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에 오른 자캐오 -
☆ 2013년 다해 11월19일 (녹)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청주] 은총의 그릇을 준비하라.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2마카 6, 18 - 31
† 복음 : 루카 19, 1 - 10
★ 이스라엘이 종교적 박해를 받던 시대에 엘아자르라는 율법 학자는
온갖 협박과 타협을 이겨 내고 율법을 지킨다. 그리고 끝내 죽어
가면서도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을 드러낸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예리코에서 자캐오를 부르신다. 키가 작아서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가 당신을 보고자 했던 그에게 다가가시어 그의
집에 묵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지난 11월 3일 연중 제31주일의 복음 말씀과 같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자캐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간 것은 서민들을 밟고
높은 자리에 올라갔음을 상징한다고 묵상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내려오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제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은 또 다른
차원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자캐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간 이유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나무 위로 올라가는 그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는 비웃음을 살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선을 뒤로하고 기꺼이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그만큼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지극한 정성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그리하여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에 모시게 되었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하기에 이릅니다.
어느 영화의 제목이기도 했던 ‘줄탁동시’(茁琢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알 속의 병아리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오고자 안에서 아직
단단하지도 않은 부리로 껍질을 쪼아 대는 것을 ‘줄’(茁 빠는 소리 줄)
이라 하고, 이때 어미 닭이 그 신호를 알아차리고 바깥에서 부리로
쪼아 깨뜨리는 것을 ‘탁’(啄: 쫄 탁)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줄탁동시’
란 줄과 탁이 동시에 일어나야 한 생명이 온전히 탄생한다는
뜻입니다. 자캐오의 간절함과 예수님의 자비하심이 서로 만나 새로운
삶이 탄생하였으니, 오늘 복음은 ‘줄탁동시’를 잘 드러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간절히 찾는다면 우리에게서도
‘줄탁동시’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은총의 그릇을 준비하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11월19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루카 19,1-10
은총의 그릇을 준비하라.
사람은 각기 자기 위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그에 맞는 처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접은 크게 받기를 원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기의
것을 포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잘 대해주기를 바라며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어떤 생물도 살지 못하고 주위에는 나무도 새소리도 없습니다.
사해는 물이 흘러 나가는 강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들인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썩어버렸습니다. 반면에 갈릴래아
호수는 요르단 강에서 물을 받아들인 만큼 사해로 흘려보내기
때문에 언제나 생명이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을 모르면 결국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세관장이라는 위신과
체면을 포기하고 나무에 올랐습니다. 주님을 뵙고자 하는 갈망
때문입니다. 갈망이 큰 만큼 키가 작다는 장애를 극복해야만 했고,
따라서 나무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달려가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의 정성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카19,5). 하시며 그를 기억해 주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캐오가
세리였기 때문에 그를 죄인 취급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을
찾아주시고 품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처신을 보고
못마땅해 하였지만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9-10).
만약 자캐오가 부자라는 것에 대한 자만이 있었더라면, 세관장이라는
위치를 고집했더라면 그 위신과 체면 때문에 나무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후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돈에 눈멀었던 그였지만 가난한 이를
위해 재산의 반을 내놓을 마음이 생겼고, 혹시라도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라도 갚아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치룰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아무리 풍요하더라도 인간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가 나무에 오르지 않더라도 자캐오를
부르실 수 있으시지만 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10)고 하신대로 모든 이를 구원에로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모두가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선물이지만 주님 때문에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이에게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자캐오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나무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주님과의 깊은 입맞춤으로 삶의 쇄신을 이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1티모1,15)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자신이 원하는 결과만을 쫓는 행복이 아닌
제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은 마당이 있는 주택에 살았습니다.
지금이야 마당도 있어서 좋겠다고 말하겠지만, 당시에는 그러한
주택에 사는 것이 그리 좋지가 않았습니다. 빌라나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의 집에 가면 참 따뜻한데, 주택인 우리 집은 너무나 추웠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겨울에 눈을 치우는 것 역시 저의 불편함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또한 집 안에 화장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당에 있는 수세식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것도 주택에
사는 것이 싫은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이밖에 여러 가지의 불편함 때문에 아파트에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에 드디어 아파트로 이사를 갔습니다.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이런 천국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기쁨도 그리 오래가지 않더군요. 아파트가 많은 편리함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주택에 비해 너무 좁아서 저만의 공간이 많이 줄어든 것입니다.
