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과 서양철학전공
변 문 숙
초 록
최근 약 20년간 심의 민주주의는 공적 심의를 통한 정치적 정당성 확보를 주장하는 민주주의관이라고 인식되면서 이것을 나름대로 해석하는
다양한 배경의 이론가들을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이게 하였다. 그리고 사실상 해석의 여지가 많은 규정을 통해 심의 이념을 이해하는 접근이 심의
민주주의 진영의 양적 팽창에 어느 정도 기여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심의 이념에 대한 느슨하고 옅은 이해가 더욱 일반화된다면, 심의 이념 내에서만 발견되는 첨예한 규범적 판단의 척도가 활용되지 못한 채 사장(死藏)될 우려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의 민주주의가 질적으로 향상되기 위해 불가결한 지향점의 상실일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본고는, 옅고 넓은 의미의 심의 민주주의관에 대비되는, 그것만의 고유성과 정합성을 겸비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밀도 높고, 좁은 의미를 담은 심의 이념의 규명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러한 심의관에 비추어 민주주의의 절차적 요소와 실질적 요소라는 민주주의의 두
가지 구성 요소들에 대한 기존의 논의를 조명하는 미시적 고찰을 진행하고, 이어서 협의(狹義)의 심의 이념의 거시적 의의를 밝힘으로써 이러한
이념의 실현을 위한 논의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협의의 심의 이념을 규명하는 데에 필요한 단서(端緖)는 바로 상당수의 심의 민주주자들이 반복적으로 인용하는 하나의 신조(信條)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심의가 오직 더 나은 논변의 힘만을 반영하여야 한다는
것인데, 본고는 이러한 신조에 그것이 유래한 철학적 배경의 함의를 더하여 “더 나은 논변”에 의한 지배의 테제로 명명한다. 그리고 이 테제로부터
협의의 심의 이념의 두 가지 핵심 요건을 도출한다. 첫째 요건은 사실적
주장뿐만 아니라 규범적 주장에 대해서도 객관적 기준을 전제하여 타당성을 요구하고, ‘좋음’보다는 ‘옳음’의 문제를 엄격한 의미의 규범적 타당성의 논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인지적 요건인데, 이것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심의 이념은 그것이 비판하는 선호취합적 민주주의관과 차별되는 고유성을 확보할 수 없다. 둘째 요건은 진리와 옳음을 추구하되 겸허하게 자신
- ii -
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하고 독단을 경계하는 의지적 요건이며 이것을 갖추지 않으면 심의 이념은 정합성을 유지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절차적 요소에 대한 논의에서 기본적으로 심의 이념은 정치적 영향력의 차이를 공적으로 제시된 논변의 설득력에 비추어 허용한다. 이에 덧붙여 본고는 정치적 평등은 교육을 포함한 자원의 제공으로써
기본적인 능력의 계발을 통해 추구되고, 특정 사안에 대해 강력한 문제
해결 의지와 기여 가능성을 증명한 시민들에게 비공식적 공론장 뿐만 아니라 주요한 정책 결정에도 참여할 기회를 제공할 것을 제안한다. 한편
실질적 요소와 관련된 기존의 논의에서는 실체가 없는 도구적 해석이나
잠재적으로 억압적인 집단주의적 해석이라는 양극단을 피하는, 유의미하고도 비억압적인 도덕적 공동선 개념, 즉 정의(正義)의 개념이 부각된다. 이와 더불어 본고는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을 토대로 다수를 위해 소수의 권익이 희생되는 것을 막고 개인적 삶에 과도한 정치적 간섭을 배제할 것을 강조한다.
끝으로 본고는 새롭게 규명한 심의 이념을 철학과 민주주의의 결합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이 가능한 이유는 사실적, 규범적 타당성 검토를 통해 합리성과 불편부당성을 반영한 정치적 결정을 도출하려는 심의는, 논변으로 진리와 옳음을 추구하는 철학적 탐구와 유비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찰을 통해 본고는 심의 민주주의 이념이 짙은 의미로 해석될 때 플라톤의 소수의 철인 통치자를 다수의 철학적 시민으로 대체하는
정치적 이상으로서 중우정치(衆愚政治)를 우려하는 플라톤적 반(反)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처방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주요어 : 심의 민주주의, 정치적 정당성, 공적 이성, 시민성,
하버마스, 롤즈
학 번 : 2004-30043
- iii -
목 차
I. 서 론 ......................................................................................... 1
II. 심의 민주주의 이념의 새로운 이해 ....................................... 10
2.1. “더 나은 논변”에 의한 지배(支配) .................................. 11
2.1.1. 도덕적 객관성의 규명 .............................................. 13
2.1.2. 도덕적 객관성 적용 범위의 한정 ............................ 20
2.1.3. 타당성 요구자로서의 자기이해 ................................ 23
2.1.4. 협의(狹義)의 심의 이념 .......................................... 27
2.2. 협의의 심의 이념으로부터의 이탈 ................................... 29
2.2.1. 인지적 요건의 부재 ................................................. 29
2.2.2. 의지적 요건의 약화 ................................................. 38
2.3. 협의의 심의 이념의 정당화 ............................................. 46
III. 심의 이념과 민주주의의 절차적 요소 .................................. 51
3.1. 정치적 평등의 정당 근거 ................................................ 52
3.2. 기존의 우려와 심의적 해법 ............................................. 59
3.2.1. 개인 간의 정치적 역량의 차이 ................................ 59
3.2.2. 정치적 참여의 본질 ................................................. 65
3.3. 당면 문제들 ..................................................................... 70
3.3.1. 수행적 차원 ............................................................. 71
3.3.2. 제도적 차원 ............................................................. 78
- iv -
IV. 심의 이념과 민주주의의 실질적 요소 .................................. 85
4.1. 공동선으로서의 정의(正義) ............................................. 88
4.2.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 ........................................... 104
4.2.1. 옳음의 우선성과 공리주의 ..................................... 104
4.2.2. 옳음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 ................................. 118
V. “더 나은 논변”에 의한 지배의 의의(意義) .......................... 134
5.1. 철학과 정치 ................................................................... 135
5.1.1. 플라톤의 국가: 철학과 데모스의 단절 ............... 136
5.1.2. 철학에 대한 인식의 전환 ....................................... 142
5.2. 철학과 민주주의의 결합 ................................................ 146
5.2.1. 철학적 제도 ........................................................... 149
5.2.2. 철학적 시민 ........................................................... 160
VI. 결 론 .................................................................................. 175
6.1. 본문 내용 요약 .............................................................. 175
6.2. 중우정치(衆愚政治)에 대한 근본적 처방 ....................... 179
참고 문헌 .................................................................................. 185
Abstract .................................................................................... 192
- 1 -
I. 서 론
정치철학의 궁극적 목표는 가장 정당한 정치질서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러한 체제가 '민주주의(democracy)'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어의 민인(demos)과 통치(kratia)라는 낱말들로 조합된 민주주의는 ‘민인의 통치’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다르게 규정될 여지가 있으나. 이제는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정치체제로 널리 인식되고 있는 까닭에서이다.1)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통치라는 규정이 정치적 이상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이 표현이 두 가지 속성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국민을
위한다는 속성은 어떤 정치적 이상이든 그것이 정치적 이상이기 위해서 반드시
갖춰야할 요소이다. 피통치자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 체제는
당연히 모든 이들로부터 환영받을 수 없으므로 정치적 이상이 되려면 민주주의는 이러한 요소를 반드시 포함해야만 한다. 반면에 국민에 의한다는 속성은 민주주의 특유의 자기통치의 이상을 담고 있다. 피통치자는 법에 종속될 뿐만 아니라 법을 만든 자이기도하다.2) 이렇게 구성원의 참여 내지 동의를 보장하는
정치적 의사결정 절차(절차적 요소)와 실질적으로 정의로운 결과(실질적 요소)
를 약속한다는 인식 덕분에 민주주의는 독보적인 정치적 이상으로서 부각되었고 철학은 이러한 민주주의 이념을 구현할 수 있는 최선의 모델을 제시하는 작업에 참여해왔다. 1) 간혹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데모스(demos)를 빈곤한 계층에 한정하여 민주주의(democracy)를 바람직하지 못한 정치 체제를 지칭하는 데에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 데모스는 사회의 어떤 특정 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구성원 다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리고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이라는 표현은 미국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이 1863년 게티즈버그에서 행한 연설에 등장하는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원문에는 세 가지 요소가 언급되지만 이 중에서 “of the people"은 정부가 국민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절차적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결국 국민의 참여를 가리키는 ”by the
people"이라는 부분으로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2) 민주주의의 두 요소에 대한 설명은 라퐁(Cristina Lafont), “Is the Ideal of a Deliberative
Democracy Coherent?", In Deliberative Democracy and its Discontents, ed. S. Besson
and J. L. Marti, Ashgate Publishing Company, 2006. pp.4~5 참조.
- 2 -
주지하다시피 철학이 민주주의 담론을 독점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는 크게 기술적(descriptive) 차원과 규범적(normative) 차원으로 구분된다.3) 기술적 논의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를 하나의 현상(現像)으로 탐구하는 것으로서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라고 지칭된 통치방식이 어떻게 발생하고 변모하고 다양화되었는지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이러한 역사적, 정치학적 논의 외에도 정치와 관련된 여러 현상을 탐구하는 여타 사회과학적 접근, 즉 경제학적, 사회학적 고찰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규범적 차원의 논의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밝혀 하나의 이상(理想)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 때 민주주의는 논자에 따라 넓게 해석되어 '사회적' 이상으로 제시될
수도 있고 좁게 적용되어 '정치적' 이상으로 한정될 수도 있다.4) 기술적 논의와
규범적 논의는 서로 다른 성격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실현가능성이 없는 이상론은 무용하다고 판단하는 관점에서는 규범적 이상으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탐구가 현실의 민주주의 정체들에 대한 연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민주 정체라고 불리는 사회들이 실제로 작동하거나 현실적으로 작동하리라고 기대되는 방식에 대한 기술적 논의가 규범적 논의에 동반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과 현실은 양자 간의 괴리를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는
개념쌍이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규범론과 현실론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관계는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 바람직함에도 불구하고, 간혹 규범적인 철학적 논의가 그것의 이상주의적 경향을 지적하는 현실주의적인 사회과학적 접근의 도전에 압도되기도 한다. 근래의 예에서도 드러나듯이 20세기 중반을 지배했던 민주주의 이론들은 대개 후자의 접근을 취한 것이었다. 보만(James Bohman)과 레그(William Rehg)의 분석에 따르면, 슘페터(Joseph Schumpeter)를 대표로 하는 엘리트주의적 민주주의 이론이 그 중 하3) 커닝햄(Frank Cunningham)은 여기에 의미적(semantic) 차원을 덧붙이지만, 본고에서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의미적 물음이 기술적 차원이나 규범적 차원의 논의로 흡수될 수 있다고 보았다. Frank Cunningham, Theories of democracy : A Critical Introduction, Routledge, 2002. pp.10~12 참조. 또한 Giovanni Sartori, The Theory of Democracy
Revisited (Part one: The Contemporary Debate), Chantham House Publishers, Inc. 1987
(이하 Sartori 1987로 표기) pp.xi~xii (번역본: 민주주의 이론의 재조명 I p. 18) 참조4) 그리고 지금까지 살펴본 두 차원 위에 다양한 민주주의적 이상들을 다시 상호 비교하고 평가하는 메타적 성격의 논의도 존재하는데, 대개의 경우 이러한 작업은 새로운 민주주의 이상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에서 진행되므로 규범적 논의에 포함시켜도 무방할 것이다.
- 3 -
나이다. 이것은 현대 민주주의 정체의 시민들이 정치에 무지하고 무관심하며
조종당하기 쉽다는 정치사회학적 발견과 나치당의 등장이 말해주듯이 대중의
정치참여가 매우 위험할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 그리고 베버(Max Weber)의
비관적인 현실주의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슘페터의 결론은 모든 이들이 동의할 수 있는 공동선이란 존재하지 않고, 통치는 엘리트의
손에 맡겨지는 것이 최선이며 민주주의는 다음 선거에서 낙선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통해 정치인들을 소극적으로 통제하는 체제로 축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다운즈(Anthony Downs)는 경제에 적용되는 개념의 범주를 정치에
적용한 대표적 예로서 정당을 정치 시장에서 정치적 소비자에게 자신의 정책을
팔려는 의도로 경쟁하는 일종의 기업에 비유한다. 이러한 경제학적 민주주의
이론은 시민들을 합리적 선택자로서 묘사하였고 정부가 시민들이 선정치적인
이해관심(prepolitical interests)에 반응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슘페터와
마찬가지로, 그도 시민들을 투표를 통해 정치를 통제하는 수동적인 소비자로, 정치 과정을 공동선의 추구보다는 경쟁하는 이해관심들의 권력을 향한 투쟁으로 보았다. 이에 가세하여 사회적 선택 이론가들은 선호 취합의 메커니즘에 대해 비관적인 결론을 내렸는데, 이것은 선호의 다양성이 충분히 확보되면 모든
시민에게 수용가능한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부 이론가들은 이를 대중 참여주의를 비판하는 근거로 활용하였다. 또한
민주주의의 다원적 모델의 대표자인 달(Robert Dahl) 역시 메디슨(James
Madison)과 유사하게, 집단의 이해관심 간의 경쟁이 민주주의의 중요한 조건이라고 보았다. 비록 달의 권력 분산적이고 다두적인 형태의 다원주의는 슘페터의 엘리트주의를 대체하긴 하였으나, 이 역시 경쟁과 이해관심과 투표를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5)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태는 역전될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른바 현대 심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 논의가 시작된 것이다.6) 사실5) Bohman and Rehg, “Introduction”, in Deliberative Democracy: Essays on Reason and
Politics, ed. by Bohman and Rehg, MIT Press, 1997. pp. 10~12
6) “deliberative democracy”는 우리말로 ‘심의(審議)’ 민주주의 이외에도 ‘토의(討議)’ 또는 ‘숙의(熟議)’ 민주주의로 번역되고 있다.
- 4 -
상 그러한 명칭이 정치 이론가 베셋(Joseph M. Bessette)에 의해 도입될 당시에는 누구도 그것이 큰 반향을 일으킬 규범적 이념에 활용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980년에 출간된 논문에서 베셋은 현대의 대의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의회가 건전한 심의 기능을 회복할 것을 역설하였다. 다수결의 위험인 다수의 횡포를 억제하고 공익에 부합하는 결정을 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건전한 심의(sound deliberation)이며, 건전한 심의는 광범위한 지식과 공동의 목표들에 대해 집단적인 추론을 할 수 있는 여건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의회는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이에 근접한 조건을 갖추었다는 것이다.7) 1987년에 정치 학술지에 게재된 마냉의 논문은, 미국 헌법 입안자들의 견해를 주로 다뤘던 베셋의 논문과는 사뭇 달랐다. 철학과 정치학을
함께 연구한 프랑스 출신의 마냉은 심의 개념을 철학적 논의와 관련짓기 시작한다. 그는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으로 유명한 미국의 정치철학자 롤즈(John Rawls)를 직접적으로 언급했으며 독일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사회이론가인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담론 이론을 의식하고 있었고 그것으로부터 자신의 입장을 어느 정도 차별화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마냉 이후로 코헨(Joshua Cohen), 벤하비브(Seyla Benbabib), 굿만(Amy Gutmann)과 톰슨(Dennis Thompson), 드라이젝(John S. Dryzek) 등의 많은 영어권의 철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이 속속 심의 민주주의 이론을 정립하는 작업에 합류하였다.
심의 민주주의 이론가들은 경제적 모델과 다원적 모델을 선호취합적 민주주의관(the aggregative view of democracy)으로 통칭하고 여기에 깔려있는 중심 가정들에 의문을 표명하면서 반격에 나섰다. 간단히 정의하면 선호취합적
민주주의관은 민주주의를 이미 주어진 개인들의 이해관심이나 선호를 취합하는
정치적 기제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부분은 취합적 관점의 문제를 지적하는 심의주의자들의 초점이 대부분 규범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시민들의 선호가 심의 과정에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적 주장이지만, 정치적 결정이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선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어야
하고 그것이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to be legitimate) “자유롭고, 동등하고, 이성적인 행위자들 간의 심의 결과”이어야 한다는8) 주장들은 분명 규범적7) Joseph M. Bessette, “Deliberative Democracy: The Majority Principle in Republic
Government", in How democratic is the Constitution?, 1980. pp.102~116
- 5 -
인 성격의 것이다. 이는 심의주의가 ‘현실의 민주주의 체제는 무엇인가’의 문제로부터 다시 ‘정당한 민주주의 체제는 무엇인가’의 문제로 논의의 흐름을 전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흐름의 배후에는 칸트의 도덕 철학의 전통을
각자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전승한 두 명의 철학자, 하버마스와 롤즈가 있었다. 물론 심의주의에 미친 두 사람의 영향의 성격은 조금 다르지만, 논의를 직간접적으로 촉발시키고, 그 이후 논의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이들이 없는 심의 민주주의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러한 비교적 단순한 규정을 토대로 판단하면, 심의 민주주의의
정체는 일견 생각만큼 그리 신선하거나 분명하지 않아 보인다. 우선 심의의 강조는 그리 신선해보이지 않는다. 엘스터(Jon Elster)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 간의 토론에 의한 결정이라는 심의 민주주의의 이상과 실천은 혁신적인 이념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이상 자체만큼 오래된 것”이라고 했는데, 따지고 보면
어떤 민주주의 모델도 토의 없이 정치적 의사 결정을 하자는 주장을 한 적이
없으니 그의 말이 맞는 듯도 하다. 게다가 심의 민주주의 진영에서 나타나는
다각적인 관점의 차이로 말미암아 이들이 단일한 이념을 추구하는 것이 분명한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한다. 굿만과 톰슨의 설명에 따르면, 심의의 가치(value), 위상(status), 목표(aim), 범위(scope)에 따라 다양한 입장이 병존하며,9) 에스트룬드(David Estlund)가 지적하듯 민주 절차의 정당성(legitimacy)
8) Jon Elster, "Introduction", in Deliberative Democracy, ed. J. Elst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이하 Elster 1998로 표기) p. 5 9) 이들은 심의 민주주의 논의에서 심의의 가치(value), 위상(status), 목표(aim), 범위(scope)
라는 각 항목마다 존재하는 대립 구도를 보여준다. 이들에 따르면, 첫째 심의의 가치에 대해서는 심의를 가장 정당화될 수 있는 정책에 도달하는 수단적(instrumental) 가치만을 강조하는 입장과 상호 존중의 표현적(expressive) 가치를 중시하는 입장으로 분류된다. 둘째 심의의 위상에 대한 이견이란 정치적 결정이 내려지는 절차에만 원칙이 적용되어야한다는 절차주의적(procedural) 입장과 (다수결 같은) 원칙을 절차에 도입하는 것만으로는 부정의한 결과의 산출을 막는 데에 불충분하므로 이를 방지할 수 있는 구체적인 도덕적 내용을 담은 원칙이 필요하다는 실질주의적(substantive) 입장 사이의 것이다. 셋째 심의 목적을 포괄적이거나
두터운 공동선 개념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는 공감적(consensual) 입장과 옅은 공동선 개념, 즉 자유롭고 동등한 개인들 간의 협력의 공정한 조건들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다원주의적(pluralist) 입장 간의 이견이 존재한다. 넷째, 심의의 범위에 대한 논의는 여러 층위가 존재한다. 먼저 심의 참여자의 범위를 보통 시민까지 확장하는 참여적(participatory) 입장과 대표자에 의한 간접적인 형태를 선호하는 대의제적(participatory) 입장이 갈라진다. 또한 심의 원칙의 적용 범위를 이 정부 기관(government)에 적용된다고 보는 입장과 시민 사회(civil
- 6 -
이 절차의 공정성에 있다고 보는지 아니면 결과의 옳음(correctness)에 있다고
보는지에 따라서도 분류가 가능하다. 물론 양극단의 중간쯤에 위치한 에스트룬드 자신의 대안까지 포함하면 입장은 더욱 다양해진다. 그래서 혹자는 과연 이러한 차이들이 사소한 것일지 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현대
심의 민주주의의 이념은 무엇이며 어떤 의의가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의 중요성을 재확인할 수 있도록 현실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이제 스스로를 민주주의라고 지칭하지 않는 정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에 대한 관측은 일찍부터 여러 민주주의 이론가들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가령 맥퍼슨(C. B. Macpherson)은 1965년 출간된 저서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50년 동안 이러한 현상이 생겨났음을 술회하면서, 이 같은 현상으로 말미암아 민주주의가 여러 의미를 가진, 심지어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 것처럼 통용되었다는 사실을 유감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반성이 그로 하여금 다양한 민주주의 개념과 이론들을 점검하고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관을 재정립하는 기획에 동기를 부여했던 것이다.10)
그런데 흥미롭게도 최근 약 30년 동안 유사한 일이 심의 민주주의라는 이념에도 일어났다. 극단적인 다원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민주주의 이론가들이 자신의 입장을 일종의 심의 민주주의관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개 양상을 목도하면서, 이를 심의의 중요성이 널리 인식된 덕분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하거나 적어도 중립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실제로 국내외 많은 연구들은 모든 종류의 심의관들을 동일한 선상에 놓고 유사한 특징을 공유하는 이론들끼리 묶어 분류하는 시도들을 기본적으로 행해왔다.
가령 정치 철학자 무페(Chantal Mouffe)는 심의 민주주의 이론들을 크게
두 가지 부류, 즉 하버마스 계열과 롤즈 계열로 나누었다.11) 그런데 정규호는
society)로 확장된다고 보는 입장이 서로 이견을 보인다. 마지막으로 심의를 통한 결정을 정당화해야하는 대상의 범위를 자국으로 한정하는(domestic) 입장과 국제적으로 넓히자는(international)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Amy Gutmann and Dennis Thompson, Why
Deliberative Democracy, Princeton University, 2004. pp.21~39
10) C. B. Macpherson, The Real World of Democracy. Oxford University Press, 1966.
pp.1~2
11) Chantal Mouffe, The Democratic Paradox, Verso, 2005, pp 83~93 참조.
- 7 -
이러한 두 부류에 하나를 더 추가하여 심의 민주주의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그는 롤즈 계열을 ‘규범’중심적 심의 민주주의로 명명하고, 굿만과 톰슨, 코헨 등이 여기에 속한다고 설명한다. 정규호에 따르면, 롤즈 계열의 특징은 심의적 절차만으로는 정당성을 보장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어떤 외재적인 규범 또는 기준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롤즈의 경우에는 공적 이성(public reason)이 그러한 규범 또는 기준이라는 설명이다. 반면에 하버마스 계열은 ‘과정’중심적 심의 민주주의라고 지칭되는데, 정당성을 심의의 과정 또는
절차에서 찾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벤하비브, 보만 등이 속한다. 마지막으로 정규호는 심의 민주주의를 소통 민주주의(communicative
democracy)로 대체하려는 영(Iris M. Young), 심의 민주주의보다는 담화 민주주의(discursive democracy)라는 명칭을 선호하는 드라이젝, 그리고 다른 여성주의적 이론가들과 녹색정치 이론가들을 함께 묶어서 ‘성찰’중심적 심의 민주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들이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제약할 수 있는 규범이나 합의
형성의 강조를 거부하고 “참여의 맥락을 성찰적으로 재구성할 것”을 강조한다고 설명한다.12)
하지만 이렇게 심의 민주주의 논의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을 자신의 입장을
일종의 심의 민주주의관으로 생각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심지어는 심의 민주주의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성적 논변의 중요성을 격하시키는 이론가마저도 심의 민주주의자로 간주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앞서 민주주의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어떤 이념이 방만한 해석을 통해 확산되는
것은 오히려 우려할만한 것이다. 정치적 이상으로서의 민주주의 성립에 필요한
요소를 결여하거나 민주주의의 가치와 모순된 요소를 포함한 정체가 스스로를
민주주의라 부르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을 가릴 수 있는 것처럼, 심의 민주주의 이념의 고유성을 희석시키고 이론적 정합성을 떨어뜨리는 요소들의 잔존을
12) 정규호, “심의 민주주의적 의사결정논리의 특성과 함의”, 시민사회와 NGO, 2005, 제3권, 제1호, pp. 29~54 참조. 김명식은 심의 민주주의 이론가들을 공화주의, 자유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다양한 배경에 따라서 분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김명식, “롤즈의 공적 이성과 심의민주주의”, 철학연구, (Vol.65, 2004) 참조. 이영재와 오현철은 심의 민주주의 이론가들간의 차이를 쟁점을 중심으로 대비한다. 이영재, “토의 민주주의의 쟁점과 과제” 정치비평, (통권 제13호, 2004), 오현철, “토의민주주의 이론의 쟁점”, 한국정치학회보, (제40집, 제5호, 2006) 참조. 한편 장동진은 특별한 분류를 시도하지 않고 주요 심의 이론가들을 병렬적으로 다룬다. 장동진, 심의 민주주의: 공적 이성과 공공선, (박영사, 2012)
- 8 -
허용할 경우 심의 이념의 규범적 날을 무디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정치적 이상으로서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이론가들이 민주주의관 자체에
대한 반성적 고찰을 주도했듯이 심의주의 진영 내부를 점검하는 과제는 심의
민주주의에서 희망적 가능성을 보았던 이들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심의 이념 특유의 본질을 명확히 제시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이상으로서의 민주주의 이념의 발전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민주주의의 이상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전통적인 숙제들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미시적으로는 절차적 요소와 실질적 요소라는 두 가지 구성 요소들의
정확한 의미를 드러내야 한다. 국민에 의한다는 것과 국민을 위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진영 내에서도 다양한 의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거시적으로는 심의 이념이나 민주주의 자체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두 가지 구성 요소가 어떤 조화를 이루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심의 민주주의 이념의 탁월성과 실현가능성을 동시에 입증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제까지 각종 민주주의관들이 나름의
해법을 제시해왔다. 하지만 적어도 심의 민주주의자들에게는 심의적 접근이야말로 이러한 문제들을 해명하는 데에 가장 적절하기 때문에 반드시 심의 이념을 적용하여 이러한 문제들에 답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도 먼저 심의의 이념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순서이다.
