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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제1판 서문*
칼 마르크스/ 김영민 옮김
지금 제1권을 독자 앞에 내놓는 이 저작은 1859년에 간행된 나의 저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속편이다. 첫 부분과 속편 사이에 오랜 중단기가 있었던 것은 몇 해에 걸친 병치레로 말미암아 여러 차례 작업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나온 저서의 내용은 이 제1권의 제1장에 요약해 놓았다. 이렇게 한 것은 맥락을 잇고 완결성을 갖추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서술의 측면에서 개선되었다. 이전에는 그저 암시만 했었을 뿐인 많은 내용들을 여기서는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더욱 상세히 개진하였고, 거꾸로 상세히 개진되었던 것들을 이 책에서는 그저 암시만 한 경우도 있다. 가치이론 및 화폐이론의 역사에 관한 절들이 이번에 완전히 생략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이전의 저작을 읽어 본 독자는 제1장의 주註에서 이 이론의 역사에 관한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할 것이다.
시작이 어렵다는 것은 어떤 학문에서나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1장 특히 상품 분석을 포함하고 있는 절이 가장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더욱 상세하게 말한다면, 나는 가치 실체와 가치크기에 관해 될 수 있는 대로 평이하게 분석을 하고자 했다. 화폐형태에서 그 완성된 모습을 갖는 가치형태는 무척이나 내용이 없고 단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정신은 2천 년 이상이나 그것을 해명해 내고자 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훨씬 내용이 풍부하고 복잡한 형태들을 분석하는 데에 적어도 어느 정도는 성공하였다. 왜 그러한가? 다 자란 신체는 그 신체의 세포들보다 연구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더구나 갖가지 경제형태에 대한 분석에서는 현미경이나 화학적 시약은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추상력이 이것들을 대신해야만 한다. 그런데 부르조아 사회에서는 노동생산물의 상품형태 또는 상품의 가치형태가 그 경제적 세포형태이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형태들에 대한 분석이 사소한 것에 주의를 돌리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거기에서는 확실히 사소한 것들을 문제삼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는 마치 미시적인 해부에서 사소한 것들을 다루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가치형태에 관한 절을 제외하고서는 이 저서가 어렵다는 비난을 받을 이유가 없다. 물론 나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또 그럼으로써 스스로 사고하고자 하는 독자를 상정하는 것이다.
자연과정을 관찰한 때에 물리학자는 가장 내용이 충실한 형태에서, 그리고 교란적인 영향으로 말미암은 불순화가 가장 적은 상태에서 관찰하거나, 과정의 순수한 진행을 보증하는 조건들 아래에서 실험을 한다. 이 저서에서 내가 연구해야 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및 그 양식에 상응하는 생산제관계와 교역제관계이다. 그것들이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오늘날의 영국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이론적 전개의 중요한 예증으로서 영국이 이용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독일의 독자들이 영국의 농업노동자와 공업노동자들의 상태에 대해 바리새인처럼 어깨를 으쓱하거나 독일에서는 사태가 그렇게 악화되어 있지 않다고 낙관적으로 안심한다면,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어야만 한다. “바로 당신 자신의 이야기요!”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연법칙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적대관계의 발전 정도의 높고 낮음이 그 자체로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법칙 자체, 곧 철의 필연성을 갖고 작용하며 자신을 관철해 가는 그 경향이 문제이다. 선진산업국은 후진국에게 그 자신의 미래상을 보여 줄 뿐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제쳐두기로 하자. 우리 나라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을 완전히 받아들인 곳, ‘예를 들어 본래적인 공장’에서의 상황은 영국보다 훨씬 더 열악하다. 왜냐하면 공장법이라는 균형추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우리는 그밖의 서유럽 대륙 전체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뿐만 아니라 그 발전의 결여 때문에 숱한 고통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근대적인 곤경뿐 아니라 예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일련의 수두룩한 곤경들이 시대착오적인 사회, 정치적 관계를 수반하는 낡아빠진 생산양식의 잔존으로부터 발생하여 우리들을 압박하고 있다. 우리는 산 것뿐 아니라 죽은 것으로부터도 고통을 받고 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사로잡는다!
