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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옛 돌 박물관 도심 속 숨은 보물창고
우리는 늘 돌을 보고 산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기에 큰 의미를 안 둔다. 돌이겠거니, 하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 옛 돌 박물관에 다녀와서 생각이 달라졌다.
우리옛돌박물관에서 가장 높은 장소인 '오감만족'. 서울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돌 조각을 손으로 만져볼 수 있게 조성해 뒀다. 날씨가 좋으면 이곳에 돗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먹어도 된다.
돌은 말이 없다. 움직이지도 않는다. 한데 묘하게도 나이는 먹는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밴다. 표정도 있다.
비 온 다음 날엔 좀 더 청명해지고, 아침 해가 뜰 때면 영롱해 뵈기도 한다. 돌의 매력. 암만 말로 해봤자 직접 느껴보기 전까지는 모른다. 굳이 돌의 매력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좋다. 이곳엔 내로라하는 회화작품이, 기막힌 절경이, 야생화가, 새소리가 있다. 유독 바람이 많이 불던 지난 5월 4일, 박물관을 찾았다. 거센 바람 속에서도 돌은 그저 묵묵했다.
세계최초 석조유물박물관
언제나 그렇듯 평온했다. 북악산 자락의 성북동 길. 그 길을 오르다 보면 우리옛돌박물관을 마주하게 된다. 지난 2015년 11월 개관한 이 박물관은 용인의 세중옛돌박물관에서 가져온 석상 1천2백50여 점으로 새롭게 선보인 곳이다. 18,182㎡(약 5천5백 평)대지와 건평 3,300㎡(약 1천 평) 건물에 둥지를 튼 석상들은 대부분 조선시대 작품들이다.
4층짜리 건물 내부에는 환수유물관, 동자관, 벅수관, 자수관, 기획전시관까지 총 5개 전시실이 있다. 찬찬히 둘러보기로 했다. 옆에는 학예사가 따라붙었다. 무심코 지나치려던 돌들이 그의 해설과 함께 새옷을 입었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환수유물관이다. 들어서자 문인석(文人石)이 가득했다. 문인석은 무덤을 수호하기 위해 봉분 앞에 세우던 석조유물인데, 본래 한 쌍씩 두는 게 보통이다.
“자세히 보시면 대부분 짝이 맞지 않죠? 처음 일본으로 팔리거나 밀반출됐을 때는 짝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여기저기 팔려 다니며 짝을 잃어버리고 혼자 돌아와 이곳을 지키고 있는 거죠.”
문인석은 키가 각기 다르다. <성종실록>에 따르면 석인의 크기는 계급에 따라 정해졌다고 한다. 전시된 유물 중 가장 큰 건 185㎝인데, 이는 왕족의 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7품 이하인 생원과 진사 등에게는 140㎝ 정도의 석인만을 세울 수 있도록 했다.
문인석을 보고 나오니 ‘길상(吉祥)’이라는 전시공간이 나왔다. 좋은 일이 일어날 조짐을 뜻하는 말이다. 이곳에는 18마리의 석양(石羊)이 전시돼 있다. 물고기와 함께 양은 대표적인 길상의 동물.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에 양 꿈을 꿨다고 해요. 꿈속에서 양을 보고 잡으려 했더니 양의 꼬리와 두 뿔이 떨어지더랍니다. 꿈이 하도 이상해 무학대사에게 물어보니, 양(羊)이라는 한자에서 뿔과 꼬리가 떨어지면 바로 왕(王)자가 되니 왕이 될 것이라 해몽했다고 해요. 그때부터 양 꿈이 길몽이 됐다고 합니다.”
석상에는 문외한이었던 기자의 눈엔 그저 ‘키가 큰 남성 형상의 돌’로 보였던 장군석에 대한 얽힌 이야기는 이렇다.
“문인석과 함께 능묘 앞에 세워졌던 석조유물입니다. 장군석은 저희 박물관 대표 작품이기도 해요. 높이가 190㎝이고, 투구를 쓰고 갑옷을 갖춰 입은 채 칼을 들고 있죠. 칼자루와 양어깨에는 도깨비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전쟁터의 나가는 장수에게 힘을 더하는 벽사진경의 상징무늬이죠. 눈썹과 수염이 표현이 사실적이고, 섬세한 갑옷의 무늬는 뒷면까지 이어져요. 굉장히 단단하고 견고한 화강암이라 이처럼 조각을 하기 쉽지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을 떡 주무르듯 했던 우리 조상들의 솜씨는 감탄할 만하죠. 단단하고 강하며 하얗고 깨끗한 화강암은 한국인과 닮은 돌이기도 합니다.”
