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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다리며 구하는 의
황은영 목사
우리는 오늘 이제 대림절 두번 째 주일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대림절은 성탄절을 향해가면서 그리스도의 초림을 기억하는 동시에 재림을 기대하는 절기 입니다. 사실 대림을 의미하는 라틴어 용어 Adventus는 그 자체로 도착 혹은 임재라는 뜻이지만, 황제나 장군, 총독 혹은 유력 인사가 지역을 방문할 때 행하는 예식을 의미하는 용어였습니다. 지금의 환영식과도 비슷하지만, 방문 이전에 도시는 이런 저런 방식으로 장식되었고, 그가 오는 시점에 맞추어서 대로에서 행진식이 열리고 또한 그를 찬송하는 찬가가 울려퍼지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대림절을 맞이할 때, 이미 오신 우리의 왕으로서 예수를 다시 한번 기리는 환영식을 사건 이후에 반복적으로 하는 동시에 아직 오시지 않은 앞으로 오실 예수를 기대하며 미리 환영식을 사건 이전에 반복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미 오셨는데 또한 아직 오시지 않은 분의 오심을 기릴 때, 그 미묘한 긴장의 시간은 사실 지금 이 순간 그가 이미 와 계셨지만 아직 희미하게 가리워진 그분의 임재를,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우리의 모습을 헤아려 볼 시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가? 사실 이 문제는 우리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게 하는 질문입니다. 그분은 우리 이전에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와 항상 계시고 우리 이후에도 그리고 우리를 넘어서 항상 계실 분입니다. 우리가 물어볼 임재는 사실 우리와 항상 계시는 그 분을 보지 못하는 우리의 눈의 밝아져 보이지 않는 그 분이 우리에게 원하는 뜻을 너무나 깊이 알고 느끼고 또한 그것을 우리의 몸으로 살아내고 그로 인해서 이미 우리 안에 계시는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가의 문제 입니다. 이런 점에서 대림절에서 우리가 스스로 생각해 볼 것은, 우리가 과연 부족한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담아내고 또한 밖으로 살아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며칠 전 성소수자의 집회에 축도를 한 이유로 감리교의 이동환 목사가 출교 되었습니다. 소외된 이들의 시민적 권리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의견을 가지고 논의함에 있어서, 물론 그 소외된 이유가 무엇이냐, 즉 동성애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이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외된 이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 자체로는 그것이 결코 죄가 될 수 없습니다. 심지어 교도소에 수감된 재소자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것도 죄가 될 수 없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동성애 그 자체의 옹호의 문제가 아닙니다. 핵심은 소외된 이들의 권리 옹호의 문제 입니다. 소외된 이들의 권리를 나와 같이 누릴 수 있도록 지지하고 노력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민 구성원에게 있어서 칭송할만한 덕목이며, 기독교인 중 어느 누구에게는 이웃 사랑을 표현하는 정치적 실천일 수 있습니다. 감리교회는 과연 이러한 치리를 통해서 자신이 생각한 하나님의 법을 실현해서 누룩을 제거하고 그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영광일까요? 이동환 목사는 출교, 즉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강제 낙인이 찍혔습니다. 목사 면직은 말할 필요도 없고, 행정 절차상 다른 교단으로의 편입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리교가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기도해준 이에 대해서 출교 처리를 내리는 냉혹한 엄밀한 법집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반면에, 세상법으로 미성년자 그루밍 성폭력으로 징역 8년을 선고받은 문모 목사에게는 그저 출회, 즉 지방 연회 탈퇴의 솜방망이 처벌과, 동일하게 성적 비행을 저지른 인천 윤모 목사, 심모 목사에게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며 관대한 용서를 보임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두 가지 대조된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일은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치리에 있어서 기본적인 사안의 경중을 가려내는 공정과 균형감을 놓치는 폭력적 우둔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가장 결정적으로는, 소외된 이들의 권리를 증진하며 유익을 추구하는 사랑의 표현을 하면 기독교 공동체에서부터 축출될 수 있다고 공적으로 선포한 동시에 자기의 육체적 쾌락을 위해서 상대의 신체를 위계와 강압으로 범하는 것은 세속의 법적 판단이 어떠하든 교회 내 공직을 맡음에 있어서 기독교 공동체의 사랑으로 덮어줄 수 있는 문제라고 공적으로 선언한 것 입니다. 