, 그런 사람들도 결국 한국에서 그때 야인이었어. 어. 그러니까 보성전문학교 선생을 댕기구, 그게 왜 뉘기야,, 시방 그 뭐야, 민주당에 그, <아, 조순형 대표 부친, 조병옥씨> 아, 조병옥씨. 이제 그런 사람하구 마작하구 그래 댕긴걸루 내가 알아. 그때 다 그 사람들은 일본에서 감시를 하구. 그걸 자세히 하니까 재미난 얘기가 나오지만은. 결국 그런 사람을 갖다가서 근로봉사를 내보냈다 이 말이야, 근로봉사. 그걸 갖다 어디루 내보냈는고 하니, 인천에, 인천에 아니구 소산가? 일본의 조병창이 있었어. 그래 일본측에서 그런 사람을 갖다 그리 근로 봉사를 내보냈거던. 그 당시에 거기 누가 있는고하니, 한국 사람 채병덕이가 있었다 이 말이여. 채병덕이 아마 책임자가 될는지 모르지. 채병덕이 있었단 말이여. 그래 채병덕이가 딱 보니까 그 한국에 내라 하는 사람을 갖다 근로봉사를 보내놨거던. <예> 그래니까 채병덕이가 그걸 갖다가서 그냥 눈치봐가면서 봐줬다 이 말이거던. <음, 안에서 이제 배려를 해줬구만요.> 그래, 배렬 해주고. 봐 줬는데, 해방이 떡 되니까. 채병측이를 친일파루다 딱 몰어딱는거지. 그러니까 이 조병옥씨가 그를 안어줘. 그를, 그 사람들이. <음, 그게 운명적으로 그렇게 됐구만요.> 그렇지 그게. 그래 아주 그 참, 이제 그게 그래가지구 채병덕이는 소위 그 친일파 이걸 떠나가지고, 그때 경비대라구 했지. 그때 군대 조직의 한 사람이 됐다 이 말이여. 됐대는데, 같은 이종찬이하구 같은 동기여. 이종찬인 그때 국군경비대루 안들어갔지. 그러니까 이종찬이가 자숙을 한다 이거지. 그래 자숙하고 있는데 그것 갖다가서 군대다 늫게 한 것은, 그 뉘기여, 이기붕이. <아, 이기붕씨가요> 그래, 이기붕씨가 그를 갖다 받어주구. 들어오두룩 맨든거지. 그러니까 뭐가 빨갱이구 뭐가 친일판지 몰러 그게.
김희찬 : 그 전에도 한번 말씀을 해주셨는데, 이 정태희(鄭泰熙), 정석희(鄭奭熙), 정상희(鄭商熙)씨, 동일 항렬(行列)들이죠?
권태성 : 그럼, 동일항렬이지.
김희찬 : 이게 형제 관계가 어떻게 돼요?
권태성 : 사촌 간이지.
김희찬 : 서로 다?
권태성 : 아니, 정석희하고 정상희하고는 친형제 간이고.
김희찬 : 정석희씨가 위예요?
권태성 : 위고. 정태희씨는 사촌이고.
김희찬 : 정석희, 정상희씨하고 사촌간이고.
권태성 : 어.
김희찬 : 이 분들이 다 이쪽 충주가 고향이 되나요?
권태성 : 어.
김희찬 : 그 정태희씨하고 정석희씨는 여기 교현학교 졸업생 명분데, 10회, 1918년으로 같이 졸업을 하셨더라구요.
권태성 : 그렇지. 그럼 그게 몇회가 되는지 모르겠네. 몇 회여?
김희찬 : 10회요. 교현학교 10회가 되네요. 그 보통학교.
권태성 : 10회. 내가 몇 회던가?
김희찬 : 선생님이,,, 20회 졸업, 29년도에.
권태성 : 20회? 그러니까 저 분덜이 나보덤 십몇년이 위에 아니여?
김희찬 : 중간에 6년제로 바뀌니까 12년?
권태성 : 그렇지.
김희찬 : 그렇게 되네요. 또 여기 정상희씨 이력을 보니까, 양정고보를 나와서, 졸업하구요. 바로 일본으로, 명치로 간 게 아니고, 상해를 들어가가지고 교통대학에서 1년을 있었나봐요. <그래여> 그때 시기가 이 정태희씨가 상해 있을 때거든요. 그런 관계가 거기서 만들어지는 건가?
권태성 : 그렇지.
김희찬 : 그리고 정태희씨 같은 경우에는 나중에 국내로 들어오시잖아요? 다른 책을 읽다 보니까, 거기에, 상해에 부인이 있었던 것 같애요.
권태성 : 누구 부인?
김희찬 : 정태희씨. 두고온 부인이 있었던 것 같더라구요.
권태성 : 아니여. 그건 내가 잘 모르겠다. 여기에 저 중국아주머니라고 하는 분이 있었거던. <여기에?> 어, 있었거던. 그건 내가 잘 모르겠네.
김희찬 : 그, 원산 출신이고요, 보성을 나오고, 바로 상해로 가가지고 조선의용대인가 이런 쪽에 하다가 연변에서 돌아가신 분의 회고록을 보니까, 거기에 이런 대목이 있더라구요. 상해에 계셨던 분이 김혜숙이란 분이거든요, 부인이. '사람들은 김혜숙 여인을 '미세스 정'이라고 불렀다. 그 남편의 성이 정씨였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로 전향을 했다는 그 남편 정태희(鄭泰熙)씨는 이때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치안유지법위반'으로 6년 징역의 3년째를 살고 있었다.'(김학철, 최후의 분대장, 문학과지성사, 1995, p.111) 그 집 주소가 상해 애인리 42호였고, 그 집은 아직도 있다라고 애길 하거던요.
