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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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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 |||
1940년의 제국주의 일본의 확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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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중화민국 미국 |
일본 제국 | ||
지휘관 | |||
장제스 천청 옌시산 펑위샹 리쭝런 슈에위에 바이총시 펑더화이 조지프 스틸웰 클레어 첸노트 앨버트 웨더마이어 |
히로히토 도조 히데키 고노에 후미마로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마쓰이 이와네 스기야마 하지메 하타 슌로쿠 니시오 도시조 오카무라 야스지 우메즈 요시지로 | ||
병력 | |||
중화민국 560만 미국 700대 이상 항공기 |
일본 제국 320만 | ||
피해 상황 | |||
군인 322만 민간인 1,753만 |
군인 190만(전사자 48만 포함) |
중일 전쟁(中日戰爭)은 1937년 7월 7일 일본 제국의 중국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이다. 중국에서는 중국 항일 전쟁(중국어 간체: 中国抗日战争, 정체: 中國抗日戰爭, 병음: Zhōngguó Kàngrì Zhànzhēng), 일본에서는 일중 전쟁(일본어:
1931년 이후로 두 나라 사이에 간헐적으로 교전이 있었으나, 전면전은 1937년 이후로 시작되었으며, 일본의 항복과 함께 1945년에 종료되었다. 전쟁은 수십 년간 계속되어 온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의 결과였으며, 이는 원료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을 정치·군사적으로 지배하려는 것이었다. 동시에, 중국의 민족주의와 민족자결주의의 대두가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1937년 이전에는 양쪽이 소규모, 지역적, 다양한 이유로 전투를 벌였다. 1931년에 일본이 만주 사변을 일으켰고, 그 연장에서 일어난 1937년의 루거우차오 사건(盧溝橋事件)으로 두 나라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의 기간에는 중국이 단독으로 일본에 맞섰으나, 진주만 공격 후의 중일 전쟁은 더 큰 규모의 제2차 세계 대전에 포함되었다. 이후 일본군의 전력은 급속히 쇠퇴했고, 1944년즈음에 일본군은 '대륙타통작전'을 개시하면서 반격을 꾀했으나, 실효를 거두지못하고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중일전쟁 역시 종결되었다.
목차 |
[편집] 배경
[편집] 일본의 상황
일본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많은 이득을 얻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구 독일제국령의 태평양 식민지들을 접수하고, 아시아의 독보적 강대국으로 인식되면서 급부상하게 되는데, 이무렵 일본제국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로 경제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1920년대말에 경제 대공황을 맞게 되면서 경제적 불황으로 인해 극우 군부세력들이 암살 및 쿠테타를 일으키게 되었고, 일본의 민간 의회 정부는 전복되었다. 이어 일본제국은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식민지를 더욱 확보하고자 침략전쟁의 길을 걷게된다. 자원이 풍부한 만주지역을 얻기위해 전쟁할 구실을 잡기위해 만주군벌 장작림 폭사 사건등을 조작하였고, 만주침략에 반대하였던 이누카이 츠요시 수상을 암살하는데 이어 1931년 선전 포고도 없이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그리고 만주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한 일본제국은 괴뢰국가 만주국을 수립하게 된다. 이어, 경제대공황을 극복하고자 '일-만 블록경제'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지만, 성과가 없었다.
한편, 국제연맹은 '만주를 불법침략, 점령한 일본제국의 만주지역 철수'를 결의하자, 일본제국은 1933년에 국제 연맹에서 탈퇴하였다.
[편집] 중국의 상황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중국 대륙에서는 격동의 시대였다. 중국에서는 사회질서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한 반면에, 여러 각지역은 여러 군벌세력들이 득세를 하였고 군벌세력들은 온갖 갖은 수탈과 함께 열강세력에 빌붙는등 매국행위들을 해왔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후, '산둥지방의 독일제국의 이권을 일본제국에게 양도한다.'는 파리 강화 회의의 내용이 알려지자, 1919년 베이징 지역에 학생들이 중심으로 결집, 대규모의 '반군벌', '반제국주의'성향의 운동이 일어났다.(이를 5.4 운동이라 한다.)
1919년 5.4 운동이후, 중국에서는 민족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광둥지방의 국민당과 공산당이 창당되었고, 1924년 여러 지역에 널리 퍼진 군벌을 타도하기 위해 '국민 혁명','제1차 국공합작'을 전개하였다.