하긴 30평 되는 아파트만 살면 행복하겠다는 사람이 막상 그러한
아파트에 살게 되면 그 순간부터 40평 이상의 아파트를 꿈꾼다고
하지요. 즉, 아파트와 자동차는 줄여서 못 간다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행복해질까요? 어떤 결과에 도달해야 행복해진다는 것은 맞는
답이 아닙니다. 자신이 세운 하나의 조건을 충족시키면 또 다른
행복이 조건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 결과로서의 행복은
결코 우리를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과정 안에서 느끼는
행복은 아주 작은 것에서도 쉽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혹시 어렸을
때 친구들과 식사 때를 놓쳐가면서까지 놀았던 기억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친구랑 신나게 야구도 하고, 전쟁놀이
등을 하다보면 배고픈 줄도 모르고 또 날이 어두워진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신나게 놀았었습니다. 그 순간 너무나도 재미있고
행복했기 때문이지요. 바로 과정 안에서 어떤 일에 몰두할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까요? 결과로서의 행복
아니면 과정 안에서의 행복? 당연히 없어질 결과로서의 행복이
아닌, 지금 이 순간 집중할 과정 안에서의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쫓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결과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병의 치유, 배고픔의 해결, 로마
지배에서의 해방 등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쫓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관장이었던 자캐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로지 예수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요.
그래서 다 큰 어른이 체면불구하고 돌무화과 나무에 오를 정도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 예수님 보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보는 기쁨을 넘어서 자기 집에 모시는
커다란 영광도 얻게 되었습니다.
자캐오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체면 때문에 나무 위에 오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 오르는 것은 쉬울까요?
자캐오처럼 나를 드러내려는 체면을 버리지 못한다면 하늘나라에는
절대로 오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방법을 동원할 수 있는
집중이 있어야 하늘나라에도 오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만을 쫓는 행복이 아닌, 결과를 위한 과정
안에 집중하는 행복을 가질 수 있는 참으로 현명한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이문재).
이 세상에 하나뿐인 귀한 당신을 하늘나라로 초대하십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구일까요?
1) 부패한 정치인과 결탁한 적이 있으며 점성술로 결정을 내리고,
두 명의 부인이 있으며 매일 줄담배를 피우고, 하루에 9~10병의
마티니를 마신다.
2) 회사에서 두 번 쫓겨난 적이 있으며 정오까지 잠을 자고, 대학 때
마약을 복용했고, 매일 한 번씩 위스키 4분의 1병을 마신다.
3) 전쟁 영웅으로 채식만 하고 담배도 안 피고 필요할 때만 맥주를
조금 마실 뿐이다. 불륜을 저지른 적이 없으며 죽을 때까지 단 한
명의 애인만 사귀었습니다.
이 세 명의 정치인 중에서 한 명에게 투표권을 행사해야 한다면 어떤
정치인을 선택하겠습니까? 당연히 3번이겠지요. 1번과 2번을 뽑기란
도덕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번이
바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고, 2번은 영국의 처칠 수상입니다.
그리고 가장 올바른 모습을 보였던 3번은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참 모습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옛 어른들이 항상 힘주어 말씀하셨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던 자캐오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아주 차가웠습니다.
그를 타락한 죄인의 본보기로 생각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가 보여준
겸손과 주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결국 모든 이들이 그토록 원하는
구원으로 연결됩니다.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지금 이 순간 얼마나 집중하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 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연중 33주간 화요일
2013년 다해 11월19일
신학교에는 큰 느티나무 같은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도 계셨으니 30년 이상 계시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있는
것만으로도 큰 가르침이 되고, 계시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시는
분들입니다. 이제는 몸은 늙으셨지만 마음은 여전히 저에게 큰
스승이십니다. 원로 신부님들께서 늘 건강하신 모습으로 신학교에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깨버린 불법일지 모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고,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참된 행복을 느꼈고, 신분과 계급의 벽에 막혀서 답답하던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앞에 모든 이가 한 형제요 자매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라면 몸이 아픈 병자들도, 장애인으로 태어나
멸시를 받았던 사람들도, 죄인이라 손가락질을 받던 사람들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축복임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아픈 것도, 장애인이 된 것도, 멸시를 받던 것도, 죄인처럼 살아야
했던 것도 모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기 위한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삶이
파격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것 자체가 파격입니다. 왼 뺨을 때리면 오른 뺨을 내어주라는
말, 친구가 오리를 가자면 십리까지도 가주라는 말,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는 말,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말은 바로 파격입니다.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은 이해 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교회를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을
생각합니다. 교회는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지 생각합니다. 지금 아프고, 굶주리고, 가난 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교회와 신앙인들은 바로 예수님을 친구로,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는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신앙인들이 이기심과 욕심 때문에 지금 가난한 이들, 굶주린
이들, 병든 이들을 외면하고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무늬만 교회요, 겉모습만 신자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 이상 더 명확한 말도
없습니다.
전례력으로 우리는 한 해를 마감하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하기 때문에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걸어온 올 한해를 돌아 볼 수는 있습니다. 나의 발자국이 누구와
함께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가난 한이, 병든 이, 굶주린 이와
함께한 발자국이었다면 그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한 삶이었고, 그 길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아시나요?
2013년 다해 11월19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아시나요?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하느님 편에서 생각한다면 무엇때문일까요?
구원받을 만한 사람들을 구하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셨을 테지요.
그러니 예수님은 자신의 육화이유를 그대로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편에서 예수님 오심을 풀이하지는 않습니까?
나에게 복을 주시어 세상에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잘 살기위해라고요.
그것은 어려운 고통 없이 행복하게 살다가 천당에 잘 가게 해주신다고요.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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