권태성 : 그건 잘 모르겠어. 그 부인이 상해 아주머니라고. 상당히 활달하게 충주서 있었던 것만은 알아.
김희찬 : 아, 이분이 나중에 들어오셨구나 그러면. 우연히 책을 읽다 보니까, 이 정태희씨 이름이 한자도 같게 있어 가지고 메모를 한번 해봤어요. 그리고 이게 요때가 재밌는게, 그전에 왜 유석현(劉錫鉉)씨 돌아기시기 전에, <누기?> 유석현씨요. <어> 그분하고 이 정태희, 정석희씨가 한해 선후배 사이더라구요.
권태성 : 그럴껄.
김희찬 : 예, 여기 11회 졸업을 하셨고. 또 요때가 이제 그 지금 류자명(柳子明)이라고 하는 분하고 관계가 많은게, 여기에서 19년도 3월에 서울로 올라갔을 때, 이 두 분(정태희, 석희)이 서울에 가 있을 때, 그 기거하고 있던 정낙윤(鄭樂潤)이라고 하는, <누기?> 정낙윤. 그 정태희, 정석희씨가 조카라고 했거든요. 그 윗대인 것 같은데. 그 집으로 가게 되고.
권태성 : 그 양반은 무정부주의잔가?
김희찬 : 예. 류자명 선생이 갔던 길이 그 길이기도 하구요. <어?> 류자명 선생이 사상적으로 얘길하면 무정부주의, 아나키스트거든요. 직접 마지막 가르치고, 졸업식 전에 여기서 1919년 3월 달에 거의 사전 발각이 돼가지고, 만세운동 준비하던게. 그냥 도망을 가다시피 했으니까. 그 마지막 제자가 여기 유석현씨가 되는 것 같애요. 이가 상핸가 갔을 때 조금 다른데 있긴 했지만 류자명 선생 소식을 듣고 선생을 못 뵙고 간다 그래가지고, 그게 이제 들어와가지고 결국 잡혀서 징역살이, 8년인가 언도를 받고 그러던 그 사건 직전이었는데, 상해에서 그때 총 가지고 들어오고 이러기 전에. 그런 일화들도 서로 책속에서 있더라구요. (류자명 선생의 <나의회억>을 꺼내 권석희 대목을 찾았다) 정낙윤이라고 하는 분의 친구가 권석희(權石熙)라고 하는 분이 동기래요. 그런데 그 권석희라고 하는 분은 류자명 선생의 보통학교 동창이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이 명부를 보니까 권석희라는 이름은 안보여요. 혹시 몰라서 거기 권 성을 가진 분이 한 분이 계시는데, 태자에 길영(永)자 쓰신 분이 혹시 집안이 되시나요? <어?> 권 태자 영자, 길 영(永)자 쓰신 분?
권태성 : 어.
김희찬 : 그 분이 이제 류자명 선생하고 동기거든요.
권태성 : 아! 그 태영씨는 여기. <길영자 쓰셨던 분이요?> 맞어.
김희찬 : 아, 여기 분이시구나.
권태성 : 그러니까 영자, 길영자, 태자 영자가, 권태하씨의 제일 맏형이야. <아, 이분이요!> 어. 거게 삼형제가 있는데, 제일 맏이 권태영(權泰永), 그 다음에 뭐 또 잠깐 거기 언급되던 권태은(權泰殷)씨가 둘째구, 권태하(權泰夏)씨가 셋째고 그래.
김희찬 : 아, 전에 말씀드렸던 권태은씨가?
권태성 : 그렇지. 일찍이 개화했지, 이 양반들이.
김희찬 : 영, 은, 하 이렇게 삼형제가 되시는구나.
권태성 : 그렇지.
김희찬 : 꽃부리 영(英)자 쓰신 분도 1회 졸업생이 있더라구요.[權泰英]
권태성 : 그건 몰러.
김희찬 : 그 다음에 이, 비출 영(映)자 쓰신 분, 17회.[權泰映]
권태성 : 그는 몰러.
김희찬 : 아 이렇게 삼형제가 되시는구나.
권태성 : 그러니까 그 멤버가 시방 여기서 얘기하는게, 충주사회에서 일찍이 개화된 사람들이여.
김희찬 : 개화도 개화지만은, 소위 그 1900년이 되기 전에, 조선 말기에 그 이쪽에 세를 가지셨던 그 집안의 후예들, 충주지역의 유지로 내려왔던 명문거족들의 축이 되는 것 같거든요?
권태성 : 그렇지.
김희찬 : 정상희, 정석희 이분들의 연고는 지금 여기 누가 계시는 분이 있나요?
권태성 : 정석희네 연고가 된 사람이, 에, 모르겠네.
김희찬 : 거의 이분들은 지금, 이분들의 원고향이?
권태성 : 노은(老隱).
김희찬 : 노은이고요. 노은쪽에 연고가 거의 없는 것 같던데.
권태성 : 그 정씨네, 그 정씨네, 아 모르겠네.
김희찬 : 그럼 정태희씨도 노은쪽에, 노은이 고향이 되나요?
권태성 : 그냥 그렇게 알고 있지 뭐.
김희찬 : 다, 그쪽이구나.
권태성 : 그 정씨네가 노은에, 여기 권씨네가 그냥 모자리 그렇다 그러면, 그 노은에 그짝에선 그 정씨네, 동래(東萊) 정씰꺼야. 으.
김희찬 : 노은이면은 자형( 兄)한테 한번 물어봐야겠구나... 그 정태희씨 같은 경우엔 그렇게 들어와서 40년대에 출옥하고, 전에 말씀해 주셨던 거는 측량위원회 소속이고, 마차조합 조합장을 하시고,,
권태성 : 신탄조합(薪炭組合). <예?> 신탄조합. <신탄이요?> 장작 때구 그랬거던.