(왼) 성북동 길에 위치한 우리옛돌박물관 정문. 지난 11월 개관했다.
(오) 무덤을 수호하기 위해 봉분 앞에 세우던 석조유물인 문인석.
현대 회화작품과의 스토리텔링
제아무리 얘깃거리를 많이 담고 있는 석조유물이라지만, 혼자 놓아져 있었다면 다소 단조로웠을지도 모른다. 현대 회화작품 약 100점을 함께 전시해둔 건 그런 배려에서였다. 각각의 회화작품들은 저마다 거기 있는 이유가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문인석 전시장 앞에는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을 놔뒀다. 이인선 학예사는 “이 사진은 경주 경애왕릉의 소나무 숲을 찍은 사진”이라면서 “천년고도 신라를 지키고 있는 마지막 왕릉, 그리고 다시 고국에 돌아와 이곳을 지키고 있는 문인석들과 그 의미가 통하는 것 같아 이 작품을 전시실의 정면에 배치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소나무는 예로부터 신성한 기운을 뿜는 나무로 여겨져 왕이 사는 궁궐이나 왕릉에 많이 심었다. 이 학예사는 “문인석 전시장 앞에 설치된 배병우 작가의 소나무 작품은 마치 왕릉의 풍경처럼 이 공간을 장엄하고 신성하게 한다”고 덧붙였다.
이 밖에도 이우환, 김종학, 김창열, 김환기, 남관, 변종하, 유영국, 이대원, 류경채 등 한국 근현대미술의 부흥기를 이끈 작고 작가와 생존 작가의 작품을 석조유물과 적절히 배치해 놨다. 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차녀 박유아 작가가 고뇌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그림도 눈길을 끈다. 이들 작품은 모두 돌 조각의 사연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데,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동자석이 있는 2층으로 갔다. 동자석은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서울과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왕족과 고위 사대부의 무덤에 놓였던 석상이다. 엄숙한 묘역에 활력을 주면서, 4계절 내내 무덤 주인의 시중을 드는 역할을 했다. 이에 동자관에는 4계절을 표현한 4대 작가(심산 노수현,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 의제 허백련)의 10폭 병풍을 함께 전시해 뒀다.
소소한 즐길 거리도 있다. 동자석 맞은편 커다한 벽면에는 수백 장에 달하는 엽서가 빼곡히 꽂혀 있다. 이름하여 ‘소원의 벽’인데, 관람객들이 소원을 적어 꽂아놓는 곳이다. 삐뚤빼뚤한 아이의 글씨는 “태권도 잘하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빌어놨다.
“동자는 신의 메신저 역할을 했습니다. 동자관 입구에 배치된 수복강녕 엽서에 도장을 찍고 소원을 적은 후, 전시관을 돌면서 자신의 소원을 전달해줄 메신저 동자를 선택하고 마음으로 동자에게 소원을 비는 겁니다. 그리고 소원을 벽에 꽂아두면, 저녁에 동자가 내려와 꼭 이뤄지도록 도와줄 거예요.”
동자관으로 가기 전에는 ‘돌과의 대화’를 위한 작은 방도 있다. 들여다보니, 촛불과 돌이 하나 놓여 있다. 침묵하고 있는 돌은 어떤 얘기라도 들어줄 기세였다. 자수관도 흥미롭다. 돌조각에 수복강녕을 기원한 것처럼 옛 여인들은 가족의 수복강녕을 기원하며 수를 놓았단다. 2백50여 점의 자수작품을 볼 수 있는 이 전시관의 주제는 ‘어머니의 정성, 한 땀 한 땀 사랑을 짓다’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숨은 돌 찾기(러닝 Running/ Learning 스톤)’ 교육체험프로그램도 즐길 수 있다. 옛돌 1천2백50여 점 중 ‘이빨 빠진 벅수(마을 어귀나 다리 또는 길가에 수호신으로 세운 사람 모양의 형상)’를 누가 먼저 찾느냐와 같은 놀이다.
