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크리스마스”
마태복음 2장 1~12절
크리스마스하면 떠오르는 인물 중에 산타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산타 할아버지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산타 할아버지의 존재가 어린이집 선생님이나 부모님으로 바뀌게 됩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들이 일부러 속아주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제 조카가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데 매형이 선물을 사려고 물어보았습니다. “산타 할아버지에게 무슨 선물을 받고 싶니?” 그런데 조카는 “그걸 아빠가 알아서 뭐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기는 이미 산타 할아버지에게 받을 선물을 마음속으로 정해놓았고, 그 마음을 산타 할아버지가 알고 있을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가족과 친척들이 총동원되어서 조카가 마음 속으로 정한 선물을 알아내기 위해서 노력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조카가 유치원에 간 이후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받을 선물을 미리 매형과 누나에게 알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유치원 동료들하고 이미 정보를 교환한 것이죠. 그리고 일부러 속아주는 척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어린 아이가 있을 때, 어느 순간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해서 부모님과 상의하는 때가 온다면, 그 아이는 이미 산타 할아버지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세 살짜리 제 딸은 산타 할아버지가 매일 아빠인 저에게 전화를 걸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호가 손가락을 하도 빨아서 산타 할아버지가 손가락 빠는 아이는 선물을 안준다고 했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이제 막 세 살이 되어서 생긴 손가락 빠는 버릇이 쉽게 고쳐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매일 산타 할아버지가 전화해서 지호 손가락 빠는지 안빠는지 물어본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지난 주에는 집에 전화하니까 지호의 첫 마디가 ‘아빠, 나 손가락 안빨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지호가 산타 할아버지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는 때가 오겠죠.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일단 징징대거나 손가락을 빨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산타 할아버지를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지호가 손가락 빠는 버릇이 있는데, 이것을 한 살짜리 지윤이가 배웠습니다. 지호는 특정한 한 손가락을 빠는데 지윤이는 모든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빱니다. 저녁에 자다 보면 지호랑 지윤이가 손가락을 쪽쪽 빨면서 음악을 연주합니다. 지호와 지윤이가 손가락을 빨고, 제가 코를 골면 그날 밤은 그야말로 오케스트라 연주가 되는 것입니다. 손가락 빠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지호는 압니다. 그런데 손가락 빨고 싶은 유혹을 가끔 이기지 못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자기가 언니라고 지윤이가 손가락을 빠는 것을 보면 지윤이 손가락을 빼면서 빨지 말라고 혼냅니다. 그런데 자기는 계속 빨고 있습니다. 이런 지호의 모습을 보면서 가끔 내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제가 여기에서 여러분에게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이러한 것은 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어느 순간 제 딸아이 처럼 나도 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가 이야기하는 내용이 자신은 없지만 앞으로 고쳐나갈 것이라고 다짐을 하면서 준비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함께 우리의 잘못된 모습을 바라보고 고쳐나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2장 1절에서 12절까지입니다. 아마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오늘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교회가 많을 것입니다. 아마 오늘 전국, 아니 전 세계의 교회와 성당에서 선택되는 본문은 마태복음 2장의 동방박사 이야기 아니면, 누가복음 2장의 목자들 이야기, 그리고 조금 확대되면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난 누가복음 1장,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난 마태복음 1장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간혹 구약을 좋아하는 분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한 예언서를 가지고 설교 본문을 정할 것입니다. 너무 한정된 본문이지만, 저도 이들 본문 중에서 무엇을 가지고 설교를 할까 고민했습니다. 이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정한 본문이 바로 마태복음 2장 1절부터 12절까지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주보를 펴보았을 때 쉽게 접하는 본문이지만 이 본문이 결정되는 데에는 정말 일주일의 기나긴 고민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오늘 2부 예배에 선택한 본문이 마태복음 2장 1절부터 12절까지인데, 마지막까지 제가 고민했던 본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눈치 빠르신 분은 이미 주보를 펴는 순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8절부터 20절까지입니다. 오늘 오후 찬양예배 본문이죠.