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저축, 투자, 수출을 가장 중시하는 일본형 경제모델 을 동아시아에서 모방한 것이 현재의 아시아 경제위기의 원인 중 하나다.”
4월28일 미국 상원 예산위원회가 주관한 청문회에서 미국기업연 구소(AEI) 연구원 존 메이킨이 내린 결론이다. 그가 이날 발표한 논문제목은 `일본형 모델의 고통에 찬 죽음'이었다.
`일본형 모델의 죽음'은 폴 크루그먼 교수의 `아시아 성장한계론 ' 이래 지금까지 수없이 쏟아져 나온 아시아경제 비판 가운데 하 나다. `일본형'과 `아시아형'은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인 도네시아 사태 뒤 비판은 더욱 대담해지고 노골화했다.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5월27일 한 강연회에서 아시아 경제위기는 “중앙집권적인 관료중심 경제체 제에서 법치국가의 시장경제체제로 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혼란” 이라고 규정하면서 사태수습에 정부가 개입해선 안된다고 강조했 다. 같은 날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도 아시아 경제 위기의 주인은 `정실자본주의'라고 지적했다.
이들이 일본형 또는 아시아형이란 말로 상징하는 내용들은 주로 정부주도 성장, 시장 메커니즘의 불투명성, 법률경시의 비합리적 연고주의 등이다. `아시아적 가치'라는 포괄적 용어로 종종 묶여 지는 이들 개념에 대한 평가는 여러가지로 엇갈린다.
그러나 요즘의 비판론자들은 개념 자체의 분석·평가에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 그것은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일방적이고 모순된 태도를 통해 드러난다.
메이킨이 지적한 저축, 투자 중시는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교 육열, 공동체의식, 근면성, 권위존중 등과 더불어 당시 몰락징후 를 보이던 미국이 갖지 못한 `배워야 할 가치'로 떠받들여졌다. 하지만 아시아 경제기적의 토양으로 예찬받던 이런 가치들은 불과 몇년만에 아시아 경제몰락의 원인으로 지목당하는 처지로 내몰리 고 있다. 이런 극단적 편향의 근거는 분명하지 않다.
2차대전 후 저축, 투자, 수출을 중시하지 않는 경제모델 중에서 성공한 모델은 하나도 없다. 유일하게 이를 중시한 동아시아만이 서구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대안도 없이 그것을 포기하라는 것 은 서구우위의 질서를 영원히 유지하겠다는 주장으로 들릴 뿐이다 .
비판론자들의 논리적용 또한 매우 차별적이다. 그린스펀과 캉드 쉬 등 정실자본주의 비판자들이 최근 중국을 그 대상에 포함시킨 적은 없다. 비판하기는커녕 `무책임한 일본' 두드리기에 열중할 때 책임 있고 건전한 경제력을 지닌 아시아국으로 칭찬하면서 일 본에 대비시킨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이야말로 불투명성, 정 부개입, 법치경시 연고주의가 여전히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 다. 그럼에도 중국을 `문제아' 대상에서 뺀 이유에는 중국이 사회 주의 국가라는 점과 함께 위안화 평가절하 방지요구를 수용하는 등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에 순응한 점과 미국의 전략적 대중접근에 따른 결과라는 게 일반적 시각이다.
이런 모순된 자세는 비판이 처음부터 `아시아형'의 가능성과 한 계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 따라서 `숨겨진 의도'를 고려하지 않은 아시아적 가치, 아시아 성장모델 논란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위험할 수 있다고 비판자들 은 반박한다.
애초에 아시아적 가치는 경제적 성과를 등에 업은 싱가포르의 리 콴유,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모하마드가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 화하기 위한 도구로 앞세운 논리로 출발했다. 정실자본주의는 원 래 필리핀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족벌체제를 지칭하는 말 이었다.
미국의 비판자들은 지금 이 개념들을 인도네시아나 타이, 한국 등 국제통화기금의 `신탁통치'를 받고 있는 나라들에 주로 적용하 고 있다. 약자에게 강요된 `점령정책'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동원 하고 있다는 혐의가 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