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스코 공항 (숭배하는 태양신 상징의 형상이다.)
공항을 나오자 마추친 동상.
쿠스코 시내의 집 ( 아래 돌 축대는 잉카시대의 것으로 추정됨)
전통의상을 입은 여인* 신발까지 갖추었더라면...^^
코리칸차에 입맞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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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 붉은 지붕들 위로 불빛이 마치 보석처럼 빛난다.
잉카의 전설 속으로 흐르는 물처럼 나는 스며들고 있었다.
겨우 500년 정도 지난 이 잉카 시대가 이리도 전설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랜 기다림이었을까?
고도 때문인지 밀림지역 말도나도 보다 기온차가 있어 추위를 느낀다. 쿠스코의 지형이
해발 3400m나 되다보니 고산증 때문에 머리는 어질어질 속은 메스껍고 울렁거린다. 기운이 쭉 빠진다.
몽롱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창밖의 어둠에 눈길을 멈춘다.
‘쿠스코, 코리칸차’ 이 말들이 주는 어원 자체가 신비스런 아득함이다
세계의 배꼽이라는 뜻의 쿠스코는 우주안의 작은 별인 지구, 그 중에서도 이곳 페루가 중심이라는
생각을 가진 페루인들 이었고, 코리칸차는 문자는 없고 언어만 있던 잉카인의 언어 캐추아 말 그대로
황금정원이었다.
온통 넉넉한 황금으로 벽을 장식한 태양의 신전이었으니 이들은 그대로 빛나는 황금의 *잉카이었다.
잉카의 옛 도시 쿠스코, 영화로웠던 황금의 도시답게 불빛은 잘게 부셔진 금빛으로 반짝인다.
마치 지금도 온 거리가 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하다.
길거리 바닥의 돌 하나하나, 하얀 벽의 이층집 작은 발코니의 꽃들. 집을 받치고 있는
오래된 잉카의 주춧돌. 우리와 닮은 피부색과 얼굴 모양의 인디오, 길게 땋아 내린 머리칼,
오래전부터 이곳에 한 몸이었을 것 같은 알 수 없는 영성의 느낌.
쿠스코의 아르마스광장 과 성당
광장 주변의 스페인식 건물
페루 쿠스코 경찰
비바 엘 페루! 페루에 축복을..이 산등성이에 새겨져 있다.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엔 다른 도시와는 빛깔도 사뭇 다른 성당의 위용이, 가뜩이나 어지러운 머리를
더욱 압도한다. 스페인 풍 남미의 다른 성당들과는 다른 붉은 빛을 띄고 있다. 아직도 도로 조차
바둑무늬의 돌이 전통 깊은 도시를 상징하고 있다.
무언지 모를 높낮이의 감정처럼 기온마저 춥다가도 햇볕 가운데 서면 다시 따듯한 기운이 감돌지만,
가늠할 수 없는 중압감이 마음을 깊게 한다. 고산증이 발걸음을 점점 더 무겁게 한다.
잠시 눈 돌려 하늘빛에 감동한다. 남미여행 내내 저 하늘과 사랑에 빠졌었는데 이곳 쿠스코의 하늘은
더없이 나를 잡아끈다. 어쩌란 말이냐 하늘아!
물들고 싶은 하늘과 연두 빛 산 그림자, 그리움으로 아득했던 쿠스코 도시의 붉은 빛깔이 더 없이
감동이다.
코리칸차 는 옛 잉카의 황금정원이다. 스페인 점령후 산토도밍고 성당이 됨
코리칸차 문앞에 전통의상을 하고 앉아 사진을 같이 찍으면 돈을 요구한다.
*코리칸차 산토도밍고 성당에 들어선다.
태양의 신전인 코리칸차를 스페인 정복자들이 산토도밍고 성당으로 만들어 버렸다
지진에 의해 스페인이 세운 건물은 허물어져 다시 세워졌지만, 옛 잉카인들이 세운 코리카차의
주춧돌은 아직도 남아 잉카인들의 지혜와 뛰어난 건축문화를 그나마 보게 해준다.
다시 산토도밍고 성당이 되긴 하였지만, 성당 문 앞에 전통의상을 입고 관광객을 상대로 모델이
되어주는 잉카의 후예는 코리칸차의 침묵을 피 속에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산토도밍고 성당에 전시되어 있는 잉카의 유물들을 돌아보며, 우리나라 신라 시대 또한 돌 만지는
솜씨가 가히 뛰어났음도 확인한다. 1500년대의 돌 만지는 기술의 이 코리칸차 보다도
더 이른 시기에 신라의 돌 만지는 솜씨는 신기였다고 보아진다. 석굴암은 751년에 창건된 것이니
코리칸차의 배의 시간 전에 이미 만들어진 석굴암의 부조와 형상들은 석조예술의 극치가 아니던가.