김희찬 : 아, 연료계통으로, <연료가 장작이지 뭐.> 그래서 그 저쪽에 소남(蘇南)선생 정미기 발동기 돌릴 때 거기서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그런 말씀을 하신거예요?
권태성 : 그렇지.
김희찬 : 그랬었구나. 이 보면은...
권태성 : 그런데 그렇게 그 양반이. 그 사업현장서 상해루두 가 있었구, 그래서 사상범으루다가서 왔는데, 그러한 소위 관권(官權)이 영향을 줄 수 있는 조합(組合), 거기에 많이 관여할 수 있는 사실은, 정석희씨 덕택이여.
김희찬 : 아, 정석희씨.
권태성 : 정석희씨가 그 당시에는 부인이 일본사람이구.
김희찬 : 이 분이 의사를 하셨다 그러셨죠, 정석희씨가?
권태성 : 정석희씨 부인이 일본 사람이거던. 일본 사람인데, 그냥 일본식으루다 나갔지. 한국 냄새루는 그 집엔 읎었다, 뭐 이렇게 보면 과언이 아닐거야. <예> 그만치 일본하구의 관계가 밀접하거던, 정석희씨는. 부인이 일본사람이구, 의사구 하니까 뭐 자신네 사촌을 갖다가 그걸 여러 가지 방면에 카바할 수 있는 그런 능력, 에빌리티가 있다 이 말이여. 그 내용으루 보면. 그래서 그 분이 그렇게 여러 가지 관계를 하고 있지.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지.
김희찬 : 그게 또 공교롭게 충주에 유공표창을 받은 분들, 건국훈장이나 독립운동으로 표창받고 이랬던 분들이, 많은 부분이 이제 정태희씨를 포함해서, 1963년도, 이제 정상희씨가 국회의원 재직하던 시절에. 그때들 충주쪽 인사들이 많이 정리가 됐어요. <다시 말해봐> 그러니까 충주쪽에서 국가유공자로 독립운동 관련해가지고 훈포장을 받은 분들이 1963년도에 대거 많이 정리가 됐거든요. 그게 이제, 제 혼자 생각인데, 정상희씨가 5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서 의원직을 수행하고 있을 그 시기거든요. 그리고 이제 전체적으로 독립운동 관련해가지고는 독립운동 사항까지, 그렇게만 대개 정리가 돼있는데, 다른 지역 상관없이. 정태희씨 같은 경우에도 40년도, 여기 어떻게 정리돼 있는가 하면, 40년도 출옥한 후에 고향에서 은둔생활을 했다가 끝이예요. 앞서 이제 어떤 어떤 어떤 독립운동을 하고 그렇게 정리가 되고, 그 이후에 이제 옥살이를 하고 나와서 그 이후는 이제 다른분도 마찬가지로 그냥 그렇게 살았다, 그냥 그 정도로 간략하게 정리가 되거든요. 그게 공교롭게도 1963년도에 전부 이쪽 지역에 지금 독립운동 관련해 가지고 유공표창을 받은 분들이 대부분 63년도에 같이 이렇게 표창을 받게 되고, 그게 이제 정상희씨가 국회의원 재직하던 시절이고, 그런저런 관계들이 거기서 형성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한번 해봤거든요.
권태성 : 그렇지, 시방 그 독립유공자다 한데 대해서 정상희씨가 혹간 그 관련이 있는 것처럼 얘길 했지.
김희찬 : 예, 시기적으로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을 했죠.
권태성 : 실질적으로 사실은, 그런데 대해서는 정상희씨가 절대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 아니야.
김희찬 : 예, 이건 전혀 무관한 거구나.
권태성 : 아주 정상희씨는 아주 호인이야. 그 어떻게 생각하면 No라고 하는 사람은 아니야, 뭐든지. 그러니까 정상희씨, 그 뭐지? 이제 그 박정희, 박정희때가 아니라, 이박사 그 당시에 그 의장 지내고 한 사람, 이 뭐씨? <이박사 때요?> 어, 이박사 때. 이 모씨 있잖아? <이기붕씨요?> 그렇지. 이기붕씨가 체육회장할 당시에 정상희씨가 육상연맹 위원장이야. 어.
김희찬 : 그리고 또 사업도 일찍 시작하신 것 같애요. 유럽 갔다 와서 베를린 갔다와서 39년도에 협신상사, 협신상사라고 하는.
권태성 : 정상희씨가?
김희찬 : 예, 39년도에 대표가 됐다라고 하는데,,,
권태성 : 그거 난 처음 듣넌 얘기구.
김희찬 : 그러고 10년 있다가 49년도에 삼호방직,
권태성 : 삼호방직에 그러니까 중역으로 들어갔는데, 에, 그 사장이 정재호인가?
김희찬 : 거기 부사장으로 가 있고. 그 다음에 56년도에는 동아통신사 부사장.
권태성 : 결국은 그 아덜 때문에, 뭐여 저, 삼성 우에 회장까지 지내지 않었어.
김희찬 : 예, 62년도에 인제 삼호무역, 삼호방직에 이사회장이 되고, 69년도에 삼성전자에 대표이사 사장, <그래 맞어> 70년도에 삼성물산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하고...
권태성 : 좌우간 전직은 화려하게 지낸 사람이여.
김희찬 : 예, 71년도에 육상경기연맹 회장을 72년까지 역임을 하고. // 그리고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가, 실고(實高)가 30년도에 생기잖아요. <실고?> 예. 중학교 고등학교, 여기서 이제 고등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그 전까지는 교육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불가능했던 상황. 그래 이제 청주나 아니면 서울이나 이런 쪽으로 가게 됐던 상황들. 그 당시에 보면은 보통 상급학교를 진학하는게 어느 정도 됐나요? 보통 이제 교현 같은 경우에, 보통학교 같은 경우에 졸업을 하게 되면?