즉 교계 선동가들과 대형 교회의 군주들의 입맛에 영합하는 가장 영리한 움직임이면서도 하기에 그 이유로 정신이 어두워져서 기본적 균형감과 정의감도 상실한 교단 법의 적용을 보고 있고, 또한 그 점에서 가리워진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를 쫓아낸 교회와 신학은 웨슬리나 모든 전통적인 옛 신학의 말을 떠벌이며 자기 스스로 느끼는 성스러움을 탐닉하며 이일로 공동체가 더욱 정결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법은 그렇게 선택적으로 작동하면서, 여전히 교회는-사실 그게 우리라고 하기 힘들어도 결국 같이 짐을 진 우리입니다- 계속 세습을 하며, 교회 재산 횡령을 하고, 사음을 하고, 성직을 매매하고, 폭력적으로 종교적 신분제를 끌고가며, 꼬꼬마 주교놀음을 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극우정치로 대중을 동원하는 그 모든 난행을 교회 법을 가지고 긍정하며 암묵적으로 조장할 것 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가 우리이며 또한 사실 어쩌면 그 모든 것에 다소간 다른 형태로, 역시 우리 안에서, 아니 최소한 저에게는, 한 스푼 혹은 어쩌면 한 웅큼 씩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주제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사는 삶과 그 속에서 실패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을 드러내게 할 수 있을까 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상에서 서로 완전히 동떨어진 두 본문에 마주하게 됩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다소 낯선 것으로 성막을 건설할 때 같이 마련할 법궤에 대한 규정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울 사도의 복음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선포입니다. 두 본문은 사실 시공의 차원에서 볼 때 전혀 다른 맥락과 청중들을 가집니다. 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선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두 이야기들을 연결지으면서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이야기로 새롭게 써내려갈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두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를 짧게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을 드러내는 길은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법을 살아내는 삶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실패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과 실패를 넘어서 그것을 속죄하며 품어주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보면서 자유롭게 살아갈 때, 그리고 서로를 품어주고 인정하고 사랑할 때, 이미 있었던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그 영광을 드러내며 살게 된다는 것 입니다.
출애굽기 25장 16절 에서 22절의 본문은 분명 다소 지루하고 건조한 성막과 법궤 혹은 언약궤 즉 십계명을 넣은 궤를 만드는 세세한 규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떠돌다 성막을 만든 상황은 뜬금없이 사실 바빌론과 관계가 있습니다. 사실 본문의 이 부분은 소위 바빌론 유수 시절 때 편찬된 사제 전승, 즉 P전승에 속하는 부분입니다. 바빌론은 기원전 6세기에서 5세기 고대근동의 패자로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는 물론 유다 역시 멸망시킨 제국입니다. 이 제국은 자기 자신이 모든 보이는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처하며, 자기 자신에서 부터 예측가능하며 풍요롭고 안전을 보장하는 삶의 질서가 나온다고 스스로 자부했습니다. 그들의 신 마르둑 자체가 혼돈을 상징하는 거대한 원시적인 물의 신 티아마트를 반으로 쪼개고 질서를 확립한 신으로 그 무력 자체가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는 바빌론의 가치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바벨론인들은 나선형의 오르막길을 가진 거대한 탑에서 매해 춘분에 신년제를 지내며 계절의 순환과 그 질서를 기념하며 그 도시의 안전을 기원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너네 나라 노래나 불러봐라며 조롱받던 포로기 상황 속에서 유대민족들은 역설적으로 어쩌면 이제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 된 자신들의 전통을 다시 모으고 연구하고 다른 전통들을 참조하면서 새로운 해석을 추구하며, 모든 질서와 터전이 무너진 절망의 심연에서 다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시 발견해 낸 전통은, 특히 자신들이 자랑 하던 성전 자체가 불타고 없어지고 삶의 뿌리가 자신들이 경멸하던 이방 나라에 이식된 상황에서, 어떻게 보이는 권력과 힘에서부터 풀려진 하나님을 다시 그려내고 그를 예배하며 또한 다른 이들과 구별된 삶과 윤리를 다시 확립할 수 있을까 였습니다. 특히 이러한 관심은 바빌론에 뿌리박은 정치적 안정과 장대한 신전, 폭력과 번영에서부터 시선을 돌려서, 광야에서의 유랑, 옮겨다니는 떠돌이 하나님의 천막, 그리고 무력함과 빈곤의 한 복판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 중에 거하는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의 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지에 집중했습니다. 그런 틀에서 그들의 새로운 관심은 오랜 출애급기의 이야기를 지금 바빌론 포로기의 상황에서 새로운 관점으로 기억해내고 다시 만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어쩌면, 한 편에서는 돈과 합리적 세속 질서가 지배하는 이 세상 속에서, 기독교와 그 신앙의 전통이 회생불가능하게 더렵혀지고 망가진 상황 속에서, 산산히 깨어진 기독교의 제도들의 파편들을 떠다니는 하나님과, 파편 속에서 이리저리 깨어진 하나님의 조각을 찾는 마음들과, 무력함과 초라함 속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 법을 지키고 그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새로 배워야 하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사실 큰 틀에서 보면 오늘 본문이 담은 지루한 법궤 제작에 대한 규정은 더 흥미로운 이야기의 틀 