영국의 사회통계와 비교해 볼 때, 독일과 그밖의 서유럽 대륙의 사회통계는 매우 빈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회통계는 ‘메두사의 대가리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가리고 있던 베일을 벗기기에 충분하다. 만약 영국에서처럼 우리 정부와 의회가 경제 사정에 관한 정기적 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이 위원회가 진실을 조사하도록 영국에서와 같은 권력을 부여해 주고, 이 목적을 위해 ‘영국의 공장 감독관’이나 ‘공중위생’에 대한 의무보고자 또는 부녀자와 소년에 대한 착취와 주택 및 영양 상태에 대한 조사위원들처럼 전문가적이고 비당파적이며 엄정한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상태에 대해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리라. 페르세우스(메두사를 처치한 영웅)는 괴물을 잡기 위해서 몸이 안 보이게 하는 모자를 사용했다. 그런데 우리는 괴물의 존재를 부인할 수 있기 위해서 그 모자로 눈과 귀를 틀어막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만해서는 안 된다. 18세기에 미국의 독립전쟁은 유럽의 노동자계급에게 경종을 울렸다. 영국에서의 변혁과정은 손에 잡힐듯이 뚜렷하다. 그것이 일정한 고도에 이르면 대륙에도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 틀림없다. 대륙에서 그것은 노동자계급 자체의 발전 정도에 따라 보다 잔인한 형태로 진행되든지 또는 보다 인간적인 형태로 진행될 것이다. 따라서 보다 숭고한 동기는 제쳐두고라도, 오늘날의 지배계급은 ----바로 자기 자신의 이해관게에 따라----노동자계급의 발달을 방해하는 장애 가운데 법률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제거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이 저서에서 그렇게 많은 부분을 영국의 공장입법의 역사와 그 내용 및 성과에 할애했다. 한 국가는 다른 국가로부터 배워야 하고 또 배울 수 있다. 한 사회가 그 운동의 자연법칙을 발견하였다 하더라도----근대 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밝혀내는 것이 이 저작의 궁극 목표이다----그 사회는 자연적인 발전단계들을 뛰어넘을 수도 없고 그것을 법령으로 제거할 수도 없다. 다만 그 산고産苦를 단축하고 완화할 수는 있다.
만일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마디 언급하고자 한다. 나는 자본가와 토지 소유자를 결코 장미빛으로 묘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람들이 문제되는 것은 오로지 그들이 갖가지 경제적 범주들의 인격화인 경우에 한해서이며, 특정한 계급관계 및 이해의 담지자인 경우에 한해서이다.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발전을 하나의자연사적 과정으로 파악하는 나의 입장은, 각 개인이 스스로 주관적으로는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여길지라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그 피조물에 머물러 있는 바의 그모든 관계들에 대한 각 개인의 책임을 다른 어떤 입장보다도 적게 묻는다.
