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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이사야 11,1-10
루카 10,21-24
동생 수녀님이 전화를 하였습니다. 어머니에게 육포를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알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전에 어머니와 함께 홍콩과 마카오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마카오에는 육포를 파는 거리가 있었고, 어머니는 그곳의 육포가 입맛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명동에는 마카오서 볼 수 있었던 육포를 파는 가게가 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육포를 좋아하시는지도, 명동에 육포를 파는 가게가 있다는 것도 잘 몰랐습니다.
어머니에게 육포를 보내드리면서 잠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육포를 드시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아들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은 아닐까!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면, 경륜과 슬기의 영이 함께 하면 고목에서도
아름다운 꽃이 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아름답게 꽃을 피울 것이라고 합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돌보아주고, 가난한 이, 아픈 이, 굶주린 이들이 위로를 받고,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낙원’을 이야기합니다.
1988년 저는 군대를 제대한 후에 ‘돈 보스코 직업 훈련원’에서 잠시 일을 했습니다.
그곳에는 멀리 외국에서 오신 신부님과 수사님들이 계셨습니다.
학생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밤에는 방송통신 고등학교 과정을 배우게 하고,
틈틈이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영어와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낮에는 용접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학생들을 위해서 후원회원들을 만나기도 하셨고,
재미있는 강론으로 학생들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수사님들은 직접 기술을 가르쳐 주셨고, 점심 식사 후에는 아이들과 함께 농구를 하셨습니다.
권위적인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늘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사랑과 관심을 주셨습니다.
존경받는 사제, 권위적인 사제, 엄한 사제들을 보았던 제게는 새로운 경험이었고,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사제가 된 후에 신부님과 수사님들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만주에 있는 ‘직업 훈련원’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한국은 이제 잘 살게 되었기 때문에 더 어려운 곳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70이 넘은 연세에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려는 신부님의 열정을 존경합니다.
수사님들은 멀리 아프리카로 가셨다고 합니다.
역시 더 어렵고, 가난한 곳을 찾아서 떠나셨다고 합니다.
신부님과 수사님들께서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를 ‘가별’이라고 불러주셨던 신부님이 생각납니다.
쉽고 편안한 길이 있지만 굳이 힘들고 어려운 길을 선택하셨던 신부님이 생각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더 좋은 집,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차, 더 좋은 것들을 얻으려고 공부를 합니다.
출세와 성공이 삶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또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가치를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책을 자주 읽고, 나는 누구인지를 고민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며,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이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참된 신앙인입니다.
나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얻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해하기 때문에 이해받을 수 있고, 용서하기에 용서받을 수 있고,
사랑하기에 사랑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에게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것이 참된 기쁨입니다.
그런 세상은 분명 있었습니다.
마더 데레사, 이태석 신부님, 오웅진 신부님은 그런 세상을 꿈꾸었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갔습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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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용승 요셉 신부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이사야 11,1-10
루카 10,21-24
여러분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오래 전에 글에서 본 통계에 관한 내용이 생각납니다.
그 통계는 많이 배운 이들과 자신이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만하는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과 비교했을 때 도박과 사기에 잘 빠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의 인식 틀 안에 어떤 사실이 수용되어 들어오게 되면,
그것이 가지는 가치와 공동의 선에 대한 구현 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욕심의 충족을 위한 것으로 변질되어 실현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탕주의에 가까운 도박과 대박의 달콤한 유혹인 사기에 쉽게 빠져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확률적 계산과 가능성의 범위를 논리와 이성으로 포장하면
많이 배운 이들, 똑똑하다고 자만하는 이들은 쉽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많이 배우지 못한 이들은 그것이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타당성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서 맞갖지 않으면 그것을 수용하는데 직관적으로 거부하고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사람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반성이
깃들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만하는 이와 스스로 부족하다고 겸손한 자세를 취하는
많이 배우지 못한 이들과의 더 뚜렷한 차이는 만족과 감사의 태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많이 배웠다는 사람과 똑똑하다고 자만하는 이들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만족과 감사가 상대적으로 많이 배우지 못한 곧 오늘 복음에서 언급한
“철부지” 이들과 비교해 볼 때 적다는 것입니다.