본고는 이러한 두 가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세 단계의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우선 첫 번째 단계에서는 심의 민주주의 이념의 고유성과 정합성을 확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들을 규명하는 본고의 일차적 목표를 추구한다. 이러한
목표 하에 II장에서는 그 동안 심의 민주주의 진영의 팽창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판단되는 통상적인 이해보다 한층 더 두터운 의미의 심의 이념을 분리해내고 이를 정당화한다. 이 같은 방식으로 심의 이념의 정체성을 공고히 한 후에는, 민주주의의 미시적 과제와 거시적 과제에 도전하는 것이 본고의 이차적
목표이다. 그래서 III장과 IV장에서는 먼저 미시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심의 이념에 비추어 민주주의의 두 가지 구성 요소인 절차적 요소와 실질적 요소를 각각 재조명하고 관련 문제들을 다루는 두 번째 단계의 논의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논의에는 앞서 정립한 심의 이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심의 민주주
- 9 -
의 진영의 기존 논의들에 대한 분석과 보완 작업이 포함된다. 그 다음, V장에서는 세 번째 단계로서 거시적 과제를 수행한다. 여기서 바로 본고가 제시한
심의 이념의 의의(意義)를 밝히게 되는데, 이러한 논의는 새롭게 규명된 심의
이념의 진정한 이상적(理想的) 면모를 드러내고 그러한 이상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의미가 있다.
- 10 -
II. 심의 민주주의 이념의 새로운 이해
심의 민주주의 이념은 무엇인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두 가지 대조적인 방식으로 제시될 수 있다고 본다. 하나는 자신을 심의 민주주의의 옹호자로
인식하는 모든 이론가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몇 가지 특징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념을 가능하게 만든 철학적 배경에
주목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전자가 농도 옅은(thin) 규정이라면 후자는 농도 짙은(thick) 규정이고, 전자가 넓은 의미의 심의관이라면 후자는 좁은 의미의 심의관이다. 실제로 정치학과 정치철학의 문헌에서 발견되는
심의 민주주의관의 정의는 이러한 양극단 사이의 어떤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가령 심의 민주주의관을 단순한 정치적 정당성(legitimacy)에 대한 관점, 즉 공적 심의의 과정에서 시민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만큼만 강제성을 띠는 정책들이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시각으로 규정하는 것은13) 전자에 가깝고, 여기에
덧붙여 참여자들이 합리성(rationality)과 불편부당성(impartiality)이라는 가치를 중시하는 이들이어야 함을 동시에 강조하는 규정은14) 후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 장에서 나는 심의 민주주의 이념에 대한 두 가지 이해방식 중에서 후자를 취해 협의(狹義)의 심의 민주주의 이념을 규명할 것이다. 협의의 이념은 기본적인 심의적 정당성 요구, 즉 광의(廣義)의 심의관에 추가적으로 두 가지 요건을 더하면 충족되는 것으로 규정된다. 그래서 이러한 두 요건들을 결여하거나 불완전하게 만족시키는 심의관은 단지 광의의 심의관에 머무르는 것으로 분류될 것이다. 협의의 심의 민주주의 이념을 규명한 다음에는, 심의 진영의 논의
중에서 그로부터 벗어나는 몇 가지 예를 살펴보고 이들의 문제점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을 마무리 하면서 광의의 심의 민주주의관이 아닌, 협의의
심의 민주주의관으로 접근해야할 이유를 다시 강조하도록 하겠다.
13) Cristina Lafont, “Religion and the public sphere: What are the deliberative obligations
of democratic citizenship”?, Philosophical Social Criticism vol. 35, pp.127~150, 2009, (이하 Lafont 2009로 표기), p.128
14) Elster 1998, p.8
- 11 -
2.1. “더 나은 논변”에 의한 지배(支配)
협의의 심의 이념을 광의의 심의 이념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실마리는 바로 심의 민주주의자들이 빈번하게 인용하는 하나의 신조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신조는 심의 민주주의 논의를 주도하는 대표적 철학자들 중 한 사람인 코헨이, 최근 출간된 자신의 저서의 서론에서 다년간 민주주의이론을 연구해온 자신의 철학적 노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할 때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내가 결국 정착하게 된 접근은 심의 민주주의의 이념이었다. 심의 민주주의자는 민주주의가 단순히 집단적 의사결정의 과정에서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우함이나 집단들 간의 공정한 타협에 관한 것일 뿐만 아니라 공통의 관심사에 대해서 동등한 자격으로 함께 사고함(reasoning)에 관한 것임을 강조한다. (또는 정당화의 기초로서 우리의 공통된 이성에 의지함으로써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으로도 묘사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오직 더 나은 논변의 힘이 아닌 다른 어떤 힘도 반영하지 않는 과정을 통해
도달되는 결정이라는 하버마스의 이상에 의해 부분적으로 감명을 받았다.15) (강조 첨가)
위의 인용문에서 내가 강조한 구절은 집단적 의사결정을 할 때 오직 “더 나은
논변”의 힘만이 작동함을 강조하므로, 이를 줄여서 일단 “더 나은 논변”의 신조라고 명명해보자. 그런데 분명 이 압축적이고 인상적인 표현에 의해 영감을 얻은 이들은 코헨뿐만이 아니었으나, 모든 심의 민주주의자들이 이러한 표현이
탄생할 수 있었던 철학적 배경에 주목하고 그러한 맥락이 함의하는 바까지 철저하게 수용하였는지는 의심스럽다. 이후의 논의에서 드러나겠지만, 심의 민주주의자들의 논의를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그 표현의 중요성 대한 인식에서도
편차가 존재한다.16)
15) Joshua Cohen, Philosophy, Politics, Democracy,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 p. 7
16) 이러한 신조를 수용하는 것이 무엇을 함의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한 듯 보이는 이론가로 대표적인 예로는 심의 민주주의관에 우호적인 엘스터(Jon Elster)가 있다. 그리고, 심의 민주주의에 대해 거리를 취하고 그것의 보완을 촉구하는 논문을 쓴 공동체주의자 왈저(Michael
Walzer)도 하버마스가 심의 민주주의 이념의 형성에 미친 결정적 영향을 어느 정도는 간파한
것으로 보인다. 왈저는 심의 민주주의를 “독일의 의사소통 행위와 이상적 담화 이론의 미국판”이라고 대담하게 정의했던 것이다. (“토론 정치와 그 한계” 자유주의를 넘어서, 철학과
현실사, 1999. p.70) 물론 이러한 왈저의 규정은 다른 이들이 그것을 수용해야할 어떤 이유
- 12 -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본래 이 표현은 하버마스가 타당성을 주장하는 담론의
특징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사용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하버마스가 말하는 담론의 특징들이란, 괄호처진 주장, 제안, 또는 경고들이 논의의 대상이고, 검토되는 타당성 주장을 시험하는 목적 이외의 다른 것 때문에 참여자, 논의 주제, 논의 참여가 제한되지 않으며, 이 때 더 나은 논변 이외의 힘은 행사되지 않고, 그 결과 진리에 대한 협력적인 탐구 이외의 다른 모든 동기는 배제된다는 것이다.17) 그래서 하버마스에게서 사실상 “더 나은 논변”의 신조는 외부로부터 다른 압력이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진리를 탐구하는 것 이외의 동기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이제부터 이러한 하버마스의 논의 맥락을 충분히 반영한 “더 나은
논변”의 신조를 “더 나은 논변”에 의한 지배의 테제라고 부르겠다.
사실상 하버마스의 체계에서 “더 나은 논변”의 힘만을 반영하는 담론의 논의는 실은 수면 위로 극히 일부만을 노출한 거대 빙산의 정상과도 같다. 그 수면 아래에는 철학, 사회학, 정치학, 법과 문화 연구의 이론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 중에서 우리의 논의와 가장 밀접한 부분은 역시
도 제시하지 않았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사실 그의 규정은 상당히 배타적이라서 어떤 설명이나 정당화 없이 제시되기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왈저의 정의가 불완전한 또 다른 이유는 심의 민주주의를 논하면서 통상적으로 거론되는 미국의 입헌 민주주의 전통과 현대 공법에서 자치에 관한 공화주의적 담론과 선진 산업 사회들의 정치에 대한 급진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비판적 논의, 그리고 특히 롤즈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우선 이론적인 측면에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과 담론 윤리학이 직접적으로 토대를 제공했다면, 롤즈는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연구에 천착함으로써 하버마스의 규범이론이 영어권에 영감을 줄 수 있는 풍토를 조성했다. 더구나 롤즈는 다원적인 현대 사회에서의 정치적 토론에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공적 근거들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는 점에서 심의 민주주의 이론에서 다루어야할 중요한 문제들 중 하나를 선구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코헨은 롤즈가 정의로운 사회에서의 민주적 정치에 대해 설명할 때, 심의 민주주의의 중심적 특징들 중에 일부를 강조하였다고 평가한다. 코헨에 따르면, 첫째 롤즈의 질서정연한 사회에서 정치는 공익에 대한 대안적
견해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토론이 조직된다. 둘째, 롤즈에서 민주적 질서의 이상은 시민들에게 명시적인 방법으로 만족되는 평등주의적인 함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셋째, 롤즈는 민주적 정체(政體)는 자존감의 토대를 마련하고 정치적 경쟁력을 높이고 정의감 형성에 이바지
하는 방식으로 조직되어야 하며, 또한 시민간의 연대감과 정치문화의 바탕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J. Cohen, "Deliberation and Democratic Legitimacy", in Bohman J &
William R (eds), Deliberative Democracy: Essays on Reason and Politics, MIT Press,
Cambridge, MA, 1997. 이하 Cohen 1997a로 표기. p.68 )
17) Jürgen Habermas, Legitimation Crisis, trans. by T. MacCarthy, Beacon Press, 1973, (이하 Habermas 1973으로 표기) pp.107~108
- 13 -
담론 윤리학과 의사소통행위이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론들과 연결된 복합적인 체계 내에서 “더 나은 논변”의 적용 범위는 사실의 문제뿐만 아니라 도덕의 문제에까지 확장된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의 문제에서 뿐만 아니라 도덕의 문제에서도 객관적인 기준이 있을 수 있다는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이로부터 객관적인 기준이 적용되는 한도 내에서만 도덕의 문제의 결론을 기대할 수
있다는 입장이 파생된다. 또한 “더 나은 논변”에 의해 설득당할 용의가 있다는
것은 사실 판단이건 당위 판단이건 자신의 판단보다는 더 나은 것이 존재할 가능성을 인정하는 지적 겸양, 그리고 이론적 진리와 실천적 진리의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로서의 자기이해를 함축한다. 이제 이러한 분석을 관련된 하버마스의
저작을 살펴보면서 확인해보자.
2.1.1. 도덕적 객관성의 규명
하버마스의 체계에서 “더 나은 논변”이 언급될 때는 사실의 문제뿐만 아니라 당위의 문제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더 나은 논변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버마스는 어떤 방식으로 당위 영역의 객관성을 확보하였는가? 우선 하버마스는 독특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도덕에 대한 회의주의를 극복하려 하였다. 그가 보기에는 윤리적 주관주의도 문제가 있지만 윤리적 객관주의도 문제가 있었다. 사실 양자는 하나의 잘못된 전제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전제는 바로, 어떤 명제든지 그것이 진리성이나 타당성을 주장하려면 기술적 명제가 진리성이나 타당성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전제 때문에 양자는 모두 잘못된 결론에 도달한다고 하버마스는 설명한다. 객관주의는 무리하게 도덕적 진리를 사실적 진리와 동일한 유형으로 전제했기 때문에 도덕적 명제가 검증이나 반증과 같은 기술적 명제를
검사하는 규칙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면 대응할 방도가 없다. 이를 빌미로 실천적 문제의 진리수용성을 아예 폐기해야한다는 주관주의적 주장에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주관주의자들은 당위 명제를 감정이나
명령이나 평가의 언어로 이해하고 자의적으로 표현되거나 채택되는 것으로 묘사하여 정당화의 가능성을 아예 막아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회의주의로 귀결된
- 14 -
다.18)
도덕 인지주의의19) 노선을 걷는 하버마스의 새로운 제안은 우리가 도덕적
주장을 할 때, 엄밀한 의미의 진리성을 포기하는 대신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는 것이다.20) 타당성 주장이란 자신의 진술을 근거를 들어 “비판에 대해 방어”하는 주장으로서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상호이해를 도모하는 의사소통을 하는 동안 견해의 불일치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속해 있는 세 가지 세계, 즉 자연(객관적) 세계, 사회(상호주관적)
세계, 내면(주관적) 세계에 대해 적용될 수 있다. 객관적 사태들에 대한 사실적
진술로는 진리성 주장을, 사회 집단의 상호주관적 관계에 대한 도덕적 진술로는 정당성(옳음) 주장을, 각자의 내면에 대한 표현적 진술로는 진실성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중에 진리 주장과 옳음(정당성) 주장은 근거 제시를 통해서, 진실성 주장은 일관된 행위를 통해서 타당성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다.21) 이렇게 하버마스는 진리성 주장 위에 더 포괄적인 타당성 주장의 개념을 상정하고, 도덕적 판단을 사실 판단과 나란히 놓고 또 다른 유형의 타당성
주장이라고 해명함으로써 양자 간의 유사성을 드러낸다. 즉 도덕적 판단들은
진리 주장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것과 같은 타당성 주장으로서 유비적이라는
것이다. 두 가지 타당성 개념을 결합시키는 것은 담론의 절차를 통해 검토된다는 사실이고 양자를 분리하는 것은 각각이 서로 다른 세계, 즉 사회 세계와 객관 세계와 관련된다는 점이다. 18) J. Habermas, Moral Consciousness and Communicative Action, trans. C. Lenhardt and
S.W. Nicholsen, The MIT Press, 1990. p. 54, 이하 Habermas 1990으로 표기 (번역본:
도덕의식과 소통적 행위 pp. 89~90)
19) 통상적으로 메타 윤리학에서는 도덕적 판단을 여러 차원에서 조명하는데 각 층위마다 도덕 판단의 객관성을 주장하는 측과 주관성을 지적하는 서로 대립하는 입장들이 존재한다. 가령 존재론적(ontological) 차원에서 도덕적 판단이 인간의 생각으로부터 독립된 내용을 가진
사실을 지칭하는지 여부에 대한 입장은 이를 긍정하는 실재론(realism)과 부정하는 반실재론(irrealism / antirealism)이 대조를 이룬다. 또한 인식론적(epistemological) 차원에서는 도덕적 판단이 믿음을 표현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이를 긍정하는 인지주의(cognitivism)와 부정하는 비인지주의(noncognitivism)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 실재론자들은 도덕적 판단을 도덕적
사실에 대한 믿음으로 보기 때문에 동시에 인지주의를 표방하지만, 모든 인지주의가 인간의
생각으로부터 독립되어 존재하는 도덕적 사실을 상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인지주의자가
반드시 실재론자는 아니다. 20) Habermas 1990, p. 56 (번역본 p.94)
21) Habermas 1990, p. 58 (번역본 p.96)
- 15 -
그래서 타당성 주장이 이렇게 서로 다른 세계에 관계함으로써 갖게 되는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각각의 객관성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하다. 이때 우리는 먼저 객관 세계에 대한 타당성 주장과는 달리 사회 세계에 대한 타당성의 주장은 좀 더 복잡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생각해보면, 진리 타당성 요구와 관계하는 객관 세계는 하나이지만 옳음 타당성 요구와과 관계되는 상호주관적 세계는 이중적 구조를 갖는다. 말하자면 현재 통용되는 관행, 정책, 법체계로 이루어진 현실의 사회 세계와 타당한 관행, 정책, 법체계로만 이루어진 이상적인 사회 세계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적 명제의 타당성(즉, 진리성)은 어떤 사태의 존재를 의미하지만 규범적
명제의 타당성(즉, 옳음)은 어떤 사태가 존재한다든지 또는 반드시 존재하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상적 사회 세계와 인식적으로 관계하고
현실의 사회 세계와 실천적으로 관계한다고 해석해야한다. 쉽게 말하면, 어떤
규범이 타당하다는 판단은 그것이 이상적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며 그 규범이 현실화되려면 우리가 그것을 준수하는 것, 즉 실천이 다시 필요하다.
하버마스는 객관 세계와 사회 세계에서 타당성의 주장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22) 첫째, 객관 세계와 사회 세계의 존재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화행(speech act)이 사실과 관계하는 방식과 규범과 관계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우선 객관 세계는 우리의 화행과 별개로 “타당성과는 무관하게 존재”한다. 그것에 대한 어떤 진술이 참인 것은 우리에게 실용적으로 의미가 있을 뿐, 객관 세계의 존립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하버마스가 “진리에 대한 주장은 오직 화행에 내재”하고, “진리에 대한 주장은 사물들과 내재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인 듯하다. 반면에 사회적 실재는 그것이 정당하다는 근거가 없다면 그것의 존재의 이유를 보장받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정당성은 우리의 타당성 주장을 통해서 검토된다. 정당성의 유무는
규범에게 귀속되고 우리의 화행은 타당성 주장을 통해 정당성과 관계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버마스는 사회적 실재는 “본래적으로 규범적 타당성 주장들과
연결”되어 있고 규범적인 “타당성 주장의 소재는 본래 규범이며 오직 파생적으로만 화행 속에 존재”한다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22) Habermas 1990, pp.61~62 (번역본 pp.99~100)
- 16 -
둘째 하버마스는 담론의 절차를 통해 도달된 합의의 의의도 그것이 객관 세계와 사회 세계 중 어느 것에 관한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설명한다. 우선
전자의 경우에 담론을 통해 성취된 합의는 단언적 명제의 “진리 조건들이 충족된 것을 표시한다(signify).” 반면에 후자의 경우 담론을 통해 성취된 합의는
하나의 규범이 “인정할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정당화한다(justify).” 여기서 합의는 스스로 타당성의 조건들의 충족에 기여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 이성적 수용가능성은 “단언적 명제가 참임을 단지 가리킨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 이성적 수용가능성은 “도덕적 규범들의 타당성에 구성적으로 기여한다.” 이는 이론적 지식은 주로 발견을 통해 획득되지만 도덕적 통찰은 구성의 요소가
이보다 훨씬 많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하버마스는 “구성과
발견이 서로 엮여있다”고 표현한다.23)
정리하면, 하버마스의 시각에서 본 도덕은 어디까지나 이성적 존재들 간의
상호주관적 관계를 떠나서는 존속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선호와
관계없이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 세계가 지니는 절대적인 자립성을
지니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관점은 사회 세계를 유지함에 있어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타당하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임의적이거나 상대적이지 않다. 사실상 그 모든 관점을 제공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므로 그런 측면에서 도덕은 우리에 의해 구성된다. 하지만
모든 관점에 의해 동시에 이성적으로 수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좌우될 수 없는 특수한 의미의 객관으로서의 자립성을 갖는다.