정치경제학의 영역에서의 자유로운 과학적 탐구가 다른 모든 영역에서 만나게 되는 그러한 점들만을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경제학이 취급하는 소재의 독특한 본성은 자유로운 과학적 연구에 대항하여 인간의 가슴에 가장 격렬하고 가장 편협하며 가장 악의에 찬 감정 곧 사적 이해라는 복수의 여신을 싸움터에 불러낸다. 예를 들면 영국 국교회는 그 화폐 수입의 1/39에 대한 공격을 용서하느니 차라리 39개조 신조 가운데 38개조에 대한 공격을 용서한다. 오늘날에는 무신론조차 전래의 소유관계에 대한 비판에 견주면 가벼운 죄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어떤 진보가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보기를 들면 나는 요즈음 지난 몇 주일 동안에 공표된 청서靑書 [산업문제 및 노동조합에 관한 각국 재외 사절 통신]을 지적하고자 한다. 영국 국왕의 재외 대표들은 노골적으로 독일이나 프랑스, 간단히 말해서 유럽 대륙의 모든 문명국가에서도 영국에서와 같이 자본과 노동의 현존관계의 변화가 감지되며, 또 그것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와 함께 대서양 건너편에서는 미국의 부통령 웨이드도 공식 자리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된 뒤로 자본 및 토지 소유관계의 변환이 일정에 올랐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시대의 징후이어서 자포紫袍(군주의 의복)나 흑의黑衣(승려의 법의)로도 가릴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징후들이 내일 당장 기적이 일어나리라는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현재의 사회가 결코 고정적인 결정체가 아니라, 변화될 수 있고 또 끊임없는 변화과정에 있는 유기체라는 예감이 지배계급에서도 어렴풋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저작의 제2권은 자본의 유통과정과 총과정의 여러 형태들(제3권)을, 마지막 제3권은 학설사를 취급할 것이다.
과학적 비판에 따른 판단이라면 어떠한 것이든지 환영하는 바이다. 내가 한번도 양보해 본 적이 없는 이른바 여론이라는 것이 지니는 편견에 대해서는 저 위대한 플로렌스인(단테를 말한다)의 모토가 나에게도 변함없이 타당하다.
“너의 길을 걸어라, 사람들로 하여금 말하게 내버려 두어라!”
1867년 7월 25일 런던에서
제2판 후기
제1판의 독자들에 대해서 나는 먼저 제2판에서 있었던 수정들에 관해 보고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구분 방식이 한층 보기 쉽게 되었다는 것이 당장 눈에 띄는 점이다. 추가로 수록된 주에는 빠짐없이 제2판의 주임을 밝혀 놓았다. 분문 자체를 변경한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제1장 제1절에서는 다양한 교환가치를 표현하는 제등식을 분석함으로써 과학적으로 한층 엄밀하게 가치의 문제를 유도했으며, 또 제1판에서는 암시에만 그쳤던 가치실체와 사회적 필요 노동시간에 따른 가치크기의 규정 사이의 관련에 대해 명백히 서술하였다. 제1장 제3절 [가치형태]는 모두 고쳐 썼는데, 이것은 이미 제1판의 이중적 서술에 의해 요구되었던 바이다. 내친 김에 말하자면, 그 이중적 서술은 하노버에 있는 나의 친구 쿠겔만 박사의 권고에 따랐다. 1867년 봄에 나는 그를 방문하여 그곳에 있었는데, 함부르크로부터 최초의 교정쇄가 도착했다. 그는 대부분의 독자를 위해서는 가치형태에 대한 보충적이고 보다 강의에 가까운 분석이 필요하다고 나를 설득하였다. ----제1장의 마지막 절인 [상품의 물신적 성격]은 대부분을 고쳐 썼다. 제3장 제1절 [가치의 척도]는 면밀히 수정하였는데, 그것은 이 절이 제1판에서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베를린, 1859년)를 참조할 것을 요구하면서 소홀히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제7장 특히 제2절은 무척 많이 수정하였다.
흔히 문체의 수정에 지나지 않는 부분적 본문 수정을 하나하나 다 거론하기란 쓸데없는 짓일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책 전체에 나타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파리에서 분책으로 출판될 프랑스어판을 교정하면서, 나는 독일어 원본의 상당 부분 가운데 어떤 곳에서는 더욱더 철저한 수정이 요구되고 있으며 또다른 곳에서는 문체상의 보다 폭넓은 수정과 한층 면밀한 몇몇 오류에 대한 제거가 필요하다는것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시간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 책이 품절되어 1872년 1월에는 제2판의 인쇄에 착수해야 한다는 보고를 받은 것은 다른 일로 바빴을 때인 1871년 가을에 이르러서였기 때문이다.
