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여성수필의 정체성 연구
80년대 여성언술의 특성
가. 대화의 생산성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아, 난 요즘 섹스가 너무 강해져 미칠 것 같아요. 이름도 성도 묻지 말고 딱 한번만 자고 나서 남남으로 돌아서 줄 남자가 어디 없을까요?”
“얘, 그러다 애기가 생기면 어쩌려고?”
“좋지. 생기기만 한다면야. 어떻게 해야 애기가 생기지?”
“만약 나한테 애기가 생기면, 나는 절대로 학교 같은 데 보내지 않을거야.” 우리는 이어서 그 자리에 참석치 않은 B란 친구가 진 빚에 대해서 걱정을 늘어놓다가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 모두 복면을 하고 뉘 집을 좀 털까?” “그래, 어떤 집에 돈이 많을까?”
“작가 Q씨는 어때? 그의 거지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돈방석에 앉았다잖아. 나중에 들키면 복면을 내리고, 나야, 나 몰라? 이담에 갚아주면 될 것 아냐, 하고 달래기도 좋잖아.” 그러는 사이 우리는 말의 자유로움에 어느덧 깊이 취해, 혀도 심장도 영혼도 깃털처럼 가벼워져 지옥에서 천당까지 한 달음으로 오락가락했다. (굵게 강조 : 인용자)
- 서영은, 「꽃이 떠다니는 방」 중에서 -
위의 예문은 이 작품의 화자 친구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 대화를 통해서 지금 여성소설가 서영은이 돈이 없어 궁핍한 지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빈궁 속에서도 그 상황을 농담으로 풀어가며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돈이 없는 상황을 두고 그냥 살 것인가, 남의 집이라도 털 것인가의 문제가 심각하지는 않지만 내부의 갈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독신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성의 문제도 자연스럽게 드러내며 자유분방한 성격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독신 경험은 작가들의 의식에 세계에 대한 비극적 인식과 정신적 가치의 붕괴, 체제의 불안정에서 오는 실존적 허무의식을 각인시켰다. 이러한 당대의 분위기는 특히 여성소설가들의 작품 속 여성등장인물들에게서 성모랄의 변화로 드러난다. 성문화는 그 사회의 풍조를 가장 빠르고도 정확하게 반영하는 기제일 뿐 아니라, 여성의 자기정체성의 형성과정을 가장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여성수필에 나타난 여성작가들의 성모랄과 성역할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전후 한국 사회 전반에 퍼져 있던 허무주의적 태도의 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전쟁은 남성 가장의 부재나 가족 구성원들의 정신적인 황폐화를 가져와 전 사회적으로 여성에 대한 기대는 더욱 보수화되는 경향을 나타낸다. 그 같은 현실 속에서 여성의 주체적 자기정체성의 형성은 여성의 고유한 체험에 바탕한 여성 자신의 욕구와, 사회적 혹은 가족적 기대치 사이의 갈등을 유발시키고, 그 갈등 속에서 여성등장인물들은 두 가지의 뚜렷한 양상으로 성적 정체성을 재현해 보이고 있다. 한 가지는 대상화된, 혹은 타자화된 성의식을 소유한 여성등장인물의 형상화이다. 이들은 주로 자기방기의 성적 타락으로 치닫거나, 성적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건강하고 주체적인 자기정체성의 형성에 수렴되지 못하는 여성을 재현하고 있다. 다른 한 가지는 대상화된 남성중심적 성의식에서 벗어나, 모성적 자아와 여성적 자아의 정직한 대결을 통해 끝내 주체적 자아로 일어서는 여성인물의 재현이다. 이러한 주체적 성의식을 지닌 여성주인공의 형상화는 모성체험의 환기를 통해 현실의 환멸을 극복해 가는 한국의 건강한 여성상을 제시해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서영은의 글에서 나타나는 대화 속의 친구는 작가의 다른 모습일 수가 있다. 즉 소극적인 자아와 적극적인 자아, 순응적인 자아와 반항적인 자아, 현실적인 자아와 이상적인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독신자들의 자유 발랄한 담론이 대화체를 통해 여성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면서 진정한 자아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 언어들은 결코 추상적인 문법 체계나 중립적인 구조 속에 존재하지 않고 다양한 세계관을 담지하고 있는 갈등과 대화의 장에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언어가 담고 있는 의미 자체를 새로이 밝혀주거나 독백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새로운 측면을 열어주는 것이 바로 이러한 대화의 언어, 대화체의 언술은 어느 한 쪽이 상대방의 언어가 풀려 나오도록 도와줌으로써 상대방이 자신의 견해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도록 자극하고 부추기는 대화체 언술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언어가 그 화자가 소유한 관념이나 이데올로기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이런 언어의 교환은 곧 가치관과 세계관의 ‘나눔’이 된다.
그날 이후, 퇴근하여 집에 오면, 내게 술 한 잔 먹이는 것이 그의 빼놓을 수 없는 일과가 되어버렸다. “자, 마셔” 그가 내 앞에서 황제처럼 명령하면, 나는 그 때마다 미소로써 그 잔을 받아든다. 이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마시는 것이다. 밤마다 나를 이렇게 조금씩 취하게 만드는 일이 재미있어서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약효가 대단한가 보지? 이제 당신은 감기 안 걸릴거야.” 그는 정말 그 술의 약효를 대단히 믿는 눈치였다. 그러나 때로는 에이, 바보! 하면서 의자 깊숙이 파묻힌 나를 끌어당기며 놀린다. 남자란 무릇 자기 아내까지도 취하게 하고픈 풍객들인 모양이다.(p. 193) (굵게 강조 : 인용자)
- 문혜영, 「한 잔 술에 취하여」 중에서 -
이런 숨겨진 내적 대화, 그에 대한 응답은 곧 타자에 대한 인식과 인정, 다른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심이 되기에 관계 지향적인 여성의 본질에 부합된다. 여성수필가는 아내인 자신이 왜 한 잔 술에도 금방 취하는지를 모르는 남편에게 대화의 언어로 알릴 수 있다.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마시는 일은 즐겁다는 표현은 대화의 생산성을 확보한다고 하겠다. 때로는 저항으로, 때로는 지지로 나타나면서 언어를 생산해 내는 능동적인 힘이 바로 이런 대화의 여성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수필가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독자나 사회가 전적으로 찬성할 것이라고 가정할 수 없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스토리를 전개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이 때 여성들은 자신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대화의 언어로 ‘지나치게’ 말하게 된다. 그렇듯 수필문학에 있어서 언술구조는 작가의 내면 성격까지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특질이 있다. 여성수필가가 대화 구문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전달하려는 것은 여성 의식과 관계가 깊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