이제까지의 고찰로 분명해진 것은 도덕의 객관성은 도덕의 관점이 모두의
관점의 통합으로 해명됨으로써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관점이 모두의
관점을 담아낼 수 있다면 이는 그 관점이 불편부당성/비편파성(impartiality)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의무와 그 보다 덜 구속력이 있는 가치를, 도덕적으로 옳은 것과 우리가 윤리적으로
노력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구분한 결과, 도덕적 타당성은 불편부당성의 요구로 선명하게 드러난다.24) (강조 첨가)
23) J. Habermas, “On the Cognitive Content of Morality", Proceedings of the Aristotelian
Society, New Series, Vol. 96 (1996) (이하 Habermas 1996b으로 표기) pp. 351~352
- 17 -
그렇다면 불편부당성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 하버마스는 일차적 도덕적
규범의 보편화가능성을 검토하여 타당성을 시험하는 이차적인 원칙, 즉 그가
보편화 원칙 또는 도덕 원칙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시하는 방법을 취한다. 보편화 원칙은 그 자체로는 도덕규범이 아니며 이성적 논증의 규칙들에 이미 어느
정도 전제된 것으로서, 그것을 거부하면서 이성적 논증에 참여하는 이는 발화수행적 모순(performative contradiction)을 피할 수 없다.25)
U: 어떤 규범이 각 개인들의 이해관심(interest)과 가치관(value-orientation)을 위해
일반적으로 준수될 때 예견되는 결과들과 부작용들을,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이 공동으로 자유롭게 수용할 수 있다면 그 규범은 타당하다.26)
여기서 우리는 하버마스의 보편화 원칙이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보편화 원칙이 신의 관점을 대체하는 세속화된 도덕적 관점을 대변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세속화된 도덕적 관점이 보장하는 불편부당성은 “독백적(monological)”인 방식이 아니라 “대화적(dialogical)" 또는 “담론적(discursive)”인 방식에 의해 추구된다는 것이다. 사실상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종교가 권위를 잃게 됨으로써 도덕적 명령 역시 종교나 형이상학을 토대로 정초될 수 없게 되었다는 관측이 팽배하게 되자. 종교와 형이상학이 무대에서 퇴장해도 도덕적 관점을 보존하려는 이들은 매킨타이어가 말하는 “세속화된 도덕”을 기획하게 되었다. 물론 하버마스가 이러한 작업에 참여한 유일한 철학자는 아니지만 그는 자신만의 접근으로 이러한 대열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그의 접근의 독창성은, 칸트처럼 각 개인들이 “각자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다른 모든 이들의 상황에 자신을 충분히 투영할 수 있다고 암묵24) Habermas 1996b, p.348
25) Habermas 1990, p.90 (번역본 p.140) 논증의 규칙은 논리적-의미적 산물의 차원에서 스스로 논리적으로 모순을 범하지 않고 타자와 동일한 의미로 언어를 사용할 것을 명하고 있고, 변증법적 절차의 차원에서는 자신이 믿는 것만을 주장하고 논의를 확장하고자하면 그 근거를 제시해야한다. 그리고 수사학적 과정의 차원에서는 참여자의 범위를 모든 언어능력과
행위능력을 지닌 주체로 설정하고 이들은 자신의 주장을 할 동등한 기회를 얻게 되며 어떤
억압이나 강제도 없는 상태를 보장한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규칙들, 특히 수사학적 차원의 논의 규칙들로부터 보편화 원칙이 도출되는 것으로 말한다. 26) Habermas 1990, p.65 (번역본 p.106)
- 18 -
적으로 가정”하지 않고, 공적인 담론을 통해서 규범에 대한 자신의 판단의 타당성을 평가받도록 한다는 데에 있다.27)
이러한 접근을 취하게 되면 여러 각도에서 의문이 제기될 수 있지만, 우리의 논의에서는 비인지주의적 진영에서 반박할 수 있는 논점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자. 사실 하버마스는 비인지주의적 입장이 인지주의를 거부할 때 두 가지 논변에 의존한다고 분석한 바 있다. 그 중 하나는 기본적인 도덕 원칙들에 대한
논쟁은 통상적으로 합의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규범적 명제들이 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들이 실패했다는 주장이다.28) 이미 우리는 규범적 문장들은 명제적 진리가 아닌 다른 의미에서 타당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을 살펴보았는데, 이는 두 반론 중 후자의 주장에 대한 대응이다. 이와 더불어 하버마스는 도덕적 논의에서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전자의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서 도덕적 논의에서 합의의 도출을 유도하는 보편화 원칙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보편화 원칙은, 하버마스가 의도한 대로 도덕적 판단과 도덕적 관점을 연결하는 교량원칙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키친(Gary Kitchen)은 이 가능성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하면서 하버마스의 인지주의가 성립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첫째, 보편화 원칙은 사실적 측면에서 어떤 규범에 대해서도 합의를 도출하지 않을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규범에 대한 모두의 견해를 취합하는 것은 실행불가능하고
한 사람이라도 의견을 달리하면 타당성을 잃기 때문에 비현실적이다. 오히려
얼마나 불일치가 만연한지를 드러낼 뿐, 도덕적 문제의 이성적 해결에 대한 믿음을 훼손할 수 있다. 둘째, 보편화 원칙은 원칙의 수준에서 어떤 규범에 대해서도 합의를 도출하지 않을 수 있다. 이미 상충하고 통약불가능한 정의관들이
병존하는 상황에서 그 중 어느 것이 모두에 의해 수용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 하버마스는 보편화 원칙에 의해 고안된 절차가 일반화가능한 이해관심을 재현할 것이며 이것에 접근 여부로 합의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규범들이 일반화가능한 이해관심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것들에 합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규범들에 동의하면 그것이 증27) Habermas 1996b, p.346
28) Habermas 1990, p.56 (번역본 p.93)
- 19 -
진하는 이해관심을 일반화가능한 것으로 보게 된다. 때문에 보편화 원칙에 의해 어떤 합의가 성사된다 해도 그것은 불안정하고 일시적이다.29)
그런데 이러한 키친의 비판들은 하버마스가 보편화 원칙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적용한 절차를 따라 이루어지는 실제 합의가 가능한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 제기된 것이다. 키친을 반박하려는 측에서는 물론 키친의 비판에 담겨진 경험적 요소, 즉 실제 합의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주장에 도전할 수도 있다. ‘아직 논의가 끝난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말이다. 이제까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가정은 귀납 논리이며 확실한 지식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키친의 경험적 주장을 수용하더라도, 키친의 세 가지
비판은 다른 각도에서 동시에 논박될 수 있다. 키친이 실제 합의의 불가능성이 하버마스에게 치명적이라고 보는 이유는 그가 하버마스의 이론에서 논변의 과정을 거친 실제 합의 내용들이 바로 옳음의
내용을 구성한다고 전제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실제 합의의 가능성이
요원하면 하버마스의 이론에서 도덕 자체가 구성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버마스의 인지주의적 도덕은 실제 합의의 유무에 좌우되지 않는
기본 구조를 이미 갖추고 있다. 그 기본 구조는 우리가 이성적 논증의 전제 조건들이 모두 충족된 이상적인 상태에서의 가상적 합의와 이러한 조건이 완벽하게 충족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실제 합의를 구분하는 순간 드러난다. 엄밀한 의미에서 옳음을 구성하는 것은 이상적 합의 내용이다. 그리고 실제 합의
내용은 이성적 논증의 전제 조건들이 (현실의 불완전성으로 말미암아) 불완전하게 충족된 상태에서 도출된 것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언제든지 논증의 전제
조건이 더 많이 충족되었을 때 이루어진 합의에 의해 전복될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실제 합의는 옳음에 근접할 수 있을 뿐, 옳음을 완결적으로 구현한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비록 실제 합의가 사실상 그리고 원칙상 어렵고, 도출된 합의가 불안정하고 단기적이며, 만장일치에
의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일단 옳음에 근접하는 부단한 노력의 과정으로서 의의가 있으며 더 나은 대안이 나타날 때까지 하나의 유용한 지침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29) Gary Kitchen, "Habermas's Moral Cognitivism", Proceedings of the Aristotelian Society, New Series, Vol. 97 (1997), pp.317~324
- 20 -
중요한 것은 보편화 원칙이 불편부당성의 개념을 구체화하는 방편으로 제시된 것이며 불편부당성 개념 자체가 이미 인지주의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이다. 첫째 불편부당성의 개념은 옳음의 본질을 어느 정도 규정하여 규범의 타당성의
논의에서 경쟁하는 주장들을 평가하는 잣대로 사용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구체적이고, 동시에 특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허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추상적이다. 둘째, 무엇이 불편부당한지를 가늠하는 것은 단지 감정으로
느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의지로서 결단하는 것도 아니며, 사고를 통해 따져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 관점이 불편부당성으로 해석되는 순간부터
도덕 인지주의의 성립가능성이 열린다. 셋째, 불편부당성의 개념은 도덕적 회의주의자들에게 발화수행적 모순보다 더 큰 부담을 안겨준다. 그것은 도덕적 판단의 인지적 객관성을 인정하고 불편부당성의 관점을 보유할 것인지, 아니면
도덕적 판단의 인지적 객관성을 거부하고 불편부당성의 관점을 포기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부담이다. 만일 그들이 도덕적 비인지주의를 일관되게 고수하기 위해 불편부당성의 관점의 포기를 선택한다면, 그들은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편파적인 관행, 정책, 법으로부터 이성적 논변을 통해서 자신들을 지킬 수
없다는 엄중한 사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2.1.2. 도덕적 객관성 적용 범위의 한정
일찍이 칸트는 실천이성에 의해 선험적으로 파악하는 옳음 또는 정의의 문제와 경험적으로 구성되는 좋음 또는 좋은 삶의 문제를 구분하여 전자를 진정한 도덕의 문제로 보았다. 하버마스 역시 이러한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칸트에서 발견되는 다소 형이상학적인 구분을 제거하고 도덕적 관점을 보편화 원칙이라는 절차적 의미로 해석함으로써 유사한 효과를 거두었다. 즉, 엄밀한 의미의 도덕은 상이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공통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좋음 삶에 대한 문제는 엄밀한 의미의
도덕의 범위에서 배제되고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보편화 원칙은 평가적인 언명들과 엄격하게 규범적인 것들, 좋음과 옳음(정의)을 날카
- 21 -
롭게 가르는 칼과 같은 역할을 한다. 문화적 가치들은 상호주관적인 수용을 요구할 수도 있지만 그것들은 특정한 삶의 형태의 총체와 떼어낼 수 없이 얽혀있어서 엄밀한 의미의 규범적 타당성 주장이라고 불릴 수 없다. 이러한 본성 때문에 문화적 가치들은
기껏해야 일반적 이해관심을 표현하도록 고안된 규범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 후보자들에 불과하다.30) (강조 첨가)
그런데 이러한 보편화 원칙의 효과는 사실상 객관적으로 해답을 구해야하는 문제의 외연을 좁히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버마스는 이렇게 좋음과 옳음의 문제를 구분하고 후자의 문제를 진정한
도덕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자신과 같은 노선의 입장을 강한 인지주의라고 지칭하였다. 인식론적 차원에서 도덕적 판단을 크게 인지주의와 비인지주의로 구분된다. 그런데 하버마스는 비인지주의와 인지주의를 각각 강한 입장과 약한 입장으로 다시 세분하고 있다. 이러한 구도의 정밀화는 기본적으로 이론적 현상을 자세히 기술하기 위한 것이지만, 논의가 전개되는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비인지주의보다는 인지주의를 다시 구분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 중요한 포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단 비인지주의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하버마스는 강한 비인지주의를
도덕적 언어에 인지적 내용이 담겨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보는 입장으로 소개하였다. 도덕적 판단이나 입장으로 보이는 언명의 배후에는
단지 주관적인 감정, 태도, 결단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시각에서 스티븐슨(Charles Leslie Stevenson)의 정의주의(emotivism)와 포퍼(Karl
Popper)의 결단주의(decisionism) 등이 여기에 속한다. 한편 하버마스는 약한
비인지주의가 도덕적으로 “행위하는” 주체들의 자기 이해는 설명하고 있지만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주체의 자기 이해에 대해서는 여전히 간과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보았다. 스코틀랜드 도덕철학 전통은 도덕감으로, 홉스적인 계약론에서는 수용된 규범들에 대한 정향성으로 도덕적 행위의 동기를 설명함으로써
이 범주로 분류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여전히 실천적 영역에서 이성의 역할이
행위자가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게 하는 도구적 지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31)
30) Habermas 1990, p.104 (번역본 p.159)
- 22 -
이제 인지주의로 넘어가면, 하버마스가 말하는 약한 인지주의와 강한 인지주의는 몇 가지 측면에서 구분된다. 첫째, 자기 확장의 범위에서 차이가 있다. 약한 인지주의는 누군가 자신을 자신이 태어나 자라온 특정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신을 이해하는 경향을 반영하는 반면, 강한 인지주의에서는 이러한 경계를
확실히 넘고 있다. 미드(G. H. Mead)가 말하는 ‘더 넓은 공동체’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이들이 포함된 “도덕적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좀 더 분명한 차이는, 약한 인지주의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의(justice)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가 강한 인지주의에서는 강조된다는 것이다. 약한 인지주의에서는 정의가 여러 가치들, 즉 여러 좋음들 중에 하나로 인식되지만 강한 인지주의에서는 정의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여 옳음이 좋음으로부터
구분되며 나아가 좋음에 대해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통찰을 토대로 하버마스는 가치정향(가치관)과 개인 또는 집단의 평가적 자기 이해 전반을 판단하는 윤리적(ethical) 관점과 의무, 규범, 정언적 명령을 판단하는 도덕적(moral) 관점을 구분한다.32)
강한 인지주의의 장점은 근본적인 도덕적 관점을 그렇지 않은 것으로부터
구분하여 가치의 문제에 대해 좀 더 입체적인 조망을 가능하게 한다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먼저 근본적인 도덕적 관점에 대해서만 객관성이 확보됨이 분명해진다. 즉, 객관적 해답을 찾는 도덕적 타당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 좋은
것인가를 판단할 때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판단하는 상황으로 한정된다. 조상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문제의 예를 들어보자. 가령 다음 세 가지 방법, 즉 후손들이 종가집에 모여 조상에게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 단지
각자 원하는 때에 산소나 납골당을 방문하는 것, 그리고 아예 조상의 뼈를 단지에 담아 집의 한쪽 구석에 모셔놓고 수시로 예를 갖추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조상에 대한 예의를 더 잘 표현하는 방법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강한 인지주의의 관점에서는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상에 대해 자기 방식대로 존경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는 확보된다. 무엇이 옳은가의 문제는 무엇이 편파적이지 않은가의 문제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31) Habermas 1996b, pp.337~338
32) Habermas 1996b, pp.342~348
- 23 -
의무와 덜 구속력 있는 가치들과의 구분, 도덕적으로 옳은 것과 윤리적으로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 사이의 차별화는 도덕적 타당성을 불편부당성에의 요구로 첨예화한다.33)
(강조 첨가)
위의 구절에서 나타나듯이 결국 상호주관적 세계에 적용된 타당성의 요구의
정체는 다름 아닌 불편부당성의 요구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불편부당성의 요구가 다시 실천적 영역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도덕적 평가의 기준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도덕적 의무들은 그것들이 모든 우연적인 결정 요소들로부터 의지를 해방시키고 어떤
의미에서는 의지를 실천 이성 자체에 동화시키는 법칙들로부터 나왔다는 가정 하에 무조건적 또는 정언적인 타당성을 획득한다. 그래서 우연적인 목표들, 선호들 그리고 가치 정향들은 도덕의 관점으로부터 정당화될 수 있는 규범에 비추어 행해지는 비판적
평가에 종속될 수 있다.34) (강조 첨가)
이에 따르면, 어떤 특정한 좋음에 대한 견해, 즉 가치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윤리적 입장들도 불편부당한 도덕적 관점에서 평가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윤리적
판단은 도덕에 종속된다. 전술된 예로 다시 돌아가서, 후손들이 종가집에 모여
조상에게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관습 내에 어떤 하부 관행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가령 여성들은 음식을 장만하고 차려내고 치우는 등의 모든 노동을 제공하면서도 조상에게 절을 하는 의미 있는 의식에서는 배제되는 반면, 남성들은 이러한 노동을 면한 채로 담소나 나누면서 여성들의 노고의 결실을 향유함과 동시에 의식 참여를 독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부 관행은 불편부당성을 추구하는 도덕의 관점에서 볼 때 여성과 남성 사이에 차별 대우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2.1.3. 타당성 요구자로서의 자기 이해
33) Habermas 1996b, p.348
34) Habermas 1996b, p.345
- 24 -
하버마스에서 “오직 더 나은 논변의 힘”에 의해서만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사실적 판단뿐만 아니라 도덕적 판단에서도 객관성을 전제하는 것 이외에, 사실 영역에서는 진리를 지향하고 당위 영역에서는 옳음 지향하는 태도를 함께
함축한다. 그리고 진리와 옳음에 대한 추구는 각자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오류가능한 개인들이 서로를 보완하는 협력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다음의 구절에서 하버마스는 “더 나은 논변의 힘”에 의해 강제됨을 이성적 논증의 참여자가 지켜야하는 전제 조건들 중의 하나로 제시하면서 이러한 의도적
측면을 언급하고 있다. 그들의 의사소통의 구조가 더 나은 논증의 힘 이외에 모든 외부적 또는 내부적 강제를
배제하고, 그리하여 진리에 대한 협력적 탐구의 동기 이외에 모든 다른 동기를 무력화시킨다.35) (강조 첨가)
문맥상 여기에서 말하는 진리는 단지 사실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규범적 정당성(옳음)까지 포괄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버마스의 철학의 전 체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심층적인 자기 이해가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의사소통을 하는 가운데 진리와 옳음을 추구하면서 상호이해를 도모하는 존재로서의 자기 이해이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 이론은 그가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이러한 자기 이해의 근거를 정초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하버마스는 인간의 사회적 행위와 언어의 본성에 대한 방대한 연구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타자와 주고받는 언어행위에서 두 가지 다른 목적이 대조를 이룬다는 결론을 내린바 있다. 즉 우리가 성공을 지향할 때는 전략적인 언어행위를 하는 반면, 우리가 이해를 지향할 때는 의사소통적 언어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바라는 바대로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가령 상대를 “자신의 목적에 얽매이게” 하거나 상대에게서 자신이 “바라는 행위를 유발”시키려는 것은 전자에 해당한다. 이렇게 “언어에 의해 매개된 모든 상호작용이” 이해지향적인 것은 아니지만 하버마스는 우리의 언어 행위는 근본적으로 이해를 지향한다고 보았다.36) 35) Habermas 1990, pp.88~89 (번역본 p.138)
36) Habermas, 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I, trans. Thomas McCarthy, Beacon
Press, 1984 이하 Habermas 1984로 표기 pp.286~295 (번역본: 의사소통행위이론 I,
- 25 -
하버마스에 따르면 의사소통행위는 “청자와 함께 어떤 것에 관하여 상호이해하고 그렇게 하면서 자신을 이해될 수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한” 의도로 행해지는 것이다37). 여기서 우리는 의사소통이 세 개의 축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듣는 청자와 말하는 화자 그리고 그들이 함께 이해하고 관계하려는 어떤 세계들이다. 그 세계들은 바로 “정당한 질서를 갖춘 우리의 상호관계 세계”, 혹은 “실재하는 사태들의 객관적 세계”, 혹은 “각자의 주관적 체험의
세계”이다.38) 그리고 화자와 청자는 근거를 가지고 타당성을 주장하거나 요구하면서 함께 참, 옳음, 또는 진정성을 추구하며, 타당성의 주장이 이러한 가치들을 구현하고 있음을 확인한 순간 그 화행 내용이 담고 있는 타당성의 주장에
기꺼이 동의 하려한다.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적어도 우리는 이성적 논증에 참여할 때 진리와 옳음과 같은 가치를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 존재이다. 물론 전술한 바와 같이 화행이 항상 타당성을 주장하는 성격을 띠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종종 자신의 이해관심을 추구하기 위해서 또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전략적인 대화를 주도할 때도 있다. 이러한 사실은 모두가 늘 진리와 옳음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가
타당성을 요구하는 이성적 의사소통에 참여할 때만큼은 적어도 바로 이러한 본성을 암묵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해를 지향하는 언어행위의 구조 속에서 이러한 존재로서의 자기 이해를 확보하였다. 그런데 하버마스는 진리와 옳음을 추구하되 간과해선 안 될 것을 함께 강조한다. 그것은 그의 전 저작에서 수시로 등장하는 오류가능성에 대한 성찰이다. 신의 관점으로부터 인간의 관점으로의 이행은 또 다른 결과를 낳는다. 도덕적 규범의
타당성의 주장의 양상은 이제 발견하는 정신의 오류가능성과 구성하는 정신의 창의성
모두의 색채를 띠게 된다. ‘타당성’은 이제 어떤 관행이 모두의 이해관심을 동등하게
추구하는지 여부를 실천적 담론으로 한데 모여 검토한다는 조건에서 도덕적 규범들이
관련된 모두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합의는 두 가지를 표현한다. 가상적으로 도입된 규범이 인정될 가치가 있다고 서로를 납득시키는, 숙의하는(deliberating) 주체들의 오류가능한 이성, 그리고 자신이 복종할 규범들의 창조자로 스pp.424~436)
37) Habermas 1984, p.307 (번역본 p.452)
38) Habermas 1984, p.308 (번역본 p.453)
- 26 -
스로를 이해하는 입법하는(legislating) 주체들의 자유.39) (강조 첨가)
위의 구절은 우리가 자신들을 진리와 옳음을 소유한 존재로 선언하지 않고 그것들을 단지 열망하는 존재로 인식해야하는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가 유한한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이러한 인간
이성의 유한성을 잠시 망각하고 자신의 믿음을 진리나 옳음 그 자체라고 단언한다면 이러한 통찰에 위배되는 것이며, 독단적(dogmatic)이라는 비판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 하버마스에게서 이론적 진리뿐만 아니라 실천적 진리의 추구라는 대의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는 그가 실천 영역에서의 진리 추구를 표명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롤즈를 비판할 때 여실히 드러난다. 롤즈는 근대의 회의론과
도덕 실재론을 동시에 거부하고 구성주의적 도덕관을 표방한다는 측면에서 하버마스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하버마스는 롤즈의 전기의 대표 저작인 정의론(A Theory of Justice)과 후기의 대표 저작인 정치적 자유주의(Political Liberalism) 각각에서 문제점을 찾아내었다.
먼저 하버마스는 롤즈가 정의론에서 사회계약 모델을 절차로 삼았던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다. 계약을 채결하는 사적 주체들 사이의 합의의 모델을 취하게 되면 진리탐구의 인지적인 계기보다는 자신에게 유리한 합리적 결정을 내리려는 의지적인 계기가 강조된다는 것이다.40) 이후에 정정하기는 하였으나 롤즈는 이 모델을 도입할 때 분명 정의의 문제를 합리적 의사결정의 문제로 접근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버마스는 이것이 롤즈가 가지고
있던 “이론 이성에 실천 이성을 인식론적으로 동화시키는 데에 대한 두려움”을
반영한다고 분석한다.41)
또한 하버마스는 롤즈가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실천적 진리를 대신하여 합당성(reasonableness)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의 문제를 지적한다. 롤즈의 ‘합당한(reasonable)’이라는 술어의 의미는 단지 질서정연한 사회 내에서 살 용의39) Habermas 1996b, p. 348~349
40) J. Habermas, Justification and Application, trans. Ciaran P. Cronin. The MIT Press,
1993. (third printing, 2001) pp. 27~28 이하 Habermas 1993으로 표기 (번역본 담론윤리의 해명 pp. 157~159)
41) Habermas 1993, p. 29 (번역본 p. 160)
- 27 -
가 있고 또 그럴 수 있는 시민들을 일컬을 때 등장한다. 합당한 자세는 객관적인 도덕적 시각을 함축하지 않기 때문에 하버마스는 롤즈가 정의 개념의 도덕적 타당성을 “보편적으로 구속력을 갖는 실천이성"으로부터가 아니라 도덕적
구성 요소가 서로 중첩되는 합당한 ”세계관들의 운 좋은 수렴“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비판한다.42) 문제는 롤즈가 정치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의 분업을
구상하면서 시작되었다. 시민들은 전자의 영역에서는 관찰자, 후자의 영역에서는 참여자라는 두 개의 관점을 갖는 것이다. 시민은 관찰자로서 정치 영역에서
합의가 도출될 때 그것이 서로 다른 포괄적 교설에 각각 포함된 도덕적 구성요소들이 우연히 성공적으로 중첩되어 생겨났으며 그 덕분에 공동체가 안정되게
유지된다는 것을 인식한다. 하지만 그러한 합의된 내용의 근거는 다른 곳에 있다. 시민은 각자 자신이 참여하는 종교적 또는 형이상학적 세계관, 즉 포괄적
교설에 입각하여 정의관의 진리성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는 곧 합의가 나타나기 전에는 시민들이 공적인 토론을 통해 불편부당한 판단력을 형성하게 해줄
상호주관적으로 공유된 제 삼의 관점, 즉 도덕적 관점이 부재함을 의미한다.43)
롤즈가 말하는 이성의 공적 사용은 합의가 이미 이루어진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하버마스는 ”정치적인 것이 자기의 타당성 원천을 박탈당한 것“으로 보고 개탄하고 있다.44)
2.1.4. 협의(狹義)의 심의 이념
지금까지 나는 하버마스의 저작에서 “오직 더 나은 논변의 힘”만을 반영하는 것의 철학적 뿌리를 비교적 상세히 고찰하면서 그것이 실천이성의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칸트적 의무론 전통의 (강한) 도덕 인지주의라는 윤리학적
배경과 자신의 인식의 한계를 자각한 가운데 옳음을 추구하는 태도를 전제하고
있음을 보였다. 이제 나는 이러한 전제들을 공유하는 심의 민주주의관을 협의42) J. Habermas, The Inclusion of the Other, ed. Ciaran P. Cronin and Pablo De Greiff.
The MIT Press, 1998. pp. 82~83 이하 Habermas 1998로 표기 (번역본 이질성의 포용, pp.111~112)
43) Habermas 1998, pp. 83~84 (번역본 pp. 112~113)
44) Habermas 1998, p.85 (번역본 p.114)
- 28 -
의 심의 민주주의관으로 규정하고, “더 나은 논변”의 신조가 함축하는 바를 인지적 부분과 의지적 부분으로 나누어 협의의 심의 이념의 두 가지 요건으로 명명하겠다. 두 가지 요건들 중에 인지적 요건은 일단 ‘규범적 타당성 요구의 요건’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것은 사실상 두 단계로 세분될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사실적 주장뿐만 아니라 규범적 주장에 대해서도 객관적 기준을 전제하고
타당성을 요구한다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좋음과 옳음의 문제를 구분하며
옳음의 문제를 엄격한 의미의 규범적 타당성의 논의 대상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어떤 심의관이 이 둘 중에서 전자의 조건조차 거부하면 아예 ‘도덕 인지주의 요건’을 충족시키지 않은 것이고, 전자를 수용하되 후자를 거부하면 ‘강한
도덕 인지주의 요건’을 만족시키지 않은 것이 된다. 의지적 요건은 진리와 옳음
앞에서 겸허하게 자신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하고 독단을 경계한다는 의미에서
‘반독단주의 요건’이라 지칭할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주의를 환기시켜야 할 부분이 있다. 협의의 심의 민주주의 이념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이론과 담론 윤리학이 빚어낸 상호소통적인 이성에 의한 지배라는 테제를 토대로 구축되었지만 하버마스에 의해서
직접 제안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버마스 자신은 심의 민주주의 논의가 이미
시작된 이후에야 비로소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한 사람의 심의 민주주의자로서 논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심의 민주주의의 이념의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철학적 전통을 적절히 구현한 하버마스의 도덕
이론과 심의 민주주의 이론가로서의 하버마스가 제시하는 구체적 처방을 분명히 구분하고자 한다. 이러한 배경적 이유 외에 협의의 심의 민주주의가 하버마스의 심의 민주주의이론과 동일시 될 수 없는 좀 더 중요한 이유는 협의의 심의 민주주의가 핵심 사상을 담은 추상적인 이념인 반면 하버마스의 심의 민주주의이론은 구체적인 정치 모델을 구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상의 과정에서
같은 이념을 좇는 이론가들 간에도 사실적 판단이나 주안점에서의 차이가 개입되어 추상적 이념의 구체화 방향이 다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은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소극적으로 표현하면 협의의 심의 이념은 하버마스의 정치 이론과 동일시될 수 없으므로 후자에게서 발견되는 취약점이 반드시 전자의 취약점은 아니며,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협의의 심의 이념이 하버마스의 구체적인 제안을 뛰어넘는 다른 방안에 의해 더 적절하게 구현될 수 있
- 29 -
는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것이다.
2.2. 협의의 심의 이념으로부터의 이탈
이제 나는 현재 심의 민주주의의 기치(旗幟) 아래 활동하는 이론가들의 저작들 내에서 협의의 심의 이념의 두 가지 요건이 완전히 충족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인지적 요건인 ‘규범적 타당성 요구의 요건’에 속한 두 가지 세부 요건 중에서 좀 더 기본적인 요건인
도덕 인지주의의 요건으로부터의 이탈하는 두 가지 경우를 비판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이탈의 가능성이 약하게 의심되는 사례이고 다른 하나는
이탈이 거의 확실시되는 예라고 볼 수 있다. 그 다음, 의지적 요건인 ‘반독단주의 요건’이 약화된 예를 고찰하겠다.
2.2.1. 인지적 요건의 부재
현대 심의 민주주의 탄생을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마다 마냉(Bernard
Manin)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게 만든 1987년에 출간된 그의 논문은
일견 심의 민주주의의 주요 요소들을 거의 갖추고 있는 듯하다. 우선 그는 심의(deliberation)가 정치적 결정의 정당성(legitimacy)을 보장해준다는 주장을
역설하고 있으며 그가 전통적 다원주의라고 부르는 선호취합적 민주주의가 정치를 시장과 유사하게 이해하는 것을 비판한다. 게다가 집단적 결정에서 개인의 의지를 이미 결정된 것으로 보는 시각을 크게 문제 삼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이러한 주장들을 정당화하는 방식에서 앞서 추출된 협의의
심의 민주주의의 첫 번째 요건에 대한 이해가 충분한지를 의심하게 만드는 부분들이 발견된다.
일단 마냉이 개인의 의지나 선호를 선결된(predetermined) 것으로 보는 가정을 비판하면서 심의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대목에서부터 시작해보자. 그는 여
- 30 -
기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논거를 제시한다.45) 첫째, 현실세계에서 개인들이
사회적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그들은 결코 모든 필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는 파편적이고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집단적인 심의와 개인적인 숙고를 통해서, 처음에는 불완전했던 정보가 완전해지지는 않더라도 차츰 더 확보된다. 집단적 토론에서 제안된 해결책들에
관련된 증거를 교환하는 과정에서 주어진 해결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게 되고 결과가 본래의 목표와 모순된다면 그 목표마저도 바꿀 수 있다.
둘째, 개인들이 처음부터 ‘완전한’ 선호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토론을 시작할 때, 어떤 바람을 가질 수는 있지만 이는 토론에서 제기되는 모든 주제들 또는 내려질 결정의 모든 측면들에 적용되지 않는다. 예컨대 한 시민이 원래는 세금 인하를 바랐으며 사회 보장의 수준에 대해서는 특별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토론의 과정에서 세금이 인하되면 불가피하게 사회 보장 수당들이 줄어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는 자신이
사회 보장의 수준이 낮아지더라도 세금 인하를 원하는지 아니면 사회 보장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 인하를 포기할 것인지를 결정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사회 보장에 대한 자신의 선호를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집단적 토의는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시민들이 자신들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선호를 발견하게 해준다.