{자본}에 대한 이해가 독일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 넓은 범위에 걸쳐 급속히 진전되고 있다는 사실은 나의 노동에 대한 최상의 댓가이다. 경제적으로는 부르조아적 관점에 서 있는 비인의 공장주 마이어 씨는 보불전쟁 중에 출간된 어느 소책자에서, 독일인의 유산이라고도 할 만한 저 위대한 이론적 감각이 독일의 이른바 교양계급에서 완전히 소멸한 반면에 독일 노동자 계급 속에서 새로이 부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절하게 서술하였다.
정치경제학은 독일에서는 아직까지도 여전히 외래 학문이다. 구스타프 폰 귈리히는 {상업, 공업 등의 역사적 서술}, 특히 1830년에 출간된 자신의 저작의 처음 2권에서 우리(독일)에게 있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과 그에 따른 근대적 시민사회의 건설을 저해하는 온갖 역사적 상황들의 대부분을 이미 상론한 바 있다. 곧 독일에서는 정치경제학을 배양시킬 토양이 결여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치경제학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완성품으로서 수입되었으며, 독일의 정치경제학 교수는 여전히 배우는 입장에 있었다. 외국 현실의 이론적 표현은 그들의 손바닥 안에서 하나의 교의집敎義集으로 전화하였고, 그들에 의해 그들을 둘러싼 쁘띠 부르조아적 세계의식으로 해석되었으며 결국 곡해되었다. 그들은 문헌사적 학식으로 치장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이른바 재정학----청운의 꿈을 품은 독일 관료 후보자가 빌어 온 그 연옥의 불처럼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 지식들의 혼합물----에서 빌어 온 낯선 자료들을 혼합함으로써,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었던 학문적 무력감과 실제로는 낯선 영역에서 교수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불안한 양심을 은폐하려 하였다.
1848년 이후 독일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급속히 발달하였으며 오늘날에는 눈부실 정도로 번영하고 있다. 그러나 운명은 여전히 우리 전문가들의 편이 아니었다. 그들이 편견을 가지지 않고 정치경제학을 연구할 수 있었던 당시의 독일에는 현실적으로 근대적 경제관계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이러한 경제관계들이 실현되자 그에대한 편견없는 연구는 곧 부르조아적 시야의 내부에서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정치경제학이 부르조아적인 한 ‘곧 자본주의적 질서를, 사회적 생산이역사적으로 지나가는 발전단계가 아니라 그 반대로 사회적 생산의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형태라고 이해하는 한’, 정치경제학이 과학일 수 있는 것은 오직 계급투쟁이 잠재적인 상태에 있거나 또는 고립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동안 뿐이다.
영국의 예를 들어 보자. 영국의 고전경제학은 계급투쟁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 나타났다. 고전경제학의 최후의 위대한 대표자인 리카아도는 마침내 의식적으로 계급적 이해의 대립 ‘곧 이윤과 임금 그리고 이윤과 지대 사이의 대립’을 자기연구의 도약점으로 삼았지만, 그는 소박하게도 그것을 사회적 자연법칙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리함에 따라 부르조아 경제학은 극복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하였다. 리카아도가 아직 생존하고 있을 당시에 그에 반대하여 부르조아 경제학에 대한 비판이 시스몽디라는 인물에 의해 제기되었다.