속에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면서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사역울 보았으면서도 지속적으로 믿지 않고 불평하며 불순종하고 광야를 헤맵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은 단물이나 만나와 메추라기를 베풀고 그리고 아말렉족을 격퇴하는 등 하나님의 개입하심의 여러 놀랄 만한 구원의 일들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지속적으로 역경에 이끄시고 믿음을 연단하시고 그의 일하심을 보이시면서 그 과정에서 그들을 그의 백성으로 빚어가시며 이제 그들에게 백성으로 살아내야 할 법을 주시고 또한 더 나아가 그들이 가는 한걸음 한걸음 마다 함께 하시며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성막을 통해서 그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합니다. 오늘의 지루한 법궤에 대한 규정은 사실 이러한 이야기의 틀 속에 있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그 영광이 드러나는 성막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구원하심이라는 부름 속에서 역경을 겪으면서 믿음을 연단받으며 자라가는 우리의 삶은 한 편에서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받고 하나님의 영광스런 거하심을 느끼며 살아 갑니다. 오늘 법궤에 대한 규정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 노력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잘 드러냅니다.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속죄소 입니다. 속죄소와 그룹 모두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하는 우리 노력이 실패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그 임재를 가리기에 이미 그것을 고려해서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는 은혜로운 속죄 역시 함께 간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돌판을 담은 그 곳 즉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품고 그 뜻대로 살려는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만큼 속죄, 즉 그럴 자격 없는 이를 감싸주고 품어주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속죄소로 번역된 부분은 실재로는 케페로트라는 단어로 곧 자비 혹은 은혜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이 속죄소의 비율이 2.5와 1.5 라는 사실 10과 6의 비율로 성서 전통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수의 조합입니다. 또한 그 재질이 순수함과 불변을 상징하는 순금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 노력하며 살고 그 임재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자격 없음에도 우리에게 그러한 삶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며, 온전한 비율과 순수한 금에서 보듯이 그 은혜는 온전하고 순전합니다.
우리에게 낯선 것으로서 천사인 그룹 혹은 케루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야웨의 거처를 둘러싸는 존재나 혹은 야웨의 탈 것으로 여겨진 천사로서 케루빔이라는 이름은 그 아카드어의 어원이 카라부 혹은 카리부로서 중간에 혹은 사이에서 개입해서 복을 주는 자 즉 중보자의 의미를 가집니다. 본래 고대 시대에 왕의 탈 것은 가장 크고 장려하고 위엄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꺼리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왕의 몸과 다른 사람들을 구분하며 거리를 띄우는 수단이지요. 그러나 여기 본문에서 하나님이 타시는 천사는 그에게 다가오며 그를 쳐다보는 이를 하나님께 올 수 있게끔 중간에서 좋은 말을 해주고 이끌어주는 존재로 그려지며 곧 이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그에게 가까이 가려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속죄의 유익함을 잘 드러냅니다. 중보자를 상징하는 그룹은 하나님의 법을 담고 있는 법궤를 덮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끝 다른 하나는 저끝 이라는 수사적 표현은 그 그룹의 법궤를 덮음이 조금의 빈틈도 없이 완전하다는 것을 강하게 보여줍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중간에 복을 주는 그 그룹들, 즉 속죄의 중보자의 사역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을 알고 지키며 살아갈 때 언제나 동반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법을 덮는 죄사함의 상징인 속죄소와 그룹에서 모세를 통해서 그 백성에게 그 갈길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22 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5)속죄소 위 곧 6)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이 해야할 바, 즉 하나님의 법과 상황에 따른 그 구체적 적용을 알려 줄 때, 그 구체적인 경로의 고비고비 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확실히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미 성막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드러내는 상징이며, 믿음이 연약한 이들에게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 특히 속죄소와 그룹 사이에서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명령할 바를 지시한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와 함께 있다라는 사실로서의 임재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는 매 경로 경로 마다 함께 가시고 인도한다는 더 깊고 구체적인 임재의 차원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듣는 또 다른 본문인 로마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더 완성된 진리를 드러냅니다. 