권태성 : 그렇지 좌우간. 내가 학교댕길 당시에, 에, 서울 학교를 간다 그러면, 유학(遊學)한다 그러거던. 유학이라 그랬어. 그러니까 그렇게 희소했었지, 그게, 에.
김희찬 : 그게 충주 뿐만이 아니고 지방이면 거의 다 그런 상황들이,,,
권태성 : 여기서 충주는 저, 그 당시에 사람은 결국 여기는 청고출하고 청농출하고 인제 이렇게 나눌 수가 있지. 그게 이제 헤게모니를 잡었지. 여기 이게 되기 전에는. 그렇지. 그 후에 이제 그 뭐랄까 지방 고등학교가 생기고.
김희찬 : 지금 이제 이게, 선생님께 여쭤보는 부분들이 류자명이라고 하는 분을 이유로 해서 이 분이 이제 고향을 떠나게 된 계기가 그 기미년, 19년 만세 운동을, 충주만세운동을 준비하다가, 가서 계속 독립운동을 하고 이러다가 85년도에 돌아가시게 됐는데요.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어요. 충주가 왜 그 소위 독립운동이나 이런 쪽에서 이야기를 하면 상대적으로 사람이 적고 그랬을까.
권태성 : 글쎄 이제 그건 내가 아는 거시키는, 그것 때문에, 그건 어디서 나온 얘긴고 하니, 유석현씨가 나한테 얘기 했잖어? 유석현씨가 얘기하는 내용은, 류자명씨가 얘기하는 내용하고 다르거던, 내가 봐선.
김희찬 : 크게 보면 유석현씨 이후에, 유석현씨를 끝으로 해서 그 뒤로는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를 했거나, 아니면 두각을 나타내는 그런 급의 사람들이 충주에서는 잘 안보이거든요. 그게 이제 어떤 상급 교육기관, 고등학교 중학교의 부재나, 아니면 으르신들께서 말씀하셨던, 이쪽이 지역의 거점도시가 되다보니까 모든 군사시설부터해서 들어와있고, 소위 예비검속이다 해서 그런 싹 자체가 충주라고 하는 시대상황에서는 자랄 수 없는 그런 이유 때문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배우고 의식을 가지고 활동하고 이런 부분에서는 계속 의문들이 좀 남아요. 그게 공식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20년이 딱 넘어서면 상대적으로 팍 줄어버리고. 그 앞의 것도 자료 미비나 이런 것들 때문에 소상히 다 밝혀지지도 않았고. 그 나마 아쉬운 게 유석현씨 같은 경우가 직접 참여도 했고, 그 다음에 1910년대 이제 어린, 학교다닐 때지만은 그때 기억이나 이런 것들을 가지고 계셨는데, 정리하기 전에, 고향에 대한 기억을 정리하기도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모르고. 그러다보니까 이제 선생님 말씀하셨던 것처럼 동시대를 살았든 내지는 시차를 조금 두지만 그때 직접 간접 경험을 가졌던 으른들의 여러 가지 말씀들을 통해서 하나하나 찾을 수 있는 최대한을 찾아가지고 꿰어 맞춰야하는 그런 식이 되더라구요.
권태성 : 꿰맞춘다는게 이제 내가 봐선. 시방 내가 얘기한 거, 또 다방에서 소남(蘇南)이 얘기한 거와 안맞는게 있거던. 그걸 갖다 어떻게 해결하냐 문제가. 이제 그런 문제가 나오는데. 내가 느끼는건, 뭐 정사(正史), 역사에는 정사가 있고 야사(野史)가 있다. 한데, 갖다 꿰맞춘다는 것은 야사고, 그런 생각이 드는데, 그런 문제하고 같이 걸린게 하나 뭔고하니. 요전에 그 뭐 충주신문에 난 걸[중원문화와 관련된 3월초의 기사] 가지구 가져가서 얘기할라 그러니까 모두 그냥 거기서두 관심 없길래, 내가 말을 갖다 잇지 않었구, 그걸 갖다 내가 문화원에 갖다 줬어, 문화원에. 이제 그걸 갖다서 문화원에서 어떠한 뭐를 갖다 그런 거를 구상을 하고 있는 것 같던데. 문화원에서 정사를 내겠너냐? <예?> 정사(正史), 역사의 기록을 찾아가지고 아주 틀림없는 걸 맨드냐? 아니면 야사를 갖다가 어디 근거있는 걸 추려서 계속적으로 야사를 맨들면 되질 않느냐? 정사는 그건 모르겠더라 그거야. 그러니까 중원문화를 갖다가 그런 가치에서 한번 해봐라. 그래서 그때 신문에 가지고 간 건 뭔고 하니, 일본서 뭐 어쩌고 저쩌고 한 것이, 그 유래가 신문에 난거는 충주다 이렇게 됐거던.
김희찬 : 아,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칠지도.
권태성 : 어, 칠지도. 충주라는게 있구. 한가지 느끼는게 뭐냐하면은, 이 동네가 원래 이름이 칠지여, 이름이. 그리고 어, 창터, 창터라구 예부터 내려온 이름이 있거든. 그래 동네사람들 보구선 저기가 뭐냐? 그러니까, '아 창터다' 그래. 창터가 뭐하는 데냐? 대장간 아닙니까, 여기 사람들이. 그 광산은 저짝에 그 팽고리산 맞은편에 광산이 있거던. 그러니 나는 내 생각에 어떻게 그렇게 일본하고 해갖구 꿰맞춰두 되잖느냐. 나는 정사로서 내가 아는 정도는 여기 창터가 있고, 이름이 칠지고, 또 광산이 있고. 모든 조건이 맞는다. 그 얘기 들었나? 저기 문화원에서. <아니요> 그, 시청 사람을 데려왔더군 그래. 내가 시청사람한테 그냥 아넌대루 얘길 해줬지.