국민당의 당수 손문이 사망한 이후, 장개석이 국민당 당수가 되어 손문의 정신을 이어받아 북벌운동을 전개하여 추진하였다. 장개석의 북벌운동은 북양군벌세력들을 몰아내고 사실상 중국을 장악하게 되었으나, 이내 곧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일본제국의 침략이 본격화와 되어가면서 장개석은 중국공산당을 몰아내는데 차질이 생기게 되어 지방 여러세력 군벌들과 연계를 하게 된다.
[편집] 만주사변
중국에 대한 일본의 21개조 요구안에 대해 중국은 그 조약의 폐기또는 무효를 주장하고, 국권 회복 운동을 펼쳐 나갔다. 특히 만주에서는 일본의 후원을 받았던 봉천파 군벌 장작림이 친일적 성향을 보이다가 1928년 일본군에 의해 열차안에서 폭사당하고, 그 후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은 반일 운동측으로 돌아서게 된다. 장학량은 국민당의 장개석과 손을 잡는데, 이때 일본 제국은 대륙에서 완전한 식민지를 얻는 한편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해 다른 대륙 정책의 근거지로 삼기위해 만주 지배를 계획한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의 관동군은 봉천 교외 유조구에서 남만주 철도를 폭파해놓고, 이것을 '중국군의 행동'이라 몰아붙히고, 이를 구실삼아 만주를 침략한다. 이어 1932년 2월에는 만주 전역을 거의 점령한다. 이듬해, 일본 제국은 과거 청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수반으로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운다. 그렇게 됨에 따라, 만주가 일본의 자원 공급지이자 경제시장, 군사 기지 역할 등을 하게 되면서 일본인들은 만주로 적극적으로 침략하게된다.[2]
[편집] 국공내전
- 이 부분의 본문은 국공내전#반공산당 토벌전입니다.
1924년, 군벌과 열강세력들을 내몰자는 목표로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하고 제1차 국공합작을 함으로써 북벌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28년 국민당 장개석이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면서 국공합작은 완전 결렬되었고, 이후 국민당은 공산당 토벌전을 펼쳤다.
[편집] 중국 공산당 장정
- 이 부분의 본문은 장정입니다.
1931년 난창 지역에 중국 공산당 임시정부가 수립된 직후부터 공산당의 세력이 넓혀지는것을 우려한 국민당은 무려 5번이나 공산당 지구를 포위하고 토벌전을 펼쳐나아갓다. 제1회 토벌은 1930년, 2회와 3회는 1931년, 4회는 1932년 6월에 이루어졌으나 모두 국민당의 참패로 끝났다. 그러던중 1933년 10월에 100여만명의 국민당 군대가 제5회 토벌을 시작했다. 여기서 공산군은 패전에 직면하게 되고, 1934년 10월에 10만여명의 공산군은 강서성으로 후퇴하며 서쪽으로 장정을 시작했다. 오랜기간동안 국민당 군대의 공격을 피하면서 무려 9600km라는 장정 끝에 1935년 10월에 섬서성 옌안에 다다르게 된다. 여기서 살아남은 공산군은 약 2만여 명뿐이었다.
[편집] 시안사건
- 이 부분의 본문은 시안사건입니다.
1936년 12월 12일 중국 섬서성 중부의 도시 시안에 머물고 있던 장개석이 갑자기 장학량에 의해 체포, 감금되었다. 당시 장개석은 중국 공산당에 대해 제6회 토벌을 위해 이들 군대를 대규모로 동원했었다. 그러나, 이들 양군은 중국 공산당의 영향을 받아 '내전중지, 항일'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켜 장개석을 인질로 체포했다. 한편, 중국 공산당은 반(反)장개석을 주장하는 내부세력들을 억누르고 국민당에서는 친일 반공파를 억누름으로써 장학량과 장개석 사이에 타협이 성립되고, 장개석은 25일 난징으로 돌아왔다. 시안사건을 계기로 제2차 국공합작, 항일전선에 기반이 된다.[3]
[편집] 경과
[편집] 루거우차오 사건
- 이 부분의 본문은 루거우차오 사건입니다.
1937년 7월 7일, 베이징 서쪽에 있는 펑타이에서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중국군사이에서 루거우차오(노구교)에서 무력충돌했다. 여기에서 일본군 현장 지휘부는 독단으로 "중국군이 일본 병사를 납치해갔다!"는 주장을 펼치며 중국군에게 공격을 가하는데, 이러한 지시를 내린자는 무다구치 렌야였다.
