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충분했던’ 말씀… “강의 끝나면 짜장면 먹으러 가세”
- 문화일보 2026년 9월 1일 ~ 2일
■ 그립습니다 - 다운(茶雲) 정진권(1935~2019) 수필가
한국체육대 등에서 후학을 기르며 수필을 쓰신 다운(茶雲) 정진권 선생님과 함께 한 시간을 떠올려본다. 선생님과는 소천하시기 몇 년 전부터 한 달에 한두 번 만났다. 내가 한 감리단에 속해 있었는데, 사무실 캐비닛에는 이름도 생소하고 맛도 알 수 없는 다국적 위스키가 다양하게 늘 비치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를 보듬고 다운 선생님을 만나러 다녔다.
다운 선생님은 취기가 들면, “매원(梅園), 덕계(德溪) 선생과 함께 수필계에서 미꾸라지 3인방이었는데, 이젠 혼자만 남았다”고 허전해하시며 그분들과 있었던 문학계의 아름다운 추억을 들려주셨다. ‘문학이란 책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쌓이는 추억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어지는 정’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2019년 2월 어느 날, 다운 선생님께서 서재를 정리하겠다며 댁으로 오라고 부르셨다. 책 몇십 권만 곁에 두고 나머지는 도서관으로 옮겨갔으면 하셔서 수백 권의 책을 내가 근무하는 도서관에 기증하였다. 책을 옮기고 나니 서재가 허전해 보였다.
며칠 뒤 작은 책장을 마련해 고서적 공간으로 꾸몄다. 선생님은 매우 기뻐하시며 “쇠고기 먹으러 가자”고 하셨다. 나는 선생님의 명수필 <짜장면>을 생각하며 “짜장면이 먹고 싶다”고 했다. 선생님은 “그러는 게 아니다. 쇠고기로 대접하겠다”고 하셨지만, 나는 선생님 내외분과 함께 짜장면을 맛있게 먹었다.
그날 짜장면은 내게 특별한 음식으로 남아있다. 음식 맛 때문만은 아니다. 사제가 한 그릇 짜장면을 나누며 웃고 이야기하던 그 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사람은 마지막인 줄 모르고 평범한 하루를 살아간다. 지나고 나서야 그날 한 마디, 한 번의 악수가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깨닫는다.
짜장면을 먹을 때였다. 5월에 <피천득 문학 새로 읽기>가 흥사단 강당에서 있을 예정인데 한 시간 정도 강의를 부탁하며 정정호 회장 뜻이라고 했다. 선생님은 “늙은이가 무엇을 잘하겠느냐? 젊은 사람이 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내 고집도 황소고집이어서 결국 승낙을 받았다. 계좌번호를 여쭈니 스승에 관련한 강의를 하는데 어떻게 강사료를 받을 수 있겠냐며 사양하셨다. 계좌로 보내는 일도 사무총장 임무 중 하나라고 했다.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그럼, 강의 끝나면 짜장면 먹으러 가세.”
나는 그 말씀이 오래 남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선생님은 이미 짜장면 한 그릇에 담긴 정을 알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값비싼 음식도 아니었다. 강의를 마치고 허기를 달래며 마주 앉아 먹는 짜장면 한 그릇이면 충분했다. 문학도 그런 것이 아닐까. 어려운 이론이나 화려한 수사보다 결국 사람 마음에 오래 남는 것은 사람의 체온이 담긴 한마디와 한 장면인지도 모른다.
2019년 5월 9일, 흥사단 3층 대강당이 좁았다. 방청객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사회는 제물포고등학교 제자인 정정호 회장이 맡았다. 고교 시절 은사이니 두 분은 기쁨이 충만했을 터. 이런 사제 관계를 소개할 때 회원들은 힘찬 박수로 화답했다.
다운 선생님은 충청도 두메산골에서 상경해 서울대 다닐 때 자칭 시골뜨기가 그 유명한 금아 피천득 교수에게서 배운 학창 시절을 회상하며 반세기도 지난 옛이야기를 마치 엊그제같이 생생하고 흥미롭게 들려주셨다.