뒤이은 1820~1830년대 영국에서는 정치경제학 영역에서의 학문적 활기가 그 특징을 이루고 있다. 이때는 리카아도 이론의 속류화와 보급의 시기인 동시에 리카아도이론과 낡은학파 사이의 투쟁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화려한 시합이 벌어졌다. 당시 일어난 일들은, 논쟁이 대부분 잡지의 논문이나 시사적 저술 및 소책자 속에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럽 대륙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 논쟁의 편견없는 성격은----리카아도 이론이 이미 예외적으로 부르조아 경제에 대한 공격 무기로써 그 역할을 맡았지만----당시의 시대 상황으로부터 설명된다. 한편 대공업은 이제 겨우 유년기를 벗어났을 뿐이며, 이는 1825년의 공황과 함께 비로소 대공업이 그 근대적 생활의 주기적 순환을 개시하였다는 사실로써 증명된다. 다른 한편 자본과 노동 사이의 계급투쟁은, 정치적으로는 신성동맹 주위에 모여든 여러 정부 및 제후와 부르조아 계급의 지도를 받는 민중 사이의 투쟁에 의해, 경제적으로는 산업자본과 귀족적 토지소유 사이의 불화----프랑스에서는 분할지 소유와 대토지 소유의 대립의 배후에 숨겨져 있었고, 영국에서는 곡물법 이후 공개적으로 폭발한 불화----에 의해 배후로 밀려나 있었다. 이 당시 영국의 경제학적 문헌들은 케네 박사 사후 프랑스의 경제학적 질풍노도의 시대를 연상시키지만 이는 마치 늦가을의 따스한 날이 봄을 상기시키는 것과 같은 것일 뿐이었다. 1830년에 이르자 결정적인 위기가 시작되었다.
부르조아 계급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이미 정치권력을 획득하였다. 그 이후로 계급투쟁은 실천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점점 더 명확하고 위협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 계급투쟁이 과학적 부르조아 경제학의 조종을 울렸다. 이제는 이 정리가 옳으냐 저 정리가 옳으냐가 문제가 아니라, 자본에게 유익한가, 편리한가, 정치적으로 위험한가, 어떤가가 문제였다. 사심없는 연구 대신 돈벌이 논쟁이 등장하였으며, 편견없는 과학적 연구 대신 비양심적이고 분순한 의도의 변론이 등장하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공장주 콥덴 및 브라이트가 주도했던 곡물법 반대동맹이 세간에 내놓은 뻔뻔스러운 소책자조차, 토지 소유 귀족에 대한 논쟁을 통하여 과학적 흥미는 아니라 하더라도 역사적 흥미를 어느 정도 제공하였다. 그러나 로버트 필 이래의 자유무역 입법이 속류 경제학으로부터 이 최후의 자극마저 빼앗아가 버렸다.
1848년 대륙의 혁명은 영국에도 반작용을 미쳤다. 여전히 과학적 의의를 요구하며 지배계급의 단순한 궤변가나 추종자 이상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제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온갖 요구들과 자본의 경제학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존 스튜어트 밀을 대표하는 얼빠진 절충주의가 발생하였다. 러시아의 대학자이며 평론가인 체르니셰프스키가 이미 그의 저서 {밀에 의한 경제학 개요}에서 훌륭하게 밝혀낸 바와 같이 이것은 ‘부르조아 경제학의 파산선고’이다.
이리하여 프랑스와 영국에서 이미 역사적 투쟁을 통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절대적 성격이 치열하게 나타난 뒤에야 독일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성숙하였는데, 그때 이미 독일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독일 부르조아 계급보다도 훨씬 더 명확한 이론적인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부르조아 경제학이 성립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던 바로 그때, 곧 그것은 다시 불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 아래 부르조아 경제학의 대변자들은 두 계열로 분열되었다. 교활하고 욕심 많으며 실리적인 한쪽은 속류 경제학 옹호론의 가장 천박하고 따라서 가장 성공적인 대변자인 바스티아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고, 자기네 학문의 교수적 품격을 과시하려는 다른 한쪽은 존 스튜어트 밀을 추종하여 조화시킬 수 없는 것을 조화시키려고 하였다. 부르조아 경제학의 고전적 시대와 마찬가지로 그 몰락의 시대에도 독일인은 여전히 단순한 학생, 모방자, 추종자, 외국 도매상인의 소매상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 사회의 독특한 역사적 발전은 이곳에서 ‘부르조아’ 경제학의 어떠한 독창적인 연구도 불가능하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한 비판까지 불가능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무릇 이러한 비판이 어떤 계급을 대표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변혁과 계급의 최종적 철폐를 역사적 사명으로 하는 계급, 곧 프롤레타리아 계급만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이다.
