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는 반복에서 태어난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과 불교의 심상속·진여훈습·환멸연기
우리는 반복을 흔히 같은 것이 되풀이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어제와 오늘이 비슷하고, 같은 생각과 실수를 되풀이한다. 그래서 반복을 변화의 반대편에 놓는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 상식을 뒤집는다.
반복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생산하는 운동이다.
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나도 두 번째 사건은 첫 번째와 다르다. 시간이 흘렀고, 기억과 관계, 주체가 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복은 동일성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 지점에서 들뢰즈의 사유는 불교의 심상속(心相續)과 만난다.
불교에서 마음은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의 마음이 인연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며 연속성을 형성한다.
어제의 분노는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오늘의 반응에 영향을 준다. 욕망은 지나가도 반복되면서 성향이 되고, 과거의 선택은 오늘의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심상속은 동일한 마음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낳으며 이어지는 반복의 흐름이다.
여기서 업(業)과 훈습(薰習)을 생각할 수 있다.
한 번의 생각과 감정, 행위는 사라진다. 그러나 흔적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반복되는 생각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성향이 된다. 성향은 다시 다음 생각과 행동을 조건 짓는다.
반복은 자신이 만든 흔적을 다음 반복에 넘겨준다.
이것이 훈습의 중요한 의미다.
심상속을 강물에 비유해보자.
강물은 계속 흐르지만 같은 물이 다시 흐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강이라고 부른다.
마음도 그렇다. 어제의 마음이 오늘로 그대로 이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제의 조건과 흔적은 오늘의 마음에 작용한다.
그러므로 마음의 연속성은 동일성의 연속성이 아니라 차이의 연속성이다.
반복은 같은 것을 복제하지 않는다. 반복될 때마다 무엇인가가 달라지고, 그 차이가 다음 반복의 조건이 된다.
여기에서 수행의 문제가 등장한다.
우리는 매일 좌선하고, 호흡을 관찰하고, 계율을 지키고, 경전을 읽는다. 겉으로는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수행의 반복은 동일한 상태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좌선은 어제와 다르고, 오늘의 알아차림도 어제와 다르다. 작은 참회 하나가 과거의 습관을 다르게 반복하게 만든다.
수행이란 반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반복 속에 새로운 차이를 만드는 일이다.
훈습은 번뇌가 강화되는 과정만을 뜻하지 않는다.
선행과 지혜, 자비도 훈습된다. 분노를 반복하면 분노하기 쉬워지고, 자비를 반복하면 자비가 자연스러워진다.
따라서 수행은 심상속에 새로운 반복을 삽입하는 일이다. 작은 반복이 전체 흐름을 바꾼다.
여기서 진여훈습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승불교에서는 중생의 마음에 무명과 번뇌만 훈습되는 것이 아니라, 진여 역시 마음을 훈습하여 수행과 깨달음으로 이끈다고 설명한다.
이를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마음은 자신이 반복해온 것만 반복하지 않는다.
자신의 반복을 넘어서는 가능성도 마음 안에서 작동한다.
수행은 나쁜 반복을 좋은 반복으로 바꾸는 데 그치지 않는다.
더 깊이 들어가면,
반복하는 '나' 자체가 반복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보는 일이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라는 말은 나를 고정된 실체로 만든다.
그러나 심상속을 들여다보면 '나'는 습관과 기억, 감정과 관계가 만든 하나의 패턴일 뿐이다.
패턴은 바뀔 수 있다.
오늘의 작은 차이가 내일의 반복을 바꾸고, 내일의 반복이 다시 나를 바꾼다.
여기에서 불교의 **환멸연기(還滅緣起)**를 생각할 수 있다.
순연기의 흐름에서는 무명이 행을 낳고, 행이 식을 낳으며 생사의 반복이 이어진다.
그러나 환멸연기는 그 흐름이 반드시 같은 방식으로 계속될 필요는 없음을 보여준다.
무명이 사라지면 행이 달라지고, 행이 달라지면 식의 흐름도 달라진다.
즉 연기의 고리는 고정된 운명이 아니다.
조건이 달라지면 반복의 결과도 달라진다.
업은 운명이 아니고, 습관은 본질이 아니다. 과거의 반복이 미래를 완전히 결정하지도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인연이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들뢰즈와 불교는 다시 만난다.
