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림동 순교성지 >
○ 죽림동 본당(곰실 공소)은 우리나라의 신앙 전래가 외국 선교사의 전교 없이, 스스로 신앙 교리를 찾아 그 가르침대로 살게 되면서 이루어진 것이 특징
○ 엄주언(嚴柱彦) 마르티노는 1872년 12월 10일(음)생, 열아홉 살이 되던 해인 1891년 우연히 “천주실의”와 “주교요지”를 읽고 감명을 받음
○ 엄 회장은 상주 사제 파견을 간청한 결과 마침내 곰실 공소가 본당으로 설립, 1920년 9월 초대 김유룡(金裕龍) 필립보 신부 부임
○ 곰실 공동체는 교우 전원이 가마니짜기, 새끼꼬기, 짚신삼기 등을 통해 약사리(藥師里) 고개 현 죽림동 성당 아래 골롬반 병원 터, 아래마당, 수녀원 터를 사서 개조하여 1928년 5월부터 춘천 본당의 옛 성당 사용
○ 죽림동 주교좌 성당은 연중 무휴 오전 11시 매일 미사를 보고 있으며 순교자는 천주교 태동시대가 아니라 6. 25전쟁 중 살신성인한 사제
○ 소양로 성당 - 1950, 6, 27일 집사 겸 복사인 김 가브리엘과 밧줄에 묶여 끌려가던 콜리어 고 안토니오 신부는 “가브리엘, 자네는 처자식이 있으니 꼭 살아야 하네. 저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면 재빨리 쓰러지게. 내가 쓰러지면서 자네를 덮치겠네.”라고 말했다. 예상대로 인민군 병사는 경고 한 마디 없이 총을 난사했다. 그때 김 가브리엘은 목과 어깨에 총상을 입었지만 자신을 끌어안고 쓰러진 콜리어 신부 덕분에 목숨을 건져 훗날 그 상황을 생생히 증언
○ 양양 성당 - 1950년 10월 8일 신부와 포로들이 놀랄 사이도 없이 시체 위에 업드리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바로 총탄이 쏟아졌다. 총을 맞은 사람들의 "살려 달라! 물을 달라!" 아우성 속에 "제가 가겠어요. 기다리세요. 제가 물을 드리겠어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광재 신부였다. 자신도 총을 맞아 사경을 헤매는 이광재 신부의 목소리였다고, 같이 업드렸으나 총을 맞지 않고 살아나온 한준명 목사와 평강고교 학생이었던 권혁기 군이 증언했다. 이광재 신부의 마지막을 본 목사는 "가톨릭 신부는 위대하다."고 증언
○ 성당 뒤뜰에는 “성직자 묘역” 있으며 이 묘역에는 1950년 남한에서 피살된 성 골롬바 외방 선교회 안토니오 신부, 라 프트리치오 신부, 진 야고보 신부의 3분 유해 안장
○ 북한지역에서 순교하여 유해를 모실 수 없었던 이광재 티모테오, 백응만 다마소, 김교명 베네딕토, 손 프란치스코 신부의 4분 가묘 조성
~ 죽림동 주교좌 성당 신호철 토마스 신부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