독일 부르조아 계급의 박식하고도 무식한 대변자들은 그들이 나의 이전 저작들에 대해서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는 이 {자본}을 묵살하려고 하였다. 이 전술이 더 이상 시류에 적합하지 않게 되자, 그들은 나의 저서를 비판한다는 미명 아래 “부르조아 의식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처방전을 썼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자 신문에서----예를 들면 {폴크스슈타트}에 실린 요제프 디츠겐의 논문을 보라----그들보다도 뛰어난 투사들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이들에게 답변을 해야 할 빚을 지고 있다.
{자본}의 우수한 러시아어 판이 1872년 봄 페테르스부르그에서 발간되었다. 3천 부나 되는 이 판은 현재 거의 품절되고 없다. 키에프 대학의 경제학 교수인 지베르 씨는 1871년에 이미 자신의 저서 {가치 및 자본 등에 관한 리아카도의 이론}에서 가치, 화폐 및 자본 등에 관한 나의 이론이 근본에서 스미드와 리카아도 학설의 필연적 발전이라고 논증하였다. 그의 뛰어난 저서가 서유럽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까닭은 시종일관 순수하게 이론적 입장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에 적용된 방법은 그에 대한 상호 모순된 이해에서 이미 증명된 바와 같이, 거의 이해되고 있지 않다.
보기를 들면 파리의 {실증주의자 평론}은 한편에서는 경제학을 형이상학적으로 취급하였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미래의 대중식당을 위한 요리법(꽁트류의?)을 쓰지 않고 사실에 관한 단순한 비판적 분석에만 국한하였다고 나를 비난하고 있다. 형이상학적이라는 비난에 대하여 지베르 교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본래 이론이 문제가 되는 한, 마르크스의 방법은 영국학파 전체의 연역적 방법이며, 이 방법의 결함과 장점은 가장 우수한 이론경제학자들에게도 공통된 것이다.”
또 블로크 씨는----독일의 사회주의 이론가들, {이코노미스트}지 1872년 7월 및 8월호의 발췌]에서----나의 방법이 분석적이라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특히 이렇게 말하였다.
“이 저서에 의해 마르크스는 가장 우수한 분석가의 부류에 들어간다.”
물론 독일의 평론가들은 ‘헤겔적 궤변’이라고 떠들고 있다. 페테르스부르그의 {유럽의 사도}지는 오로지 {자본}의 방법만을 취급한 어느 눈문에서(1872년 5월호, 427-436쪽) 나의 연구 방법이 엄밀히 실재론적이나 그 서술방법은 불행히도 독일 변증법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있다. 동지는 말한다.
“서술의 외적 형태에 따라서 판단한다면 마르크스는 최대의 관념철학자이며, 그것은 이미 이 말의 독일적 의미 곧 좋지 못한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경제학적 비판을 전문으로 하는 그의 모든 선배들에 견주어 볼 때 더 실재론자Realist이다. ....그를 결코 관념론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
나는 이 필자(카우프만)에 대하여 그 자신의 비판으로부터 약간의 발췌를 하는 것 이상으로 답변할 수 없지만, 이 발췌는 러시아어 판 원문을 입수할 수 없는 다수의독자들에게는 흥미가 있을 것이다.