김희찬 : 그걸 2월말에 한번 말씀을 하셨구나. 3월 초였나? 3월 초였던 것 같은데요.
<테잎 앞면 끝 / 이어서 뒷면>
김희찬 : 그런 면에서 보면 지역에서 발생하는 문화현상들을 모두 중원문화라고 하는 이름으로 다 포장해 버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애요. 실제 내용을 들어가보면 그렇지 못한 것들이 많거든요. 그때 신문에 발표됐던 그런 것들이 그 계획서가 나오고 거기 이제 보도자료 형식으로 이번 계획서의 특징은 뭐다, 핵심 내용은 뭐다 죽 정리해 놓은 것을 그대로 받아 적은 경운데. 제가 읽어봤던 그 '충주시문화예술장기발전계획'이라고 하는 올해 나왔던 그 계획서 자체는, 중원문화와는 좀 별개로, 나름대로 독창적으로 계획을 세운 그런 부분이 더 크거든요.
권태성 : 난 내 생각은 어떤 그 전문성도 읎구, 한가지 그 얘길 했는데. 이제 그 부분을 어떻게 어떻게 찾어야 되는지. 이걸 연결을 시켜서 뭘 생각해야지. 거기에 정답이 우륵문화제다 그렇게 보거던.
김희찬 : 행사로 하면 그렇게 가야죠.
권태성 : 그러니까 우륵문화제를 살려라. 우륵문화제도 살리고, 또 중원문화도 살리고. 그러기 위해서 이건 벌써 20년을 했던지 우륵문화를 갖다가 그렇게 했던지, 이걸 뭐 헷갈리지 말고 그렇게 가지고 간다. 좋다 가지고 가라. 그런데 중원문화로 하자. 그래서 중원문화도 살리구, 우륵문화도 살리구. 난 그래. 예총하구 문화원하고 역할분담하라구.
김희찬 : 그게 선생님께서 전에부터 그 말씀하실 때마다, 말씀하시는 부분이 나눠서, 아니면 서로 협력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협력해서 우륵문화제를 한번 제대로 만들어봐라 하는게 선생님 주문이신데,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저쪽에서들 들어야죠? (함께 웃음) 서로 열어놓고. 그러다보니까 안되니까 문화원쪽에서는 중원문화제를 새로 만드네 그러면서 그 얘기를 하는데. 그게 시군(市郡)을 또 나누자는 얘기거든요, 어떻게 보면.
권태성 : 시군은 그 역사적 배경이 말이지, 점점 희석이 돼간다 이 말이여. 과거 이제 중원군 사람이니 충주시 사람이구. 그런 것이 이제 자연적으로 역사적 배경이 달르긴 하지만, 달러져 가는 그 찬스를 역시 연결을 시켜주고 이어나가야 된다 이거야. 이게 반대로 간다하면 말이 안되지.
김희찬 : 그런데 그게, 중원군이 39년, 40년 밖에 안되잖아요. 이게 한 세대가 지나가니까 그 시간만큼 무서운게 없다라는 것. (통합) 10년이 다 되가는데도, 소남선생 말씀에서는 '중원군이' 이렇게 시작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이게 습관되다 보니까 중원군민이다 하는 의식속에 박혀있는 부분이 통합이 되고 다시 충주시가 돼서 간게 한 10년이 됐는데, 하루아침에 없어질 건 아닌 것 같고요. 그런데 의외로 중원군에 대한 의식들이 크게 자리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애요. 과거 이제 충주군에 충주읍과 면단위 개념에서 읍의 경기나 이런 것들이 좀 나은 부분들이, 시와 군이 나누어지고 충주시 동지역, 시내쪽과 면지역의 생활격차나, 도시와 농촌이라고 하는 40년 동안 변해온 외형적인 모습 등등에서 바로 구별이 되어 버리니까 그걸 극복해 가는 건 또 한 세대가 지나가야 될 것 같애요. 그런 것들을 만들어가는 방법이 결국은 전통, 전래의 지역에서 가지고 있는 문화적 색채를 드러내 줄 수 있는, 그런 것들이 결국 우륵문화제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행사의 기본 골격들이 돼줘야 할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그런 것에 대한 발굴이나 찾아가는 것보다는, 아시다시피 예총의 8개 지부의, 학교로 하면 학예발표회, 거기에다 이제 다른 것들. 그 동안에 몇 개 명목으로 가져왔던 것들이 계속 상설로 가고. 그러다보니까 더 이상의 발전이나 고민, 고민을 하지 않으니까 발전이 없고. 그러다보니까 다른 데는 자꾸 변해가고 발전해가는 것 같은데 여긴 정체돼있는 느낌에 쇠퇴해가고. 그러다보니까 대두되는 문제가 중원문화의 정체성이 뭐냐? 더 심하게 얘기하면 충주의 정체성이 뭐냐라는 얘기까지 지금 나오고 있거든요.
권태성 : 그래.
김희찬 : 아 참. 그 간도에 가셨을 때, 만주 가셨을 때, 이범윤인가? 그 성장(省長)으로..
권태성 : 아, 이범익(李範益)씨, 제천양반.
김희찬 : 단양분이라 그러던데요.
권태성 : 어, 단양 사람이래? 난 그 제천사람으로 알구 있었는데. 참 그 분은 그 유명했지.
김희찬 : 그 분이 40년까지 성장을 하고, 그러고 민간단체쪽의 장으로 활동을 하셨다 그러는 것 같던데요.
권태성 : 어, 그분이 간도 성장을 그만 두고, 내가 알기에는 그 일본이 만주를 갖다서 먹구 하는 것이 모두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서 그런게 원인뿐만 아니라, 보다 더 큰 의미에서 아세아권이라는게, <예, 저희가 배웠던 대동아공영이라고 하는 것?> 어. 그러니까 이범익씨가 그러한 데 대해서 동조한 사람으로다 알고 있어.