로마서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덧입혀서 우리를 품으시고 새로운 법을 지키며 구별된 삶으로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증거합니다. 오늘 본문은 로마서 내의 더 큰 구조, 즉 크게 모두 죄에 처해 있는 인간의 정황, 이를 구원하시기 위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의와 그 효력, 그리고 구원의 역사의 의미 등을 다루는 큰 서술 구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은 인간의 정황에 대한 서술이 마무리되고 하나님의 의가 소개되는 부분입니다. 로마서는 로마 교회의 기독교인을 위해서 쓰여졌습니다. 로마 교회는 본래 원래 로마에 예수 탄생 이전 150년 전 부터 거주했던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들 에게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우리의 선입견과 달리 로마에 거주한 유대인 들은 약 4만에서 5만 정도로 상당히 많았고 그들 중 많은 이의 신분은 대개 자유민이었습니다. 특히 유대교가 보인 유일신에 대한 숭배와 그 철학적 깊이, 질서 잡힌 삶, 그리고 다신교적 종교들에 대한 우상 파괴적인 태도 등등은 많은 지식인들에게 우호적인 이미지를 주었고 존중을 받았습니다. 게중의 어떤 이는 신을 두려워하는 이들로 불리며 유대교로 개종했습니다. 그들 개종 이방인 들 중 몇이 유대인들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여기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형성 했습니다. 당연히 유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물려받은 하나님의 법과 관습을 지키는 삶이야 말로 하나님의 의로움을 얻어내고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그 영광을 드러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경멸받는 이상한 사이비가 아니라 로마 인들마져도 경외하고 존중하는 유대적 배경은 비록 그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해도 여전히 정신적 그리고 윤리적 삶의 자부심의 근원 입니다. 반면 이방 기독교인들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려 애씀에도 기존의 유대교적 전통이 규정한 법과 관습의 틀에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고 주눅이 들었을 것 입니다. 바울은 현재 이러한 갈등 상황을 조정하기 위해서 로마 기독교인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핵심은 제 아무리 자신의 신앙과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 하면서 자신과 공동체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을 동원하려 할 때 하나님의 법은 언제나 저주가 되며 하나님 스스로 거짓된 영광을 허물지만, 반면 법을 지키며 영광을 얻는 시도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의로움만을 의존할 때 자유롭게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애쓰지 않고도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우리 안에 품고 지키며 살아갈 때 즉 그의 뜻을 따라 의롭게 살아가려 노력할 때,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스스로 낮추시며 거하시는 은혜를 깊이 생각하기 힘듭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옳음을 드러내며 이를 또한 남에게 강요하며 그러면서 상대방을 낮추고 상대방을 하나님 품 밖으로 내어 쫓으려하며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합니다. 사실 이 문장은 나쁘게 표현한 것이지만, 이건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 누구나 자기 기준으로 무엇인가 옳음을 추구하고 결단하고 살아낼 때, 이 기준이 자기에게 너무 중요하기에, 이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할 수 있는 한 자기 기준을 같이 나누었으면 싶고. 그렇지 않을 경우 힘을 다해 영향을 주려 노력하거나 그것이 안될 때 그를 나쁘게 평가하는 일은 어쩌면 인지 상정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또 그 높은 기준이라면 더더욱 이런 일은 강화됩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임재하심이 나에게 있으니 자격이 없더라도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나는 내가 생각한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니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잘 소유 하고 있고 그에 따라 내가 하나님 백성됨의 자격을 주장하고 더 나아가서 다른 이의 자격을 정할 수 있다라는 마음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더 최악의 상황은 내가 지키지 않는 하나님의 법은 무시하고 듣지 않고, 예를 들어 가난한 이와 고아에 대한 복지와 탐욕에 대한 경고와 같은 것이지요, 내가 습관적으로 생각없이 기계적으로 편하게 하는 어떤 법을 가장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내가 하지 않지만 뭔가 변두리에서 의심스러운 이들이 하는 그 무엇을 가장 더럽고 속되며 참람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 선한 하나님의 법이 나쁜 의미에서 