이 필자는 내가 내 방법의 유물론적 기초를 논한 {경제학 비판}의 서문(베를린, 1859년, 4-7쪽)을 인용한 뒤에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에게는 오직 하나만이 중요한데, 그것은 그가 연구하고 있는 모든 현대상의 법칙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이 완성된 하나의 형태를 가지며 주어진 역사적 시기에서 고찰된 상호관련 속에 있는 한, 그에게는 이러한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들 현상들의 변화나 발전의 법칙, 곧 한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 관련의 한 질서로부터 관련의 다른 질서로의 이행의 법칙이다. 일단 이 법칙을 발견하면, 그는 이 법칙이 사회생활에서 나타내는 결과들을 상세히 연구한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오직 하나만을 위해 노력하는데, 그것은 곧 정확한 과학적 연구를 통해 갖가지 사회적 관계들의 일정한 질서의 필연성을 논증하는 일과 그에게 출발점 및 중간 거점이 되는 사실들을 될 수 있는 대로 완벽하게 확정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현재의 질서의 필연성을 논증함과 아울러 인간이 그것을 믿든 말든, 또 그것을 의식하든 하지 않든 이 질서가 불가피하게 이행할 수밖에 없는 다른 질서의 필연성을 논증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운동을 하나의 자연사적 과정으로 여기고 이 과정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의식 및 의도로부터 독립적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인간의 의욕이나 의식 및 의도를 규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만일 의식적 요소가 문화사에서 수행하는 역할이 이렇듯 종속적이라고 한다면, 문화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비판이야말로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더 의식의 어떠한 형태 또는 어떠한 결과를 그 기초로서 삼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곧 관념이 아니라 외적 현상들만이 이 비판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 비판은 어떤 사실을 관념이 아니라 다른 사실과 비교, 대조하는 데에만 국한될 것이다. 이 비판에서는 두 개의 사실을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히 연구하는 일과 실제로 한 사실이 다른 사실에 대하여 갖가지 발전 계기를 형성한다는 것만이 중요하다. 그러나 특히 중요한 것은 이들 모든 질서의 계열, 곧 모든 발전단계가 나타나는 연속과결합이 그에 못지 않게 정확히 연구되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경제생활의 일반적 법칙들은 똑같은 것으로서 이것을 현재에 적용하거나 과거에 적용해도 완전히 마찬가지라고 말할 것이다. 이야말로 마르크스가 부정하는 바이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추상적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이와는 반대로 각 역사적 시기는 저마다 독자적인 법칙을 갖고 있다. ...... 생명은 그것이 하나의 주어진 발전시기를 경과하여, 어떤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이행하자마자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다. 간단히 말하면, 경제생활은 우리들에게 생물학의 다른 영역에서의 발전사와 유사한 현상을 제공한다. 과거의 경제학자들은 경제적 법칙들의 본성을 오해하였으므로, 이 법칙을 물리학 및 화학의 법칙들에 비유했다. 온갖 현상들에 대한 보다 깊은 분석은 동식물 유기체들처럼 사회적 유기체들도 서로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똑같은 하나의 현상도 유기체의 전체적인 구조의 차이, 그것들의 각 기관의 편차, 그것들이 기능하는 조건들의 차이 같은 것에 따라서 전혀 다른 법칙 아래에 놓여 있다. 마르크스는 보기를 들어 인구법칙이 모든 시기와 모든 장소에서 똑같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는 이와 반대로 각 발전단계는 그 자체의 인구법칙을 갖고 있다고 단언한다. 생산제력의 발전이 다름에 따라 제관계, 그것들을 규정하는 법칙도 달라진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질서를 이러한 관점에서 연구하고 설명하려는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경제생활에 대한 모든 정밀한 연구가 지녀야 할 목표를 엄밀히 과학적으로 정식화하였을 따름이다. 이러한연구의 과학적 가치는 주어진 하나의 사회적 유기체의 발생, 존재, 발전, 사멸을 규제하고, 또 보다 고도로 발전된 다른 유기체가 그것을 대체하도록 규정하는 특별한 법칙을 해명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사실상 이러한 가치를 마르크스의 저서는 지니고 있다.”