김희찬 : 연변 쪽에서 정리된 자료를 보면, 아주 몹쓸 사람으로, <어?> 그 시대에 가장 일본에 앞장을 섰고, 반대로 독립운동이나 이런 부분에서는 정반대적인 쪽으로 정리가 됐더라고요.
권태성 : 어. 그건 처음 듣는 얘기야. 난 내가 직접 들은 것은, 그때도 얘기 했지만은, 소위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북으로다 자꾸 가는데. 한국 사람이 가서 개척을 해놓으면, 한국 사람을 갖다 이북으로 내쫓구 일본 개척민을 데려다 왔거던. 당시에 유명한건 이범익씬 뭐라고 일본 사람한테 항의를 했냐하면, 지금 연변이지, 완전 어깃장을 놓는거지. 이걸[만주 개척된 땅을] 갖다가서 이북으로 옮겨놓구 일본 사람들이 여기 들어와라. 난 그걸 기억하는거지.
김희찬 : 쌀이나 이런, 선생님께서 전에 말씀하셨지만,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이주한 부류하고, 정치적이거나 이런 크게 두 가지 부류가 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먹고사는, 뭐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에 주인없는 땅, 내 땅을 가질 수 있고, 그 넓은 땅을 개간해서 배불리 먹을 수 있다. 이러한 신기루같은 것을 쫓아서 가셨던 분들이 많다라고 하는데. 그런 면에서 쌀재배 한계선을 극복하면서 논 개척을 하고, 식량 증산을 하고 이런 쪽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하면, 그 반대면에서 후일에 역사를 정리하면서 이 사람의 성향과 성정이 어떤가를 평하면서, 연변쪽에서 정리된 것은 가장 친일에 앞장섰던 모범적인 사람이고, 소위 해방 이후의 이 양반에 대한 생사를 확인을 못해요. 만주에서는 떴다고 하는데 그런 것들이 고향에서는 얘기가 안나오고.
권태성 : 아, 그랬구나. 난 그 당시에 아는게 그거니까. 더군더나 만주 관리로 조금 댕기구, 했을 적에 이범익씨가 그랬다. 그래서 이 양반은 참 훌륭한 양반이다. 그렇게 생각했지.
김희찬 : 선생님께서 만주 들어가셨을 때는 이범익씨가 성장에서 물러나고 난 다음이죠?
권태성 : 그렇지. 이짝 그 야인들하고의 저걸 하는데. 그건 이제 일본 야인이고.
김희찬 : 예. 그럼 40년 이후에 들어가신 거네요.
권태성 : 그렇지. 그게 그 당시에 아주 위험해. 그전에 자네한테 잠깐 얘기했지마는, 그냥 뭐 김일성이가 왔다갔다는 지구를 난 그냥 의식적으루다 다녀봤거던. <예> 이제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도 듣구. 그렇게 되면은 내가 조심해야 되겠다, 내가 빨갱이로 몰린다. 김일성이에 대해서. 김일성이가 한국 사람이면 경찰도 놔줬다 이 말이여. 내가 직접 가 본데야 그게. 그러니 그런 말을 갖다 그게 안되느냐 이거야. 찬양한다, 이런 말을 가지고. // 자네 이걸 뭘 하는지 몰러두 내가 그걸 찾어봐 줄까? 권태하씨 사진도 있거든. 권태하씨 사진이 내게 있거던. 로스안젤레스 올림픽 가 찍은 게.
김희찬 : 잃어버리셨다 그러셨잖아요?
권태성 : 글쎄 그게 세계적으루 유명한 누르미라고 있는데, 누르미하고 같이 찍고, 몇 년도에 태하씨가 싸인을 해구, 그래 요만한게 있었는데 어디 갔는지...
김희찬 : 한번 틈나실 때 한번 찾아보세요. 자료들이 워낙 없으니까. 이게 지금 잘못하면 중국을 제가 들어가야 할 것 같애요. 류자명 선생 건으로 해서 TV에서 다큐멘터리 계획을 하고 거기에 맞춰서 제가 자료조사 정리를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고향이 여기다 보니까, 고향 충주에 소위 독립운동 관련해서, 반일운동 항일운동 관련해서 인사들의 인적사항들을 새로 확인해나가야 되고. 그러니까 폭넓은 교류관계들이 넓게 잡히고요. 그 다음에 류자명 본인의 회고록 속에서도, 고향 사람 만나면 반갑다고, 가령 이제 유석현씨 같은 경우에는 왔는데도 못보고 서로 애닲어하고 아쉬워하는 부분들이 진솔하게 써있고요. 뭐 처음에 가서 활동하게 된 계기도, 많지는 않지만 동향 선배들이 상해나 이런 쪽에 임시정부 관련하는 분들이 있어가지고 거기에 영향받고 서로 위로했던 관계들이 많이 나오더라구요. 좀 넓게는 이제 단재 신채호선생 같은 경우도 청주분이니까 충청도 사람이라고 해서, 젊은 청년이 왔다고 해서 많이 좋아했고, 또 사상적인 교류도 서로 많이 했던 것 같고요. 그런 관계들 속에서 사람들을 찾다보니까 한편으로 이분이 90수를 하셨으니까, 그 기간동안 만났던 분들이 적지가 않고요.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이라고 하는 상해 임시정부나 그때 거명됐던 인물들은 거의 다 교류관계가 있고, 거기서 이제 분류해보니까 사상적인 노선에 의해서 하나 그룹지어지는 부분이 있고, 인간적인 정리나 도의부분에서 백범 김구나 이런 쪽과의 관계형성이 있고, 또 아주 작게 보이는 것이 충주나 아니면 충청도 사람들과의 교유관계를 통해서 그 시대의 어려웠던 부분들을 극복해 나갔던 그런 것들도 조금 보이는 것 같고요.
