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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5:15]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는 잘 쓰지 않은 용어로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온다. 그 뜻은 '어떤 교리를 반복한다'는 의미이다. 즉 그들이 알지 못한 어떤 새로운 것을 가르친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알고 있는 복음의 진리를 회상시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울은 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라고 했을까 ?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1) 복음의 원리와 명령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들의 행함에 부족함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더 굳건히 세우기 위해서다. 물론 성숙한 신앙적 면모를 갖춘 로마 교회였지만 온전함에 이른 것이 아니었기에 바울은 다시 한번 진리를 일깨워 주어 로마 교회를 튼튼하게 세우려고 하였을 것이다. (2) 이미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는 수신자들의 신앙의 질을 존중해 주는 예의 바른 태도이다(3) 또한 여기서 가르친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구태여 '생각나게 하려고'란 용어를 쓴 것은 바울의 신앙 인격의 겸손한 표현법이다.
이는 형제를 권면할 때에 상대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 모범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 로마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특별한 의미와 감회를 주는 것이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는 세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만세 전에 택정함을 입은 것을 말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일반적인 주권으로 선택함을 받은 것을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라고 노래했다.
(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 구원함을 받은 것을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강조했다(엡 2:5, 8). 지난 날 무지 가운데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고 믿는 자를 멸절시키려 했던 악한 자신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친히 만나 주심으로 자기를 불러 회개시키고 구원해 주신 그 사건을 그는 평생 감격하며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찬송했다.
바울 사도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대적했던 자신이 구원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라고 그의 서신 곳곳에서 고백하고 있다. (3) 사도적인 직분과 사역에 관련된 고백으로서 바울은 자기의 사도 직분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고 말한다. 교회와 믿는 자를 핍박하여 주님을 대적했던 죄인중에 괴수인 자신을 불러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이방인의 사도'로 삼아주신 것이야말로 은혜 중의 은혜라고 간증하는 것이다.
이중 본문에서 말하는 은혜는 문맥상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즉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예수께서 부르시고 세우신 사도적인 직분과 사역을 뜻한다. 더욱 담대히 - 이 말은 비교적인 의미가 내포된 부사로서 바울 사도의 다른 서신보다도 본서를 '더욱 담대한 마음으로' 썼음을 나타낸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 교회를 세우지 않았고 또한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정하시고 이방인의 사도라는 막중한 사명을 맡겨 주심을 생각할 때 그들을 권면할 자격을 찾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담하게' 말할 수 있었다.
대강 - 이는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 '부분적으로', 혹은 '어떤 곳에는'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2) '다소', 또는 '어느 정도'라고 해석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번째 해석을 취한다 해도 크게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첫번째 견해를 취함이 좀더 적절한 해석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더욱 담대히'란 말은 (1)번의 해석과 연결시킬 때 비교적인 의미가 선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어느곳에서는 내가 더 대담하게 썼다'고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느 곳에서'). 위와 같은 구절들에서 바울은 더욱 담대한 권면을 하고 있다. 썼노니 - 이 말은 '과거에 ~했다'는 단순 과거형 동사로서 바울 사도가 이제까지 로마서를 쓴 사실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본서 저자가 사도 바울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증거를 보게 된다.
[롬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그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를 본절에서 구체적으로 약술하고 있다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 바울은 대제사장의 명을 받아 기독교도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즉 사도직의 은혜가 이방인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숭고한 사역의 성취를 위해 바울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 후에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온 생애를 전략하였다. '일꾼'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이투르곤'은 '레이토스'와 '에르곤'('일')이 합성된 단어로 공직자 곧, 공적인 관리를 뜻한다.종종 '군대의 종이나 왕의 신하'나 '성소에 부리는 자'에 대해서도 사용된다. 그러나 특히 신약에서는 하나님에 의하여 임명된 일꾼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임명받은 일꾼을 말한다. 바울은 이 단어를 그리스도의 일꾼된 자신에게도 사용하지만 또한 바울 자신의 일꾼된 에바브로 디도에 대해서도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바울에게 맡기신 사도직은 범세계적인 직무로서 복음 전파의 직무는 물론 제사장적 성격을 띤 직무였다. 즉 바울의 사명은 이방 세계를 하나님이 받으심직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일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란 단어가 명백히 보여준다. 신약에서 본절에서만 사용된 '히에루르군타'란 단어는 '히에로스'와 '에르고'의 합성동사 '히에루르고스'에서 파생한 동사로서 '거룩한 사명을 수행하다', '제사장으로 봉사하다'의 뜻을 가진다. 이러한 사명을 받은 바울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1) 제사장 직무를 맡은 바울의 역할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인격은 물론 모든 청중, 곧 이방인의 인격을 하나님께 바치는 구원의 메신저로서의 봉헌 행위였다.