전투는 처음에 국지에 제한된 전투였고, 서둘러 제안한 교섭으로 양측은 협정을 맺고, 이 사건을 덮어두기로 결정하여 사태를 되돌려놨지만, 전쟁발발의 구실을 찾던 일본군 상층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7월 28일, 본격적인 중국 침략전쟁을 개시했다. 일본은 공격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뒷날 일본군에 의한 조작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4]
[편집] 국공 합작
- 이 부분의 본문은 제2차 국공 합작입니다.
중일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 정부 휘하의 변구(邊區)정부로 격하되고 1937년 8월 중국 공산군의 홍군(紅軍)이 국민 혁명군 제 8로군으로 개칭, 국민당 정부 군대로 합류하였다.[5] 다음달 9월 23일에는 제2차 국공 합작이 성립되어 항일전쟁 체제를 정비한다. 그러나, 제2차 국공합작은 머지않아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균열은 차츰 커져가면서 이들은 서로 다투면서도 각자 항일전쟁을 계속하게 된다. 국민당 정부군은 정면전장으로 지구전 형식으로 전개하였고, 공산군은 유격전을 벌이면서 적후방의 전장으로 나뉘어 치러졌다.[6]
[편집] 미국과 소련의 중국지원
[편집] 미국의 지원
미 의회는 피트만 법을 통과시켰고, 이 법을 통해서 중국의 은을 미국의 금과 바꾸는 것을 허용했다. 이에 따라 중국 국민당은 이법을 통하여 필요한 군수물자를 살 수 잇는 화폐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난징대학살이후 1940년 일본제국이 인도차이나반도에 침략하고, 나치 독일-이탈리아와 추축국 동맹을 맺자, 미국의회에서 대일수출을 금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이에 곤란해진 일본제국은 제재를 가한 미국, 영국, 네덜란드와 중화민국을 묶어 'ABCD 포위망'이라고 가칭하며 일종의 배후처럼 선전해댔으며, 이후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어 이들 국가들과 맞서게 된다.[7]
[편집] 소련의 지원
일본군이 화북지방을 침략하자, 중국과 소련사이에 협상이 급히 시작되었다. 협상 결과 200대가 넘는 항공기와 화포, T-26전차등 다른물자들이 소련으로부터 원조되기로 결정되었다. 또한 훈련된 의용 파일럿들도 극비리에 중일전쟁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 극비리에 소련이 원조한 작전을 제트작전이라 부르는데, 이와 동시에 중국과 소련간에 상호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다.
[편집] 전쟁 초기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을 빌미로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근대화된 산업력에 바탕을 둔 잘 훈련된 30만 여명 이상의 정규군과 일본군 장교에 의해 지휘되는 만주국출신 만주인 및 몽골인 부대 15만 여명 이상, 그리고 약 200만 명에 가까운 예비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당시 세계 3위의 막강한 해군력과 육군및 해군 항공대가 이를 지원하고 있엇다.
반면, 중국 국민당은 숫적으로는 약 400만 여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으나, 현대식 무장을 제대로 갖춘 부대는 약 10만 여명 이상인 장개석의 직속부대뿐이었다. 나머지 군대는 지방 군벌들 세력을 주축이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부패하고 무능했으며 변변한 장비조차 갖추지도 못하였다. 더구나 외부로부터의 원조로 보급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던 국민당군은 변변한 해군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항공력 역시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했었다. 7월과 8월에는 베이징, 톈진등 손쉽게 점령하는 등 일본군은 기세등등하였다. 그리고 곧이어 8월에는 중국 최대 항구 도시인 상하이를 상륙작전하여 공략하기 시작한다.
이와 동시에 9월부터는 일본군이 화북지방에서 남진을 개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철도를 따라 3갈래로 뻗은 이 진격은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과 주로 야간에 통신망과 보급로를 차단하는 게릴라등의 활동으로 11월에 이르자, 지지부진한 상태에 빠지고 만다.
[편집] 상하이 전투 & 삼광 작전
- 이 부분의 본문은 상하이 전투입니다.
전쟁초기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 수뇌부들은 '2~3개월정도면 중국대륙 전역을 점령해 끝낼수있을거같다.'라고 호언장담했었다.
