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사인암도〉, 《병진년화첩》, 1796년, 종이에 수묵담채, 26.7×31.6㎝, 삼성미술관 리움. 《병진년화첩》의 두 번째 그림으로 단양 팔경의 하나인 사인암을 그린 것. 다른 그림들에 비해 실제 경치와 차이를 보인다. 한진호(韓鎭㦿, 1792∼?)의 『도담행정기』에는 김홍도가 사인암의 참모습을 담기 위해 고심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최초의 우리말 시조
우탁 선생의 탄로가는 널리 알려진 시조로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시조이다. 구전되어 오다가 100여년이 지난 후 문자화 되었다. 우탁 선생은 안향의 제자이며 퇴계 선생이 百世의 스승이라고 흠모하던 고려말 성리학자이이다.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싣는다.-녹암
(嘆老歌) / 탄로가(우탁(禹倬)
백발가
한손에 막대기 잡고 또 한손에 가시쥐고
늙은길 가시로 막고 오는백발 막대로 치려 하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한 손에 가시 돌고(원문)
한 손에 가시를 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白髮 막대로 치랴터니
白髮이 제 몬져 알고 즈럼길로 오더라
출처: 악학습영 해동가요(일석본)
춘산에 눈녹인 바람
춘산에 눈녹인 바람 문득 불고 간데 없다
잠간만 빌어다가 머리위에 불게하고 싶구나
귀뒤에 해묶은 서리를 녹여볼가 하노라
춘산에 눈 노긴 바람 (원문)
春山에 눈 노긴 바람 건 듯 불고 간 대 업다
져근듯 비러다가 불리고쟈 마리 우희
귀 밋테 해 무근 서리를 노겨 불가 하노라
출처: 악학습영 청구영원(진본)
늙지 않으려고
늙지 않으려고 다시 젊어보려 하였더니
청춘이 날 속이고 백발이 거의로다
이따금 꽃밭을 지날때면 죄지은듯 하여라
늙지 말려이고 (원문)
늙지 말려이고 다시 져머 보려타니
靑春이 날 소기고 白髮이 거의로다
잇다감 곳밧찰 지날 제면 罪 지은 듯하여라
악학습영악부(서울대 본)
* 이 시조는 최초의 우리말 시조로 구전되어 오다가 한글 창제 후 문자로 기록되 었다.
우탁은 1334년 죽었고 한글 반포가 1446년이니 100년이상 구전되어 온 것이다.
지은이 소개
우탁(1263 ~1342): 호 역동(易東), 고려 원종 ~ 충혜왕.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하다 물러나 예안에 돌아가 글을 벗하였다. 뒤에 성균 제주가 되어 성리학을 후진들에게 가르쳤다. 안향의 제자로 주자학에 정통하여 퇴계가 백세(百世)의 스승으로 부르며 역동서원을 건립하여 흠모하였다.
역동 서원은 대원군 때 철폐되었다가 최근 안동대학교내에 복원되었다.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에는 사당이 있다
그는 1308년(忠宣王 즉위) 감찰규정으로 있을 때 충선왕이 충열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밀통하자 흰옷에 도끼를 들고 거적을 메고 대궐에 입궐하여 상소(上疏)하니 신하가 상소문을 펴들고 감히 읽지 못하니 우탁이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경(卿)은 그 죄를 아느냐?"하고 말하니 대신들이 어쩔줄 모르고 말문도 못열고 왕도 부끄러워하는 빛이 있었다고 한다
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예안(지금의 안동부근)에 은거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닦았다.
우탁 선생은 경사에 정통하고 역학(易學)에 깊으니 정주학(程朱學)이 처음 우리 나라에 들어왔으나 이것을 아는 사람이 없자 한달 동안 문을 닫고 연구하여 이를 해득하고 후진을 가르치니 성리학(性理學)이 비로소 행하게 되었다.
이 어려운 성리학을 해득하여 정리하게 되자 중국에 여러 학자들이 중국의 易이 이제는 東으로 가게 되었다하여 후에 사람들이 선생을 역동(易東)선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학 한국사
첫댓글 감사합니다 청해 님!
참고로 밴드에도 예전에 올렸던 자료이네요.
https://band.us/band/55099895/post/1267415960
감사합니다.
'역동'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