율법이 되는 지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스라엘 의 역사에서 보다시피 그러한 자기 마음대로의 법 준수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은 언제나 그럴 경우 뱀의 쓸모없는 허물처럼 껍데기만 남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전통을 해석하는 권리를 독점하며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해없이 누군가를 죄인으로 만들고 그로 인해 자신의 종교적 권력을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으로 만들 때 혹은 지상의 권력을 종교적으로 신성화하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증거로 만들 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조롱거리와 쓰레기로 만들어버립니다. 그것이 법궤이건 성막이건 성전이건 주교좌 성당이건 대형교회이건 교단이건 혹은 기독교 국가이건 더 나아가 기독교 문명이건 모든 나쁜 의미의 율법적인 것은 바람이 불 듯 자유로운 성령에 의해서 모두 허물어지고 스러져 버립니다. 어쩌면 한국 교회가 동성애자들 뿐 아니라 동성애자들의 권리 향상을 위해 돕고 애쓰는 이들을 한사코 배제하고 조직적으로 억압하려 열심을 보일 때, 결국 그런 모습은 한국 교회 자체가 쌓아올린 부끄러운 자신을 감추며 스스로를 속이며 혹은 세속사회에서 상실되는 영향력을 상쇄하기 위해서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하는 모습일 것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세상을 향해 스스로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삶을 드러낼 때, 그것이 동성애의 반대 혹은 더 나아가서 동성애자의 시민적 권리 증진 을 방해하는 것으로만 드러난 다면 그것은 우리의 지적, 도덕적, 영적 파산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을 마음에 품으려 해도 결국 이를 자신의 힘과 지혜 그리고 자기 사랑을 키우는 땔감으로 소비해버리곤 하며 자기가 누구인지를 꾸며대며 정치적, 도덕적, 종교적 정체성을 과시하는 허영스런 존재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유로운 영은 어려운 중에서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하나님의 법의 핵심을 살아내려 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자신의 마음과 삶에서 이루려 하는 가장 작은 이들을 찾으며 또 그들의 연약함을 품고 보듬으며, 사람이 만든 하나님을 가둔 모든 울타리를 허뭅니다
이 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 애쓰지만 자기 사랑의 둔감함과 악의 그리고 허영에 사로잡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그 영광을 구 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법이 아닌 믿음으로 우리를 의로운 존재로 여겨주시며 차별없이 품어주시는 하나님 스스로의 의로우심을 그 답으로 제시합니다. 이 답은 잘못된 답이 주는 무게 즉 우리가 법을 지키며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얻어내거나 혹은 의로운 우리가 우리를 닮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또한 우리가 우리를 기준으로 악인을 가려내고 그들로부터 우리를 순수하게 한다는 무게에서 우리를 건져냅니다. 우리는 이 점에서 법궤에 대한 규정에서 나온 통찰로 다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에 언제나 하나님의 법과 속죄가 같이 갑니다. 이 통찰은 바울 사도의 선포에서 더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법이 언제나 우리의 무력함과 그것을 감추려는 허영에 닿아서 물들게 되기에 우선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완전히 씻어내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어 우리를 즐겁고 자유롭게 하나님의 법을 살아내는 삶으로 해방시킵니다. 우리는 더이상 하나님 앞에 그리고 이웃 앞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서 혹은 다른 이의 자격을 심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의 자격에 집중하거나 혹은 우리의 자격을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모든 자격을 이룬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나의 것으로 품었는가 만을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남의 의로움이 내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룰 바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미 다 이루어졌음을 믿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품어지고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품어집니다. 이제 나의 자격 혹은 남의 자격을 따지기 보다는 마치 모든 법을 완성한 예수가 법에 소외된 이들을 끌어오며 법을 자유롭게 파악하듯이, 우리 각자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법을 저마다의 자리에 각자 자유롭고 파악하고 살아냅니다. 우리는 당연히 실패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오로지 내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볼 뿐이며 나는 나의 삶에서 너의 삶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그것을 믿고 알고 살아갑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저마다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의롭게 하심과 그리스도의 영의 임재하심의 다양한 빛깔과 다양한 질감 그리고 여기에 반영된 다양한 영광들을 드러냅니다.
