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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福宮의 夜景, 밤하늘에 빛나다(2-2)
(51) 景福宮 兩儀門
王의 居處인 康寧殿 뒤쪽에서 王妃가 居處하는 交泰殿으로 통하는 문으로
‘兩儀’는 陰陽의 調和를 뜻한다.
(52) 景福宮 交泰殿
交泰殿은 王妃의 寢殿으로 中宮 또는 中殿이라고도 했다. 교태전이라는 명칭은 周易의
六十四卦 중 ‘泰’괘에서 따왔으며, 괘의 형상은 위로는 坤이고 아래는 乾이 합쳐진 모양으로
地天泰, 즉 하늘과 땅의 기운이 조화롭게 화합하여 萬物이 生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
*坤(☷): 純陰의 괘, 地支의 괘, 여자의 괘 *乾(☰): 純陽의 괘, 天의 괘, 남자의 괘
교태전 동쪽에 元吉軒, 서쪽에 含弘閣, 동북쪽에 健順閣이 부속건물로 연결되어 있다.
(53) 景福宮 交泰殿 정면
世宗 때에 교태전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明宗 때(1553년) 경복궁의 화재로
소실되어 명종 I0년(1555) 再建하였으나 壬辰倭亂 때 다시 소실되었다. 高宗 6년(1869)에
새로 창건하였으나 昌德宮에 큰 화재로 內殿이 불에 타버리자,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서
재목으로 사용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90년에 重建한 것이다.
(54) 交泰殿 마루
(55) 交泰殿의 처마와 元吉軒 처마의 ‘만남’
(56) 경복궁 健順閣, 교태전 동북쪽의 부속건물
(57) 景福宮 峨嵋山의 굴뚝 -보물 제811호-
경복궁 慶會樓의 연못을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 交泰殿 後苑을 조성하면서 峨嵋山이라고
이름 짓고 그곳에 교태전의 아궁이와 연결된 굴뚝을 세웠다.
*峨眉山(해발 3,092m)은 중국 四川省 崑崙山系 동쪽 끝에 있는 산으로 五臺山∙普陀山∙
九華山과 더불어 중국 四大佛敎聖地의 하나로, 특히 普賢菩薩의 靈場(神靈이나 부처를
모신 神聖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峨嵋 十景과 같은 景勝이 많다고 한다.
(58) 景福宮 峨嵋山의 굴뚝
굴뚝은 붉은색 벽돌을 육각형으로 30∼31단씩 쌓았으며 6모의 각 모서리마다 四君子∙
十長生∙卍字무늬∙鳳凰∙鬼面∙唐草文의 무늬를 새긴 浮彫物을 부착하였다.
(59) 景福宮 欽敬閣 (*欽: 공경할 흠)
世宗 20년(1438) 세종이 蔣英實에게 명하여 天文觀測所로 건립하여 물시계와 계절을
측정하는 玉漏機輪이 설치되고, 天體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渾天儀, 별자리를 관찰하는
渾象 등의 천문관측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60) 경복궁 흠경각 정면
交泰殿 서쪽에 있는 흠경각은 明宗 8년(1553) 경복궁 화재로 소실되어 여러 차례
重建했으며 高宗 때 興宣大院君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 복원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95년에 중건된 것이다.
(61) 景福宮 含元殿
交泰殿 서쪽에 있는 함원전은 世宗 때 佛像을 모셔두고 佛敎儀式과 행사를 열었던 곳으로
이후에는 端宗이 머물렀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燒失되어 高宗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시 지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을 복원하기 위해 移建 되었다가
1995년 제자리에 중건되었다. ‘含元’은 元氣를 간직한다는 뜻이다.
(62) 함원전 뒤뜰의 우물
(63) 景福宮 慶會樓 -국보 제224호-
경복궁 勤政殿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慶會樓는 나라에 慶事가 있거나 外國使臣이 왔을 때
宴會를 베풀던 곳으로 景福宮을 처음 지을 때는 작은 규모였으나 太宗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
(64) 경회루 내부, 동쪽에서 본 모습
(65) 景福宮 慶會樓
壬辰倭亂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아 있었으며, 高宗 4년(1867) 경복궁을 重建하면서
경회루도 중건하였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66) 경복궁 경회루
(67) 경복궁 경회루와 연주하는 서울市立交響樂團
5월 4일(수) 20:00부터 ‘궁중문화축전-경회루 야간 음악회’가 열려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연주하는 클래식 旋律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연못 남쪽 가에서는 많은 聽衆들이 음악을
鑑賞하고 있었다.