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하던 날, 동방 박사들이 찾아와서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바친 이야기입니다. 제가 예전에 있던 교회에서 성경퀴즈대회를 했는데 요즘처럼 도전 골든벨 형식으로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예수께 바친 선물 세 가지를 쓰라고 했는데, 가관이었습니다. 유향이 유황으로 둔갑하기도 했고요, 몰약이 물약으로 변하기도 했고, 어떤 친구는 보약이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동방 박사들에 관한 이야기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가장 널리 활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성탄절 연극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가 바로 동방 박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동방 박사가 몇 명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116장은 세 명의 동방 박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동방 박사가 세 사람이라는 구절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동방 박사의 숫자를 12명으로 주장했습니다. 초기 기독교 예술작품을 보면, 베드로의 무덤에 있는 그림에는 두 명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도미틸라 무덤과 키첼 박물관에는 8명으로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방 박사를 세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아마도 아기 예수께 드린 선물이 세 가지라는 사실에서 세 사람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동방 박사의 이름도 가지각색입니다. 8세기 이후에 접어들면서 유럽의 교회에서는 이들의 이름을 카스팔, 멜키오, 발타자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에디오피아 기독교인들은 호르, 카수단, 바사나테르로 부릅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카그파, 바다닼하리다, 바다딜마로 부릅니다. 시리아의 기독교인들은 라벤다드, 구쉬나사프, 호르미스다스로 부릅니다. 동방박사 중 한 사람인 카스팔은 후에 인도-파시안 왕국을 세웠으며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도마와 만났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주 들으셨던 이야기 중 하나로 예수님이 청년 시절에 인도에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아기 예수 때 만났던 동방 박사들을 만나러 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동방 박사에 대해 독특한 이야기 중의 하나로 중국인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중국 한나라 때 천문가인 류상이라는 사람이 중국인들이 대왕성이라고 부르는 새 별을 발견하고는 황궁을 떠나 2년간 사라진 일이 있는데, 그 2년 동안 실크로드를 따라 베들레헴에 갔다 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의 중국이라는 나라도 일본처럼 역사왜곡의 달인의 경지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밖에 동방 박사에 대한 이야기로 약속시간에 늦게 나타났다가 30년동안 고생했다는 알타반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러한 주변의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지는 이유는 복음서에 있는 동방박사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짧고 간결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전후의 이야기를 궁금해했고, 그러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수집되고, 창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이후의 상황을 보면, 헤롯이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이라는 잔인한 명령 때문에, 예수님의 가족이 이집트로 피난을 갑니다. 이 이야기와 관련된 전설도 있습니다. 이집트로 피난가는 도중에 아기 예수 일행은 강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강도 중의 우두머리가 아기 예수를 보고는 “최고의 축복을 받은 자여 나에게 자비를 베풀 때가 이르면 나를 기억하소서 그리고 이 시간을 잊지 마소서”하고 그대로 보내주었습니다. 먼 훗날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 위에서 두 강도 사이에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한쪽의 강도는 예수님을 욕하고 비방했지만 다른 쪽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하고 간구하였고 예수님은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바로 그 구원받은 강도가 아기 예수를 구해준 강도이며, 그의 이름은 디스마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한 전설은 아기 예수 일행이 헤롯의 병사들을 피해서 한 동굴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그 동굴의 터주대감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대대로 동굴에 살았던 거미 한 마리였습니다. 이 거미는 처음에는 자기의 보금자리를 침범한 아기 예수 일행이 매우 못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의 얼굴을 보고는 이 동굴의 주인으로서 손님들에게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거미가 가진 재주는 거미줄 만드는 것이라 거미는 밤새도록 동굴 입구에 환영의 거미줄을 만들었습니다. 