또 문교부 편수관 시절 금아 선생 수필을 교과서에 싣게 된 사연과 금아 선생이 편수관 실을 찾아 사제 간에 나눈 도타운 정을 설명할 때면 ‘훌륭한 스승에게는 훌륭한 제자가 있기 마련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그 강의가 다운 선생님 이승에서의 마지막 강의였고, 명강의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강의를 마친 뒤 ‘짜장면’을 생각했다. 강의가 끝났으니 함께 짜장면을 먹으러 가야 했다. 그러나 마무리를 해야 했고 선생님은 다른 분들과 동행하고 나는 동참하지 못해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며칠 뒤 소천하셨기 때문이다.
금아 피천득 선생이 1977년 제1회 현대수필문학상을 받고, 그 받은 상금을 기증하여 현대수필문학상 신인상을 제정했다는 것도, 제2회 때는 일석(一石) 이희승 박사가 대상을 받고 다운 선생님이 제1회 신인상을 받았다는 사연도 그 마지막 강의와 함께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피천득 문학 새로 읽기>를 성황리에 마치고 며칠 뒤였다. 그날 일을 정리하며 미흡했던 부분은 가을에 있을 <피천득 다시 읽기>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다운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 짜장면 사 주겠다고 하신 약속을 지키려고 하는구나.’ 생각하며 반갑게 받았는데 사모님 목소리였다.
“선생님 지금 대학병원 응급실에 계세요.”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한걸음에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은 덜컹덜컹, 내 마음은 콩닥콩닥했다. 땀을 훔치며 서울대병원 응급실에 들어섰다.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못 하신 채 생사 언덕을 넘나들고 계셨다. 그토록 수필을 사랑하셨던 분이 마지막 순간에는 자갈밭을 맨발로 걷는 듯한 고통 속에 계셨다. 자강불식(自强不息) 하시던 선생님은 나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피안(彼岸)으로 떠나셨다. 그날은 7월 3일 선생님 생신날이었다. 짜장면 사 주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홀연히 떠나신 것이다.
나는 사흘간 장례식장에 머물면서 문상객을 맞이하며 연합뉴스 K 기자와 선생님 생애에 관련한 인터뷰까지 하면서 이승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했다. 그런데도 자꾸만 “강의 끝나면 짜장면 먹으러 가세.” 하시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세미나 때 <그리운 금아 선생님>을 주제로 강의하시던 모습을 영상으로 찍었다. 선생님은 다른 분 강의 때도 경청하시며 열심히 메모하셨다. 그런 모습이 존경스럽고 아름다워 사진을 여러 장 찍었는데 그 모습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이야.
장례식을 마치고 마지막 강의 모습과 기타 자료를 유족에게 보냈다. 며칠 뒤 장남에게서 연락이 왔다. 선생님 유고집 《옛 이야기가 있는 에세이》’(범우사·2019)를 출간했다며 감사 편지와 함께 유고집을 전달받았다.
다운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신 뒤에도 가끔 짜장면을 먹는다. 젓가락으로 면을 비빌 때마다 선생님 호(다운茶雲)처럼 다정하신 모습이 떠오른다. 짜장면 한 그릇이 그토록 많은 추억을 불러낼 줄은 예전에는 몰랐다. 검은 춘장 속에 스승의 웃음이 있고, 면발 사이사이에 문학 이야기가 있었다. 지금도 선생님이 그리울 때면 다정스러운 누이처럼 챙겨 주던 담원 수필가를 찾아 나선다. 나는 보리밭길을 지나가도 크게 취한다는 과맥전대취(過麥田大醉)라서 선생님을 만나러 갈 때면 동행하여 나 대신 선생님과 소맥을 대작하며 문학 이야기를 들려주던 문학 동무이다. 요즈음에도 담원을 만나면 명수필 <짜장면>에 나오는 곳과 비슷한 장소를 찾아다니기도 한다. 교수님보다는 선생님으로 부르는 것을 더 좋아하신 다운 정진권 선생님.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묻는다.
“선생님, 강의 끝났습니다. 이제 짜장면 드시러 가시지요.”
그러면 어디선가 선생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래, 가세--.”
그 한 마디면 충분하다. 선생님은 떠나셨지만, 약속은 떠나지 않았다.
- 김진모 금아피천득선생기념사업회 사무총장, 前 문학의 숲 도서관장
* 주) 행간을 뗀 것은 인터넷상에서 눈의 피로를 덜기 위함일 뿐입니다.
첫댓글 폰으로 읽기엔 긴 글 이었지만
귀한글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강의 끝나면 짜장면 먹으러 가세" / 김진모
https://youtu.be/xhJpkHkhXFk?si=19tB0bpDxBGjsq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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