(2) 모든 교회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본서는 물론 모든 바울 서신의 첫머리에 나타나는 모습이다. (3)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란 표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바울의 사도직은 제사장적 직무를 수행하는 기능이 있었다).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 이것은 신약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비유적 표현으로서 아마도 사 66:20로부터 발전된 개념일 가능성이 높다.
바울은 여기서 '이방인과 '제물'을 동격으로 취급하여 복음에 의하여 얻어진 이방인을 사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즉 영적인 희생 제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물'이란 제사 의식에서 마지막으로 바쳐지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비유적인 표현에서 우리는 복음 전파자의 사역의 목표를 보게 된다.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단순히 복음을 전파할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순종케 함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제물이 되도록 그들의 영혼을 성결케 해야 한다는 사명인 것이다.
이런 뜻에서 사도직의 기능을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함으로 묘사했고, 사역의 대상인 이방인을 구약의 제사에서 제사장이 드리는 제물로 비유하여 나타낸 것이다.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하심이라 - 당시 복음을 통해 회개한 이방인 신자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하여 불결하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신자들이 있었기에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고 깨끗게 되어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하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의 헬라어 '헤기아스메네 엔 프뉴마티 하기오'는 완료형 수동태 분사 구문을 취하고 있어, 성화가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로 칭의와 최종적인 구원 사이에서 이루어져 가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성령께서 신자를 하나님이 받으심직한 상태로 창조해 가시는 주체임을 보게 된다 거룩한 삶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롬 15: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러므로 - 앞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사도직과 이방인을 위한 임무를 말한 바울은 이제 그 사역의 구체적인 결과를 진술하기 위해 15절과 16절의 내용을 받는 접속사를 쓴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이 어구는 바울의 애용구로서 바울 신학의 기본어다. 본문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말은 그리스도를 통하여란 말로서 '자랑한다'는 용어가 시사할 수 있는 지나친 자기 자랑적인 태도를 부드럽게 유화시켜 준다
(2) 바울의 자랑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는 것으로 자랑의 근거를 강조하는 것이다. 즉 그의 자랑은 자기 자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임을 말한다.(3) 사도가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말을 첨부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랑이 아니고는 모든 자랑이 제거되어야 할 것임을 나타낸 말이다. 위의 세 견해는 유사한 것으로서 본문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어구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덧붙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헬라어 원문에 나타난 강조점의 문제이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어구는 '자랑하는 것'이란 말을 직접 수식하고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부사구로서 '내가 가졌다'는 '에코'라는 동사를 수식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말은 위의 세 가지 해석을 취하면서도 자랑 그 자체를 강조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바울이 자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의 근거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한층 강조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사도의 모든 사역의 근거요 내용과 목표였다.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1)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하나님께 관한 것'이다. (2) 일종의 부사적 대격으로서 '하나님께 대하여'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두 가지 해석을 다 취할 수 있다. 이 표현은 어떤 특정한 것을 가리킨다기보다는 하나님께의 섬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에 관련된 것에 있어서만 자랑한다는 자랑의 범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용어는 예배 직무를 수행하는 유대인의 예배 의식적 표현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전문 술어로서 앞절의 '제사장 직무'와 '일군'과 일맥 상통한다.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 여기서 자랑의 구체적 내용은 16절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방인들이 복음을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말한다. 여기서 바울이 유달리 자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도구로서의 축복을 받은 사실이다. 이것을 바울은 자기의 면류관이요 기쁨이라고 했다..