그리고, 8월에 상하이를 상륙하여 공략에 들어갔는데, 상하이에서의 중국군 저항은 예상외로 격렬했다. 특히 '오송 상륙 전투'에서 일본군은 매우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는 1930년대에 중국내 독일 군사고문으로 파견된 팔켄하우젠 장군과 젝트 장군이 강력한 벙커밭을 조성해놓는데 추진하였고, 장개석의 직속군대 역시 독일식 장비를 갖추고 훈련을 독일 군사고문의 조언대로 받으면서 육성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1930년대 독일 군사고문의 조언과 추진으로 설치한 벙커밭을 뚫기위해 돌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또한 독일식으로 훈련받은 장개석의 직속군대의 정예 제 88사단이 일본군의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일본군 상륙부대를 상하이에 묶어놓아, 매우 격렬하게 저항했었다. 그렇게됨으로써 3개월동안의 전투끝에 지원부대에 의해 증강된 일본군은 11월에 겨우 상하이를 점령한다. 상하이 전투에서 전쟁의 범위가 확대되어 장기화 되어가자, 일본군은 적개심이 불타올랐고 무고한 양민들을 잔인하게 죽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일본군은 가는곳마다 태우고, 빼앗고, 죽이는 이른바 '삼광작전'을 개시하면서 살육전이 일반화 되어간다. 1937년 12월, 상하이 교두보를 벗어난 일본군은 예정도 없었던 국민당 정부 수도 난징으로 향한다.[8]
[편집] 난징 대학살
일본군이 난징으로 진격할동안, 중국 국민당 정부는 수도 난징을 버리고 충칭(중경)으로 옮긴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唐生智) 장군은 '결사항전'을 주장했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수도를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난징성을 삼면에서 좁혀들어오는 일본군의 포위속에 국민당 주요관리와 부유층들은 재빨리 손을써서 도시를 빠져나갔고, 중일전쟁 이전에 약 110만명 육박했던 난징은 도시를 빠져나갈려는 시민들과 일본군을 피해 도시로 피난들어오는 피난민등 뒤엉켜 아수라장이었다. 난징성을 포위한 일본군은 중국군 사령관에게 투항하라고 권고 및 경고를 했다. 그러나 난징성을 지키고있던 탕셩즈(唐生智) 사령관 휘하의 15만 명의 중국군은 투항을 끝내 거부했다. 중국군의 당시전략은 도시 밖 요충지를 포기하고 난징성 안에 머물며 고립한 채로 방어하겠다는 전략방식으로 나가려고 했었다.
12월 13일, 일본군은 난징성을 점령하고 난징성 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당시 난징성에 방어하고 있던 국민당 군대 약 15만여 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무참히 무너진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중국군의 흐뜨러진 군기와 지휘관들의 부재 및 무능함에서 비롯되었으며, 여기에 단합이 안 되었던 것에 큰 한몫을 했다. 즉, 중국군은 제대로 전투도 못 해본채로 뒤숭숭한 혼란속에 빠져있기만 했다.
그무렵, 난징성이 함락되기 전날,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唐生智)는 자신의 휘하 중국군부대와 난징성에 고립된 시민들을 뒤로한 채, 양쯔강을 가장 먼저 건너 도망을 쳤다. 여기서 피난 떠나지 못한 채 남아있던 5~60만의 난징 시민들과 중국군인들은 공황상태 속에 빠지게 되고, 1937년 12월 13일부터 4~6주간 일본군은 중국 민간인들 및 중국 군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 방화, 강간등 전쟁범죄를 자행했다.[9]
[편집] 전쟁의 고착화와 전쟁의 확대
[편집] 전쟁의 고착화
1937년~1938년동안 일본군은 중국의 여러 도시들에 대해 무자비한 폭격을 가했고, 중국의 주요 해안가 도시들을 점령하고자 전진에 전진을 거듭했다. 그러나, 일본군 수뇌부들은 전쟁 첫해에 그들이 이뤄내고자 했던 성과에 대해 불만족이었다. 그들은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이 중국내의 내분을 통합하기 전에 장개석의 조직화된 직속부대를 분쇄하고자 했으며, 중일전쟁이 일본경제에 부담을 끼치기 전에 빨리 전쟁이 끝나기를 바랬엇다. 그러나, 일본의 이러한 의도는 중국이 시간을 벌기위해 공간을 포기하는 등 결정적 전투를 회피하는 등 지구전 전략을 나아갔기때문에 전쟁은 점점 장기화 되어갔다.