나는 ‘聽而不聞’이라 사진만 몇 컷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68) 경회루에서 연주하고 있는 서울시립교향악단
(69) 照明으로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慶會樓
(70) 景福宮 慶會樓,
서울市響의 연주가 끝나고 司會者가 등장했다가 앵콜曲을 연주하는가 싶더니 잠깐 내 귀에
희미하게 들려오는 마지막 小節은 요한 슈트라우스의 ‘라데츠키 行進曲’인 것을
느꼈다(21:10경).
*클래식음악이 내 귀를 잠시나마 울려온 것은 얼마만인가?
고등학교 3학년 때 朴判吉 음악선생님이 휴대용 녹음기로 교실에서 들려주셔서
클래식음악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級友 尹君의 집에서
클래식 음악을 듣기 시작하여 그 후 오랫동안 즐겼으나 聽力이 극도로 저하되어 갖고 있던
音盤 등도 넘겨주고 電蓄도 내 귀와 함께 녹슬고 말았다.
(71) 또 다른 照明을 받고 있는 慶會樓
(72) 景福宮 修正殿 -보물 1760호(2012.03.02 지정)-
勤政殿 서쪽, 慶會樓 연못 앞에 있는 修正殿은 世宗 때 集賢殿으로 사용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高宗 4년(1867) 再建하면서 修正殿이라고 했다.
재건 당시 수정전 주변에는 闕內各司로 약 200칸의 殿閣들과 行閣이 들어서 있었으나
1910년 國權被奪 후 모두 헐렸다. 1894~1896년까지는 조선의 개혁을 주도했던
甲午更張 때에는 軍國機務處로 사용되었다.
(73) 경복궁 수정전
(74) 수정전 정면
(75) 수정전에서 본 勤政殿
(76) 景福宮 勤政殿 서쪽 측면, 추녀와 처마의 曲線이 아름답다.
(77) 근정전, 남서쪽(45도쪽)에서 보이는 또 다른 모습
(78) 景福宮 勤政殿, 경복궁을 나서면서 본 근정전 정면
(79) 興禮門 앞, 여기서도 젊은 聽衆들이 다음 연주를 기다리고 있는가 보다.
(80) 光化門, 현재시간 21:40이다.
(81) 光化門 獬豸像
광화문 양 옆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石物 한 쌍은 ‘해태’라 불리는
해치상(獬豸像)으로 興宣大院君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石工 이세욱의 솜씨로 탄생한 것으로
원래는 광화문 앞 80~90m 지점인 당시의 司憲府 앞(현재 정부종합청사 정문 근처)과
길 건너 맞은편에 있었다.
궁궐 앞에 해치상을 세우는 것은 궁궐을 출입하는 관료들에게 警戒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의미와 是非曲直을 가리는 사법기관인 司憲府를 상징하는 것으로 首長인 大司憲의 흉배에
獬豸文樣이 부착되었다.
*해치는 중국의 堯 임금시대에 세상에 나타났다고 하는 想像의 동물로 <論衡> 是應篇에는
해치가 뿔이 하나밖에 없으며 죄지은 사람을 찾아내는 신통한 재주가 있다고 한다.
(82) 광화문에서 본 光化門廣場
종로구 광화문에서 세종로사거리와 청계광장으로 이어지는 世宗路 중앙에 조성된 광장으로
차량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공간으로 전환하고, 景福宮과 北岳山 등 아름다운 自然景觀을
바라볼 수 있는 공간으로 새롭게 조성하고, 세종로의 옛 모습인 六曹거리 복원을 통한
역사∙문화 체험 공간으로 재 탄생시키기 위하여 2009년 8월 개방되었다.
(83) 四獅子 三層石塔 燈
석가탄신일(음력 4월 8일/양력 05.14)을 앞두고 奉祝行事의 일환으로 사사자 삼층석탑 燈을
4월 20일 點燈하였다.
*求禮 華嚴寺 四獅子 三層石塔 -국보 제35호-
신라 眞興王 5년(544) 緣起祖師가 세운 湖南 제일의 寺刹인 智異山 자락 求禮 華嚴寺에 있는
높이 5.5m의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신라시대의 사자석탑으로는 유일한 작품이며,
慶州 佛國寺 多寶塔(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異形石塔의 쌍벽을 이루는 傑作으로
평가되고 있다.
(84) 大韓民國歷史博物館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19세기 말 開港期부터 현재까지의 대한민국의 行步를 기록한
박물관으로, 2012년 12월 개관한 최초의 국립 近∙現代史博物館이다.
(85) 世宗文化會館
1958년 12월 雩南會館으로 上樑式이 거행되고 1960년 市民會館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972년 화재로 全燒되어 1978년 이 자리에 복합공연장인 世宗文化會館이 개관되었다.
(86) 世宗大王 像
(87) 仰釜日晷 -보물 제845호(국립박물관 소장) 복제품-
世宗 16년(1434) 蔣英實이 만든 해시계 앙부일구는 종로 惠政橋와 宗廟 南街의 石臺 위에
설치하여 한국 최초의 公衆時計 역할을 하였으나 壬辰倭亂 때 유실되었다.