셋째, 개인들이 처음부터 ‘정합적인’ 선호체계를 가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다. 경험에 비추어보면 욕구들은 빈번히 서로 갈등 관계에 놓인다. 이것은 다른 개인들이 다른 것들을 원해서만이 아니라 각자가 상충하는 바람들을 가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의 예로 다시 돌아가면,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세금의 인하와 사회보장의 확대를 동시에 원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심의 과정에서 개인들은 자신들의 바람이 상충함을 알게 될 것이고, 결국 둘 중 하나를 포기하거나
덜 중요하게 여김으로써 자신의 선호들 간에 조화를 꾀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마냉이 심의를 강조하는 논거들은 심의가
가능한 대안에 대한 사실 판단에서 오류를 줄이고 개인이 자신의 선호를 더욱
분명히 인식하고 일관되게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 집중되어있45) Bernard Manin, "On the Legitimacy and Deliberation", Political Theory Vol.15 No. 3
(Aug.1987) pp.338~368. (이하 Manin 1987로 표기) 여기서 pp.349~350 참조
- 31 -
다는 점이다. 이러한 마냉의 논리를 따라가 보면 심의에 참여하는 주된 목적은
좀 더 완성되고 정합적인 선호의 표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이것이 마냉의 의도한 바라면 그의 이론은 좀 더 세련된 형태의 선호취합적 민주주의론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주지하다시피 선호취합적 접근은 어떤
결정이 옳은가에 대한 반성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관철시키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런데 마냉이 제시한 논리에 비춰진 심의의 역할은 정보의 확충과
논리적 점검으로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고 모순됨
없이 추구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지,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도덕적 자각으로
그의 선호 자체를 반성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마냉의 논의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도 역시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각 개인의 자유로운 자신의 목표 추구와 공동선(the common good)의 화해”
또는 “각 개인의 이해관심을 정의(justice)와 조화”시키는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공동선과 정의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드러낸다.46) 또한 심의 과정에서 사회와
자신에 대한 새로운 사실의 발견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며 참여자들이 서로를
설득하려하고, 이는 논변제시(argumentation)의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덧붙인다. 그는 논변을 “청자의 동의를 산출하거나 강화할 목적을 갖는 일련의
명제”라고 정의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논변은 “담화적(discursive)”이고 “이성적(rational)”이다. 그런데 여기서 마냉이 말하는 논변을 통한 설득은 “결정이나
규범”과 관계된 것으로서 논리적 증명이나 과학적 논증과 달리, 진위를 말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거부되거나 부정될 수도 없는데, 어떤 입장이든 항상 “어느 정도는 정당화될 수 있기(more or
less justified)” 때문이다. 즉, 논변은 진위(truth ot false)가 아닌 강약(stronger or weaker)으로 평가된다.47)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논변이 왜 진위가 아닌 강약으로
평가되는지에 대한 마냉의 설명이다. 논변으로부터 도출된 결론은 필연적인 명제는 아니다. 청자는 그것에 동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청자는 자유롭다. 논변은 자명한(evident) 전제들이나 규약46) Manin 1987, p.351
47) Manin 1987, pp.352~354
- 32 -
상의(conventional) 전제들로부터 시작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화자는 청중에 의해
일반적으로 수용될 것이라고 가정하는 명제들을 취함으로써 시작한다. 정치에서 화자는 특정 시점에 공중에 의해서 추구되는 어떤 공동의 가치들을 가정함으로 논변을 펼치려할 것이다. 논변은 그러므로 항상 그것의 청중에 상대적이다. 이러한 가치들은 공유하지 않는 이는 제시된 논변들에 의해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논변은 특히 정치적 논쟁의 본성에 적합하다. 그것은 대립하는 규범들이나 가치들 간의 대결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베버를 따라 어떤 과학도 엄격하고 필연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베버의 이론과는 반대로
가치의 선택이 피할 수 없이 자의적임이 따라오지는 않는다. 어떤 가치들은 합당한 태도를 가진(reasonable) 사람들로 이루어진 청중의 승인을 얻을 가능성이 더 높다.48)
(강조 첨가)
위의 설명을 살펴보면, 정치적 토론에서 가치나 규범에 대한 이견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 즉 논변이 강하거나 약한 것, 설득력이 높거나 낮은 것은 어떻게 판단되는지에 대한 해명이 분명히 주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그러한 판단은 청중에 상대적이며 청중들이 공유하는 가치관에 의해 좌우되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나마 순리적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지만 그 개념의 정확한
의미 역시 주어지지 않는다. 만일 마냉이 여기서 순리적이라는 개념이 롤즈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면 객관적인 도덕적 시각을 함축하기에 부족하다는 하버마스의 비판에 노출된다. 따라서 마냉의 접근은 좋음의 문제와
옳음의 문제, 즉, 윤리와 도덕의 차원을 나누고 후자 차원의 논의에서 진리와
유사한 지위를 갖는 객관성을 담보하지 않은 채로 실천적 논변의 강약을 따지는 것이 얼마나 피상적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편, 밀러(David Miller)는 처음부터 자신이 생각하는 심의의 목표는 정치공동체가 직면하는 문제에 대한 정답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합의에 이르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제기된 문제에 객관적으로 옳거나 타당한 해답이 존재”하며, “그 해답이 무엇인가는 불확실하기 때문에 결정 절차가 필요”하고. “민주주의야말로 다수결의 형태로 옳은
답을 산출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절차”라고 가정하는 견해를 인식적(epistemic
conception) 견해라고 부르면서 비판하고 있다. 인식적 견해는 정치적 의사결48) Manin 1987, pp. 353~354
- 33 -
정에 비현실적으로 너무 높은 기준을 설정한다는 것이 그의 비판의 요지이다. 밀러가 보기에 “정치 공동체는 가끔 정확한 답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 있는, 이를 테면 어떤 과학적인 문제 같은 것에 대해서 결정해야 할 수도 있지만, 공동체가 다루는 문제들은 대개, 경쟁에 대한 어떤 해결도 객관적으로 옳다고 간주될 수 없고, 그렇다고 경쟁하는 주장들이 모두 동시에 만족될 수도 없는 것들”이다49).
그렇다면 객관적 답이 존재한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합의에 도달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밀러에 따르면 합의는 상이한 방법에 의해 성취될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실질적인 규범에 동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절차에 동의하는 것이다. 예컨대 얼마간의 대지가 가용하고 여러 집단들이 그것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 땅을 어떻게 할당할지 결정해야하는 문제가 발생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때, 첫 번째 방법처럼 그러한 자원을 가장 필요로 하는
집단에 돌아가야 한다거나 그것을 가장 생산적으로 이용할 집단에 주어야 한다는 원칙에 합의한 후, 그런 집단이 어느 집단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 또는 두
번째 방법을 택할 수 있다. 즉, 심의체가 스스로 그러한 실질적 규범 판단을 내릴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고 대신 절차적 해결방식을 택하여, 문제의 집단들이 그 땅을 공동으로 소유하거나. 순서대로 사용하거나, 제비뽑기를 하는 것이다. 밀러는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당사자들이 자신들이 순리적(reasonable)
이었다고 여길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려진 결정이 정의나 옳음에 대한
초월적 기준을 반영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밀러의 시각에서 심의관이 강조하는 것은 모든 관점이 청취될 수 있고, 그러한 논의가 결과에 반영된 것으로 보이면, 그 과정을 거쳐 도출된 결과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답을 찾는 발견의 절차로서의 심의를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50)
이제 밀러가 제안한 성격의 심의관이 제공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그가 제시한 예를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서 밀러의 논의의 구체적
목표는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 선택 이론의 비판에 심의적 민주주의가 자유주49) David Miller, "Deliberative Democracy and Social Choice", in Prospects for Democracy, ed. David Hel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pp.74~92. (이하 Miller 1993으로 표기)
여기서 p.76 참조
50) Miller 1993, p.77
- 34 -
의적(선호취합적) 민주주의보다 “덜 취약”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51) 그에
따르면, 사회 선택 이론이 민주주의 이론에 제기하는 도전은 두 가지 기본 주장으로 압축된다. 첫째, 개인들의 선호들을 취합함에 있어서 명백하게 공정하고
합리적이어서 다른 규칙들보다 우월한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실제로
모든 규칙들이 전략적 조작에 노출되어있기 때문에, 모두가 진실하게 투표를
하면 주어진 선호의 집합에 대한 그럴듯한 결과가 산출된다하더라도 실제 결과는 전략적 투표에 의해 왜곡될 수 있다. 가령 어떤 사회가 전력을 생산하는 방법에 대해 결정해야하는데, 석탄, 석유, 천연가스, 원자력 발전 중에 선택해야한다고 가정해보자. 사회 선택 이론의 관점에서 결정 규칙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눠지는데, 라이커(William L. Riker)의 용어를 빌리자면 그 중 하나는
다수결(majoritarian)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서열(positional) 방식이다. 그런데
이 경우 양자 중에 어떤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가?
우선 다수결 규칙 중에서 잘 알려진 콩도르세 규칙은 일련의 양자택일 선택
중에서 다른 모든 것을 이기는 선택지를 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그러한
콩도르세 승자가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어서 그 규칙은 불충분(incomplete)하다. 이를 테면 천연가스가 석탄과 석유를 누를 수 있더라도 원자력 발전에 밀릴 수 있고, 원자력은 다시 다른 선택지 중의 하나에 패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서열 규칙들 중에서 가장 선호되는 보르다 계산법은 각 선택지에 각 투표자가 매긴 순위에 따라 점수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누군가에게 최우선의 선택지는 n점을 받고 그 다음은 n-1점을 받는 방식으로 계속 진행된다. 하지만 이
방식의 문제는 인기 있는 선택지들 간의 결정이 일부 투표자들이 투표지에 있는 괴상하거나 특이한 선택지들에 순위를 정하는 방식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콩도르세 규칙과 보르다 규칙의 결과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콩도르세의 방식의 승자가 존재할 수는 있지만 보르다 규칙을 사용하면 이와 다른 선택지가 선택될 수 있다. 만일 원자력이 많은 수의 사람이 최우선으로 뽑은 선택지로 콩도르세 방식의 승자가 되더라도 그것에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낮은 순위를 기록한 반면, 천연가스가 단지 소수의 최우선 선택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에게서 두 번째 순위라면 보르다 방식으로는 승51) 이하 본문 다섯 단락의 논의는 Miller 1993, pp.77~86의 요약을 담고 있다.
- 35 -
자가 된다. 밀러는 심의 민주주의관으로 전환이 사회 선택 이론이 제기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한다고 낙관하지 않는다. 일부 심의주의자는 사회 선택 이론은 고정된
선호를 가진 투표자들을 전제하기 때문에 일단 투표자들의 선호가 의사결정과정에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사회선택 이론의 결론이 적용될 수 없다는 주장을 제기하였지만 밀러는 이러한 대응이 너무 단순한 생각이라고 비판한다. 마지막 결정의 순간에 투표자들의 의사를 취합할 때, 앞서 고찰한 것처럼
세 가지 또는 그 이상의 정책 결과가 여전히 가능하고, 이들 중의 하나에 대한
만장일치가 불가능하므로 여전히 사회 선택 이론의 결과는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잠재적으로 임의성과 전략적 조작의 문제들에 취약하다.
결국 심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고 밀러는 주장한다. 첫째 심의가 최종 판단에서 취합되어야 하는 선호의 범위를 줄이는 효과가
있다. 우선, 심의를 통해 거짓된 경험적 믿음에 기초한 비합리적인 선호 순위가
제거될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이가 오로지 환경적 건전성의 토대에 근거하여
석탄, 천연가스, 석유, 원자력의 순서로 선호를 정했다고 하자. 하지만 토론 중에 강한 증거가 나와서 석탄 연소 발전이 대기에 미치는 악영향 때문에 친환경적 견지에서 석탄을 천연가스나 석유보다 아래로 내려가게 만드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또한, 사회적으로 공유된 도덕적 믿음에 비추어 지나치게 거부감이 드는 선호는 누구도 공적 석상에서 제시하기를 꺼려할만한 것이므로 제거된다. 가령 사적으로는 인종차별주적 견해를 가지고 있어도 의회와 같은 공적인 자리에서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인종차별적 이유로 이민 제한을 원한다 해도 그러한 이유들을 공적으로 제시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러한 정책은 제안되기 어렵다. 끝으로, 편협하게 자기중심적인 선호도 심의를 통해서 억제된다. 밀러가 “도덕화 효과(moralizing
effect)”라고 부르는 현상 덕택에 토론은 단순한 개인들의 집합을 서로를 협조자로 보는 집단으로 변모시킬 수 있다.
둘째 심의체 내의 견해의 구조에 대한 지식이 선택 규칙에 영향력을 미친다. 우선 콩도르세 규칙에 따라 두 가지 선택지끼리 비교를 할 때 순환적인
(즉, 다수가 천연가스를 석탄보다, 석탄을 원자력보다, 그리고 다시 원자력을
선호하는) 결과가 나타남으로써 그렇게 선호를 취합하는 방식이 무용지물이 될
- 36 -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밀러는 심의를 통해서 현안에 내재된 다층적인
성격이 분명하게 들어날 수 있고 그것들을 서로 분리해 냄으로써 이러한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다시 전술된 예로 돌아가서 석탄이 세 연료
중에 가장 저렴하지만 환경에 가장 해가 되고, 석유는 가장 비싸지만 환경의
측면에서는 최선이고 천연가스는 석탄과 석유의 중간에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투표자들이 직면한 선택이 경제적 비용과 환경에 미치는 영향임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경제우선주의자는 석탄, 천연가스, 석유의 순서로, 환경우선주의자는 석유, 천연가스, 석탄의 순서로, 경제와 환경을 적절한 선에서 동시에 추구하려는 이들은 천연가스를 최선으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더 복잡해질 수 있다. 만일 원자력이 석유를 대신하고, 그것의 특징은 다소 저렴하며 공해를 덜 배출하지만 사고가 날 경우 엄청난 피해를 줄 위험이 있다고 해보자. 이렇게 되면 선택은 경제와 환경이라는
두 가치 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대한 관심 내에서도 예견되는
공해와 핵사고의 위험 사이에 다시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석탄이 비용의 측면에서는 우위에 있지만 공해가 문제였는데, 출력에 약간의 손실을 감수하고 황산이나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줄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올 수 있다. 그러면 다시 이러한 기술을 이용해 공해를 줄일 것인지에 대한 투표가 다시 이어질 수
있다. 정리하면, 심의를 통해 드러난 문제의 다차원적 구조를 분리하여 개별적으로 투표에 부침으로써 순환적인 결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밀러의
주장의 핵심이다. 이제 지금까지 소개된 밀러의 주장을 되돌아보자. 우선 밀러와 마냉의 논의에서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마냉이 개인의 선호가 새로운 정보의 유입이나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정보의 교정을 통해 개인의 선호를 정합적으로 완성시키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면, 밀러는 선호를 취합하는 과정에서 한데 뒤엉켜있는 “선택의 차원”을 분리시켜 개인 간의 불일치가 어디에서 연유하는지에 대해 입체적인 전망을 획득함으로써 선호의 취합을 용이하게 하려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밀러와 마냉 모두 심의를 통해 “경험적 오류”를 방지하고 논리 관계를 좀 더 투명하게 하며 공적 결정에 있어 개인의 이기심이나 차별적 태도의 반영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다고 보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일견 모든 측면을 모두 언급하고 있는 듯한 그들의 심의관에 결정
- 37 -
적인 무엇이 결여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실의 영역의 ‘진리(the
truth)’라는 이상적 가치에 필적하는, 당위의 영역의 ‘옳음(the right)'이라는 이상적 가치의 설정과 정치적 결정 속에서 그것에 가능한 접근하려는 치열한 태도이다.
한 사회의 전력을 생산하는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전력을 생산하는 방법을 선택함에 있어 사회의 구성원들은 밀러가 지적한 것처럼 “상대적 비용, 고용 효과, 환경적 안전” 등의 여러 측면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밀러의 논의에서 이 고려 사항들 간의 비중들을 비교 평가하는 시각은 제시되지 않는다. 이들은 서로 다른 차원으로서 서로 경쟁하고, 이들 간 중에 어느 것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하는지는 개인의 선택, 다시 말해 선호에 달려있는 것으로만 그려진다. 예컨대 밀러가 오직 환경적 안전만을 생각하는 “철두철미한 환경론자(the out and out greens)”라고 표현한 관점은 비용만 생각하는 “경제주의자들(economizers)”과 동등한 수준에서 경합하는 것으로 설정되고 있다. 이는 선호와 가치정향이 도덕적 관점에서 정당화되는 규범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고 보았던 하버마스의 입장과52) 매우 대조적이다.
불편부당한 관점에서 보면, 밀러의 시각과는 달리 환경론자와 경제주의자들은 동등한 수준에 있지 않다. 경제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전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좀 더 저렴한 비용으로 전력을 소비하는 데에 비중을 둔다. 그렇게 되면 부자뿐만 아니라 빈자도 필요한 만큼 전력이라는 가치재를 소비할 수 있도록 하여 어느 정도 경제적 계층 간에 전력 소비에 관한 평등을 구현하는 효과가 생긴다. 그런 측면에서 정의의 실현에 어느 정도 기여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에서는 부자든 빈자든 전력사용자들만이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된다. 반면에 환경주의자들의 시각은 이보다 훨씬 넓다. 그들은 전력사용자뿐만 아니라 전력을 생산하는 특정한 방식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는 모든 대상을 도덕적 고려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환경주의자들이 원자력 발전소의
건립을 반대하는 이유는 단지 사고가 났을 때 엄청난 재앙이 닥칠 수 있다는
위험부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원자력 발전은 요행히 아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발전의 원료가 되는 우라늄의 채굴부터 시작하여 폐기물 처리에
52)Habermas 1996b, p.345
- 38 -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의 희생을 담보로 한다. 그것은 우라늄 광산의 개발로 말미암아 삶의 터전을 잃고 그나마 멀리 떠날 수도 없어 방사능물질의 영향을 고스란히 떠안아 각종 암으로 시달리는 현지 주민과 언젠가는 마모되는 용기에
담겨있는 재앙의 시한폭탄을 넘겨받아야 하는 미래 세대와 동식물의 안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기획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불편부당함에 가능한
접근하려는 열망이 있다면 이러한 경제주의자와 환경주의자 사이에 나타나는
도덕적 고려 대상의 범위의 차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2.2.2. 의지적 요건의 약화
라퐁(Cristina Lafont)은 심의 민주주의 진영의 논의를 주도하는 철학자들
중에 한 사람이다. 특히 도덕적 인지주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그녀의 심의관은
앞서 제시했던 ‘규범적 타당성 요구의 요건’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두 번째 요건, 즉 “더 나은 논변의 힘”에 의한 지배의 신조가 함축하는 옳음을 향한 겸허한 태도의 중요성에 대해 필요한 만큼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이제 이 같은 경향이 그녀가 공적 담론에서의
종교적인 근거 제시 허용 여부에 관한 논쟁에서 입장을 밝히면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보자. 심의 민주주의관이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 간의 공적 심의를 정치적 의사결정에 있어서 불가결한 요소로 간주한다는 점은 기본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심의의 장에서 자신이 옹호하는 입장을 정당화할 때 제시하는
근거에 어떤 제한이 가해져야 하는가? 라퐁은 일단 상이한 심의 민주주의관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핵심 가정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 기본 가정은 바로 “포용적이고 구속되지 않은” 공적 심의의 과정에서 시민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만큼만 강제성을 띄는 정책들이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민주적 정당성의 기준에 따르면 시민들은 서로에게 모든 이들이 합당하게 수용할
수 있는 근거들에 기초한 정당화 논변을 제시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라퐁에
따르면, 이렇게 일견 단순 명료해 보이는 기준의 내부에는 두 가지 의무가 서로 긴장관계에 있다. '인지적 의무(the cognitive obligation)'는 제안된 강제성
- 39 -
이 있는 정책들을 그것들의 실질적인 가치(substantive merits)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이가 때문에 시민들로 하여금 관련된 모든 근거들을 고찰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더 나은 논변을 지지하는 근거를 우선시하도록 요구한다. 반면에 ‘민주적 의무(the democratic obligation)'은 다른 이들도 수용할 수 있는 근거, 즉
일반적으로 수용가능한 근거를 우선시하도록 요구한다. 그런데 다원적인 현대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종교적인 근거는 일반적으로 수용가능한 근거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가는가에 따라
이론가들 사이에 이견이 발생한다.53)
롤즈는 공적 영역에서 정치적 토론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강제적인 정책들을
지지할 때 공적으로 수용가능한 근거들만을 사용하도록 제한하였다. 종교적
(또는 다른 포괄적 교설들의) 근거들에 관해서는 시민들 간에 근본적인 불일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근거들은 근본적인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공적 심의에 포함될 수도 있지만 반드시 “때가 되면(in due course)" 그것들을
지지하는 적절한 정치적(즉, 공적) 근거들이 제시되어야 한다는 단서가 있다.54) 이러한 롤즈의 입장은 앞서 말한 민주적 의무를 강조하여 다원적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수용가능한 근거를 전적으로 우선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공적 근거들(public reasons)만이 강제적 정책을 결정함에 있어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 비판이 제기되었다. 가령 볼터스토르프(Nicholas Wolterstorff)는 종교적 신념들의 특성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요구가
많은 종교적 시민들에게 과도한 인지적 부담을 부과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롤즈의 제안은 시민들이 항상 두 종류의 근거들, 종교적인 것과 비종교적인 근거들을 따로 준비해 놓고 있는 경우에만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종교적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근거들과 비종교적인 근거들이 상충하는 경우에 바로 비종교적 근거보다는 종교적 근거를 우선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보면, 롤즈의 단서는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종교적 시민들의 정치적 통합(political integration)을 위협한다고 볼터스토르프는 주장한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논쟁에서 서로 대립하는 양쪽 편으로부터 일리가 있다고
53) Lafont 2009, p.129
54) J. Rawls, "The Idea of Public Reason Revisited", in John Rawls, Collected Papers, Cambridge ,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7) p.584
- 40 -
생각되는 부분을 모두 취하여 종합하는 입장을 취한다. 물론 그는 기본적으로
교회와 정부, 즉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자유주의적 입장에 동의하기 때문에
정치에 있어서 비종교적 근거에 제도적인 우선성을 부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는 공적인 정치적 토론이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와 같은 제도적 수준에서 공식적(formal)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공식적인(informal)
담론의 장에서도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적어도 비공식적 영역에서는
반드시 롤즈의 단서조항이 요구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오히려 정치적인 담론에 참여할 때 종교적 시민들은 종교적 근거들이 비종교적 근거들로 번역될
것을 희망하면서 자신이 지지하는 정책을 지지하는 근거로 종교적 근거만을 제시할 수 있다. 물론 번역은 필요하고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러한
의무는 종교적인 시민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공적 심의에
참여하는 모든 시민들에게 부과된다.55)
주목해야할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 하버마스가 종교적 시민들과 세속적 시민들 모두에게 자기 반성적인 인식적 태도(self-reflective epistemic attitude)
를 계발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시민들은 자기 반성적인 인식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다른 종교가 진리일 가능성과 과학적 지식의 권위와 정치에
있어서의 비종교적 근거들의 제도적 우선성을 수용해야한다. 세속적인 시민들도 그들이 살고 있는 세속 사회에 대해 반성적인 인식적 태도를 함양함으로써
종교에 “인식적 실체가 없다”는 “현대성에 대한 세속적 이해”를 초월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적 영역의 정치적 토론에서 종교적 시민들은 과학의 권위와
다른 종교가 진리일 가능성을 부정하는 종교적 근거들에 호소해서는 안 되며, 세속적 시민들은 종교적 믿음이 진실일 가능성을 부정하는 세속적 근거들에 호소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라퐁은 이러한 지적 겸양의 가치에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오히려 하버마스의 접근에는 동조할 수 없는 모종의 비대칭이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적어도 비공식적 공적 영역에서 종교적 시민들은 자신들이 진실로 믿는
근거들을 사용하도록 허용된다. 비록 그것들이 오직 종교적이기만 한 근거일지라도 말이다. 오직 자신들의 근거들이 입법 과정에서 고려되기를 원할 때에만
55) J. Habermas, "Religion in the Public Sphere", European Journal of Philosophy, 2006
(pp.1~25) 이하 Habermas 2006으로 표기
- 41 -
그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믿음에 대응되지 않는 세속적 근거들을 생각해내도록
요구받는다. 반면에 세속적인 시민들은 자신들의 세속적인 근거에 어느 정도
제한을 가하도록 종용된다. 종교에 “인식적 실체가 없다”는 인식적인 입장을 공식적으로 채택하면 안 되는 것으로 되어있다. 라퐁은 이러한 비대칭성이 공평하지 않다고 보고 종교적 시민들이 자신들의 믿음에 충실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듯이 세속적 시민들도 종교적 주장이 참일 가능성을 굳이 열어 놓아야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동성 결혼에 대한 논쟁에서 세속적 시민들이 동성결혼에 반대하는 종교적 주장이 참일 가능성에 대해 마음을 열어야할 필요는
없으며 그들이 제안한 정책이 그릇되다는 것을 보이는데 필요한 반론을 제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속적 시민들은 동성과 결혼을 원하는 시민에게 그러한 권리를 부정하는 것은 불평등한 대우라고 반대하거나 반차별주의에 호소하는 식으로 공적 토론에 참여하면 된다는 것이다.56)
라퐁의 생각은 어차피 제도적인 수준에서 공적 근거만이 인정된다는 기조를
바꾸지 않고 유지하기 때문에 하버마스처럼 굳이 비공식적 담론의 영역에서 자신이 생소하게 느끼는 것에 마음을 열고 번역을 종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종교적 시민들에게 자신들이 옹호하는 정책을 지지하기 위해 자신이 그 문제에
대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와는 별개로 비종교적 근거들을 생각해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실행불가능하거나 표리부동하다. 대신 자신들이 진정으로 믿는
견해와 근거들이 무엇이건 공적인 정치적 토론에 포함시킬 수 있는 권리와 민주 시민들에게 일반적으로 수용가능한 근거들에 관여해야하는 의무로부터 놓여날 권리는 구분해야한다고 보았다. 전자를 부여한다고 해서 후자가 보장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종교적 시민들이 진정으로 믿는 근거들을 논의에 포함시킬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일반적으로 수용가능한 근거들을 제시하는 의무를 면제받을 권리로 이행되지 않는다. 이러한 통찰에 의거하여 라퐁은 롤즈나 하버마스의 접근들에 대한 대안으로 다음과 같은 처방을 제시한다. 비공식적 공적 영역에서 정치적 논쟁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그들이 진실하게 믿는 어떤 근거에 호소해도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들은 민주
시민들에 일반적으로 수용가능한 근거들에 기초하여 다른 참여자들이 그들의
56) Lafont 2009 p.135
- 42 -
제안에 반대하여 제기한 반론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각 정책 제안에 대해 공적 근거들을 제공하거나
공적 근거들로 번역된 것을 제시할 의무는 갖지 않는다. 하지만 시민들은 그들의 제안에 대해 다른 이들이 제시한 근거에 대해 대응할 의무를 진다.57)
그런데 이러한 라퐁의 노선에는 논의되는 정책에 대한 더 나은 논변의 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근거를 경청해야한다는 '인지적 의무'는 자취를 찾을 수 없고 단지 일반적으로 수용가능한 근거를 우선시하라는 ‘민주적 의무'만이 강조된다. 이 같은 불균형한 태도는 다음의 구절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내 제안의 논점은 누구도 모두가 따라야하는 강제력 있는 정책에 대한 공적 심의에 진지하게 참여하기 위해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자신들의 인지적 입장과 전적으로 다른
방식의 사유에 참여할 의무는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58) (강조 첨가)
물론 시민들은 자신의 언어로 공적 심의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고 라퐁은
말한다. 가령 종교적인 시민들은 동성애에 반대한 종교적 주장에 대해 상이한
성서 해석이나 다른 종류의 종교적 근거들에 기초하여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 세속적인 시민들은 자신들의 세속적 입장 내에서 어떤 공통된 핵심을 찾아낼 때마다 종교적 근거들을 세속적 논변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버마스와는 달리, 라퐁에게서 이러한 일은 자신의 믿음이 오류일 수 있다는 지적 겸양으로부터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다음 구절을 살펴보면, 라퐁에게서 참되거나 옳은 답을 찾기 위한 인지적
의무가 단지 논의 주제를 독점하지 않을 민주적 의무로 변질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라퐁이 시민들에게 부과하는 인지적 의무는 진리와 옳음에 대해 열린 태도를 취하고 그것을 협력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논의를 시작하건 타인이 시작한 논의에 대응하건 간에 결국 자신의 믿음을 논변을 통해 옹호하는 것이다.