(왼쪽위)동자석. 엄숙한 묘역에 활력을 주면서 4계절 내내 무덤 주인의 시중을 드는 역할을 했다. (왼쪽아래)250여점의 자수 작품을 볼 수 있다. (오른쪽)무인석과 함께 능묘 앞에 세워졌던 장군석. 박물관 대표 작품이다.
1만2천 주 야생화, ‘돌의 정원’
내부를 한 바퀴 돌고 나면 동선이 자연스럽게 외부로 이어진다. 그렇게 ‘돌의 정원’이 시작된다. 관람객들의 휴식과 쉼을 위한 공간인데, 북악산의 자연경관과 우리 옛 돌조각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박물관 내부가 현대 회화작품과 함께여서 더 인상 깊었다면, 바깥은 온갖 야생화들과 함께해 더 빛을 발한다. 지난봄, 한택식물원의 도움을 받아 무려 1만2천 주의 야생화를 심었단다. 꽃과 돌의 하모니가 절묘했다.
걷다 보면 주인공인 돌에 집중하다 놓치기엔 아까운 볼거리가 많다. 작은 시냇물이 그렇고, 커다란 돌에 새겨진 시(詩) 한 구가 그렇다.
돌은 말은 없으나 / 철학자에겐 철학으로 /
음악가에겐 음악으로 / 예술가에겐 예술로 /
종교가에겐 종교로 / 시인에겐 시로 /
삶, 그 존재의 진리로 있나니 /
아, 그렇게 / 돌은 천년, 만년, 억 년, 수억 년 /
세월없이 놓여 있는 그 자리에서 / 침묵으로, 깊은 침묵으로 /
삶, 그 존재의 말로 있나니 (조병화, ‘돌’)
야외전시관은 오감만족, 마음의 정화, 염화미소, 승승장구의 길 등 다양한 주제로 꾸몄다. 이 중 ‘오감만족’은 박물관에서 가장 높은 장소인데, 서울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전경에, 돌조각을 손으로 만져볼 수 있게 조성해뒀다.
날씨가 좋으면 이곳에 돗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먹어도 된다. 돗자리는 박물관에서 대여할 수 있다. 돌계단을 올라가 기도를 하면 ‘좋은 기운’을 받을 수 있는 ‘승승장구의 길’도 관람객들의 인기를 얻고 있다.
아이와 함께 왔다면 놀이공간인 ‘동자 음악회, 동자 키친, 동자 놀이터’에 들러보는 것도 좋겠다.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전통악기를 지니고 있는 동자들과 제기차기나 연날리기 등 민속놀이를 즐기고 있는 동자들, 그리고 절구 같은 주방도구를 다루고 있는 동자들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 그때그때 아이를 위한 다양한 체험놀이도 마련한다니, 꼭 들러보자.
INTERVIEW
천신일 우리옛돌박물관 이사장
40년 한국 돌 애착이 박물관 세우다
18마리의 석양이 전시된 '길상'에서 천신일 이사장.
박물관이 생긴 배경을 설명하자면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70년께, 인사동. 그곳엔 평소 고서와 도자기에 관심이 많던 30대의 한 청년이 서 있다. 천신일 우리옛돌박물관 이사장이다.
“인사동에 제가 가끔 가던 골동상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가게에 일본상이 찾아왔더라고요. 그러더니 주인장과 석조유물이 담긴 앨범을 보고 흥정을 하기 시작하는데, 화가 나는 겁니다. 왜 우리 석조유물을 일본상에게 파느냐는 거죠. 젊은 혈기에 주인장 멱살을 쥐고 말했어요. 일본상에게 팔 거면, 나한테 팔라고요.”
당시 골동상 주인은 일본상과 석조유물 27점을 1억7천5백만원에 흥정을 한 상태. 40년 전인 걸 감안하면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천 이사장은 여기에 2천5백만원을 뺀 1억 5천만원에 사겠다고 했다. 그렇게 27점을 몽땅 사버렸다.
돌 조각을 집에 놓고 보니까, 묘하더란다.