그 뒤 2∼3세기 후인 17~18세기에 제작되어 國立故宮博物館에서 所藏하고 있는 2개의
앙부일구는 제작기법이 장영실의 것과 같다고 한다.
(88) 測雨器와 測雨臺
測雨器는 世宗 23년(1441)에 만들어진 후 여러 차례 다시 만들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憲宗 3년(1837)에 제작된 측우기가 유일하다.
측우기는 蔣英實이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世宗實錄 23년에 의하면 文宗이 世子 때
만들어 宮中에 설치했는데 이를 기려 발명의 날(5월 19일)을 제정하였으며, 이 측우기는
세계최초로 설치되었는데 유럽에서는 1639년 로마에서 B. 가스텔리가 처음으로 측우기로
강우량을 측정하였다고 한다.
최초의 측우기는 전하지 않으며 憲宗 3년(1867)에 만든 錦營 測雨器(보물 제561호)는
기상청이 소장하고 있다.
觀象監 測雨臺(보물 제843호)는 조선시대 측우기를 올려 놓고 降雨量을 측정하던 것으로
지금 남아있는 臺石은 世宗 때의 것으로 서울 매동초등학교 교정에 있던 것을 氣象廳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89) 渾天儀
天體의 運行과 위치를 측정하여 天文時計의 구실을 했던 기구로 璇璣玉衡∙渾儀∙渾儀器라고도
한다. 고대 중국의 宇宙觀이던 渾天說에 기초를 두어 BC 2세기경 중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三國時代 후기에서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文獻에 남아있는 제작기록은 世宗 15년(1433)이 처음이라고 한다.
顯宗 10년(1669) 宋以穎이 만든 渾天儀는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穎: 물 이름 영)
(90) 忠武公 李舜臣將軍像
(91) 서울 高宗 御極 40年 稱慶紀念碑殿
서울 高宗 御極 40年 稱慶紀念碑(사적 제171호)를 보호하는 紀念碑殿이다.
高宗의 登極 40주년과 나이 51세에 耆老所에 들어 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비를 보호하는 碑殿 안에 있다. 기로소는 正二品 이상의 벼슬아치 중에서 70세가 넘은
사람을 우대하기 위하여 太祖 때 설치한 곳으로 왕들이 短命하여 기로소에 들어가는 이가
없어, 肅宗과 英祖 등이 60세를 바라보는 나이라 하여 앞당겨 들어간 것을 본받아 高宗은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51세에 그 의식을 올렸다.
비의 篆額은 당시 皇太子였던 純宗의 글씨로 ‘大韓帝國 大皇帝 寶齡 望六旬 御極四十年
稱慶紀念頌’이라고 썼는데 碑文은 議政 尹容善이 짓고, 陸軍副射(육군부야) 閔丙奭이
글씨를 썼다.
(92) <紀念碑殿> 편액
편액 오른쪽 위에 <叡筆>이라는 글씨가 있는데 叡筆은 王世子가 쓴 글씨를 뜻하는 것으로
역시 純宗이 皇太子일 때 쓴 글씨이다. (*叡: 밝을 예)
*국어사전 등에서는 睿(슬기 예/성인 예)를 써서 ‘睿筆’이라고 했다.
(93) 기념비전 앞 萬歲門
비전의 鐵格子門은 ‘萬歲’라는 글자 모양으로 구성된 쇠문으로 日帝强占期에 日本人이
떼어가 대문으로 사용하던 것을 8∙15광복 후에 찾아와 복원하였다.
(94) <道路元標> 표석 -2010.04.10 사진-
기념비전이 있는 자리가 한국의 中心地點을 표시하는 里程元標가 있다.
(95) <비변사 터(備邊司 址)> 표석, 昌德宮 맞은편 주유소 앞에 있다.
備邊司는 中宗 12년(1517) 外侵에 대비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가 壬辰倭亂 때부터
議政府를 대신하여 國政을 총괄하던 관청이었으며 興宣大院君이 執政하던 高宗 때
폐지되었다. (*창덕궁에 갔다가 헛발질 하면서 19:16에 찍은 사진)
- 끝 -
첫댓글 덕분에 야간 대궐 구경 잘했네요 낮보다 더 멋있네요 지저분한게 안보이니 거기다가 멋진 해설 까지 곁 들이 니 금상첨화 며칠전 중국 관광객 가이드가 교태전을 왕비가교태를 부리는 곳이라고 했다던데 모르면 가만히 넘어가든가 예전생각 이나네요 후라이보이 곽규석 씨가 후라이를 잘 까서 후이보이라고 아는척 하던 어떤 친구나 마찬가지 잘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