57) Lafont 2009, p,142
58) Lafont 2009, p.143
- 43 -
논쟁의 여지가 많은 입법 결정들에 대한 우리의 동료 시민들의 견해를 심각하게 고려하는 것은 단지 인지적인 의미보다는 특별히 정치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모두가
동의해야하는 강제력이 있는 정책들을 합당하게 수용할 수 있는 근거들에 기초한 정당화 논변들을 서로에게 제시하는 것이 민주 시민들의 의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논변, 증거, 정당화 등을 제공하기 위해 다른 동료 시민들의 제안과
견해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의무는 그들이 참일 수 있다는 인지적 가능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 시민들은 창조설, 동성애의 왜곡됨, 또는 여타 많은 종교적
견해들이 참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아마 인식적으로 닫혀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왜 상대가 제안한 정책이 그릇되다고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논변을 제공하는 인지적 노력을 기울여야할 빚을 지고 있다. 동료 시민들이 우연히 믿게 된 바가 그들에게 자신들이 무엇을 ‘진지하게 고려’해야하는지를, 즉 무엇이 비공식적 공적 영역의 심의 의제에 올라가야하는지를 일러준다. 그래서 시민들이 하마터면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었던 견해들을 진지하게 고려해야하는 이유는 어떤 특정한 집단도 무엇이 정당화가 필요하고 무엇은 그렇지 않을지를 선험적으로 그리고 영구적으로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59) (밑줄은 라퐁의 강조, 굵은체는 필자의
강조)
이러한 라퐁과 대조적으로, 하버마스가 비공식적인 공적 영역에서 종교적
근거들을 제시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은 종교적 시민들에게 비종교적인 근거만을 사용하는 것이 실행불가능하거나 표리부동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그렇게 함으로써 인식적으로 얻는 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국가는 정치적인 공적 영역에서 종교적 목소리의 속박을 푸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또한 종교 기관들의 정치적 참여에도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종교적인 이들과 공동체들이 자신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도록 단념시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러지 않을 경우 세속적 사회가 의미와 정체성의 창조에 있어서 주요한 원천들로부터 단절되지 않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세속적 시민들이나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이런 종교적 발언들로부터 어떤 상황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가령 종교적 발언의 규범적 진리 내용에서 자신들의 숨겨진 직관들을 발견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종교적 전통들은 도덕적 직관을 말로 표현하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 특히 공동의 삶의 취약한 형태들과 관련하여 그러하다. 이에 해당하는 정치적 논쟁59) Lafont 2009, p.137
- 44 -
이 일어날 때, 이러한 잠재력은 종교적 연설을 가능적 진리 내용을 운반하는 진지한
후보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특정 종교 공동체의 어휘로부터 일반적으로 접근가능한
언어로 번역될 수 있다.60) (강조 첨가)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하버마스의 체계에서 비공식적인 공론장은 공식적인
공적 심의의 모판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전자를 종교적 발언에 개방시키는 것은 적어도 규범적으로 좋은 볍씨를 제공할 가능성이 있는 원천과의 통로를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비공식적 공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번역은 단순히 종교적인 어휘로부터 세속적인 어휘로의 전환이라기보다는 특수
공동체의 언어로 표현된 도덕적 직관을 일반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통찰과 연결시키는 새 품종 개발에 비유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우량으로 판명된 모는 공식적인 공적 심의라는 수전(水田)으로 옮겨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품종의 개발은 모든 시민들의 몫이다. 이러한 이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종교적 시민들이 인식적으로 닫혀있는 만큼 세속적 시민들도 인식적으로 닫혀있어도 무방하다는 라퐁의 생각은 대칭을
맞춘다는 명목으로 인식적 개방성에 있어서 하향평준화를 시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움직임은 몇 가지 어려운 문제에 직면한다. 그 중
하나는 이미 수용한 “더 나은 논변의 힘”에 의한 지배라는 신조와의 부정합성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버마스는 종교적 시민들과 세속적 시민들 모두에게 매우 자기 반성적인 인식적 태도를 함양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자신의 것과 다른 믿음이 진리일 가능성에 인식적으로 열려 있어야만, 더 나은 논변이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가진 이들에 의해 제시되었을 때 그것을 수용할 수
있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더 나은 논변의 힘”에 의한 설득은 인식적 개방성을
전제한다. 그래서 반대로 라퐁이 허용하듯이 “자신들의 인지적 입장과 전적으로 다른 방식의 사유”에 대해서는 마음을 닫고 있어도 무방하고 각자 자신의
믿음을 상대에게 정당화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더 나은 논변의 힘”에 의한
설득은 유명무실해진다. 이러한 비판의 가능성을 의식한 듯 라퐁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60) Habermas 2006, p. 10
- 45 -
시민들에게 비공식적 공론장에 자신의 종교적 견해들을 포함시킬 권리를 인정하면서
다른 시민들이 그러한 견해를 진지하게 고려할 것으로 기대할 수 없다면 그러한 인정은 무의미하다는 것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 그럴듯한 가정은 하버마스가 그것으로부터 도출한 훨씬 더 강한 결론, 즉 정치적 공론장에서 종교적 진술들의
허용은 모든 시민들이 처음부터 이러한 진술들에 어떤 인지적 실체가 있을 가능성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어야 비로소 유의미하다는 결론을 승인하지는 않는다. 공적 토론에 종교적 (또는 어떤 다른) 근거들을 포함시키는 것은 몇몇(some) 시민들에 의해서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반면, 그것들이 왜 모든(all)
시민들에 의해서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하는지는 전혀 분명하지 않다.61) (밑줄은 라퐁의 강조)
위의 인용구에서 드러난 라퐁의 전략은 인식적 개방성의 요구를 모든 시민이 아닌 일부 시민에게 돌리는 것으로 “더 나은 논변”의 지배의 신조와의 정면충돌을 일단 모면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성공적이지 못하다. 첫째, 라퐁은 같은 논문의 다른 곳에서 누구도 “자신들의 인지적 입장과 전적으로 다른 방식의 사유에 참여할 의무는 갖지 않는다”고 말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러한 사유 경험을 원하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더 나은 논변의 힘”에 의한 설득의 가능 범위는 축소되는 것이다. 그런데
더 나은 논변에 의한 설득의 범위의 축소는 단지 종교적 관점과 세속적 관점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을 수 있다. 누구든지 상대가 자신의 인지적 입장과는 너무 생소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는 라퐁을 인용하면서 상대에 대해 인식적으로
문을 닫을 수 있는 것이다. 라퐁은 이러한 미끄러운 경사길 반론의 가능성에
대해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나은 논변의 힘”의 신조의 유지를 담보하지
못한다. 둘째, 라퐁이 이 같은 반론을 피하기 위해 누군가는 반드시 자신과 전적으로 다른 인지적 입장의 사유에 참여할 것이라고 낙관한다면 라퐁은 이들이
누구인지 해명해야 할 것이다. 이때 라퐁은 일종의 트릴레마(trilemma)에 직면한다. 모종의 지적 엘리트를 가정한다면 엘리트주의라는 불만을 살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일부 시민이 “자신들의 인지적 입장과 다른 사유에 참여”하는 사태의 발생을 그저 운에 맡기거나. 또는 엘리트주의를 피할 수 있는 다른 경험61) Lafont 2009, p. 136
- 46 -
적 증거를 추가로 제시해야하는 이론적 부담을 안게 되는 것이다.
이 외에도 라퐁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난점이 발견된다. 라퐁은 공적 근거를 토대로 제시된 반론에 대응하기 위해 종교적 시민들이 제시해야하는 근거의
속성을 “강력한(compelling)”이나 “모든 시민들을 자유롭고 동등하게 대우함과
양립가능한”으로 표현할 뿐62), 그것이 종교적 근거인지 아니면 공적 근거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이러한, 긍정적으로 보면 열려있고 부정적으로 보면 모호한, 전략을 취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만약 종교적이라고 규정하면 반대자와 계속 평행선처럼 겉돌게 될 것이고 공적
근거이어야 한다고 못 박으면 라퐁 자신이 하버마스가 종교적 시민들에게 잘못
부여했다고 주장하는 인지적 부담을 다시 부과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적 시민이 비종교적 반론에 대응하는 근거가 다시 세속적이거나 종교적일 수밖에 없다면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로 남게 된다.
2.3. 협의의 심의 이념의 정당화
지금까지의 분석을 통해서 드러난 바를 종합하면, 협의의 심의 이념으로부터의 이탈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들을 드러낸다. 첫째, 협의의 심의 이념의 첫 번째 요건인 ‘규범적 타당성 요구의 요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선호취합적 민주주의와 차별되는 심의 민주주의만의 고유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잠시 상기해보면, 하버마스의 체계에서 “더 나은 논변”은 사실의 문제뿐만
아니라 당위의 문제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더 나은 판단이 존재한다는 도덕
인지주의를 전제하였다. 그래서 심의는 엄밀히 말해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알 수 있는 장치를 넘어서는, 누가 보아도 옳은 결정을 탐색하는 장치이다. 그런데 이와 달리 밀러처럼 진리(또는 객관성)의 추구를 사실 영역으로 제한하고 당위의 영역에서는 진리(또는 객관성)의 추구가 어렵다고 보게 되면 심의의 기능은 주로 사실관계를 보다 분석적으로 따지는 작업에 머물게 된다. 밀62) Lafont 2009, p.144
- 47 -
러처럼 심의에 임하면서 좀 더 객관적으로 옳은 결정에 도달할 수 있다는 기대를 제거한 후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수많은 정보와 분석을 통해서 자신의 진정한 선호를 알게 된 시민들이 다음 단계에서 할 일은 그것을 취합하는
것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선호취합적 민주주의관과 다를 바 없다. 둘째, 협의의 심의 민주주의 이념의 첫 번째 요건을 충족시키더라도, 두 번째 요건인 ‘반독단주의 요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더 나은 논변”에 의한 지배라는 신조와의 정합성을 유지할 수 없다. 물론 공식적이건 비공식적이건 정치적 담론의 참여자들은 각자의 믿음에 충실한 논변을 제시할 수 있어야하고
제시해야만 한다. 하지만 “더 나은 논변”의 신조는 그것을 수용한 이들에게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정책에 관철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관점에 내재한 사실연관과 논리연관이 충분히 드러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리할 것을 명한다. 또한 논자는 더 나아가서 자신의 믿음이 사실이거나 좀 더 옳음에 근접한 것이기를 바랄 수 있다. 하지만 “더 나은 논변”의 신조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와 옳음을 추구하는 존재로서 그러한
가치들의 구현에 기여하기를 소망하기 때문에 그리할 것을 명한다. 그래서 확신에 찬 순간에도 자신의 믿음이 오류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비할 것을 요구한다. 라퐁이 허용하듯, 자신과 전적으로 다른 인지적 입장의 사유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이러한 오류를 피할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하는 것과 다름없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다른 인지적 입장에 벽을 쌓는 것을 허용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러한 폐쇄적 태도를 어느 지점에서 버려야할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라퐁처럼 인지적 개방성을 일부 사람들에게만 요구하거나 기대할 수
없다. 일부 사람들을 어떻게 구분해야하는지도 물론 문제이지만, 인지적 개방성은 “더 나은 논변”에 의한 설득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 조건이므로 이러한 신조를 수용한 각자에게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협의의 심의 민주주의 이념을 수용할 것인지 여부는 궁극적으로 이론가나 시민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협의의 이념을 수용하지 않고도 심의 민주주의의 고유성을 확보하고 “더 나은 논변”에 의한 지배라는 신조와의 정합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본래 심의 이론가들은 선호취합적 민주주의관이 주로 인간을 이해관심을 추구하는 경제적 존재로 이해하고, 정치를 시장의 원리로 작동하는 것으로 보고, 상호 경쟁을 강조하는 다소 적대
- 48 -
적인 민주주의관을 바탕에 두고 있다는 점도 비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요소들은 무시하고 선호취합적 모델을 단지 공적 토론은 중시하지 않고 투표만을 앞세우는 입장으로 축소 정의하는 것이 그 방법이다. 그러면 당위의 문제는 객관적인 답을 찾을 수 없으며 심의 민주주의 이념을 공적 토론으로 단순히 사실관계를 명료히 하여 자신의 진정한 선호를 찾는 것이라고 규정해도, 경쟁 민주주의관으로부터 심의 민주주의를 차별화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더
나은 논변”에 의한 지배 역시 사실의 영역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한정하면 당위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믿음을 무반성적으로 고수해도 이러한 신조와의 정합성을 유지할 수 있다. 사실상 현실의 민주주의는 너무도 열악한 나머지 이 정도만의 접근으로도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양 갈래의 길에서 선택은 가능하지만 선택에는 피할 수 없는 결과가
따른다. 광의의 심의 이념을 취하면 심의 민주주의는 일단 비교적 많은 이들에게, 심지어는 도덕 회의론자에게도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고 다가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확산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정치는 여전히 시장의 원리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 당연하고, 우리는 덜 분석적이고 덜 적극적인 정책소비자에서 더 분석적이고 더 적극적인 정책소비자로 한 단계 격상될 뿐이다. 반대로
협의의 심의 이념을 취하면 우리는 정치가 현실주의나 시장주의로부터 탈피하여 본연의 도덕적 기능을 되찾게 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길이 열린다. 누구나
이러한 높은 이상을 가질 수는 있지만 이들 모두가 그러한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이론을 갖춘 것은 아니며, 협의의 심의 이념은 이러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의 담론 윤리학이 처음 제시된 맥락은 민주주의와의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고찰한 내용만으로도 그것들이 정치와 도덕을 접목시키는 데에 독보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우선 하버마스는 실천이성의 개념을 중심에 둔 칸트의 의무론의 전통을 계승하여 현대화하였다. 일단 칸트의 관점을 좇아 도덕을 인간이면 누구나 소유한 실천이성에
근거지움으로써 특정 종교의 관점을 빌리지 않고도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세속적 도덕의 영역이 구축된다. 이와 동시에 칸트의 보편화가능성 원리를 재해석하는 인지주의적인 접근을 취함으로써 도덕을 주관적 감정의 문제로 치부하는
도덕 회의론에 대응할 객관적인 도덕적 관점이 확보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 49 -
객관적인 도덕적 관점은 탈형이상학적인 의사소통 행위 이론을 매개로 하여, 관련된 모든 이의 관점의 비편파적인 통합으로 재규정되었기 때문에 도덕적 판단은 절차적인 동시에 공적인 것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보편화 원칙이 요구하는 것은 옳음에 도달하기 위한 모든 이들의 공동 탐구이다. 이는 정치적
이상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옳은 정치적 결정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이들의 정치적 참여를 요구하는 것과 동일한 구조를 갖는다. 그리고 옳음의 문제와 좋음의
문제를 구분하고 전자만을 진정한 공적 도덕의 영역으로 보았기 때문에 가치
추구의 문제, 즉 좋음의 영역에서 정당한 개인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었다. 또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우리가 이해를 지향하는
언어행위를 하는 존재로서, 적어도 근거를 가지고 타당성을 주장하거나 요구하는 이성적 의사소통에 참여할 때만큼은 참, 옳음, 그리고 진정성을 추구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설득력 있고 체계적으로 그려내었다.
지금까지 열거한 이론적 토대 중에 하나라도 그것이 대립하고 있는 개념으로 대체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한번 상상해보자. 도덕이 어느 특정한
형이상학이나 종교에 귀속되거나 주관적인 감정의 문제로 치부되거나 소수의
현자의 판단에 맡겨질 수 있는 것이라면, 논변을 제시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민주적 절차에 의지하여 옳은 결정을 내리려는 시도는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해진다. 그리고 도덕의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과도하게 억압할 수 있다면 정치에 도덕의 논리가 개입되는 것은 결코 환영받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우리가
참과 옳음을 지향하는 내면적 본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서의 자기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래서 참 또는 옳음을 더 잘 드러내는 근거에 설득되지 않는다면 상호간의 토론은 양보 없는 이해다툼과 독단적 믿음들의 격전장으로 전락하거나 힘의 균형에 의한 잠정적 타협으로 점철될 것이다.
협의의 심의 민주주의 이념의 두 요소는 하버마스에 의해 명시적으로 정식화된 것은 아니며 심의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이론 전체를 포함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이념이 그의 이론으로부터 추출될 수 있었던 모든 공적을 그에게 돌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버마스 역시, 칸트의 도덕철학을 비롯하여 언어와 의사소통에 관한 오스틴(John L. Austin) 등의 연구에서 필요한 개념들과
논의의 출발점을 제공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협의의 심의 민주주의 이념은
다차원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는 선호취합적 민주주의관을 거부하고, 심의관의
- 50 -
고유성과 정합성을 유지하는 것이 정치적 이상으로서의 민주주의와 이해를 지향하는 인간에 대한의 올바른 인식에 부합한다고 믿는 이들 모두의 이념이라
할 수 있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고유성과 정합성을 갖춘 협의의 심의
이념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심의 이념임을 정당화하였으므로, 이하의 논의에서 언급되는 심의 이념은 협의의 심의 이념을 의미한다.)
- 51 -
III. 심의 이념과 민주주의의 절차적 요소
“국민에 의한”이라는 경구로 상징되는 민주주의의 절차적 요소는 정치적 이상으로서의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적 이상과는 달리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징을
표현한다. 그것은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를 통해 민의를 공정하게 반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대부분의 민주주의 이론가들은 이것을 정치적 평등의 이념으로 규정하고 있다.63) 하지만 민주주의가 정치적 평등을 추구한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하는 이들 간에도 그것의 정당 근거나 적절한 수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정치적 평등이 단지 도구적 가치만 있는지 아니면 내재적(또는
표현적) 가치도 중요한지에 대한 논쟁이나64) 정치적 평등이 구체적으로 무엇의 평등인지에 대한 논의가 그러한 예라고 볼 수 있다.65)
이 장에서 나는 심의 이념이 민주주의의 두 구성요소 중에 하나인 절차적
요소와 결합될 때, 정치적 참여에 대한 의식과 정치적 평등을 구현하는 제도에
어떤 변화를 요구하는지에 대해 조명하고자한다. 먼저 선호취합적 민주주의관과 차별화된 협의의 심의 이념이 정치적 평등을 이해하는 방식을 고찰하면서
정치적 평등에 대해 제기된 몇 가지 중대한 우려를 해소할 수 있는 이론적 자원이 심의적 접근에 내재함을 보일 것이다. 그런데 심의 이념은 이렇게 이상적63) 예컨대 달은 정치적 평등을 민주주의의 기본전제라고 단언하고 있다. Robert Dahl, On
Political Equality, Yale University Press, 2006, p. ix (이하 Dahl 2006으로 표기) 예외적인 경우로는 손더스의 해석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많은 이들이 통상적으로 함께 연상하는 세
개념, 즉 민주주의, 정치적 평등, 다수결은 사실상 개념상으로 상호 독립적이며 뒤의 두 개념이 민주주의로부터 도출되려면 다른 실질적인 논거들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Ben
Saunders, "Democracy, Political Equality, and Majority Rule", Ethics 121 (October 2010)
p.148 (이하 Saunders 2010로 표기)
64) 아너슨과 그리핀 간의 논쟁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C. G. Griffin, "Democracy as a
Non-Instrumentally Just Procedure", The Journal of Political Philosophy: Vol. 11, No. 1,
2003, pp. 111~121(이하 Griffin 2003으로 표기), 같은 책에 수록된 R. J. Arneson,
"Defending the Purely Instrumental Account of Democratic Legitimacy", pp. 122~132 (이하 Arneson 2003으로 표기) 참조
65) 페터는 이를 두고 사회 정의 차원에서 평등의 논의가 '어떤 평등인가?(equality of what?)'
로 발전한 것과 정치적 평등도 '어떤 정치적 평등인가?(political equality of what?)'로 구체화된 것을 유비적으로 설명한다. Fabienne Peter, "The Political Egalitarian's Dilemma",
Ethical Theory and Moral Practice 10: 373~387 (2007), p. 375
- 52 -
인 방향을 제시함에 있어서는 탁월함을 보이는 반면에, 실제로 현실에 적용될
때에는 해결해야할 여러 가지 과제를 안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때문에 심의 민주주의관에 대한 비판들이 대부분 이러한 측면에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며
예견된 일이다. 심의 이념의 절차적 측면에 제기된 문제는 일단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심의 참여자들이 정치적 논의에 참여하여 논변을 교환할 수 있으려면 능력상으로나 여건상으로 제반 조건을 갖춰야 하는데
이러한 선결 요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요원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심의 절차 자체가 의사결정에 엄청난 물리적, 시간적 부담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하에서는 이러한 비판적 문제 제기에 대해 심의 이론가들의 제시한 해법을 소개하면서 이들의 논의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보도록 하겠다.
3.1. 정치적 평등의 정당 근거
정치적 평등의 정당화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구분된다. 그 중 하나는 그것의 도구적 가치에 호소하는 것으로 “국민에 의한”이라는 절차적 요소가 “국민을 위한”이라는 실질적 요소에 기여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내재적 혹은 표현적 가치를 내세우는 것이다. 여러 이론가들이 정치적 권력(political power)을 동등하게 분배하는 것 자체가 그것의 결과와는 별개로 절차를 통해 시민들을 동등하게 대우함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며, 시민들은 이로써
자신의 기본적인 사회적 지위가 공적으로 동등하게 인정받는다는 의식을 갖게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원리상으로 현실주의적인 선호취합적 민주주의 모델에서는 정치적 평등이
각자 자신의 이해관심을 추구하고 그것을 공정하게 취합하는 결정적인 도구의
역할을 하게 된다. 즉, 자신의 이해관심을 누가 대신 지켜줄 것으로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각자는 스스로 정치적 참여를 통해 이를 보호해야하며 정치적 평등이 그러한 결과를 보장할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가령 선호취합적 민주주의관의 옹호자로 지목되는 달(Robert Dahl)의 경우, 시민의 복지나 이익이 평등하게 고려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 정치적 평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절
- 53 -
대 권력의 부패, 시민에게 견제되지 않는 정부의 오류, 동등한 시민권을 거부당한 부류의 이익 침해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을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견제의 필요성을 시사하고 있다.66) 그런데 이러한 적대적 민주주의 관점은 적어도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 개인이 자신이나 자신과 이해관심을 공유하는 집단의
대표자가 정치적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면 권익을 보호받을
수 있는 안전장치가 개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모든 이의 동등한 참여를 보장하면 마치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작동하듯이 힘의 균형이 생겨 공정한 결과가 산출될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일견 그럴듯한 취합적인 접근은 곧 맹점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의 실질적 요소와 절차적 요소 간에는 외연적인 비대칭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통찰을 일단 ‘민주주의의 실질적 요소와 절차적 요소
간의 외연적 비대칭성’이라고 지칭하겠다. 그 내용을 설명하면 이러하다. 어떤
정치적 의사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는 사람들의 집합을 A라 하고 그러한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집합을 B라고 할 때, A의 외연은 B의
외연보다 압도적으로 넓다. 이는 단지 시민 모두가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대표자를 보낸다는 의미, 또는 아직 대표자를 보낼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대표자를 참석시키는 것이 자연 법칙적으로 불가능한 경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장 극명한 예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세대를 들 수 있다. 물론 선호취합적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도 어떤 이들은 미래 세대의 권익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지키기 위해 이들을 대변하고자 자처할 수 있다. 하지만 선호취합적 민주주의관에서 이러한 대리 참여는
미래세대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이해관심이나 선호를 갖는 이들의 존재 여부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선호취합적 민주주의관은 원칙적으로 자신의 이해관심과
선호를 스스로 또는 대표자를 통해 표현하는 것 이상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선호 취합적 민주주의 모델에서 정치적 참여의 도구적 가치는 대표자를 보낼 수 있는 집단이 주로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대표자를 참석시킬 수 없는 집단의 권익은 우연적인 사실, 즉 대리를 자처하는 이들이 나타날 것인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인지 여부에 좌우된다.