한편, 중국은 주요 항구도시 상하이와 수도 난징을 잃어버린것이 큰 타격이긴 했으나, 중국군은 아직도 대부분의 항구와 4개의 대외 주요보급로를 장악하고 있엇다. 하이퐁에서 쿤밍간 이어지는 철도와 양곤과 라쉬오를 거쳐 쿤밍에 도달하는 철도 및 도로, 그리고 러시아에 이르는 2개의 도로가 주요 보급로였다.
1938년에 일본군의 주된 목표는 중국군의 주요보급로를 차단하는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첫 번째 목표는 중요한 철도중심지인 쉬저우 시를 점령하는것이었다. 중국군의 저항은 완강했지만, 북쪽으로부터 남하해 온 두갈래의 공격에 의해 일본군은 5월에 이르자, 쉬저우 시를 거의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6월에는 한커우로 통하는 철도를 봉쇄하고자 정저우 시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진격은 중국군이 황하의 제방을 무너뜨려, 주변 지역을 강물로 범람 시켰기 때문에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고, 패배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에도 일본군은 장개석 정부의 수도인 한커우로 공격을 더욱 가열시켜, 8월에는 4만 여명 이상의 병력을 영국령 홍콩으로부터 20마일즈음 북쪽으로 상륙시킴으로써, 광동지역을 쉽사리 점령했다. 이 때문에 한커우는 그 주요 보급로가 차단당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9월에 가서야 장개석은 주요산업시설들을 보다 내륙으로 이전하는 한편, 수도를 충칭으로 옮겼다.
이렇게 되면서 1938년말까지 일본은 중국의 해안 주요도시들을 거의 장악했었으나, 그 지역 내에 아직도 계속적인 난관에 부딪쳤엇다. 각지역마다 게릴라의 활동은 나날이 격화되어가고, 일본의 비 인도적인 행정통치와 점령지 주민들에 대한 갖가지 횡포등으로 주민들의 적개심 또한 깊어만 갔다. 쉽사리 항복할 것으로 생각했던 중국군은 계속 저항을 하고 있엇고, 이와 동시에 미국이 중국 국민당에 더욱더 적극적으로 많은 원조를 제공함으로써 원기를 돋우어 주고 있었다.
2년 만에 신속한 승리를 쟁취하고자 했던 당초의 의도가 좌절된 일본 제국은 1939년에 접어들면서 최소의 군사력으로 전략적 요충지를 점거하는 봉쇄전술로 전환하게 되었다. 즉, 중국의 해안지대를 거의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의 보급로를 봉쇄시키는 '경제적 교살정책'으로 바꾼것이다. 그러나 넓은 대륙을 바탕으로한 중국군과 중국인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전쟁의 양상은 계속지속되어 고착화 되어갔다.[10]
[편집] 전쟁의 확대
[편집] 1940년
1940년 이후 중국대륙은 일본군 점령지구, 충칭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당 정부, 옌안을 중심으로하는 공산당의 섬강녕변구등 3개지역으로 크게 나뉘었다.
전쟁이 고착화되어가면서 계속 시일만 끌어갈 뿐이었다. 그럼에 따라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세력이 점점 커져가고 팔로군도 1940년에는 40만 명으로 불어났고, 신사군이 2만에서 10만으로 급증되었다. 팔로군은 백단전투에서 일본군을 25000여 명을 크게 무찌르는등 성과를 보였다.
[편집] 1941년 ~ 1943년
1941년 10월, 장제스의 국민당군과 마오쩌둥의 공산당계열의 신사군간의 싸움인 환남 사변이 일어나게 된다. 장제스의 명령에 의해 북상하던 신사군의 일부가 국민당군에 의해 기습을 당하게된다. 국민당과 공산당 양군은 7일동안 밤낮으로 전투했고, 이 전투에서 신사군 9천여명이 전사했고 1천여명이 간신히 탈출했다. 이 환남 사변으로 공산군은 커다란 충격을 맞게 된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제국 연합 함대가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 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게 됨으로써 제2차세계대전은 아시아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일본, 나치독일, 이탈리아왕국에 선전포고 선언을 하였다. 이렇게 됨으로써 국민당 정부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장제스의 직속부대들을 버마전선으로 파견하여 영국군과 공동작전을 전개해나아갔었다.