“비가 온 다음 날엔 더 선명해졌고요, 아침 햇살이 비쳤을 때 느낌이 또 다르고요. 같은 돌조각이 해와 물에 따라 다른 이미지로 다가오더군요.”
그렇게 석조유물의 매력에 푹 빠졌다. 애착이 생겼고, 이내 집념이 됐다.
돌에 대한 집념은 결국 박물관까지 세우게 했다. 개관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어느 날 신문을 봤는데,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석조유물 전시회를 연다고 해서 가본 게 계기가 됐다.
“가서 보니, 제 느낌으로는 제가 가지고 있는 작품보다 느낌이 덜한 겁니다. 그 자리에서 박물관장 면회를 신청했어요. 당시 관장이 김홍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어요. 학예연구관은 나선화 문화재청장이었고요. 면담 이후에 제가 소장하고 있는 석조유물을 보더니 강한 어조로 제안을 하더라고요. 최선을 다해 도와줄 테니 당신이 박물관을 꼭 했으면 한다고.”
마침 용인에 가지고 있던 땅이 있어 설계에 들어갔다. 4년간 준비한 끝에 지난 2000년 7월 세중옛돌박물관을 개관했다. 그렇게 15년 정도 운영을 하다, 성북동 땅에도 이를 데려오면 좋겠다 싶어서 지난해 새둥지를 틀었다. 개관 5개월. 현재까지 관람객은 1만70명을 돌파했다. 특히 외국인들이 그렇게 감탄을 하고 돌아간단다.
“얼마 전에는 주한대사의 부인들이 단체관람을 하고 갔어요.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더 감동적으로 보고 돌아갔습니다. 상상도 못 했다는 거죠. 예를 들어, 이탈리아 조각 같은 경우 아주 섬세하고 날렵한 미가 있죠. 근데 그 돌은 무른 돌이에요. 우리는 화강암을 써요. 아주 강하죠. 돌 중에서도 아주 단단한 걸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일일이 정으로 쪼는 거예요. 그게 우리 석공들의 전통방식입니다. 때문에 훨씬 그 공정이 까다롭고 힘들어요. 그 누구도 흉내를 못 냅니다.”
40여 년에 걸쳐 석조유물을 수집해온 그는 특히 환수박물관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
“용인에 세계 최초로 석조유물박물관을 열고 나니 외신에서도 관심이 뜨거웠습니다. 일본 신문에도 보도가 됐죠. 그러던 2000년 어느 날이었어요. 현지에서 연락이 오기를, 일본의 구사카 마모루라는 사람이 한국 석조유물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더라고요.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환수를 추진하기 위해서였는데, 쉽지 않았다. 당시 한국 시세보다 5배 정도 비싼 가격을 불렀기 때문이다.
“구사카 씨를 설득하기 위해 한국에 초청해 용인 세중옛돌박물관을 보여주고, 한의원에 가서 진맥도 받게 하고 한약도 지어주면서 공을 아주 많이 들였어요. 저희 아내가 구사카 씨 부부에게 김치도 담가주면서요. 장장 6개월에 걸친 설득 끝에 석조유물 총 70점을 환수할 수 있었습니다.”
16점은 돈을 주고 매입했지만, 54점은 기증을 받았다. 구사카 씨는 유물을 내어주면서 “꼭 내 딸을 시집보내는 기분”이라고 했단다.
환수가 결정됐지만, 복병이 있었다. 운반 문제였다. 수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석조물을 훼손 없이 들여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석조유물 하나하나를 스티로폼과 스펀지로 꼼꼼히 감쌌습니다. 특히 목 부분이 약하니까, 깨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했어요. 그리고 큰 기중기를 동원해서 나고야항에서 부산항으로, 다시 용인으로 운반한 겁니다.”
박물관 1층에 있는 천 이사장의 집무실은 마치 서재 같았다. 각종 고미술서적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천장은 여느 건물보다 높았는데, 책장이 천장과 맞닿아 있었다.
천 이사장은 “박물관을 하기 전에는 나도 토요일, 일요일에 쉬었지만 지금은 주말에 더 바쁘다”면서 “비록 일주일 내내 쉬는 날 없이 일하지만 자식처럼 모아놓은 석조유물을 보러 오는 손님들 덕분에 피곤함도 잊게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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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6일 조선일보) / 박지현 여성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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