이는 많이 배운 사람들,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만하는 그들의 삶에 욕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 가지려고 하고, 더 누리려고 하고, 더 안락한 삶을 영위하길 바라는 탐욕에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이 향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배우지 못하고 주변에 머물렀던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에 대한 주님의 따뜻한 시선을 담고 있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많이 배우지 못하고 스스로를 슬기롭지 못한 이들이라고
겸손하게 고백하는 이들에게서는 욕심의 위험이 드리우지 않고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곧 그들은 세상의 욕심에서 자유로 왔고,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과 감사의 태도가 있음을,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선택하고 주님께 믿음을 두며, 주님의 말씀에
희망과 애정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제1독서에 이사야 예언자가 표현하는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는” 평화와 기쁨의 나라를 체험할 것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축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역시도 주님께 대한 참된 믿음과 희망의 토대로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행복의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 삶을 더욱 겸손하게 주님께 의탁해야 할 것이며,
주님으로 인해 충만함으로써 감사와 비움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부산교구 곽용승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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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이사야 11,1-10
루카 10,21-24
알몸으로 주님 맞이하기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의 첫 구절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과 함께 예수님의 즐거움을 이른 아침부터 함께 느끼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값진 사명을 수행하고 기뻐하며 돌아온 일흔두 제자를 맞이하신 후에,
비록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곧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의 배척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못 배운 철부지 같은 제자들이 당신을 믿고 따름에 대해서 아버지께 감사기도를 올리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 슬기롭다는 자들, 그리고 철부지들, 모두 예수님을 만나지만
같은 마음, 같은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일상에서의 우리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성찰해보면, 작은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나’와 ‘나를 둘러싼 또 다른 나’가 있습니다.
‘경험으로서의 나’, ‘지식으로서의 나’, ‘지위로서의 나’, ‘재물로서의 나’,
‘무엇 무엇으로서의 나’가 그것들 입니다.
‘나를 둘러싼 또 다른 나’는 내가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가 누군가를 간절히 만나려고 하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나를 둘러싼 또 다른 나’가 아니라 ‘나 자신’이 다른 이들을 만날 때, 그 만남은 순수할 수 있습니다.
만나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알 수 있습니다.
‘나를 둘러싼 또 다른 나’는 나의 삶의 지평을 넓혀주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담았던 맑고 순수한 마음의 눈을 가리고 왜곡된 시선으로
다른 것들을 보도록 이끌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나를 둘러싼 또 다른 나’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나를 둘러싼 껍데기를 벗어야 합니다.
조금만 게으르면 어느 새 ‘나를 둘러싼 또 다른 나’가 나의 자리에 비집고 들어와
마치 자신이 진짜 ‘나’인 것처럼 행사하기 쉽습니다.
철부지 어린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또 다른 자신’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것들을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사물들, 사건들과 있는 그대로 직접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를 둘러싼 또 다른 나’는 늘어갑니다.
자신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것들을 보다 제대로 보고 제대로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는 그 반대입니다.
점점 더 코끼리를 만지는 소경 꼴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면,
‘나를 둘러싼 또 다른 나’의 존재를 알게 되고, 쉽게 이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혹시 유혹에 넘어갔다 하더라도, 이내 그 사실을 깨닫고 자신을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대림 시기는 나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때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나에게 오시지만, 내가 꼭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주님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꼭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나를 둘러싼 또 다른 내’가 이 만남을 방해할 수 있고, 나에게 오시는 주님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왜곡되고 편협한 시선으로 보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대림 시기는 ‘나를 둘러싼 또 다른 나’를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벗겨내고 마지막 알몸뚱이인 ‘나 자신’이 남을 때,
비로소 나는 나에게 오시는 주님을 온전히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시는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이번 대림 시기는 주님을 정성껏 맞이하겠다는 이유로 오히려 이 것 저 것 또 다른 나로 나를 치장하여,
결국에는 주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좀 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금은 부끄럽겠지만 벗님들께서 입고 계시는 거추장스러운 옷들을 모두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주님을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