이어서 미국은 조지프 스틸웰을 군사고문관으로 중국으로 파견하여 버마-인도전선 지휘를 하였고, 미 공군은 중국 전선으로 지원하여 중국 국민당 공군 소속으로 일본군과 싸워 제공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미 공군 의용대대는 플라잉 타이거즈라 불리며, 이들은 연합국이 일본군에 연패하던 태평양 전쟁 초기 몇 개월동안 연합국 부대중에서 유일하게 주목할만한 전과를 올림으로써 연합국의 사기를 크게 올렸다. 이들 플라잉 타이거즈 대대는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해체되었고, 이후 중국대륙내에는 미육군 제 23 전투기 집단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국민당군의 전투력은 형편없었고, 지방 주둔 지역에는 국민당군이 민간인들의 식량이나 재산을 강제로 약탈하는등의 범죄가 들끓었다. 거기다가 국민당군은 강제징집을 위해 시골이나 농촌등 마을에 습격하는일이 잦았는데, 이때문에 마을사람들은 강제징집에 반발하여 '자경단'을 조직하고 국민당군에 대항하는등 민란이 일어나는 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했었다.(대표적인 사례가 1942년 감숙 성지역에 일어난 농민반란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국민당군의 무능함과 부패, 잦은 수탈등 때문에 중일전쟁 전후 훗날 국공내전때 민중들의 민심은 장개석의 국민당이 아닌 모택동의 공산당세력으로 돌아서 지지하는 경우로 이어지게 된다.
내부적으로도 국민당은 크게 흔들렸었다. 산시성 군벌 옌시산은 자신의 얼마 안 남은 영역에 틀어박혀 단독으로 베이핑(오늘날 북경)의 일본군 사령부와 협상을 벌여 평화상태를 유지하려 애썼고, 국민당 임시 수도인 충칭을 중심으로 쓰촨성과 윈난성 지역의 지방 군벌들과 장개석의 알력 다툼은 극심했었다.
[편집] 대륙타통작전
- 이 부분의 본문은 이치고 작전입니다.
1944년 4월, 일본군이 전황을 타개하고자 중국 북부 점령지와 남부 하이난섬 일대의 상륙지점을 연결하는 대륙타통작전 '이치고 작전'을 개시하자, 중국군은 어김없이 대패를 당하는등 중국군은 무려 30만이라는 병력이 희생되었다. 당시, 중국 국민당의 장비조차 제대로 갖추지못한거 뿐만 아니라 전투력도 허술했었으며, 지휘관조차도 부패하고 무능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이 계획한 '이치고 작전'이 성공하게 되면서 중국 국민당 내에는 '붕괴론'위기까지 몰리고 있었다.
[편집] 종전과 영향
[편집] 종전
- 이 부분의 본문은 8월 폭풍 작전,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 일본의 항복입니다.
일본 제국은 태평양 전쟁 초기에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곧이어 미국 해군의 반격으로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 함대의 승리로 전세가 뒤바뀌기 시작하였고, 이어서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군이 기세를 확고히 잡게된다.
미국 공군은 중국 전선에서도 제공권을 잡아, 일본제국 군대와 본토를 폭격하여 강타했다.
1945년이 들어서면서 일본제국의 패배가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8울 6일에는 히로시마에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이어서 소련이 일본제국에 선전포고함으로써 소련은 '8월 폭풍 작전'을 감행했다. 이렇게 됨으로써 8월 15일에 일본제국 히로히토 덴노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 선언함으로써, 태평양 전선의 종전은 물론 중일전쟁도 종전을 맞아 일본제국의 침략전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편집] 종전 후 & 영향
중일전쟁으로 인해 중국대륙 내에서는 주요도시들(해안지역에 주로 위치)은 일본제국 군대에 의해 점령당하고 수많은 중국인들은 희생을 당했으며, 중국대륙에서 정부군이었던 국민당군은 부패하고 비리만 저지르는등 무능할뿐만 아니라 군대편제 조직도 엉망진창이었다. 반면, 공산당은 겉으로는 일본군과 싸우는 척하면서 뒤로는 힘을 비축하면서 민심지지를 얻어갔었다. 중일전쟁 종전 후 평화를 바라던 중국인들의 희망대로 중국을 다시 내전상태로 빠뜨리지 않기 위해 공산당과 국민당 정부간의 회담이 열리는데, 여기서 '쌍십협정'이라는것을 체결한다. 그러나, 국민당 장개석은 이 협정을 무시하고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국공내전이 발발하게 된다. 국공내전이 발발하면서 민심은 국민당의 부패하고 무능한 행태와 중일전쟁때 일제에 부역, 협력한 매국노 한간처벌에 미미했던 국민당 정부의 행동 등에 등을 돌려 공산당편에 붙어 결국 민심의 지지를 얻지못한 국민당은 중일전쟁 이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에게 패하게 되어 타이완으로 쫒겨나게 된다.