66) Dahl 2006, pp.15~17
- 54 -
따라서 선호취합적 민주주의관은 ‘민주주의의 실질적 요소와 절차적 요소 간의
외연적 비대칭성’에 대처할 수 있는 이론적 잠재력이 매우 제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방금 도입한 ‘민주주의의 실질적 요소와 절차적 요소 간의 외연적 비대칭성’ 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코헨은 바로 심의 절차가 이를 극복할 방안임을 주장하고 있다. 일단 코헨은 정치적 권리들을 동등하게 부여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제시된 바와 같이 다른 기본적 권리와 이해관심을 보호하는 도구적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그는 심의적 모델에서는 권리의 행사가 심의를 통해서 “공익(common good)을 증진하는 방식”67)으로 추구된다는 점을 들어서 심의적 접근의 도구적 가치가 취합적 접근의 도구적 가치와 차별화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기본권과 이해관심을 추구하되 공익을 증진하는 방식으로
추구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일단 심의 과정에서 오직 특정 제안이나 정책이 공익에 가장 이바지한다는 형식의 주장만을 허용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 예컨대 롤즈는 질서정연한 사회에서는 정치적 토론이 공공선(the public good)이 대안적 해석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하였다. 바꿔 말하면 정치가 특정한 또는 분파적인 이해관심을
각자 추구하는 집단들 간에 협상으로 이루어지는 체제는 정의로운 사회에 부적합하다는 것이다.68) 롤즈에 따르면, 정치의 장에서 활동하는 시민들과 정당들은 “편협하거나 집단의 이해를 앞세우는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된다.69) 그리고
그는 당사자들은 “공공선에 대한 견해를 언급하며 공개적으로 주장된” 요구들에만 반응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70) 한편, 코헨은 로저스(Joel Rogers)와
함께 저술한 논문에서 자신의 이해관심에 대한 언급을 허용하는 다소 세련된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코헨과 로저스에 따르면, 심의는 자신의 이해관심에 대67) J. Cohen, "Procedure and Substance in Deliberative Democracy", In: Bohman J,
William R (eds), Deliberative Democracy: Essays on Reason and Politics, MIT Press,
Cambridge, MA, 1997, (이하 Cohen 1997b로 표기) pp.
68) J. Rawls, A Theory of Justic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1 (이하 Rawls 1971로 표기) pp.360~361 (번역본 사회정의론 pp.372~373)
69) Rawls 1971, p.360
70) Rawls 1971, p.226
- 55 -
한 진술들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이해관심의 표현은 정당화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정보를 제공하는 방편으로 인정될 뿐이다. 심의에서는 모든 이들의 이해관심을 공정하게 포용하거나 가장 곤궁한
이들의 안녕을 증진시키는 것이 어떤 정책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그런데
문제의 정책이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이해관심들이 어떻게 얽혀있는지 알 필요가 있으며 관련된 이들이 각자 자기 이해관심을 표현하는 것은 그것을 찾아내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 정책은 나(또는 내가
속한 집단)의 이해관심에 부합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그 정책을 채택해야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지만 여러 상이한 정책들 간에 선택을 할 때 필요한 정보는 될 수 있다.71) 따져 보면 롤즈의 정석적인 답과 코헨과 로저스의 약간 변형된 답은 원칙적으로 “모든 이들의 이해관심을 공정하게 포용하거나 가장 곤궁한 이들의 안녕을 증진시키는” 증거에 의해서만 정책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코헨이 제시한 심의적 접근은 공익을 언급하고 자신의 제안이나 주장이 그것에 부합함을 논변으로 정당화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선호취합적 민주주의관보다는 ‘민주주의의 실질적 요소와 절차적 요소 간의 외연적 비대칭성’을
극복함에 있어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선호취합적 민주주의는
원칙적으로 자신의 이해관심을 대변하는 데에 충실하면 되고 의사결정과정에서도 정당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흥정과 협상이 끼어들 여지를 허용하기 때문에
정치적 결정에 자신의 권익을 주장해줄 대표자를 참석시키지 못한 이들을 보호하지 못한다. 반면에 코헨이 주장하듯이 심의 과정은 공공선에 호소하기 때문에 적어도 그 공중에 속하는 이들의 범위에 소외될 수 있는 이들까지 충분히
포함한다면 하나의 제안이 이러한 범위에 속한 모든 이들을 위한 것임을 인정받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취약한 이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코헨처럼 절차적 기제에만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는 측면도
존재한다. 공익에 대한 호소를 심의적 정당화의 유일한 근거로 채택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진정한 의미의 공익에 부합하는 대안이 선택되지 못하게 만드는
71) Joshua Cohen and Joel Rogers, "Power and Reason", in Deepening Democracy:
Institutional Innovation in Empowered Participatory Governance ed. by Archon Fung and
Erik Olin Wright (New York: Verso, 2003) p.247
- 56 -
요인은 각자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의의 참여자들이 자신의 이해관심을 극대화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면 적어도 심의의 기획, 진행, 종결의 세 단계에서 공익의 구현을 좌절시키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첫째, 애초에 공적 심의의 의제를 발굴하는 단계에서 심의의 기획자들은 자신의
사익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들만을 우선적으로 추천할 수 있다. 둘째, 심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참여자들은 공익보다는 사익에 좀 더 부합하는 제안을 마치
공익에 부합하는 것처럼 포장할 수 있다. 셋째, 모든 토론이 끝나고 표결로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결정이 비밀투표에 부쳐질 경우 참여자는 자신의 사익에 가장 부합하는 대안을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이 중에서 뒤의 두 가지 가능성은
심의 여건과 절차를 보완함으로써 다소 억제될 수 있다. 심의 참여자들을 충분한 논리적 훈련과 관련 정보로 준비시킨다면 심의의 과정에서 제시되는 공익의
탈을 쓴 전략적 발언을 어느 정도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비밀투표가 아닌 공개 투표를 통해 각자의 결정을 서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면 이 역시 좀
더 공익에 부합하는 대안을 선택해야할 외적 동인을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심의의 의제를 구성하는 단계, 즉 심의 기획자들의 재량이 가장 많이 발휘되는
단계에서는 소외되고 취약한 이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사안이 더 늦지 않게 문제화될 수 있는지 여부는 대부분 기획자들의 불편부당한 정신과 의지에 달려있다.
이제 다시 코헨의 논의로 돌아가 그가 정치적 평등의 도구적 가치와 더불어
내재적 또는 표현적 가치를 언급하는 부분을 살펴보자. 모든 시민들이 효과적인 정치적 권리를 가지는 것은 시민들이 정치적 심의에서 동등한 존재로 대우받는다는 것을 연상시키는 역할을 하며 권력의 불평등을 감소시킴으로써 심의적 정치로부터 협상의 정치로 회귀하려는 동기를 억제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다시 말해서, 시민들에게 심의에 기여 할 수 있는 기회를 동등하게 부여하는 것은 시민 존중의 내재적 또는 표현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서 시민들의 공적
존재로서의 자존감을 높여 공익을 추구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코헨에 의하면, 시민을 동등한 존재로 대우하는 하나의 표현으로 정치적
평등을 추구해야할 또 다른 이유가 존재한다. 그것은 시민들이 공적 업무들(public affairs)에 관여하려는 중요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들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그러한 삶이 좋은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 57 -
생각하거나, 루소처럼 개인의 자율과 참여 간에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종교적 신념에서 사회 정의를 확립할 책임을 수행하지
않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는 이유에서일 수도 있다. 아무튼 공통된 것은 시민들이 공적 사안에 관심을 두게 되는 중대한 이유들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러한 이유들이 행위자들에게 갖는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시민을 동등한 존재로 대우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72)
그런데 코헨이 시민들이 공적 사무들(public affairs)에 관여하려는 중요한
이유들과 관련하여 제시한 설명이 심의적 관점을 드러냄에 있어 최선의 설명이
될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이 드는 것은 코헨의 논거가 정치적 평등의 문제에
천착한 정치 이론가 베이츠(Charles Beitz)가 제시한 논거와 유사한 듯해도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베이츠는 정치적 평등에 의해 보호되는 이해관심의
종류가 다양함을 환기시키면서, 인간의 세 가지 '규제적 이해관심(regulative
interest)'이 정치적 평등을 요구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73) 첫째, 시민들은 공적 토론과 정치적 선택에 참여함으로서 인격체로 공적인 인정(recognition)을
받으려는 이해관심을 갖는다. (이는 민주적 절차 자체가 각자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동등하게 존중함을 상징한다는 표현적 가치에 호소한다.) 둘째, 시민들은 욕구 충족과 기획한 바의 성취와 같은 자신들의 이해관심이 불공정하게 처리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동등한 대우(equitable treatment)에의 이해관심을 갖는다. (이것은 달이 도구적 가치를 강조하는 논거와 유사하다.) 세 번째로 거론되는 것은 심의의 책임(deliberative responsibility)으로서, 민주적 제도들이 정치적 문제들이 관련 정보를 숙지하고 경쟁 대안들을 평가할 수 있는 공적 토론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공통된 신념이다. 이러한 신념의 바탕에는 공적 토의가 시민이 공적 결정자("maker")로서 자신의 판단의 적절성을 확인해주고 공공정책의 대상("matter")으로서 정치적 결정과 참여 절차의 신실함을 보장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작용한다.74)
72) Cohen 1997b, pp. 422~423
73) 규제적 이해관심이란 집단의사 선택의 문제에서 통제를 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고차적인
이해관심이다. 베이츠는 여러 차원의 규제적 이해관심들 간의 상충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Charles Beitz, Political Equality, Princeton University Press, Princeton, NJ, 1989,
pp.105~109 (이하 Beitz 1989로 표기)
74) Beitz 1989, pp. 109~116
- 58 -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단순히 자신의 이익이나 권리를 보호하는 데에 관심을 두는 차원이 아니라 공적인 사안이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적 차원의 관심을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일견 유사해 보이는 코헨의 두
번째 근거와 베이츠의 마지막 근거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베이츠는 공적
토의를 통해 자신의 공적 사안에 대한 견해의 적절함을 확인받으려는 이해관심이 정치적 평등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베이츠가 자신의 의견의 적절성을 검증받으려는 동기를 어느 정도 보편적인 것으로 본 것과 달리, 코헨에게서는 이러한 이유가 여러 가능성중 하나일 뿐이다. 즉, 개인에 따라 이러한 동기를 가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기술적(descriptive)
차원에서는 자신의 의견이 맞는지를 검증받고자 하는 이해관심을 일반화하지
않은 코헨의 다원적 설명이 더 정확할 수 있다. 하지만 심의에 참여할 때, 좋은
삶과 자율의 개념이나 종교적 배경에 의한 정치적 관심보다는 베이츠가 말하는
자신의 공적 의견의 진위를 확인하려는 관심에 의해 동기 부여된 경우가 자신의 것보다 “더 나은 논변의 힘”에 의해 설득당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자신의
견해의 진위를 확인하려는 관심은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증거나 정황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교정하겠다는 의지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코헨에게서 합당한 다원주의에서 중첩적 합의를 강조했던 롤즈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롤즈가 정의의 두 원칙을 공유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그러한 원칙들을 수용하게 한 배경의 철학적, 형이상학적, 도덕적 포괄적 이론들이 무엇이며 그것들로부터 원칙의 수용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는 문제 삼지 않았던 것처럼, 코헨은 정치에 참여하려는 배경이 특정 철학이나 가치관 또는 종교에 유래한 것에는 관계없이 공적 사안의 결정에 참여하려는 관심이 중첩된다는 사실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버마스가 다양한 철학적, 형이상학적, 도덕적 포괄적 이론들을 가진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이해 지향적 의사소통의 정체를 드러낸 것처럼 코헨도 다양한 철학적, 형이상학적, 도덕적 포괄적 이론들이 공유하는 정치적 참여의 동기의 핵심을 해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진리와 옳음에 대한 관심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왜 심의에 참여한 시민들은 각자 자신의 포괄적 이론에서 파생된 견해만을 독단적으로 고수하지 않고 심의 민주주의가 표방한 더 나은 논변의 힘에 의해 설득당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 59 -
3.2. 기존의 우려와 심의적 해법
이제 심의 이념이 정치적 평등에 대해 제기된 우려들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정치적 평등에 회의적인 논거들은 다양하지만75), 여기서 다루게 될 두 논거는 옳음의 견지에서 정치적 힘을 평등한 분배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시각을 바탕으로 한다는 측면에서 더 직접적이고 강력하다.
3.2.1. 개인 간의 정치적 역량의 차이
정치적 힘을 동등한 분배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부절절하다고 보는 첫 번째 근거는 개인 간에 능력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민주주의의 진지한 옹호자로 여겼던 밀(J. S. Mill)도 이러한 경험적 관측 때문에 다소의 정치적 차등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밀에 따르면 개인의 능력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양립가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 부당하다. 먼저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모든 사안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이들이 그 사안에 대해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각자가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과 동등한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명제이다. 예컨대 두 사람이 함께 어떤 일을 도모하면서 의견이 다를 때, 두 견해에 정확히 똑같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덕성에 있어 동등하더라도 지식과 지력에 있어 한 사람이 우월할 수 있고, 혹은 지식과 지력에 있어서 동등하더라도 덕성에 있어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또는 지적으로 더 나은 사람의 의견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밀은 한 사람에게만 관련이 있는 사안의 경우에는 당사자는 다른 사람의 현명한 의견보다 자신의 의견을 따를 자75) 본고에서 다루는 것 이외에, 민주주의와 정치적 평등의 개념의 분석(Saunders 2010), 순수
절차적 정의 개념의 성립불가능성(Arneson 2003, 129~130)과 대의 민주주의의 상황(Dworkin 1987, 12~13)등이 지적되었다.
- 60 -
격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와 관련 있을 때는 무지한
쪽이 지혜로운 사람에게 자신의 판단의 몫을 양보하지 않는다면 그 반대가 되어야하는데, 이는 정의가 요구하는 바에 어긋난다.76)
이러한 통찰의 계보를 잇는 아너슨(Richard Anerson)에 따르면, 정치적 힘이 부여되는 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조건, 즉 도덕적 능력(moral competence)
과 그러한 능력을 사용하고자 하는 성향(disposition)이 만족되어야 한다.77) 여기서 도덕적 능력이란 영향을 받게 되는 이들의 권리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힘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단지 도덕적 통찰력을 소유함을 넘어서 그러한 통찰을 구현하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지적 능력까지 포함한다. 그런데 이러한 능력을 단지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그러한 능력을 발휘하여 현실을 개선하려는 지속적인 경향성까지 갖추어야한다.78) 사실상 이러한 아너슨의 기준에는 밀과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밀은 개념적으로 구분되는 두 개의 기준, 즉 도덕성과 지력을 자세한 설명 없이
정신성으로 한데 묶어놓은 데다가 정신적 우월성을 판단할 때도 주로 지력을
판단하는 교육이나 직업을 참고한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감지한 듯, 아너슨은 도덕적 탁월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지적 능력을 그것에 종속시키는 구도를 취한다. 한편 드워킨(Ronald Dworkin)은 유사한 우려를 더 우회적이면서 섬세한 논변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 힘의 성격은 두 가지, 즉 단독효과(impact)와 영향력(influence)로 구분될 수 있다. 전자는 개인이 혼자 미치는
효과로, 어떤 대안에 표를 던짐으로써 결과에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후자는 단지 혼자만 미치는 영향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믿거나 투표하거나 선택하도록 유도하는 설득력도 포함한다.79) 그는 자원과 가치가
평등하게 분배된 평등한 사회에서조차 관심, 가치관, 특수교육, 평판 등의 차이76) J. S. Mill, 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 The Floating Press, 2006 (이
책은 1861년에 처음 출간됨) 이하 Mill (1861) 2006으로 표기, pp. 200~201
77) R. J. Anerson, "Democratic rights at national and workplace levels", In The Idea of
Democracy, ed. by David Copp, Jean Hampton, and John E. Roem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p. 122 (이하 Arneson 1993으로 표기)
78) Arneson 1993, p.118
79) 본고에서는 전자(impact)를 ‘단독효과’, 후자(influence)를 ‘영향력’이라고 번역할 것이다.
- 61 -
에 의해 시민들 간에 정치적 영향력에 있어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향력의 차이를 줄여 평준화를 시도하는 방법들은 그가 보기에 하나같이 수용불가능하다. 첫째, 함께 모여 사안에 대해 집단적으로 검토해보는 기회를 줄이는 방법이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부 시민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가장 야만적인 전체주의 정치 체제에서 하는 것처럼 정치적 연설과 결사를 금지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둘째,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는 교육이나 정치 캠페인에
투자하는 데에 상한선을 두는 방법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제한, 가령 캠페인의 지출에 대한 제한은 정치에 관심이 없는 이들은 자신의 자원을 마음대로
활용하도록 허용하면서 정치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삶에 맞게
자신의 자원을 사용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평등주의에 역행한다. 셋째,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적 결정과 관련하여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려 하거나 또는 영향을 받지 않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제안은 사람들에게 어떤 정치적 목적에 대한 가장 놓은 논변이나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를 무시하라고 권유하는 것이므로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80)
그렇다면 이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제안을 하였을까? 먼저 밀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복수 투표권(plural voting) 제도를 고안하였다. 모든 시민에게 일단 투표권을 주고 더 믿을 만한 판단력을 가진 이들을 가려내어 추가로 투표권을 더 부여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들을 가려내는 기준인데, 그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부자가 빈자에 비해 평균적으로 더 나은 교육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재산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우선 그 밖에 다른 관련 요소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이 기준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불완전하고, 따라서 그러한 배경이 현명한 판단을 보장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국가적인 교육 체제나 믿을 만한
검증 체계가 부재한 상태에서는 직업의 성격이나 교육의 성격과 정도 등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잠정적인 결론이었다.81)
이러한 밀의 제안은 빛을 보지 못했으나 드워킨이 생각하는 해결 방안은 미80) Ronarld Dworkin, "What is Equiality Part 4: Political Equality", University of San
Francisco Law Review, Vol. 22, Fall, 1987, (이하 Dworkin 1987로 표기) pp.14~17
81) Mill (1861) 2006, pp.201~204
- 62 -
국식 입헌 민주주의에서 활용되는 제도와 중첩된다. 그것은 사법 심사(judicial
review)라고 불리는 장치로서 입법부나 행정부의 결정을 헌법에 대한 이해에
비추어 시험하고 그러한 이해를 위반했다는 결정이 내려지면 무효화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소수의 현명한 대법원 판사들에 의해 내려진다.82) 한편 아너슨은 대법원 판사들이 다수결을 이러한 방식으로 제한하는 권한을 갖는
것에 대해 드워킨 만큼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조건부로 이러한 해결책에 동의하였다. 만일 대법원 판사들이 다수결을 제한하는 권한을 가지는
것이 도덕적으로 바람직하고, 그들이 개인의 기본권의 보호를 위해서 그러한
권한을 열심히 행사한다면, 더 강력한 근거로서(a fortiori) 그들이 다수결을 제한하는 권한을 가지는 것이 수용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83) 밀과 비교하면, 드워킨의 접근은 직업적으로 더 헌법을 잘 이해할 것으로 추정되는 더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 더 강력하고 영속적인 권한을 집중시키는 특징이 있다. 물론 복수투표제에 정신적 우월성을 인정받은 특별한 시민들에 비하면 사법심사제의 대법관들의 권한은 소극적인 것에 국한된다.
과연 우리는 이들의 제안을 수용해야하는가? 먼저 이들의 견해에 어떤 비판이 가능한지 알아봐야할 것이다. 밀의 경우에는 그가 전제하는 경험적 가정, 즉
지력이 뛰어나거나 교육을 많이 받은 이들이 동시에 이기적이지 않을 것이며, 이들이 대표자로 가장 탁월한 판단과 공적 정신을 가진 지도자를 선출할 것이라는 가정에 대한 비판이 가능하다. 그런데 베이츠는 밀에 대한 기존의 비판이
여기에 집중되어있음을 문제로 지적하면서 만일 그의 경험적 가정이 사실이어서 복수투표제가 최선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다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교육 수준이 높지 않은 이들의 선호가 큰 도덕적 흠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육 수준이 높은 이들에 의해 무시되면 이들이 자존감에 상처를 입는 비용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84). 그렇다면 이러한 두 종류의 비판이 드워킨의 사법심사제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대법관들이
사법심사에서 사익이나 사견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보장할 수도 없으며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이 결의한 법안이 무효화된다면 자존감의 상처를 입지 않으리란 법82) Dworkin 1987, pp.28~30
83) Arneson 1993, p.127
84) Beitz 1989, pp.35~37
- 63 -
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아너슨은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밀의 복수투표제 대신
드워킨의 사법심사제를 선택하는 이유를 밝히면서 양자에 차이점이 있다고 설명한다. 복수투표제는 비교적 적은 투표권을 배당받은 일반 시민이 더 많은 투표권을 받은 다른 동료 시민이 "왜 나는 아니고 저들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하여 당국으로부터 공식적인 모욕을 당한 것으로 느끼게
되지만, 내겐 없는 특별한 권한이 내 옆집 사람이 아니라 어려운 공적 절차를
통해 신뢰성을 부여받은 소수의 대법관에게 주어진다면 저항감이 훨씬 덜 하다는 것이다.85) 하지만 이러한 아너슨의 생각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양자의 차이는 제도를 수용하는 일반인들의 심리에 끼치는 부정적 영향에 국한될
뿐이므로 두 제도가 동시에 전제하는 바에 대한 비판은 두 제도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베이츠가 중시하는 논거는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차등을 정당화하는 논거에 직접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단지 정치적
평등을 요구하는 논리만을 앞세우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밀과 드워킨이 공유하는 전제에 결정적인 결함이 있는지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이 공유하는 전제들 중, 심의적 민주주의관을 옹호하는 이들이 주목할 만한 것은 다음과 같은 가정이다. 각 개인의 도덕성과 지력을 함께 묶어 개인 간의 비교가 가능하다.
이러한 가정을 개인의 사고력에 관한 '통합적 비교론'라고 명명해보자. 이러한 생각은 아마도 우리가 추상적으로 그려볼 수 있는 사고력 스펙트럼의 양쪽
극단에 속하는 이들, 가령 현자와 정신 지체자에게는 가용할지라도 대략 중간
지대에 위치하는 다수에게 적용되기 어렵다. 밀의 주장이 함축하듯이, 도덕성, 지식(knowledge), 지력(intelligence)이라는 영역들이 서로 비교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개념들 각각이 다시 여러 하위 항목으로 나뉘기 때문에 각 영역
내의 비교도 어렵기 때문이다. 논의의 편의상, 일단 도덕성과 지식만 논해보자. 가령 도덕적 감수성에 있어서 A는 남녀차별에, B는 동물학대의 문제에 더 민85) Arneson 1993, pp.137~138
- 64 -
감한 경우 양자의 도덕성의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또한 지식의 측면에서 A는
경제에 B는 생물학에 조예가 더 깊다고 할 때 역시 양자의 지식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 게다가 각 개인의 사고력은 서로 다른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전체적으로 우열을 판단하기에 당연히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단지 항목을 세분할수록 비교가능성이 조금씩 높아질 뿐이고, 비교의 단위가 커질수록
판단의 신빙성은 낮아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A와 B중 누가 정치적 영향력을 더 가질 자격이 있는지
여부는 정치적 의사결정 사안의 성격과 관계없이 미리 정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사안이 어떤 종류의 도덕적 감수성과 지식을 요구하는가에 따라
영향력의 비중이 달라지고, 사안의 성격이 매우 다양하므로 누가 영향력을 발휘할 것인지 미리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정치적 권한의 차이를 개인을 단위로 비교하고 정당화하는 접근은 적절하지 않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통찰은 시민 간의 수평적인 비교뿐만 아니라 전문정치가나 대표자와 시민 간의 수직적 비교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일반 시민이 어떤 특정 사안에 대해 전문정치가나 대표자들이 포착하지 못한 문제점을 감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은 심의적 관점이 중시하는 논변에 주목하는 것이다. 즉, 개인 단위의 평가를 지양하고 대신 특정 사안에 대해 제시되는 주장을 그것을 지지하는 좋은 논변의 존재 여부를 따져 매 경우마다 평가하는 것이다. 심의 당사자들이 어떤 견해들은 더 옹호가능하거나 정당화가능하다고 식별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심의는 상이한 견해들을 그것들의 내용에 근거하여 정당하게 차별한다. 하지만 심의적 장치는 개인들을 선별하지 않는다.86)
이러한 대안은 정치적 영향력의 차이를 공적으로 제시되는 논변의 설득력에 의해서 정당화한다는 의미에서 '논변 중심적 접근'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반면에
86) Jack Knight and James Johnson, "What Sort of Equality Does Deliberative Democracy
Require?", In Deliberative Democracy: Essays on Reason and Politics, ed. by Bohman
and Rehg, MIT Press, Cambridge, MA, 1997, 이하 Knight and Johnson 1997로 표기 p.