석굴암의 십일면 관음보살상의 부드러운 곡선을 떠 올려보면. 마치 천으로 만든 것처럼 하늘하늘
날리는 치맛자락이며 흘러내리는 옷자락이며 만지고 싶고 입어보고도 싶어진다.
일제에 의해 다시 만들어지기 전 석굴암의 기술적 가치는 또 어떠한가.
이곳에서 오히려 신라의 찬란한 문화에 흥분된다.
이 나라의 문화도 물론 찬탄하지만 비교되는 우리 문화의 고졸함을 절실히 알게 됨이 더욱 기쁘다.
쿠스코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대개의 도로들이 산을 타고 만들어졌기에 챠스키라는 파말꾼들을
위주로 한 소로로 도로망이 형성되어 있어서 바퀴를 이용한 수레가 다닐만한 도로망도
존재하지 않았고, 바퀴를 끌 큰 동물도 없으므로 마차도 없었다는 잉카인들이 과연 저 어마어마한
돌들을 어찌 운반해 이런 거대한 것들을 지어 냈을까?
잉카인들의 건축기술 종이조각 조차 들어가지 않을 만큼 틈이 없다.
무려 6톤에 가까운 돌을 12각으로 다듬어 주변의 돌들과 맞물리게 한 솜씨는 과연 신비 자체다
잉카인들은 3과 12라는 숫자를 완전수로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미 12진법을 이해한 것 같았다.
이렇게 잉카인들의 놀라운 석조건물들을 침략자들은 허물어다 스페인식 건물을 짓는데
바닥재로 썼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세월의 흔적들이다. 잉카인들은 단단하고 거대한 돌을
마음대로 다루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었던 것 같다.
전설 같은 이 도시를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르(Francisco Pizarro)는 1533년
카하마르카(Cajamarca)로 진격해 아타왈파 왕을 감금하고는 풀어주는 대가로 금을
방 가득 채워 주면 풀어주겠다는 약속 하에 금을 긁어모았다, 어리석은 아타왈파 왕은
부피로서의 금을 말했고, 정복자 피사로는 방 가득 채우는 족족 찌그려 뜨려 부피를 줄였다니,
방 가득 채워지려면 도대체 얼마나한 량의 금이 필요했을까? 결국은 6톤이나 되는 금을 모아주고도
죽임을 당하고 마는 잉카의 왕 이였지만, 피사로 역시 동업자로부터 6년 뒤 암살을 당해
결국은 짧은 영화 밖에는 누리지 못한 침입자 피사로의 최후였다. 그러나 이런 침략자의
시신이 리마시의 성당에 버젓이 누워 있다니 아이러니다.
역사는 승리한 자들의 전유물이다
침략자들은 이렇게 훌륭한 문화유산을 가진 페루인들을 한낮 어리석은 자로 만든 이야기도 있다.
어느 곳에나 한손엔 성경 한손에 칼을 들고 나타난 침략자들이었던 그들이 이곳이라고 무탈했을 리가
있을까. 피사로가 페루에 쳐들어 왔을 때 선교사를 내세워 하느님을 알리려 했다고 한다,
성경을 주자 글을 알지 못하는 왕은 성경을 던졌다는 것이다.
이에 피사로는 화가 나서 왕을 감금했다는 이야기다. 과연 한나라의 왕이 이와같은 행동을 하였을까?
이 이야기는 스페인의 역사서에 적혀 있다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린아이들이라도 이런 유희는 하지 않을 것 같다.
아마도 왕은 제 나라의 종교를 위해 강요하는 이런 것은 필요 없다는 오히려 당당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쿠스코에서는 더 없이 신과 인간에 대해 알고 싶어진다. 결국 신도 인간이 창조해낸
가장 훌륭한 문화유산중 하나라는 말에 동의하고 싶어진다.
화폐가 없어 끈의 매듭을 묶어가며 돈의 가치를 만들어간 페루는 직물산업이 발달되어 있다.
요즘 천의 짜임을 말할 때 실의 굵기로 측정한 단위인 수를 말하는데 잉카시대에
이미 지금 가장 짜임이 가늘게 짜는 직물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니 이 또한 잉카인의 지혜가 돋보인다.
쿠스코 밤의 시내모습
쿠스코의 시내의 야경
*잉카 ; 깨추아 어로 왕 이라는 뜻
첫댓글 좋은 글 보았습니다^^() /// 역사는 승리한 자들의 전유물! 그렇지요!!^^ /// 남북 아마리카 인디오들.. 그들 역시 한( = 칸 = 훈) 의 후예라고 저도 봅니다.^^ 중앙아시아가 발원지라 하던가요? 그러니까 흉노, 몽고, 만주, 조선, 아메리카 인디언, 티벳.. 모두 옛조선이 시작되는 어드메 쯤.. 하느님을 섬기던 부족, 부족 들이었다는 거지요^^().......
저도 잘 읽었습니다. 공부많이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