중일전쟁은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전쟁이 일어나고, 1941년 태평양에서도 전쟁이 크게 일어난 탓에 중일전쟁은 상대적으로 역사에서 큰 비중을 갖지 못하고 크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본제국이 중국대륙을 침략하지 않았으면 태평양 전쟁은 아예 발발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을것이다. 그랬다면 이후 동아시아 역사는 매우 크게 전환이 되었기 때문에 아시아권에서는 매우 중요한 전쟁 중 하나이다. 때문에 오늘날에는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 침공하였던 일을 기준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구분짓는 유럽 중심 역사관에서 벗어나, 중일전쟁을 제2차 세계대전의 진정한 시작으로 보는 역사관이 늘고 있다.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주석
- ↑ Bix, Herbert P. 〈The Showa Emperor's 'Monologue' and the Problem of War Responsibility〉, 《Journal of Japanese Studies》, Vol.18, No.2. (1992 여름), 295~363쪽.
- ↑ "만주사변"
- ↑ "1937년 제2차 국공합작 성사"
- ↑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
- ↑ <<세계의 역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p111
- ↑ <<세계의 역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p111
- ↑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교재 <<세계전쟁사>> p395
- ↑ 아이리스 장 저술- <<역사는 힘있는자가 쓰는가>> p57
- ↑ 아이리스 장 - <<역사는 힘있는자가 쓰는가>> (영문제목:The Rape of Nanking)
- ↑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교재 <<세계전쟁사>> p394
[편집] 참고자료 및 참고문헌
- Chang, Flora and Ming, Chu-cheng. (July 12, 2005). Rewriters of history ignore truth. Taipei Times, pg. 8.
- Gordon, David M. "The China-Japan War, 1931–1945" Journal of Military History (Jan 2006) v 70#1, pp 137–82. Historiographical overview of major books from the 1970s through 2006 (for paid subscribers only).
- Jung Chang and Jon Halliday, Mao: The Unknown Story (London, 2005); Jonathan Cape, ISBN 0-679-42271-4
- Annalee Jacoby and Theodore H. White, Thunder out of China, New York: William Sloane Associates, 1946
- 從大歷史的角度讀蔣介石日記 Chiang Kai-shek Diary from a Macro History Perspective
- Author : Ray Huang
- Press : China Times Publishing Company
- Date published : 1994-1-31
- ISBN 957-13-0962-1
- 中国抗日战争正面战场作战记 China's Anti-Japanese War Combat Operations
- Author : Guo Rugui, editor-in-chief Huang Yuzhang
- Press : Jiangsu People's Publishing House
- Date published : 2005-7-1
- ISBN 7214030349
- On line in Chinese: 中国抗战正向战场作战记
[편집] 외부 링크
- World War II Newspaper Archives - War in China, 1937-1945
- Annals of the Flying Tigers
- 틀:Zh icon/틀:En icon KangZhan.org - Gallery and history of the Sino-Japanese war
- Japanese soldiers in the Sino-Japanese war, 1937-1938 (Japanese)
- History and Commercial Atlas of China, Harvard University Press 1935, by Albert Herrmann, Ph.D. See bottom of the list for 1930s maps.
- Perry-Castañeda Library Map Collection, China 1:250,000, Series L500, U.S. Army Map Service, 1954- . Topographic Maps of China during the Second World War.
- Perry-Castañeda Library Map Collection Manchuria 1:250,000, Series L542, U.S. Army Map Service, 1950- . Topographic Maps of Manchuria during the Second World War.
- Joint Study of the Sino-Japanese War, Harvard University. Multi-year project seeks to expand research by promoting cooperation among scholars and institutions in China, Japan, the United States, and other nations. Includes extensive bibliograph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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