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경모재(敬慕齋)
1) 경모재의 연혁
여수시 율촌면 봉두리에 있다. 이 재각은 임진왜란 때 상주영장(尙州營將)을 제수 받은 휘 대경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묘각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종제 수사공과 더불어 적진, 옥포, 웅치, 상주전에 참전해서 공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 상주영장을 제수 받았다.
후손과 봉두와의 인연은 임란 전후에 이루어진다. 율촌면지(1998년 발행)에는 영장공이 "영장으로 재직 중 전사하자 부인 전주 최씨가 아들 효징(孝徵)을 데리고 난리를 피해 이곳에 와서 아들이 성장, 김명운의 딸과 혼인하면서 이루어졌다"고 적고 있다.
후손들은 입향조의 제사를 모실 재각이 없는 것을 늘 안타까워했다. 여러 해 논의를 거듭해 오다 드디어 1927년(丁卯) 재각신축에 착수, 이듬해인 1928년(戊辰) 3월 10일 제실과 학습장을 겸한 강당 등 9칸의 묘각을 준공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는 영장공 이하 27세까지 제향을 모시고 있다.
2) 경모재묘각기(敬慕齋墓閣記)(편제록p.197)
한(漢)나라 때부터 원묘(原廟)의 의관을 한 달에 한 번씩 출유(出遊)한 의식이 있으니 분묘(墳墓)의 예가 중한지라 당(唐)나라 송(宋)나라에 이르러 사대부가에서 다투어 서로 본받으니 한식에 상묘(上墓)의 의식이 있으며 10월에 한해 한번 제사가 있었다. 또한 이증(貤贈)에 분향의 고유가 있으니 그 경건함이 진실로 이와 같은 것이다.
지금의 여수는 옛날의 백제의 해읍(海邑)이다. 북쪽으로 이사(二舍)거리가 못되는 곳에 앵무산(鸚鵡山)이 있고 산 아래 동쪽을 봉두리(鳳頭里)라 하니 수령(遂寧)위씨의 세장산(世葬山)이다. 봉만(峰巒)이 기려(綺麗)하고 풍수(風水)가 유호(攸好)하나 그러나 천간지비(天慳地秘)하여 천백년(千百年)이 지냈으되 계벽(啓闢)한 사람이 없었는데 위씨가 관산(冠山)으로부터 옮겨와서 살면서 고향(故鄕)이 되었다.
그 묘의 벌 앞에 옛날에 큰 남수(柟樹)가 있었는데 풍우로 넘어져 나무꾼들이 그 지엽을 다 처가고 오직 밑 둥이 중대하여 움직이기 어려우므로 도끼나 낫이 침범하지 못한지 수개성상(數個星霜)이 되었다. 그런데 문득 누워있는 나무가 스스로 일어나 도로 서서 다시 살아나 가지가 무성함을 보였는데 재목이 된지 이제 63년이 지날 만큼 오래됐다.
사람들이 이로써 위씨가 부흥할 것이라 하였다한다. 왕년에 위씨 제현인 태량(台良)과 정량(政良)과 계중(啓仲)과 재량(載良)과 석근(錫瑾)과 계현(啓玹)씨 등이 종족을 소집하여 탄식하기를 묘정에 집이 없으니 장차 일을 치를 때에 재숙할 곳이 없어 일이 진실로 어려움이 많으니 다만 성심의 부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첨령(瞻聆)에도 부끄러우니 아! 우리들이 비록 유풍치는 못하나 오히려 집에서 살고 있는데 차마 이곳 선조들의 잔들인 곳에 예모(禮貌)를 이루지 못했으니 가한 것이랴.
하물며 이제 운수의 변화가 많은 세상을 만나 인륜의 질서가 캄캄하여 꽉 막혔으니 오늘날에 의범을 수시하여 후손들에게 이어주지 아니하며 어느 곳에서 법을 취하리오. 재각의 역사는 부득불 빨리해야 할 것이라 하고 이에 재와를 모으고 목수를 감독하여 정묘년(丁卯) 10월에 시작하여 무진년(戊辰) 3월에 끝마치니 첨우(簷宇)가 휘비(翬飛)하고 함영(檻楹)이 산뜻하며 정돈되어 검소하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되 사치에 흐르지 아니하여 간가(間架)의 규제(規制)가 모두 그 마땅함을 얻었다.
이제부터는 여기서 치제(致齋)하여 경모(敬慕)의 성의를 다하고 이곳에서 음산(飮酸)하여 그 존비(尊卑)의 위치를 차례하며 물러가 한 당에서 돈친(敦親)의 의를 강하여 즐거워하고 화기로워 조선을 곁에 모신 듯하니 모두가 엄숙하고 공경하며 화기가 애연(藹然)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위씨의 흥성(興盛)함이 그치지 않았음을 알게 하니 아름답지 아니하랴.
제도인즉 장수(藏修)의 규모를 자손들을 모아 성현의 글을 강학하고 틈 있는 날에는 친구를 초집(招集)하여 풍월을 읊기도 하고 설화(雪花)를 제목으로 글을 짓기도 하여 가만히 여러 어진이 들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는 뜻을 취할 것이다. 희(噫)라! 난리 통에 백성이 병든지라 사람들이 살 길을 찾기에 겨를이 없는데 이제 위씨가 고도(古道)를 독행(篤行)하여 태평낙사를 하니 어찌 사람마다 가히 얻을 바 리오. 그 일을 아름답게 여겨 기록하노라. 을해년(乙亥) 화재(火災)로 익년 병자년(丙子)에 중건하였다.
세무진국추절(歲戊辰菊秋節)
奎章閣學士 청우(聽雨) 민경호(閔京鎬) 기(記)
여수 경모재에 대한 역사와 기록이네요. 너무나 좋은 글입니다. 정독하겠습니다.
조상님들의 옛발자취와 역사공부를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