[롬 15: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헬라어 원문이나 영역본에는 이유를 나타내고 접속사 '왜냐하면'이 본절 초두에 삽입되어 있다. 그러므로 본절은 17절에서 주장한 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한 것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 이것은 16절의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으로서 좀더 쉽게 직역하면 '이방인 편에서 순종이 생기게 하기 위하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종하도록 이끄는 것이야말로 바울의 소원이었으며, 또한 그의 부르심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바울은 이것을 다시 상기시킴으로 로마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사역에 대한 열매를 확실하게 가르치면서 이런 성과가 어떻게 무엇으로 성취되었으며 그 성격은 어떤 것인지를 규명하고 있다. 나로 말미암아 - 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행한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을 통한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을 강조한 것이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방인을 순종케 하기 위해 자기가 수고한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아울러 자기 자신은 주님이 쓰시는 복음 전도의 도구요 하나의 통로였음을 명백히 밝히는 표현을 쓴 것이다.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 쓰신 도구, 즉 방편과 원리가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1) '말과 일이며' 이것을 혹자는 그의 설교와 수고, 또는 전도와 생활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말'은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한 사도 바울의 모든 노력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대개 그의 가르침과 설교(복음 증거)를 말한다. 그리고 '일'은 복음을 위한 그의 행적과 고난 즉 실천적 행실이 있는 삶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를 통해 나타나는 이런 것들을 거룩한 도구로 쓰셔서 구원 사역을 이루셨다.
(2)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을 향한 효과적인 전도 사역을 위하여 바울로 하여금 표적과 기사의 능력을 행하게 하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사도들의 사역에서도 나타났다. 여기서 '표적'은 영적인 의미로서 인간들의 눈앞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를 의미한다. 즉 영적으로 볼 수 없는 실재를 눈 앞에 나타내준 증표인 것이다. 그리고 '기사'는 놀라운 일을 뜻하는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즉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기적을 말한다.
이로보건대 표적과 기사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자임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그가 전한 복음이 하나님이 계시하신 진리임을 증거한다. 아울러 무엇보다도 그 복음이 가리키는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역사상에 현실로 임했음을 일깨워 주는 표이다. 구약에서는 표적과 기사가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의 수단으로써 나타났으며, 특히 출애굽 때와 광야 생활 중에 그러했다. 그러므로 표적과 기사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아무튼 이것은 바울을 통해 이방인을 부르실 때 쓰신 거룩한 방편이며, 그 결과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순종을 불러일으켰다.(3) '성령의 능력으로'(엔 뒤나메이 프뉴마 토스). 이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가) 본절의 결론적인 어구로서 사도의 사역이 성령의 능력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했음을 나타내 준다. (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구원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도에게 주신 능력이다. 따라서 이 어구는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신 것 외에는'이란 구절과 연결된다.
(다) 사도를 충만케 한 거룩한 능력이다). (라) 사도의 복음 전파를 열매맺게 한 실질적인 능력이다. 이를 종합해 보건대 '성령의 능력'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순종케 하기 위해서 사도를 통해 나타내신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을 가능하게 한 장본인임을 알 수 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복음 전파의 열매가 맺혀질 수 없다. 거룩한 성령께서 모든 방편들을 들어 도구로 쓰실 때 하나님 나라의 열매가 있을 것이니 모든 사역자들은 능력의 근원인 성령을 의지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 바울은 여기서 곡언법을 사용하고 있으니, 곡언법은 어떤 문장을 강조할 때에 이중의 부정사를 사용하여 훨씬 더 강한 긍정을 이끌어 낼 때에 사용하는 어법이다. 본문에서는 '우 가르 톨메소'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와 '우 카테이르가사토''역사하신 것 외에는'는 썼다. 이 문장을 직역하면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지 않는 것은 어느 하나라도 말하지 않겠다',
즉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한 것만을 말하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절의 의미는 '나는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순종케 하기 위해서 나를 통해 말과 일, 표적과 기사의 일을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