들뢰즈에게 차이는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성하는 힘이다. 불교에서도 연기된 현상은 고정된 자성이 없기에 새로운 인연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차이가 가능하기 때문에 변화가 가능하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수행이 가능하다.
물론 두 사상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들뢰즈는 불교의 해탈이나 윤회에서 벗어나는 종교적 목적을 말하지 않는다. 불교의 공(空)과 들뢰즈의 차이도 같은 개념이 아니다.
그럼에도 두 사상은 존재를 고정된 동일성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만난다.
존재는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 생성의 과정이다.
불교적으로는 연기이고, 들뢰즈적으로는 생성이다. 그리고 생성은 반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반복은 똑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다.
차이가 반복되고, 반복은 차이를 만들어낸다.
수행도 그렇다.
우리는 매일 같은 방석에 앉아 호흡과 몸, 생각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그러다 어느 날 알게 된다.
내가 반복한 것은 수행만이 아니었다. 분노와 욕망, 두려움과 '나'라는 이야기도 반복하고 있었다.
수행은 그 반복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반복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작은 차이가 생긴다.
예전에는 화가 곧 나였지만, 이제는 화가 일어나는 것을 본다.
예전에는 욕망을 따라갔지만, 이제는 욕망이 생기는 순간을 알아차린다.
예전에는 생각을 믿었지만, 이제는 생각을 하나의 생각으로 본다.
삶 전체가 갑자기 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복 속에 차이 하나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차이가 다음 반복을 바꾼다.
어쩌면 깨달음도 이와 같을 것이다.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생사의 흐름 속에서
더 이상 이전과 동일하게 반복되지 않는 것.
무명이 반복되던 자리에 지혜가 들어오고, 집착의 자리에 놓아버림이, 갈애의 자리에 알아차림이 들어온다.
그러므로 해탈은 반복의 종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반복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이다.
몸은 먹고 자고 늙고, 생각과 감정은 계속 일어난다. 세상도 생겨나고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을 반복시키던 집착의 구조가 달라진다.
그때 환멸연기는 단순히 윤회를 끝내는 공식이 아니라,
반복되는 삶 속에서 새로운 차이를 만드는 길로 읽을 수 있다.
삶은 반복되지만 똑같이 반복되지는 않는다.
바로 그 차이 때문에 우리는 변하고 수행할 수 있다.
어쩌면 자유란 반복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 속에서 더 이상 이전과 똑같이 반복하지 않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어제의 나를 오늘 반복하면서도 어제와는 다른 나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마침내 '나' 자체가 반복과 차이로 이루어진 임시적 형상임을 보는 것.
그때 반복은 감옥이 아니다.
반복은 길이고, 차이는 그 길에서 열리는 작은 문이다.
문은 거창하게 열리지 않는다.
한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순간, 한 욕망을 따라가지 않는 순간, 한 번의 분노를 알아차리는 순간, 한 번의 집착을 놓는 순간에 차이가 생긴다.
반복 속에 차이가 생기고,
차이가 다시 반복을 바꾼다.
그렇게 심상속은 조금씩 다른 흐름이 되고, 연기는 환멸의 방향으로 전환된다.
생은 같은 생을 반복하면서도 더 이상 같은 생이 아니게 된다.
첫댓글 步步新路
日日循舊路 (일일순구로)날마다 걷는 똑같은 길
非囚亦非牢 (비수역비뢰)나를 가두는 감옥 아니라네.
步步皆自得 (보보개자득)한 걸음 또 한 걸음 온전히 내 것이니
微門自不勞 (미문자불로)작은 문들 애쓰지 않아도 톡톡 열리네
忍貪心自靜 (인탐심자정)탐하는 마음 꾹 참으니 마음 절로 고요하고
覺怒氣自消 (각노기자소)솟아나는 화를 알아채니 기운 사르르 사라지네
放手無一물 (방수무일물)욕심껏 쥔 손 탁 놓아 아무것도 없으니
心溪注新潮 (심계주신조)마음의 시냇물엔 새로운 물결 흐르네.
舊徑雖如昨 (구경수여작)걷는 길은 비록 어제와 같을지라도
今我已非遙 (금아이비요)오늘의 나는 이미 어제의 내가 아니라네.
>> ai << 1초 >>
와~~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