288
- 65 -
드워킨처럼 정치적 영향력의 차이가 설득력의 차이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간파하였으나 설득력의 차이의 단위를 논변이 아니라 개인에 두었던 경우는 '개인 중심적 접근'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역량의 비교가 개인 단위에서 논변 단위로 전환된다면 특정 사안에 대한 공적 검증을 통해 실제로 중명되기 전에 보통 시민이건 대표자이건 누구의 정치적 역량이 더 큰지 사전에 속단하는 위험을 막을 수 있다. 또한 이는 개인이 아니라 논변에 차등을 두기 때문에 사전에 누구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자격이나 기회를 차단당할 근거가
되지 않는다.87)
3.2.2. 정치적 참여의 본질
정치적 권리를 평등한 분배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보는 이유
중에서 두 번째로 다룰 것은 정치적 참여의 본질적 성격 자체에 대한 통찰에
기초한다. 먼저 아너슨에 따르면, 민주적 절차를 통해 보장되는 정치적 권리들은 ‘근본적인 도덕적 권리들(fundamental moral rights)’이라고 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것들이 ‘타인에게 자신의 힘을 행사하는 권리(rights to
power over others)’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권리는 오직 근본적인 도덕적 권리를 실현하는 만큼만 정당화되는, 다시 말해 근본적인 도덕적 권리를 위해서 존재하는 파생적인 권리이다.88) 투표권의 행사는 투표자가
다른 시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권한의 행사이므로, 영향을 받게 되는
이들의 근본적인 권리들을 최대한 신장시키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도 허용될 수
없다. 예컨대 부모가 자식에 대해 자신의 방식대로 양육을 하도록 부여된 권리도 그것이 자녀에게 최선일 것이라는 전제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투표권의 행사는 투표자가 다른 시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권한의 행사이므로, 영향을 받게 되는 이들의 근본적인 권리들을 최대한 신장시키87) 심의 민주주의 진영의 보만(James Bohman), 나이트(Jack Knight), 존슨(James Johnson)
은 개인이 심의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을 갖추도록 지원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논변중심으로 영향력의 차이를 정당화하는 것과 충돌하지 않는다. 88) Arneson 2003, p.124
- 66 -
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도 허용될 수 없다. 또한 만일 다른 양육제도가 자녀들에게 더 낫다는 경험과학적 증거가 제시된다면 이러한 권리는 계속 보장될 수 없듯이, 평등한 투표권 같은 정치적 권리들은 주어진 제도 내에서 다른 실현가능한 대안보다 이러한 기능을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만큼만 정당화된다.89)
이제 아너슨의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보자. (1) 투표권과 같은 정치적 권리들이 타인의 삶에 힘을 행사하는 권리이다. (2) 근본적인 도덕적 권리와 타인의 삶에 힘을 행사하는 권리가 구분가능하다. (3) 타인의 삶에 힘을 행사하는 권리는 근본적인 도덕적 권리를 최대로 증진시키지 못한다면 타인의 동의 없이 행사될 수 없다. 우선 (1)
에 대해, 정치적 권리들이 타인의 삶에 힘을 행사하는 권리라는 것에는 큰 이견이 없을 듯하다. 정치적 권리는 집단적인 의사를 결정하는 절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결정된 의사는 구속력을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예외가 발견되더라도 아너슨의 논리는 그러한 영향을 미치는 권리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조정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것이 큰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2)에 대해서는 일견 의문의 여지가 있어 보일 수 있다. 그리핀(Christopher G. Griffin)은 어떤 종류의 권리도 따지고 보면 어느 정도는 타자에게 자신의 권한을 행사한다고 지적하면서 구분의 가능성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예컨대 언론의 자유가 근본적인 도덕적 권리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할 경우, 그러한 권리를 행사할 때 다른 이들의 간섭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일종의
타자에 대한 힘의 행사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질적 자원에 대한 기본적
권리를 인정한다면 재산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것 역시 소유자가 자신의
재산에 관한 처분과 통제를 할 수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일종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다. 타인이 나의 거주지에서 나가거나 머무르는 동안에는
그 안에서 내가 세운 규칙에 따를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근본적인 권리라는 것들도 동의를 구하지 않고 타자에게 자신의 힘을 행사하는 성격을 공유한다는 것이다.90)
이제 이러한 반론이 과연 타당한지를 따져보면, 실제로 아너슨이 대응했던
것처럼 양자 간의 구분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입장이 고수될 수 있을 것으로 보89) Arneson 1993, p.118
90) Griffin 2003, p.111
- 67 -
인다. 어떤 구분에도 애매한 중간 지대(a gray area)는 존재하기 마련이며, 낮과 밤의 경계가 명료하게 그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 그 구분 자체를 무효화시키지는 못하는 까닭에서이다. 가령 언론의 자유는 그것을 듣는 이에 대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타자에 대해 한정된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자신의 말을 듣는 것 자체를 타인에게 강요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것과 일반적인 준수를 전제하는 정치적 의사결정과는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91) 설령 그리핀의 시각을 적용해서 양자가 정도의
차이를 나타내는 스펙트럼 상에 놓여있다고 보더라도 정치적 권리는 자신의 힘을 행사하는 성격의 정도가 가장 강하다는 것이 아너슨의 설명이며 이러한 생각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마지막으로 (3)에 대해 타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권리의 행사에 최선의 결과를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이 공리주의적인 지나친 요구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그리핀은 이에 대해, 자녀양육의 비유와 관련하여 아너슨이 부모의 권리를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자녀의 근본적인 도덕적 권리가 침해되지 않는 것으로 조건을 완화하여 부모의 양육권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92) 하지만 이러한 제안 역시 자녀의 근본적인 도덕적 권리가 우선이라는 가치의 서열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아너슨의 주장을 근본적으로 뒤집은 것은
아니다. 그리핀의 주장을 따라 우리가 부모의 자신의 의지대로 자녀를 양육할
권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녀의 기본적인 도덕적 권리가 침해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인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논리를 정치적 권리에 그대로
적용하면, 정치적 권리가 그 힘의 행사의 영향을 받는 이들의 기본적인 도덕적
권리의 최대한 신장시키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만 인정된다. 한편 드워킨은 아너슨의 파생적 권리 개념보다 더 나아가, 정치적 힘은 골고루 나눠가져야 하는 일종의 자원이 아니라 집단적인 책임이라는 생각을 중요한 개념구분을 통해 피력한다. 앞서 소개된 정치적 힘에 있어서의 단독효과(impact)와 영향력(influence)의 구분 외에 정치적 의사결정의 성격도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그 중 하나는 그가 "선택에 민감한(choice-sensitive)" 결정이91) Arneson 2003, pp.125~126
92) Griffin 2003, pp.113~116
- 68 -
라고 지칭하는 것으로서 그것의 적절한 해결이 해당 정치적 공동체 구성원의
선호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의 예로서 그는 가용한 공적 자금을 새로운 스포츠 센터를 건립하는 데에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도로 체계를 건설하는 데에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을 제시한다. 비록 여기에 분배의 정의의 문제부터 환경문제까지 다양한 문제들이 녹아있지만, 경쟁하는 선택지 중
어느 것을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원하고 그것으로부터 직간접으로 혜택을 받게
되는지가 그러한 결정에 유관한 것이 분명하고 나아가 결정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반면에 "선택에 둔감한(choice-insensitive)" 결정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결정을 원하거나 용인하는지 여부와는 무관한, 원칙에
관한 문제이다. 예컨대 사형제도나 인종차별의 문제가 여기에 속한다.93)
드워킨은 이제 두 가지 구분을 바탕으로 네 가지 조합을 만들어 하나씩 정치적 평등이 적용될 수 있는지 따져본다. 우선 원칙의 문제의 경우, 단독효과이든 영향력이든 정치적 힘의 평등한 분배는 무의미하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는 나의 견해가 채택되는 것보다는 옳은 견해가 채택되는 것이 더 중요하므로
나의 견해가 채택되는 데에 초점을 맞춰 동등한 단독효과를 요구하는 것은 미성숙한 태도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또한 무엇이 왜 더 옳은 결정인지에 대해서 더 나은 의견에 동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영향력의 동등한 분배도 요구할 수 없다. 다음으로 선호의 문제에서 조차도 무엇을 선호해야하는지에 대해 설득이 가능하기 때문에서 영향력의 부분에서는 정치적 평등이 이상이 될
수 없다. 결국 선호에 대한 문제의 경우에서도 오직 단독 효과에서만 평등한
분배가 대체로 통용될 수 있다는 것이 드위킨의 결론이다. 물론 그나마 이 경우조차 소수의 기호가 지나치게 불리한 여건에서 무시될 위험에 처할 수 있으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 완전한 정치적 평등의 이상은 채택될 수 없다.94)
이러한 드워킨의 분석과 앞서 살펴본 아너슨의 견해는 어떤 이유로든 정치적 평등을 추구할 수 없다는 주장이 결코 아니다. 그들의 논점은 단지 정치적
참여의 기회는 어디까지나 옳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 부여되는 책임이기 때문에
그러한 역할을 논외로 하고 그것을 누구나 사이좋게 나누어 가져야하는 자원처93) Ronald Dworkin, Sovereign Virtue: The Theory and Practice of Equality, Harvard Univ.
Press, 2000 (이하 Dworkin 2000으로 표기), pp.323~334
94) Dworkin 2000, pp.204~207
- 69 -
럼 생각하는 맥락에서 논하는 것이 무의미함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통찰의 숭고함을 인정하더라도, 이제는 나눠 써야하는 자원으로서가 아니라 옳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책임으로서 정치적 참여의 기회를 다시 동등하게
분배해야한다는 생각을 여기에 접목시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심의의 이념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코헨이 사용한 다음과 같은 표현은 심의의 공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접목을 실제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참여자들은 권력과 자원에 대한 기존의 분배가 그들이 심의에 기여할 기회를 형성하지
않고 그들의 심의에 있어 권위적인 역할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실질적으로 동등하다.95) (강조 첨가)
이런 맥락에서 코헨이 말하는 "효과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기회의 평등"96)이나
나이트와 존슨이 강조하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접근의 기회의 평등97)"은
바로 심의에 기여할 책임을 평등하게 나누려는 의도로 이해하는 것이 선호취합적 민주관과 대비되는 심의의 이념과 일관된다고 하겠다. 여기서 이들이 드워킨이 구분한 단독효과와 영향력 중에서 후자, 즉 영향력에 정치적 평등의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심의 과정에서는 원칙적으로 누구나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바라는 대로 믿거나 투표하거나 선택하도록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정치적 평등이 적용되는 초점을 동등한 영향력에 두지 않고 영향력을 발휘할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는 것에 두고 있다는
것에도 유의해야 한다. 그래서 정치적 평등은 주로 "효과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기회의 평등"이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접근의 기회의 평등"으로 규정되고 있다. 왜냐하면 영향력의 차이 자체를 평준화하려는 것은 앞서 드워킨이 지적한 이유들 중에서도 특히 “가장 놓은 논변이나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를 무시하라고 권유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이는 심의 민주주의관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95) Cohen 1997a, p. 74
96) Cohen 1997b, p.425
97) Knight and Johnson 1997, p. 280
- 70 -
3.3. 당면 문제들
코헨이나 나이트와 존슨처럼 정치적 평등의 초점을 심의에서 효과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기회에 두는 것은 심의적 관점에서 적절해 보인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효과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거나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이를테면 강한 해석과 약한 해석이 가능하다. 영향력의 행사가 좋은 논변으로 정당화되는 제안을 참여자가 직접 구성하고 발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면 이는 강한 해석이 될 것이다. 반면에 이것이 좋은 논변으로 정당화되는 제안을 알아보고 단지 이에 동조하는
의견을 표명하는 것도 포함하는 것으로 보면 약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코헨과 나이트와 존슨의 입장은 강한 해석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만 나는 일단 약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채로 논의를 진행하도록 하겠다.
방금 전에 언급한 것처럼 심의에서 효과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좋은
논변의 제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래서 효과적인 영향력의 발휘 여부는
결국 좋은 논변을 제시하는 데에 필요한 요건이 충족되는가의 여부로 귀결된다. 기본적으로 좋은 논변이 제시되기 위한 조건은 세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논리적 차원에서 그 논변에 형식적인 문제가 없어서 전제에서
결론이 도출되고, 또한 전제가 내용상 참이거나 수용가능한 것이어서 결론이
참이거나 옳음에 근접한 것이어야 한다. 다음으로 수행적 차원에서 각 참여자가 그러한 논리를 실제로 청중 앞에 나서서 구성하고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거나(강한 해석) 적어도 그러한 논리가 우세해질 수 있도록 다른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약한 해석).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도적 차원에서 좋은 논변을 제시할 수 있거나(강한 해석)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할 수 있는(약한 해석) 참여자가 심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의 문이 열려있어야 한다.
이 중에서 논리적 차원의 조건은 이미 정해져 있어서 참여자는 그것을 인지하면 된다. 하지만 나머지 두 차원은 상황이 다르다. 이 두 차원의 조건들은 정치적 평등의 이상에 부합하도록 실제적 방안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만족될 수
없는 것들이다. 우선 수행적 차원에서 일부 시민들의 경우에 심의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져도 좋은 논변을 구성하거나 적어도 좋은 논변에 기초한 대안을 지
- 71 -
지함으로써 심의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이 기존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의해
개발되지 못하였다면 이는 심의적인 정치적 평등의 이상을 잠식할 수 있다. 또한 제도적 차원에서 비효율적이지 않으면서도 시민들이 효과적으로 심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마련되지 못한다면 심의의 이념은 그저 실행가능성이 없는 구호에 그칠 수 있다. 따라서 심의 민주주의 이념에 입각한 정치적
평등의 논의는 이 문제들을 해결해야하는 국면을 맞이한다. 이하에서는 이 두
가지 차원의 문제들을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3.3.1. 수행적 차원
심의 민주주의자들이 단순히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이 아닌, "효과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기회의 평등"이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접근의 기회의 평등"을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평등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의사결정에 참석하더라도 효과적으로 논의에 참여할 수 없다면 단지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민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기회를 평등하게 부여하려면 이에 따르는 후속 문제들이 대두되고
이들을 해결해야한다는 요구도 높아진다. 가령 필립스(Anne Philips)는 심의
민주주의의 논의가 의사결정 입회에 참가할 수 있는 동등한 접근의 원칙과 자원과 힘에 있어서 실질적인 평등을 내세우지만 실제로 그러한 조건들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였다.98) 이러한 지적에 자극받은 나이트와 존슨은 시민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기회를 평등하게 부여하는 것은 단지 발언권을 동등하게 보장하는 절차를 마련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것을 절차적인 평등과 구분되는 실질적인
평등의 문제로 규정하였다.
나이트와 존슨은 일단 실질적인 평등은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하나는 힘과 자원의 분배에 있어서의 비대칭성이 정치적 의사결정을 할 때
자신이 원하는 결정을 하지 못하고 다른 선택을 하도록 강제하지 못하게 하는
98) Anne Philips, The Politics of Presenc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p.154
- 72 -
것이고, 다른 하나는 힘과 자원의 결핍이 시민들이 심의에서 효과적으로 상호
간에 영향을 주고받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원과 힘을 더 많이 소유한 이들이 이러한 유리한 입지를 이용해서 약속이나 협박을 통하여 민주적 심의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는 전자의 요소가 충족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 대비하여 나이트와 존슨은 민주적 과정
전체를 국가 재정으로 운영하고 자본가들이 자원을 비정치적으로 사용하는 부분에까지 규제를 가함으로써 자본가들이 실제로 정치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축소하고 심지어는 시민들이 자본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경우에 사회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을 우려하여 그들에 동조하는 현상까지
방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99) 그런데 사실 따져보면 이러한 요구의 충족은
굳이 심의 민주주의 모델만이 직면한 문제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논의는 후자, 즉 토론에서 다른 이들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할만한 논변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심의적인 요소에 집중되어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요소가 충족되려면 우리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법은 두 가지, 즉 자원에 초점을 둔 접근과 능력에 초점을 둔 접근으로 압축된다. 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합하는 대안으로 이미 잘 알려진 두 접근은 각각 롤즈와 센(Amartya Sen)에 의해 제시되었다.100) 우선 롤즈는 기회의 평등에 대해 자원 중심적 접근(equality of
resource)을 제안하였다. 그에 따르면 각 시민은 정치적, 경제적 목표를 추구하는 데에 사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문지방을 넘는 기본재(primary goods)을 보장받아야 하며 그 이상에서 있을 수 있는 차이는 수용가능하고 공정으로서의
정의와 일관적이라고 보았다.101) 롤즈는 단지 시민들이 평생 동안 사회 구성원으로서 협력하며 지닐 수 있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도덕적, 지적, 신체적 능력들을 갖추고 있다고 전제하면서도102), 이러한 가정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기본선의 단순한 분배는 정치적 평등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을 인99) Knight and Johnson 1997, pp. 293~295
100) 이하에서 소개되는 롤즈와 센의 논의는 나이트와 존슨의 논문에 언급된 내용을 재인용한
것임을 밝혀둔다. 101) J. Rawls, Political Liberalism,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3 이하 Rawls 1993으로
표기, p. 184
102) Rawls 1993, p. 183
- 73 -
정한다. 그래서 롤즈는 정치적 자유들이 “공정가(fair value)”로 확보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시민들에게
정치적 자유의 값어치가 대체적으로 또는 적어도 충분히 같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가 공직에 오르거나 정치적 결정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갖는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103)
이와 달리, 센은 “자유의 수단”과 “자유의 범위”를 구분한다.104) 다시 말해서 적절한 평등관은 자유를 성취가능한 대안의 집합으로 기술하는 데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105) 즉, 한 사람이 소유한 자원이나 수단보다는 그 사람에게 실현가능한 선택지가 얼마나 많이 열려있는가를 중시하는 것이다. 센에 따르면, 롤즈와 같이 기본재를 중심으로 한 접근은 효과적인 자유에 필요한 수단들을 규명하는 데에 그친다. 그래서 평등함을 제대로 측정하려면 자원들을 자신들의
목표들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행위자의 능력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센의 능력 중심적인 접근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심의 민주주의자인
보만은 센의 “효과적인 자유”가 심의 민주주의에 도입되기 위해서는 좀 더 능동적인 개념으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센이 말하는 “효과적인 자유”는 실제적인 통제력을 함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직접 통제력을 발휘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선택했었을만한 것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비록 나의 통제력은 제한되거나 부재하더라도 나의 효과적인 자유는 손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106) 적어도 정치적 영역에 있어서의 자유는 단지 강제나 금지가 없다는 것으로 보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를 발휘하여
참여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비로소 효과적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
보만의 생각이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자유는 자신이 선택하는 대로 사는 능력이다. 그것은 사회적 행위를 위한 능력으로 함께 하는 활등들이 참여하고 거기에서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는
103) Rawls 1993, p. 327
104) Amartya Sen, Inequality Reexamined.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2. (이하 Sen 1992로 표기) p. 8
105) Sen 1992, p. 34
106) Sen 1992, pp. 64~65
- 74 -
능력이다. 정치적 자유에 있어서 문제는 공적 자유의 효과적인 사용이며, 그것은 강제나 금지가 없을 때도 부재할 수 있다.107)
나이트와 존슨은 심의 민주주의적 관점에서는 정치적 평등을 이렇게 능력
중심적으로 접근해야한다는 보만의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이러한 입장이 해결해야할 문제가 산적해있다고 지적한다. 그 중 하나는 어떤 능력들이 정치적으로 유관한지, 그것들의 상대적인 배분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지를 결정해야
하고 심의 과정에 있어서 불평등한 능력의 효과를 상쇄할 수 있는 정책적 처방을 탐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적 심의와 관련이 있어서 정치적 평등과 유관한 능력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나이트와 존슨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정도를 추려서 소개하고
있다.108) 첫째, 진정한 선호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썬스타인(Cass Sunstein)이 지적한 것처럼, 권력과 자원의 비대칭적 분배는 부분적으로
참여자가 “적응된 선호(adaptive preference)”를 갖도록 유도한다.109) 민주적
과정의 합법성은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형성된 선호에 따라서 행위 한다는 생각에 기초하므로 적응된 선호는 정치적 영향력의 동등한 기회의 이념을 훼손한다. 둘째로 문화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과 관련된 능력을 들 수 있다. 영(Iris M. Young)은 "문화적 제국주의“가 소수에게 정치적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는데110), 이러한 문제는 문화적 소수자들이 사회의 지배적인 집단의 언어로 자신들의 생각이나 욕구를 표현하도록 요구받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표현 능력이 결여되는 만큼 소수자들이 영향력을 발휘할 기회는 적어질 수밖에 없다. 셋째, 기본적인 인식 능력과 기술들을
빼놓을 수 없다. 센은 불확실성을 줄이고 효과적인 결정을 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획득하는 어려움을 강조하였는데111), 나이트와 존슨은 이러한 능력이
107) James Bohman, Public Deliberation, Cambridge, MA: MIT Press. 1996. 이하 Bohmann
1996으로 표기 p. 128
108) Knight and Johnson 1997, pp. 298~299
109) Cass Sunstein, "Preference and Politics", Philosophy and Public Affairs 20, 3~34,
1991
110) Iris M. Young, "Justice and Communicative Democracy" In Tradition,
Counter-Tradition, Politics: Dimensions of Radical Philosophy. ed. by R. Gottlieb,
Philadelphia, PA: Temple University Press, 1994. pp.133~134
- 75 -
심의 과정에 핵심적인 인지적 능력들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보고 이러한 능력
전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정치적 평등을 논하면서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는 정치적 평등을 측정하는
것이다. 센은 “성취할 자유”가 존재한다면 실제로 성취가 이루어진다는 전제 하에 그러한 자유는 집단적 결정 과정에서 나온 실제 결과를 검토함으로써 측정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112) 물론 결과가 어떤 이에게 유리하게 나왔다는 것이 반드시 논리적으로 그 사람의 능력으로 그러한 결과가 도출되었음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바와 마찬가지로 센이 제시한 효과적인 자유는
실제적 통제력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센에게는 이러한 난점이 생기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보만의 경우에는 “효과적 자유”를 정치적 영역에 적용하면서 영향력을 강조하기 때문에 보만이 센과 같은 방법으로 정치적 평등을 측정하려한다면 같은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그래서 보만은 심의 능력이 최소한의 문지방을 넘어서고 있는지 여부가 중요하고 그것의 경험적 지표로서 시민 또는 시민의 집단이 그들의 관심사에 대해 공적 심의를 개시할 수 있는지 여부에 주목한다.113) 단지 다른 이들이 주도하는 담론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공적
담론에 동등한 참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문제나 주제에 대한 공적 대화를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보만이 심의적 관점에서 정치적 평등의 중요한 요소를 간파하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나이트와 존슨은 과연 보만이
평등의 지표로서 공적 담론의 실제 결과를 완전히 배제할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해 회의적이다. 보만은 이러한 기준이 특정 시민들이나 시민 집단들이 토론이나 심의의 결과를 결정할 것을 기대하도록 요구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면서도
시민들이 심의에 참여할 때, 그들의 근거들이 종국에는 동료 시민들에 의해 채택될 것을 합당하게 기대하는 것은 요구한다고 말한 바 있기 때문이다.114) 나이트와 보만에 의하면, 이전에 결과에 영향을 미친 실제 사례가 없었더라면 그러한 기대를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111) Sen 1992, pp.148~149
112) Sen 1992, p. 5
113) Bohmann 1996, p. 128
114) Bohman, "Deliberative Democracy and Effective Social Freedom: Capabilities,
Resources, and Opportunities" In Deliberative Democracy: Essays on Reason and Politics, ed. by Bohman and Rehg, MIT Press, 1997
- 76 -
그런데 효과적 참여 능력을 평가함에 있어 의사 결정 결과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나이트와 존슨은 지적한다. 무엇보다도 참여자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선호가 집단적 결정에 반영되어 선호와 결정 사이에 인과관계가 분명한 선호취합적 메커니즘과는 달리, 심의 과정에서는 논변과 이성적인 설득을 통해 자신이 처음에 갖고 있던 입장이 심의 도중에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최종적 결과가 그 공동체의 어떤 성원의 초기 입장도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 않을 수도 있다.115)
그렇다면 롤즈와 같이 배분된 기본재, 즉 자원에 초점을 맞추는 접근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이러한 접근의 맥을 잇고 있는 코헨에 따르면, 기본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능력 중심적 평등관보다 정보를 더 적게 요구하기 때문에 더
접근이 용이하고 매력적이다. 능력 중심의 접근의 단점은 개인의 능력의 집합의 본성을 평가함에 있어 우리가 도저히 성취할 수 없을 정도의 과도한 정보를
요구한다는 데에 있다. 게다가 문제는 단순히 인식론적인 것만은 아니다. 코헨은 왜 사람들이 결정된 능력 집합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질문에 답이 있다고
가정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는다. 사실상 능력 중심의 접근이 이러한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그것과 기본재 중심의 접근 간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고 코헨은 주장한다. 정보의 제한의 문제를 풀려면
우리는 사람들을 비교할 때 인간의 다양성 모두를 반영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추상을 거쳐 낮은 차원에서 시도할 필요가 있으며, 추상의 전략을 시도한다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단순화가 적절한지를 결정함에 있어 지침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결국 코헨은 능력 한계의 차이가 심한 것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를
상세히 밝히고 그러한 경우에는 능력 평가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다른 경우에는 사람들 간의 비교할 때 기본재에 의존할 것을 제안한다. 이를테면 인간 기능의 최소한의 수용가능한 문지방, 가령 영양과 건강에 있어서의 기본적 요구를 구체화할 때와 장애를 기술하고 치료하려 할 때 능력 중심의 접근에 의지하지만 이러한 경우 이외에는 개인 간의 비교를 기능에 요구되는 수단에 한정하는 것이다.116)
115) Knight and Johnson 1997, p. 301
116) J Cohen, "Review of Amartya Sen: Inequality Reexamined", Journal of Philosophy
XCII: 275~288. 1995. p.285
- 77 -
이제 지금까지 살펴본 자원 중심적 접근과 능력 중심적 접근의 각각의 장점을 활용하여 종합하는 시도가 필요한 듯하다. 내가 제안하려는 것은, ① 정치적
평등을 구현하기 위한 목표는 어떤 기본적인 능력의 계발에 두되, ② 그러한
능력의 유무는 어떠한 자원의 제공 유무로 추정하고, ③ 그러한 자원의 목록에는 기본적인 교육이나 훈련을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포함시킨다는 것이다. 우선 ①은 사실상 이 문제에 천착하는 거의 모든 심의 민주주의자가 동의하는 것이다. 코헨처럼 이러한 접근을 전적으로 환영하지 않는 경우는 있지만 그 이유는 그러한 접근이 초점을 빗나가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요구하기
때문에 측정이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헨은 그러한 능력을 보장하는 데에 필요한 어떤 수단이 제공되었는지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능력의
유무를 추정할 것을 제안하는데 ②가 이것을 반영한다. 이는 우선 심의의 결과를 통해 능력의 유무를 판단하는 방식을 배제함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나이트와 존슨이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심의 과정에서 자신이 처음에 갖고 있던 입장이 심의 도중에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만이 제안한 것처럼 시민들이 관심사에 대해 공적 심의를 개시할 수 있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이 중요한 정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문지방 기준으로 채택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적어도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이것은 개인의 능력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관행이나 제도적인 뒷받침도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며, 또한
공적 심의를 직접 개시하려는 시도를 할 만한 사안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그럴만한 열정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능력을 갖추지 않았다고 해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불어 어떤 제안이나 그에 대한 정당화를 직접 나서서 하지 않더라도 제시된 것 중에서 더 나은 것을 판별하고 동조함으로써 그
제안이 채택되는 데에 일조할 수 있는 능력, 즉 약한 의미의 영향력도 심의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능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③은 각 참여자의 심의 참여 능력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로 각자가 지닌 넓은 의미의 자원을 참고할 때, 심의 참여 능력을 계발할 수 있는 교육이나 훈련을 받는 사실을 가장 중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일찍부터 공교육에서 일정한 시간을 이러한 교육에 할애하면 두 가지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우선 시민들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능력과 소양을 비교적 균등하게 제공함으로써 정치적 평등의 이상에 다가갈 수 있다. 자유 시장 체제에서 부득이하게 발생되는 소득이나 부의 차이에
- 78 -
관계없이 기본적인 능력과 소양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공교육 과정에서 누구에게나 주어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수행적 능력을 추정할 중요한 지표가 확보된다. 공교육에서 해당 교육을 이수했다는 사실은 그것을 통해서 필요한 능력과 소양을 함양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3.3.2. 제도적 차원
대부분의 시민이 공교육을 통해서 심의에 참여하여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과 소양을 갖추게 되어서 수행적 차원의 정치적 평등이 어느 정도 성취되었다고 가정하면, 남은 문제는 제도적 차원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런데 드워킨이 강조했던 바와 같이 정치적 평등을 논할 때는 수평적인 비교뿐만 아니라 수직적인 비교도 중요하다. 단지 수평적인 차원에서 시민들 간의 권한을 비교하고 이들 간에 정치적 평등이 성취된 것에 만족한다면, 이러한 수평적인 정치적 평등은 비민주적인 전제정치 하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직적 차원에서 평범한 시민들과 관리들의 정치적 권한이 완전히 같기를 바라는 것도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드워킨은 덧붙인다.117)
사실 집단적 의사결정에서 시민에게 무제한적인 참여 기회를 부여하는 것의
비현실성은 정치적 집단의 단위가 국가로 대규모화 된 이후로 매우 빈번하게
거론되었다. 예를 들면 달(Robert Dahl)은 참여를 강조하는 민주주의관 전반에
대해 회의를 표명하면서 이 문제를 중요한 근거 중의 하나로 들었다. 그런데
만일 수직적 차원의 심의적인 정치적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 어떤 특정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검토하는 심의에서 발언권을 부여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당연히 심의절차가 초래하는 참여의 물리적 부담은 더욱 심해진다. 심의 민주주의의 실현가능성에 대해 의구심을 표명하는 구딘(Rober E. Goodin)은 그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한다.