믿음을 가진 누구나 차별없이 품으시는 하나님의 의로움은 우리에게 더 이상 자격 심사를 통과해야 할 어떤 외적인 표징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차별 없음에서 차별을 의미하는 디아스톨레는 구분 혹은 경계를 의미합니다. 더 이상 우리의 행동이나 습성 혹은 삶의 방식이 주는 경계 혹은 테두리를 지킬 때 그것을 지키는 행위가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은 없으며 이미 우리 각자가 무엇을 하기 전에 각자 가진 믿음으로 이미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덧입어 우리가 법을 지켜 이룰 것을 완전히 이루었기에, 이제 우리는 자격을 가르는 행위의 경계에서부터 자유로와 집니다. 이제 서로의 삶이 각자 나름 하나님의 법을 자유롭게 자기의 헤아림 속에서 이루어나갈 때, 서로의 행위가 비록 서로 서로에게 초라하고 또 실패한 듯 하고 또한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각자의 일이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며 자기 나름의 주어진 사정에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추구한 것이라 품어주고, 헤아리고, 이해하며 견뎌내며, 더 나아가서, 그 속에 감춰져 있는 신비한 가능성과 잠재성을 보는 것이며 믿어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각자가 서로의 삶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법을 이루고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 영광을 드러내는 믿음의 방식이나 삶의 방식 중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의와 불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경계가 되지 못합니다.
물론 살아가면서 나의 근본적인 의로움을 바탕으로 나에게 고유하게 주어진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복음의 자유가 다른 이들에게는 깊은 시험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아직 자신 안에서 그리고 내 안에서 주어진 그리스도의 근본적 의로움을 보지 못하고, 여전히 외적인 표징에 매인 연약한 이들입니다. 법에서부터 자유로운 내 나름의 순종의 방식이, 특정 사안에서 그것을 그렇게 지키는 것 만이 진정한 법을 이룬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큰 거슬림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거슬림을 느끼는 이들은 크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단지 신앙의 깊이가 깊어지지 못해서 육적인 표징에 매인 의로움에서 자유롭지 못한 연약한 이가 있고, 하지만 자기의 지적 종교적 도덕적 자만으로 인해서 자기 중심적 동기에 따라서 육적인 표징을 조작하는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연약한 이들에게서는 때때로 그들이 상처받지 않게끔 보듬어주는 것 역시 필요 합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에게는 복음의 진리를 강하게 가르치며 그들을 더 깊은 진리로 이끄는 노력을 기울여서 그들을 교정하며 도와야 합니다. 이런 경우, 이방인과의 음식 먹는 것이 남에게 두려워하며 자리를 피한 베드로를 훈계한 바울 같이, 그들에게 저항하고 또한 비판하는 것 역시 진정한 형제 사랑의 길일 것입니다. 동성애의 문제는 성애에 대한 의학적 생물학적 고찰과 사회학적 그리고 역사적인 고려와 신학적 분석 뿐 에서부터, 권리 자체에 대한 시민윤리적, 정치적 숙고와 정치 신학적 판단을 수반하는 복잡한 논의입니다. 따라서 그에 대한 다른 견해들이 있을 수 있으며, 혹자는 자기에게 익숙한 성-윤리적 틀이나 혹은 가족제도의 틀에서 불편하고 거슬리는 감정과 태도를 가질 수 있고, 이것이 종교적인 판단과 결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같은 어떤 이들이 동성애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과 그들의 권리를 증진시키는 이들을 죄인이라 출교시키고 더 나아가서 함부로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끊어졌다고 생각 없이 낙인 찍는 것은, 그러한 이들의 믿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짓뭉게며 또한 이웃사랑의 문제에서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파괴하려는 악의이며 무지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오류를 저지르는 이들에 대한 사랑이 담긴 훈계나 혹은 품어줌을 넘어서, 이 문제에 대해서 연약한 이들과 또한 바리새인같은 이들을 혐오 세력이라는 이름으로 악마화하거나 혹은 관대한 우리에게서 적출하려는 시도 역시 피해야 합니다. 비록 그들이 시민 교양이나 사회적 반성능력 그리고 신앙의 깊이에 대한 헤아림이나 혹은 단지 사안에 따른 다른 사고 방식을 가진다고 해도, 그들 역시 같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속에 의롭게 된 존재로서 우리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과 우리의 실패를 품어주는 속죄가 같이 간다는 점을 잊을 때 우리 각자는 저마다 내 틀에서 하나님의 법을 따라 나를 심판하거나 혹은 자기 의의 허영 속에 너와 그들을 심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너와 나 우리와 그들의 모든 의로움을 대신 이루었기에 우리는 각자의 삶의 차이들을 흠과 실패로 여기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같은 하나님의 영광을 서로 나누면서 이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낸다고 보아야 합니다. 