권태성 : 아주 어려운 걸 선택했어.
김희찬 : 하다 보면 뭔가 나오겠죠. 권태하씨는 돌아가신게 언제쯤이죠?
권태성 : 본격적인, 그런거는 잘 몰라.
김희찬 : 뭐 625는. 전인가요? 후인가요?
권태성 : 그 양반이,,, 좌우간 남산에도 끌려갔다 왔거던.
김희찬 : 그러면 516 이후네요. 한참 사셨네. 60년대...
권태성 : 인간적으로 그 보스형이여. 손기정이, 남승룡이... 다 충주왔다 갔지.
김희찬 : 다 그렇게 인연이 돼서 왔다 가셨구나.
권태성 : 아니, 내 육촌이 양정 출이거든.
김희찬 : 아. 양정!
권태성 : 육상은 양정이라 그랬지. 그래 정상희씨가 서울 우리집에 와있구. 그런 관계루다 해서.
김희찬 : 조금씩 이제 저는 하나씩 알아들어가는 거고요, 선생님께서는 하나씩 가르쳐주시는 거고. 풀어놓으시는 거고.
권태성 : 내가 직접 몰러두, 시방 자네한테 얘기하는 것은 직접 보구 느끼고, 그게 진실성 있을는지 모르겠어. 내가 확실히 나이가 90이니까, 그 당시에 나도 철나구, 내가 보구 느끼구 한 걸 내가 얘기 한거지.
김희찬 : 작년에 말씀하셨던, 선생님께서 정하셨던 '촌로(村老)의 넋두리'도 한번 정리를 하시죠?
권태성 : 헤헤. 글쎄 그런걸 갖다가 인제, 대구있는 내 아덜한테는 얘길하면 자꾸 메모를 해달라 이거여. 아버지가 못 쓴다면 즈 그 뭐 대학원에 여자 직원도 있구 하니까 정리시켜 보겠다구.
김희찬 : 한번 정리를 해보세요. 직접 쓰시기는 불편하실테니까, 제가 그 역할은 해드릴께요. 여기 와서 하던가, 다른 데서라도 죽 말씀을 하시고 그냥 듣는 식으로 해서, 녹취를 해서 나중에 풀어 정리하면 되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작은 일이지만도 더군더나 세대간에 단절이 되고, 과거나 마찬가진, 과거보다 더 심하죠. 고등교육기관이 있으니까 대학 진학 등등을 이유로 해서 한번 충주를 떠나면 거의 안돌아오거든요. 말년에 돌아와서 그 사이에 20년 30년 40년 동안의 충주도 변하고, 한국도 변하고, 세계도 변하는 상황에서 지나간 이야기라는 게 야사가 될지 모르지만, 그 하나하나가 다 잃어져 가는 상황이고. 더군더나 제가 작년에 찾아뵈면서 목적도 말씀드렸지만, 불과 50년전까지 다녔던 배들이고 뗏목인데, 그걸 부리고 다녔던 사람을 만나기조차도 힘든게 지금 상황이거든요. 그 먹고사는데 꼭 필요했던 생활도구들이 그렇게 사라졌는데 다른 것들이야 어떻겠어요. 그것들이, 그런 것들이, 그 시대를 살아오셨던 으르신들의 기억속에서 이야기되는 것들이 조각조각이나마 화점(花點)을 놓듯이 퍼져있는 것들이 좀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라도, 그때에 1930년대는 어땠다, 1940년대는 어땠다 하는 충주의 지나간 이야기를, 지나간 삶을 그나마 찾아서 접근할 수 있는 그런 흔적들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요. 그게 보통 당신들 사신 거는, 우리 말하기에 그런거 있잖아요. 내가 살아온 걸 얘기하면 책으로 써도 몇 권 돼 라고 표현하는 게, 실제로 살아온 이야기로 하면 보통 책 한 권은 사람들이 다 되거든요. 그런데 막상 이게 책으로 쓰겠다 하면 할 말이 아무 것도 없는, (웃음) 그렇게 돌아가 버리는데, 그게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죽 한번 돌이켜 정리하는 것 속에서는 가능할 것 같거든요. 제가 월요일 어른들 만나뵙는다 그러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주위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주문을. 그 정도 살아오셨으면 충주에 관한 이야기들을 정리하는 것을 한번 부탁도 드려봐라. 그런 말씀하시는 분들이 몇 분 계시더라구요.
권태성 : 그런 얘긴 오늘 자네한테 처음 듣는 얘기는 아니야. 그전에도 그런 얘기가 나왔고. 또 나도 그런 필요성이 있다고 뭐 아들들한테도 얘길했고 했지만은... 그래구 시방, 자네 온다 그랜다, 오늘은 내한테. 그래 그런 얘기가 아마 필연코 나올거다. 그래 잠깐 내가 한번, 내가 다른 사람이 없는 건, 90년을 살았다는 것 그거 하나. 자랑거린 아니지만 살아온 건 사실이다 이 말이여. 그래 보고 들은게 많이 있다. 그래 하면서 생각을 갖다 또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시방 현재 사회가 너무나 변하기 때문에,,, 요새 내가 민주주의를 갖다 새로 공부를 해. 민주주의가 뭐냐 이 얘기여. 공산당도 민주주의라 그래구. 블란서 혁명이 또 뭐구. 이렇게 되니까 점점 더 모른단 말이여. (웃음) 블란서 혁명 후에 내중에 의회가 생기구 우측에 앉구, 좌측에 앉구. 시방 좌우하구는 원 그거하구는 원 동떨어지거던. 원래 다르거던. 근데 시방 말장난으루다 진보다 뭐다 나오는데, 헷갈려 당최 정리를 못해. 그러니까 민주주의를 다시 사전으루다가라도 한번 찾어본다구, 블란서 혁명이 나온단 말이여. 그러면 사회주의는 뭐냐 이거야. 일본엔 사회당이 있거던. 사회당은 소위 좌측에 가까운 사회당이 있구, 우측에 가까운 사회당이 있구. 과거에 들었기 때문에 일본은 그게 있는가 보다. 해서 들었는데 시방 우리나라에도 현재 좌측이 뭐다, 보수에 뭐. 더군더나 박근혜는 보수를 보수하겠다 이렇게 나오는데. 헷갈려서 이걸 좀 찾어보겠다고 사전을 들구 찾어보구 뭐해봐두. 그래 요샌 그것두 관뒀거든. 어려운 세상이여. 그래 이게 시끄러운게, 민주주의 본연 아니여? 시끄러운게.