이 필자는 자신이 진정한 나의 방법이라고 불렀던 것을 그렇게도 적절히, 그리고 나 자신이 이 방법을 적용하는 데에 대하여 그렇게도 호의적으로 묘사하였는데, 그가 묘사한 것이 바로 변증법적 방법이 아니고 그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서술 방식은 형식상 연구방식과 구별될 수밖에 없다. 연구는 소재를 자세히 탐구하여 그 상이한 발전형태를 분석하고 그 발전형태의 내적 관련을 찾아 내어야만 한다. 이 일이 완성된 뒤에야 비로소 그에 상응하여 현실적 운동이 서술될 수 있다. 이것이 성공하여 이제 소재의 생명 활동이 관념적으로 반영되면, 마치 선험적 구성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의 변증법적 방법은 근본적으로 헤겔의 그것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이다. 헤겔에게는 그가 ‘이념’이라는 이름 아래 자립적 주체로까지 전화시킨 사유과정이 현실적인 것의 창조자이고 현실적인 것은 다만 그 외적 현상을 이룰 뿐이다. 나에게는 그와 반대로 관념적인 것은 인간의 머리 속에서 전화되고 번역된 물질적인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다.
헤겔 변증법의 신비적 측면에 대해서는 약 30년 전, 그것이 아직 유행하고 있을 당시에 이미 내가 비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내가 {자본}의 제1권을 집필하고 있던 바로 그때, 현재 독일의 지식계급 사이에서 큰소리치고 있는 불쾌하고 불손하며 범속한 아류들이 헤겔을 취급하기를 미치 레싱 시대의 용감한 멘델스존이 스피노자를 취급했듯이, 즉, ‘죽은 개’처럼 취급하면서 득의양양해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저위대한 사상가의 제자라고 공공연히 자인하였으며 가치론에 대한 장 곳곳에서 그의특수한 표현양식에 영합하기까지 하였다. 변증법이 헤겔의 수중에서 신비화되었지만, 이것이 그가 변증볍의 일반적 운동형태를 처음으로 포괄적이고 의식적인 방식으로써 서술하였음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 변증법은 거꾸로 서 있다. 우리가 신비적 외피 안에 있는 합리적 핵심을 발견하려면, 이것을 뒤집어야 한다.
그 신비화된 형태로서의 변증법은 독일에서 유행되었는데, 이는 그것이 현존재를 신성하게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합리적 형태로서의 변증법은 부르조아 계급 및 그 교의의 대변자들에게는 분개할 만한 것이며 공포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의 긍정적 이해 속에서 그것의 부정 ‘곧 필연적 몰락에 대한 이해’도 포함하기 때문이며, 모든 생성된 형태를 운동의 흐름 속 ‘곧 그것의 경과적인 측면’에서 파악하기 때문이다. 또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위압받지 않으며, 그 본질상 비판적이고 혁명적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가득찬 운동은 실제적인 부르조아라면 근대산업이 통과하는 주기적 순환의 국면 전환 속에서 가장 절실히 느끼는 것인데, 이 국면 전환의 절정이 전면적 공황이다. 이 전면적 공황은 아직 예비적 단계에 있지만 다시 진행 중이며, 그 무대의 전면성 및 그 작용의 강렬함을 통해 신성 프로이센 독일제국의 졸부들에게까지도 변증법을 가르칠 것이다.
1873년 1월 24일
런던에서
----편집자 주: 칼 마르크스가 인류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였다면 이 가장 위대한 철학자의 대표적인 저작의 성과는 {자본}({자본론})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록, 그는 정치경제학의 후진국인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영국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그 생산관계를 분석하고, 노동자 계급의 혁명, 즉, 공산주의의 혁명을 이끌어낸 것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웅장한 사상의 혁명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고, 아직도 종교단체가 비록, 그 수익사업----수입과 지출 내역----을 공개하는 것보다는 무신론적 비판을 받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 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상은 영원히 그 영향력을 잃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서문에는 마르크스가 {자본}({자본론})을 쓰게 된 역사적 동기와 그의 사상의 전모가 가장 잘 드러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한국인들은 대부분이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지 않은 사상적 불임의 동물들이지만, 이제부터라도 마르크스의 {자본}(이론과실천)을 구입해서 꼭 정독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