아침에 헤롯이 보낸 군사들이 동굴까지 추격했는데, 동굴 입구에 쳐진 거미줄을 보고서는 이 속에는 아무도 없겠다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오늘날 성탄절 장식에 금빛 은빛 사슬을 두르는 것은 바로 이 거미줄에 얽힌 전설에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전설 이야기를 하면 한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상상력이 풍부한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고 그 당시에 진짜로 있었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마태가 복음서를 쓸 당시에도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들 중에서 마태는 동방 박사의 이야기를 자신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이 동방 박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아기 예수의 탄생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전해주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는 동방 박사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려고 했을까요? 그것을 알기 전에 우리는 크리스마스가 왜 생겨났는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크리스마스가 교회의 명절로 된 것은 교회 역사에서는 예수님 탄생 이후 300년이 훨씬 지난 주후 325년 니케아 회의 이후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생긴 초대교회는 약 3백년동안 크리스마스를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그리스도’라는 말과 ‘마스’라는 말이 합쳐져서 생긴 말입니다. ‘마스’라는 말은 ‘예배’라는 말과 같습니다. 가톨릭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미사’라고 합니다. 이 미사라는 말과 마스라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때’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면서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정신이 드러나야 올바른 크리스마스가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어떤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예배해야 할까요? 그것에 대한 해답이 오늘의 본문 마태복음 2장 1절부터 12절을 통해 제시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태는 참된 크리스마스의 정신, 참된 예배의 정신을 한 가지 단어를 세 번 사용하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떤 단어일까요? 그것은 바로 ‘경배하다’라는 단어입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2장 1절 이하 기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중에서 경배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배한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입니다. 무릎을 왜 꿇을까요? 그것은 존경의 표현입니다. 존경이란 자신은 낮추고 다른 사람은 높이는 행위입니다. 충성스러운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 아이가 어른을 대할 때, 제자가 선생님을 대할 때, 이 존경심이 필요합니다. 존경심이 없는 경배는 있을 수 없습니다. 크리스마스는 바로 이러한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하는 것이 근본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배하다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곳은 2절입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헤롯에게 말합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서 그렇게 멀고도 먼 길을 온 이유는 단 하나, 경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러한 박사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들의 순수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새로 나신 유대인의 왕에게 존경을 표시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하는 일을 일단 제쳐 놓고 먼 거리를 상관하지 않고 찾아왔습니다. 또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 분명히 탄생했다는 확신을 가지고 경배하러 왔습니다. 이들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유대인의 왕이 났을까 궁금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나신 것을 확신하는데, 과연 그 장소가 어디인가를 궁금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의 왕이 나신 것은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또 ‘별을 보고’ 왔다는 것에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 고대 세계에서는 별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데 이들 동방 박사들은 이 별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그 별이 인도해 주는 아기에게 경배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들이 도중에 자신들을 인도하는 별에 집중하지 않고, 마음 속으로 유대인의 왕이라면 왕궁에서 태어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딴 생각을 하는 순간, 그 별이 사라졌고, 박사들은 하는 수 없이 헤롯을 찾아가서 물었다고 합니다.
경배하다는 단어가 두 번째 등장한 곳은 8절입니다. 같은 경배하다는 단어이지만 그 의미와 효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헤롯이 동방 박사들에게 말합니다.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헤롯이 진심으로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이렇게 말한 것일까요? 헤롯이라는 사람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이라는 사람은 자기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아내도 죽였고, 아들도 죽였습니다.