김희찬 : 일단은 대화를 이야기하고, 거기서 합일점을 도출하고, 그게 100% 안됐을 때 이제 차선으로 가는게 다수결이라고 하는. 전체적인 얘기는 들어보고 해야지 일방적으로 결정해놓고 따라라 이러는 거는 아니니까. 기회를 다 줘놓고 간다라는게 취지 아닌가요. 그렇게 되면 시끄러울 수밖에 없고.
권태성 : 그럴 수밖에 없어. 그래 시방 그런 얘길 했는데, 나두 시방 다 체념했구. 우리집 애가 자꾸 와, 오면은 자꾸 그런 얘기를 끄내구 하는데. 저 나름대루의 나를 갖다 파악할려구 해서 그런진 몰러두... 아 요번에 또 제천에 오대. 제천 그 제자가 있다 그러지 않았어. 대학원에 대한 얘기, 세명대학에서 뭐 특강해달라 그래서 온다그래.
김희찬 : 한번 정리나 그런것보다 살아오신 역정을 죽 손자한테 얘기해 주시듯이 말씀하실 결심이 서시면 얘기해 주세요. 제가 듣고 정리하고, 정리한 걸 다시 보여드리고 하면, 얘기 중간에 잘못되고 이런 것들을 고쳐보실 수도 있고. 정리도 되고 그러실텐데. 그게 이제 나중에 원고가 되겠죠.
권태성 : 그런데 대구 집아이(참고 ; 권태성님의 장남, 대구 경북대 대학원장)가 얘기하는 것은, 거 뭐 그렇게 인쇄물로다 나간다는 거보다두, 내 대버터 시작하는 의미에서 소위 그 가보, 우리집의 내력. 그걸 아는대로 해놓구는 즈가 알어서 하겠습니다, 이거지 뭐, 솔직히 그런데 내놓을게 있어야지 뭐.
김희찬 : 책이라고 하는 것은 일정하게 내 자랑도 되지만, 책임도 따르는 부분이잖아요. 요즘은 그러한 매체가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메모라도 했거나, 내가 이야기한 것을 누가 적었거나, 아니면 녹음이라도 돼있으면 그걸 가지고 이해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저것도 없는 상황에서는 힘들죠.
권태성 : 요새, 몇일 전에 내가 소위 90이 됐다고 서울에서 친적들이 모였어. 내가 그냥 뭐 저기 일가 사람들 전부 다 모였지. 호텔에서. 내가 너희들보다 아는 것도 없지만은 보고 들은 것만큼은 제일 많다. 그것만은 속이지 못하는 사실이지. 그래 내가 몇 마디 했거던. 다듣구 애들이 하는 얘기가, 그걸 좀 풀어놔라 그러거든.
김희찬 : (2003년 녹취록 정리한 것을 보이면서) 이게 이제 작년에 제가 만났던 분들, 다니면서 녹음해가지고 와서 정리하고 그런 것들이거든요. 사람으로는 한 20명 정도 되는데, 그게 녹음한 것을 다시 정리하는 것이 지루한 작업이긴 한데, 정리해 놓으니까 이만큼의 제가 볼 수 있는 남한강과 관련되는 그런 이야기들이, 다 그건 아니지만, 그렇게 집중들이 되고, 그러다보니까 조금 더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생기더라구요.
권태성 : 그건 끝없이 나오겠지. 한정이 없지 뭐.
김희찬 : 그렇죠. 그 중에서도 이제 선생님 만났던게 이만큼 되요. 그때 제가 와서 두시간 동안 듣고 가서 정리한 내용이. 그 다음에 이건 그 다음주에 학다방 처음 갔을 때, 막 TV 틀어놓고 시끄러운 속에서 정리한게 그날 얘기한 것들이 고스란히 정리가 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그날 여기 오기 전에, 그날 뵈었던게 마지막이었는데, 가금의 이동호 선생 같은 경우도 이만큼이 되고. 망설여지시면 다 버리시고, 준비가 되시면 말씀하세요. 제가 듣고 정리해서 다시 보여드리고 할 테니까.
권태성 : 망설일 건 읎구. 좌우간 자네 돈 안되는 일을 하는 걸 보구 내 놀랬네.
(함께 웃고 말았다. 오늘 가지고 간 주제에 대한 것들은 여기서 녹취를 마쳤다. 30분 정도 요즘 정치에 대한 말씀을 더 나누다가 왔다)
[2004. 5. 7 녹취 정리]
[참조 및 주의]
1. 본문 중의 영호(永湖) 선생님은 권태성(權泰成) 선생의 호(號)입니다.
2. 이 글은 지난 5월에 인터뷰한 것을 정리한 녹취록으로 답변자의 동의는 구하지 않은 채 올린 상태입니다. 제가 볼 때는 충주를 이해하고 살아가는 데는 모두에게 필요한 자료인데 간혹 개인적인 사정들이 섞여 들어간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 부분들은 알아서 읽고 잊어주시기 바라며,,, 그렇게 그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