저희 교회의 신조 중에 우리는 우리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교양있게 서로 서로 선넘지 않고 민폐끼치지 않고 존중하자는 세속의 개인주의적 매너를 넘어설 것입니다. 그런 세속의 개인주의적 매너는 서로 그 선을 최소로 그을 때 서로가 서로의 삶에 침범하며 고통을 받으며 분노하며 뜨겁게 증오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선을 최대로 그을 때, 서로를 침범하지 않기 위해서 두려워하며 조심하다가 서로를 냉정하게 기대없이 무관심하며 차갑게 미워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현재 동성애 문제에서 기독교인들 역시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습니다. 지켜야 할 선을 아주 낮춰서 합동과 통합 교단은 우리 교단의 고-임보라 목사님을 이단으로 정죄한 바 있습니다. 혹은 그에 반대로 지켜야 할 선을 아주 높일 때, 서로가 매너 있게 마치 서로 존재하지 않는 듯 소 닭보듯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서로 간의 인정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서로 안에서 각자 하나님의 법을 지켜가는 열심을 보면서도 그 실패를 서로 보지만 그 실패를 넘어서 그들 안에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이루어진 하나님의 의로움과 임재와 그 영광을 보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으로 견뎌내고 품어주며 서로를 기대 안에서 보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하나님의 법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마주하는 모든 실패를 품어주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나의 것으로 덧 입고 자유함을 찾을 때 나는 그 자유함을 다른 이의 삶에서도 찾아내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어도 참아내며 인정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서로 다른 고유한 삶의 자리를 가지며 하나님의 법을 살아내는 다양한 개성에서 그들을 품는 한 분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보고 서로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인정하고 기리며 함께 나갈 때 우리는 각자 저마다의 마음 속에서 그리고 공동체에서 함께 품은 하나님의 영의 임재하심을 보게 됩니다.
법궤가 언제나 그것을 덮은 속죄소와 그룹에 보존되면서 하나님의 가장 내밀한 임재하심과 그 영광이 이루어지듯이 하나님의 법을 살아가다 실패하는 우리는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로움을 믿으며 그로 인해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 영광과 임재함을 서로 자신의 삶에서 드러낸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보게되면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할 때, 그 때 비로소 서로의 다름 속에서도 서로 안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드러난 사랑의 임재하심을 그리고 그 영광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낼 것 입니다. 어쩌면 대림절은 이미 오래전에 이루어진 그러나 가려진 것으로 우릴 의롭게 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임하심을 기억하며 되살리는 동시에 또한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서로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보며 서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우리 안에서 그 분의 영광의 일하심을 기다리며 고대하는 시간일 것 입니다.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사랑의 주님. 부족한 저희를 불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시고 또한 당신이 원하시는 삶, 당신의 법을 이루며 살수 있게끔 우리를 불러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그러나 저희가 저희의 죄를 회개합니다. 우리가 악하고 또 연약하여 당신이 원하시는 뜻과 당신의 법을 무시하며 지나치고, 언제나 우리의 의로움만을 내세우며 스스로를 위선으로 꾸미고 우리 형제들을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였음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부족한 저희임에도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저희를 품어주셔서 저희의 온전한 의를 이루셨고 이제 자유롭게 당신이 원하는 바를 두려움 없이 즐거움으로 이루게 부르십니다. 주님, 저희로 하여금 언제나 우리가 형제의 허물 보다는, 우리 각자의 마음과 또한 우리의 형제 자매의 마음 안에서 당신께서 이루신 의로움의 온전함을 보게 하시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귀하고 아름답게 보게하시어서 당신의 사랑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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