그 당시 마카비 가문의 후손인 아리스토불루스 3세가 유대인의 종교적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에 임명되었다고 합니다. 헤롯은 이 대제사장이 가진 종교적 권위가 혹시나 자기의 정권을 위협할까 긴장했다고 합니다. 이후 여리고 성에서 아리스토불루스의 대제사장직 축하 파티가 있었는데, 이때 아리스토불루스가 익사사고로 죽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헤롯이 그의 죽음에 관여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문학가 파피니(Papini)는 헤롯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타는 동양 사막에서 뛰어나온 많은 괴물 중 가장 흉악한 괴물이었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그는 권력욕, 물질욕, 성욕 등을 위하여 살육과 학살을 마음대로 자행한 괴물이었습니다. 이런 자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노라” 한 동방 박사들의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그는 박사들에게 “나도 가서 경배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의 마음은 전혀 존경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자기의 권위에 도전하는 한 아기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던 그는 이후에 동방 박사들이 자기에게 보고하지 않고 고국으로 떠난 뒤에 베들레헴과 그 인근 지역에 2살 이하의 아기를 모조리 죽이라는 엄청난 명령을 내립니다. 입으로는 경배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헤롯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경배한다고 하지만 실제의 삶 속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삶을 산다면 우리의 모습은 헤롯과 다를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2절의 경배하다는 단어와 8절의 경배하다는 단어는 같은 ‘경배하다’는 단어인데, 극과 극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아기 예수를 대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존경의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박사들의 경배는 문자 그대로 순수한 존경의 마음이 있었지만, 헤롯의 마음에는 존경의 마음이 없이 불순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경배하다는 단어가 세 번째 등장한 곳은 11절입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집에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이 예물의 종류를 설명하여 칼빈은 “황금은 왕권을, 유향은 제사장직을, 몰약은 죽음을 각각 상징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예물이 가진 상징적인 의미보다도 그렇게 먼 길을 걸어온 박사들이 자기들의 가장 귀한 것을 예수께 바쳤다는 그 행동이 중요합니다. 마음은 언제나 물질로써 다 표현되지 못합니다. “냉수 한 그릇을 내 이름으로 대접하는 자는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하심은 그 냉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냉수라도 작은 형제에게 갖다 줄 수 있는 그 마음씨가 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드리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어떤 마음으로 주님께 드리느냐? 우리가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선물에 보답하는 우리 마음을 바칠 수 있을까 함이 문제입니다.
아기 예수에게 바쳐야 할 것이 반드시 물질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간, 노력, 우리의 기도와 성의도 포함됩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또 순간 순간의 우리의 삶이 아기 예수가 기뻐하시는 일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박사들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경배한 그 태도가 참 크리스마스 정신을 나타내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우리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몰랐다고 해도 아기 예수에게 그들의 가장 큰 수고와 가장 큰 희생 그리고 가장 귀한 예물을 바쳤습니다.
크리스마스란 말이 그리스도를 예배한다는 뜻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압니다. 박사들이 바로 그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는 예배의 참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우리에게 예배를 가르칩니다.
우리는 성탄 절기를 맞이하여 아기 예수에 대한 존경의 마음과 경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기 4주 전부터 우리는 대림절이라고 해서 정말 분주하고 정신없이 크리스마스를 준비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성탄 카드를 보내고, 교회적으로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고, 성탄 축하 발표회를 준비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 속에서 정말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고 존경하고 경배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질 때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크리스마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 속에는 다분히 형식적이고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면 일어나고, 사도신경 후에 앉아서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할 때 머리숙이고 눈을 감고, 예배의 순서가 이미 우리의 몸에 습득되어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기도 합니다.
제가 예전에 한가지 독특한 일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강동교회 처음 왔던 2004년도에 세례 문답을 공부하던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공부시키면서 한번은 주기도문을 써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기도문을 쓰다가 막히는 부분이 생기면, 모두 눈을 감고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주기도문을 눈 감고 외워왔기 때문에 눈을 뜬 상태로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어색하고 서투릅니다. 그 당시에 주기도문을 눈 감고 외웠던 친구 중 한명은 지난 주에 제 설교를 듣기 위해서 휴가까지 나왔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어느 순간부터 타성에 젖어서 습관적이고 기계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살아있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누구에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살아 계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요, 우리 영혼의 아버지께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마주 대하고 앉아 있다는 사실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 바로 예배드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온전하게 주님 앞에 내놓고 예배에 임하기를 바라십니다. 지금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다 알고 계십니다.
매주 예배에 임하는 우리의 모습이 어떤지 돌아보면 참으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보겠다, 예수님이 본을 보이신 섬김의 모습을 보이겠다, 내 시간을 예수님을 위해 바치겠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겠다 매 순간 결단했지만, 돌아보면 부끄러운 모습뿐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에게 크리스마스를 허락하셨습니다. 이번에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며 진정 우리의 마음이 아기 예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