117) Dworkin 1987, p.9
- 79 -
우리가 각자에게 (의미 있는 참여를 위해 최소한 만족되어야할 것으로 보이는)10분의
발언 시간을 할당한다고 상상해보자. 나아가 우리가 (어떤 기준에 의해서도 상당히 후한) 하루에 10시간을 온전히 그러한 심의들에 바친다고 가정해보자. 이러한 조건 하에서는 단 60명으로 구성된 아담한 규모의 집단이 단 하나의 결정에 이르는 데에 온종일이 걸릴 것이다. 열렬한 신봉자들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새로운 기술은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우리가 인터넷을 통해서 심의를 진행한다고 상상해보자. 우리는 여전히
서로가 적어놓은 것을 읽는 데에 일정 시간을 소비할 필요가 있다. 서로가 써놓은 것을 읽는 데에 우리가 단 10분만을 소요하고 다른 이들이 써놓은 것을 모두 읽기 전까지는 결정을 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달(Dahl)의 논점의 힘을 그대로 유지된다. 그 과제에 대해 하루 10시간을 소요하는 60명으로 구성된 하나의 집단은 여전히
하루에 오직 단 하나의 결정에 도달할 수 있다.118)
이러한 시간적 부담만으로도 사실상 시민들에게 모든 종류의 심의를 조건 없이
개방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때문에 심의에 기여할 수 있는 책임을 모두에게 동등하게 분배하는 차원에서 요구되는,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한 부여는 이러한 정치적 평등을 의미 있게 여기는 심의 민주주의자들에게 하나의 난제를 부과한다. 관련된 이라면 누구나 심의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기회의 평등한 부여의 원칙에 부합하지만 그 원칙을 문자 그대로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실현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 중의 상당수는 하버마스의 “이중 궤도(two-track)” 심의관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쉽게 말해서 일반 시민과 의원 내지 관료들의 심의
영역을 따로 설정하여, 일반 시민들은 비제도권(비공식적) 공론장에서 활동하고 제도권의(공식적인) 심의는 대표자들이 맡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미 논의가 어느 정도 활성화된 후에 심의 민주주의 움직임에
합류하면서 코헨과 같은 선구적인 이론가가 제시해놓은 심의 민주주의관의 공준들(postulates)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중 궤도의 심의관이 제시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코헨이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부분 중에 하나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규제되는 결정을 지향하는 토의”와 “공론장에서 이루어지는 비공식적 의견형성
과정”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자는 제도화된 공론장이며 의회118) R. E. Goodin, Reflective Democracy,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pp.4~5
- 80 -
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되는데, 의회에서의 심의는 문제를 가공하여 처리하는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법제화 작업을 한다. 반면에 후자는 일반적 공론장으로서 여론이 형성되는 곳이다. “시간적, 사회적, 객관적 경계를 가지면서도 서로 중첩하는 하위 문화적 공론장들이 융합된” 그물망 속에서 “원칙적으로 제한이 없는 의사소통의 흐름”이 형성된다. 그리고 여기서 형성되는 다양한 공론들은 “완전히 조직될 수 없는 야생적(wild) 복합체”를 만들어 낸다. 비록 여기서는 무정부적인 구조 때문에 절차적으로 규제된 공론장에 비해서 모든 억압적
요소에 무방비로 노출되어있다는 단점도 있지만 제약 없는 의사소통 매체의 장점 때문에 새로운 문제들이 더 민감하게 지각된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전자의
심의는 정당화의 맥락에서, 후자의 심의는 발견의 맥락에서 구조화되어 있다고
표현한다.119)
이렇게 하버마스처럼 모든 시민이 제한 없이 참여할 수 있는 비공식적인 공론장의 토론과 실제 입법 과정의 심의가 병존하고 후자가 전자를 반영할 수 있음을 강조하게 되면 심의적인 정치적 평등관이 직면한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다고 볼 수도 있다. 평범한 시민은 접근에 제한이 없는 비공식적 공론장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의견이 민주적 의사형성과 의지형성에 기여하여
결국 제도화된 심의의 의제로 채택될 경우에는 법제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비공식적 공론장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의회와
같은 공식적 공론장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모든 이들이 의회에 출석하지 않아도 그들의 의견이 어느 시점에 의회의 의제가 될 수 있는 수직적 반영의 가능성은 원칙적으로 확보된다. 이러한 가능성이 입법의 심의에는 적은 수의 대표자만으로 진행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기본적인 구도에 대한 설명만으로는 비공식적인 공론장의 의견이 공식적인 공론장의 심의에 반영되는 기제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심의 이론가인 드라이젝(John S. Dryzek)은 이러한 하버마스의 기본적인 구도를 수용하면서도 좀 더 역동적인 측면을 조명하려 하였다. 드라이젝이 강조하119) Habermas, Between Facts and Norms: Contributions to a Discourse Theory of Law
and Democracy, trans. by W. Rehg, MIT Press, 1996, pp.307~308 이하 Habermas 1996a
로 표기 (번역본 사실성과 타당성, p. 374~375)
- 81 -
는 것은 공론장에는 언제나 ‘담론들의 무리들이(constellations of discourses)’
군거하며 서로 경쟁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형사적 정의의 분야에서는 현재 적어도 세 가지 경쟁하는 담론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중 하나는 범죄를
잠재적 범법자들의 합리적인 계산의 문제로 다루고, 다른 하나는 개인들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르게 만드는 빈곤과 소외된 환경을 강조하며, 나머지 하나는
범죄자들의 정신병리학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120) 드라이젝은 이렇게 일단
공론장에서 어떤 담론들이 서로 경쟁하는지를 질적인 방법과 양적인 방법으로
알아보고 다음으로 이렇게 서로 경쟁하는 담론들 간의 상대적인 비중을 따져보는 단계가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가령 어떤 특정 담론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몇 퍼센트가 되는지를 조사함으로써 알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실제
여론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공공 정책의
내용과 여타 집단적이 결과가 이렇게 밝혀진 담론의 상대적 무게와 일치하는지
여부를 조사함으로써 여론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121) 드라이젝은 이러한 분석이 여러 측면에서 하버마스를 보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령 하버마스의 이중 궤도 모델이 제공하지 못한 부분, 즉 어떤 사안에 대한
실제적인 여론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방법을 제시했으며122), 심의의 단위를 개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제에 대한 경쟁 담론으로 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심의에 직접 참여하지 않아도 심의의 정당성(legitimacy)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123)
그런데 하버마스에서 시작된 관점, 즉 이중 궤도 공론장의 구조와 비제도권의 공론장에서 제기된 문제들이 제도권의 공론장으로 선별적으로 흡수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인식에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들이 포착된다. 나는 일단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 번째 문제는 “무정부적인” 비공식적 공론장에서의 시민의 토의가 주로 비주체적이고 익명적인 의사소통의 흐름으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하버마스는 이를 여론을 발생시키는 분산된 “주체 없는(subjectless) 의사소통”으로124), 벤하비브는 “서로 맞물리고 중첩되는 심의와
120) John S. Dryzek, “Legitimacy and Economy in Deliberative Democracy", Political
theory, Vol. 29, No. 5 (Oct.,2001) pp.651~669, 이하 Dryzek 2001로 표기 pp.657~658
121) Dryzek 2001, p.661
122) Dryzek 2001, p.660
123) Dryzek 2001, p.662
- 82 -
대결과 논변의 그물망과 조합들”속의 “익명적인 공적 대화”로125), 드라이젝은
더 나아가 “담론들의 무리”로 묘사한다. 이러한 표현은 일견 비공식적 공론장의
역동적 현상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 주의를 기울이면 이 그림에서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어떤 사안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탐구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치열한 시민 논자들이다. 이는 마치 논자들의 지력과 열정으로 구축한 견해들만 이들로부터 빠져나와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는 형상을 연상시킨다. 물론 논리는 논자로부터 분리되어 유통될 수 있고 심지어는 타자에 의해 점취(占取)될
수 있다. 하지만 논리가 논자로부터 분리되어 단지 논리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기 시작하는 순간, 논자가 그 논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한 본래 의지는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의지가 거세(去勢)된 논리는 단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재발견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순수하게 피동적인 대상로 전락한다.
그래서 비제도권 공론장의 무주체화와 익명화에 기인한 피동성은 두 번째
문제이자 진정한 문제인 비제도권 공론장에서 형성된 의지 발현의 우연성으로
이행된다. 비공식적 공론장에서 이루어지는 시민의 논의들이 논자들로부터 분리된 논리로 인식되면 그것들이 제도화된 공론장으로 흡수되어 거론되는 여부는 오직 대표자들의 결정에 의존한다. 바꿔 말하면 시민들로 구성된 비제도권의 공론장에서는 주로 의견을 형성하고 문제 해결의 의지를 발휘하는 이들은
제도권의 심의를 주도하는 대표자들이다. 그러므로 심의 정치는 민주적으로 제도화된 의지형성과 비공식적 의견형성 간의 상호작용으로 지탱된다.126) (강조 첨가)
그리고 이렇게 의견 형성은 시민들의 몫이고 의지 발휘는 온전히 대표자들의
차지가 되는 구도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을 쌓는 것으로 보124) Habermas 1996a, p.486
125) Seyla Banhabib, "Toward a Model of Democratic Legitimacy", in Democracy and
Difference: Contesting the Boundaries of the Political, ed. by Seyla Banhabib (Princeton,
NJ: Princeton Unversity Press, 1996) p.74
126) Habermas 1996a, p.308 (번역본 p.375)
- 83 -
인다. 만일 심의관이 이러한 구조가 계속 유지되도록 허용한다면 그것과 여타
대의 민주주의 모델과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렇다면 심의 민주주의 모델의 과제는 모든 수준의 심의에 대한 조건 없는
개방이라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한쪽 극단과 시민이 제도권의 심의에 대해 오직 간접적인 영향만을 미치는 다른 극단을 피하면서도 고유한 특징을 부각시키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제안은 다음과 같다. 우선 적어도
특정 사안의 논의에 가시적 기여를 하는 동시에 강력한 참여 의지를 보이는 시민들의 비공식적 공론장에서의 활동을 비주체적이거나 익명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이들은 단순 의견뿐만 아니라 논의에 기여할 수 있는 논리를 스스로 구성하고 논의에 대한 참여 의지를 표현했으므로 각자 심의
주체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이들을 심의 주체로 존중하는 것은 이들의
문제해결 의지를 제도권으로 선출된 대표자들의 선택과 수행능력에 의해 우연적으로만 발현될 수 있는 것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특정
사안에 대해 문제 해결의 잠재력과 의지를 입증한 시민들을 위주로 제도권의
심의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기회를 보장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시민 전문가’ 의 자격을 인정받은 이들은 제도권에서의 심의에 원칙적으로 직접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127)
물론 이들의 숫자가 심의의 효과적인 진행을 어렵게 할 만큼 초과된다면 이들 중에 다시 상이한 입장 별로 대표자를 선정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시민의 대표자는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의원과는 다르다. 후자는 일정 임기동안 광범위한 사안을 다루는 과정에서 자율성을 보장받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지지자들의 견해와 의지를 반영하는 이들은 아니다. 반면에 전자는 한 가지 특정 사안에 대한 특정 입장을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지지자들의 의견을 그대로 대변한다. 그리고 이러한 제안은 다른 두 가지
127) 시민 전문가의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는 통로들은 다양하게 확보될 필요가 있는데, 내가
새롭게 제안하고 싶은 것은, 각 학문 영역에 학술지가 출간되듯이, 사회 각 분야별로 일반인들이 투고할 수 있는 전문지들이 많이 생겨나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그 곳에서 자신의
신원과 전문분야 또는 관심사를 밝히고 한 사람의 독립된 논객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시민 전문가를 선정하는 이들은 이러한 활동의 전력을 토대로 참여를 원하는 논객이
필요한 지식, 타당한 논변을 갖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문제 해결 의지를 갖추었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
- 84 -
방식과 차별화된다. 먼저, 시민 대표를 임의로 추첨하여 뽑는 방식과 대비되는데, 참여 시민이 참여 의지가 명확하고 참여 준비가 사전에 되어있기 때문에
실질적 기여를 담보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추첨 방식보다 심의의 이념을 더 적절하게 반영한다. 또한, 이러한 활동은 단지 국가의 정책을 비판하고 견제하며
특정 문제에 대해 동료 시민들의 의식을 고취시키는 비정부 기구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정부 기구에의 참여는 여전히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데에 그친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 차원의
법제화의 맥락에서가 아니라 가령 학교, 병원, 여타 전문가 단체나 자치 단체와
같은 규모가 비교적 작은 기관의 심의에 참여하는 것은 제도화된 공론장에 참여하는 것을 대체할 수 없다. 이들 기관은 정부 기관에서 다루는 문제들의 성격과 파급 범위 등의 측면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 85 -
IV. 심의 이념과 민주주의의 실질적 요소
“국민을 위한(for the people)”이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 민주주의의 실질적
요소는 절차적 요소와는 달리 어떤 정치적 이상이든지 그것이 정치적 이상이
되려면 반드시 포함해야하는 요소이다. 피통치자를 위하지 않는 정치적 이상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민을 위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해명하는 작업은 민주주의 논의에서 불가결하다. 그렇다면 국민을 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탈리아 출신의 저명한 민주주의 이론가 사르토리(Giovanni Sartori)는 링컨이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제시한 민주주의의 세 가지 특징, 즉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중에서 “국민을 위한”이라는 표현이 가장 명백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다. 사르토리에 따르면, 그것은
국민의 이해관심(interest), 이익(benefit), 편의(advantage)를 위한다는 것이다.128) 또 다른 민주주의 이론가 메이슨(Ronald M. Mason) 역시 국민을 위한
정부는 국민의 이해관심(interest)에 부합하는 정부를 지칭한다고 비교적 단순하게 설명하였다.129)
하지만 데모스의 이해관심에 부합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하면, 이해관심이라는 개념 이외에도 공동선(the common good)이나
자유와 평등, 나아가 불편부당성(impartiality)이나 정의(justice)와 같은 규범적 개념들까지 함께 연결된다. 데모스 일부의 이해관심에는 부합하고 다른 일부의 이해관심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을 데모스 전체를 위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없으므로 모든 이에게 좋은 것이라는 공동선 또는 공익도 거론될 것이며, 시민 각자가 갖는 이해관심에는 물질적인 혜택뿐만 아니라 자유나 권리, 그리고 평등의 종류와 수준이 포함될 것이고, 이러한 포괄적 이해관심의 보장의 방식이 불편부당하거나 정의롭기를 기대할 것이다. 그래서 국민을 위한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이러한 개념들이 서로 얽혀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128) Sartori 1987, p.34~35 (번역본: 민주주의 이론의 재조명 I p. 65)
129) Ronald M. Mason, Participatory and Workplace Democracy,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1982. p. 34
- 86 -
그렇다면 심의 민주주의관이 이러한 논의에 특별히 기여할 수 있는 바는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이 장에서 나는 심의 민주주의 이념에서 발견되는 강한 도덕 인지주의적 요소에 주목하고자 한다. 앞서 하버마스에 대한
고찰에서 소개된 바 있는, 강한 도덕 인지주의는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the priority of the right over the good)'의 테제로 표현될 수 있는데,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의 테제는 옳음을 논함에 있어 목적론(teleology)이 아니라 칸트적 의무론(deontology)을 취하는 접근에 기초한다. 목적론과 의무론은 좋음과 옳음이라는 윤리학의 주요한 두 개념을 관련지우는 방식에 있어서
서로 대비되는 윤리설로 알려져 있는데, 목적론은 옳음을 규정할 때 좋음을 먼저 옳음과 상관없이 규정하고 좋음을 극대화하는 것을 옳음으로 보는 반면, 의무론은 옳음을 좋음과는 별개로 규정한다. 목적론은 구체적으로 선(좋음)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서 여러 종류로 나뉠 수 있고, 그 중에서 주로 공리주의와 완전설(perfectionism)이 심의관의 의무론적 논의와 긴장 관계에 놓인다.130)
우선 의무론의 입장에서 본 공리주의의 문제는 합리적 욕구의 만족을 좋음으로 규정하고 이를 최대화하는 데에 목표를 두기 때문에 만족의 최대치를 산출하기 위해 일부의 자유와 권리의 희생을 묵과할 수 있으며, 분배의 방식도
분배 자체의 공정성보다는 만족의 최대치에 초점을 두고 간접적으로 고려한다는 데에 있다. 한편 완전설의 문제는 인간의 어떠한 탁월성을 선으로 보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개인에게 특정한 삶의 형태를 강요하고 그것이 추구하는 이상에 미치지 못하거나 그러한 이상이 지향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 삶의 방식을 억압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의무론은 좋음을 추구하기 전에 그것의 추구 방식이 누군가의 정당한 자유를 억압하거나
권리를 침해하는지 여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옳음의 우선성의 테제는 두 가지 의미로 정식화될 수 있다. 첫째, 개인의 권리들이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전체 이익에 앞선다. 둘째, 권리들을 명시하는 정의의 원칙들은 (완전설이 추구하는) 좋은 삶에 대한 특정한 견해에 의존하지 않는다.131) 그래서 심130) 윤리학에서 좋음과 옳음의 관계에 대한 규정방식에 따른 두 가지 이론에 대한 이 같은 언급은 Rawls 1971, pp.24~25 (번역본 pp.46~47) 참조
131) 이러한 정식화는 샌델의 분석을 따른 것이다. 괄호 안의 설명은 필자가 추가한 것임.
- 87 -
의 이념에는 이러한 두 가지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의 테제가 함축된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의무론의 입장에서 목적론인 공리주의와 완전설을 경계하는 태도를 심의 민주주의관의 실질적 요소에 대한 접근의 특징으로 규정하는 이유를
좀 더 설명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선 앞서 나는 넓은 의미의 심의 민주주의
이념과 좁은 의미의 심의 민주주의 이념을 구분하면서 2장 1절의 끝부분에서
심의 이념이 고유성과 정합성을 확보하려면 인지적인 ‘규범적 타당성 요구의
요건’과 의지적인 ‘반독단주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좁은 의미의 심의관을 채택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을 수용하는 이들은 일단 협의의
심의 이념을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사실
‘규범적 타당성 요구의 요건’은 두 가지 요건으로 세분된다. 그 중 하나는 ‘도덕
인지주의 요건’으로서 사실적 주장뿐만 아니라 규범적 주장에 대해서도 객관적
기준을 전제하고 타당성을 요구한다는 것인데, 이 조건은 분명히 목적론적 배경을 가진 공리주의자나 완전설 이론가들도 만족시킬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나머지 하나인 ‘강한 도덕 인지주의 요건’이다. 이 요건은 좋음과 옳음의 문제는 구분하고 옳음의 문제만을 타당성 논의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옳음을 좋음의 극대화로 보는 공리주의와 좋음의 문제에 대해서도 타당성을 논하려는 완전설과 충돌하게 된다. 그리고 이 요건이 바로 전술한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 테제이다.
물론 단지 ‘도덕 인지주의 요건’뿐만 아니라 ‘강한 도덕 인지주의 요건’의 충족까지도 요구하는 것이 심의 이념을 지나치게 배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도덕 인지주의 요건’이 규범적
주장에도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여 선호취합적 민주주의관과
구분되는, 심의 이념의 고유성을 확보하는 역할을 하듯이, ‘강한 도덕 인지주의
요건’은 규범적 타당성을 타진할 때 공리주의와 완전설 각각에 잠재된 문제들을 통제하는 데에 불가결한 역할을 한다. 그 대신 지나친 배타성에 대한 우려는 심의에 참여할 권리와 진정한 심의 이념의 수용을 별개로 간주함으로써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의 심의 민주주의자들은
Michael J. Sandel, “Political Liberalism", Harvard Law Reiview vol. 107, no.7,
1765~1794 (May,1994) (이하 Sandel 1994로 표기) p.1766
- 88 -
이론적 배경에 관계없이 모든 이들이 심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원칙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리주의나 완전설을 지지하는 이들도 얼마든지 심의에 참여하여 주장을 펼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협의의 심의 이념을
지지하는 이들은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 테제를 수용함으로써 공적 심의에
임할 때 만족의 최대치를 산출하기 위해 일부의 자유와 권리의 희생을 묵과하는 것과 개인에게 특정한 삶의 형태를 강요하는 것의 부당함을 추가적으로 경계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 테제의 수용은 이러한
위험에 대한 각성 효과로 인하여 정당화될 수 있다.
이하에서는 심의 이념이 담고 있는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의 테제’를
여러 측면에서 고찰함으로써 심의 이념이 민주주의의 실질적 요소에 대한 논의를 적절하게 이끌어갈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먼저 옳음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심의 민주주의 이념이 무의미한 도구적인 공동선 개념이나 위험한 집단주의적 공동선 개념 대신, 유의미한 동시에 비억압적인 도덕적 공동선 개념을 제시할 수 있음을 조명할 것이다. 그 다음 심의 이념이 의무론적 접근을 취함으로써 공리주의나 완전설과는 달리 민주주의 사회가 국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추구하거나 규제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예리한 기준을 제공함을 보일 것이다. 이는 정치적인 의사결정에서 도덕적 논의가 과도한 ‘집단
우선주의’나 ‘도덕주의(moralism)’로 발전하여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를 지닌다.
4.1. 공동선으로서의 정의(正義)
국민을 위한다는 이념은 단지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데모스 전체에게 좋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종종 공동선(the common good)의 추구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리고 심의 민주주의자들 역시 종종 심의가 공동선을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공동선의 개념을 거론하는 것은 오늘날 그리 환영받는 일은 아니다. 정치적 집단의 공동선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만으로도 집단 중심적이며
잠재적으로 억압적인 시도로 저항감을 갖는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132) 하
- 89 -
지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우려가 없는 공동선의 개념도 가능하다. 단적인 예로서, 롤즈는 공동선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이득이 되는 어떤 일반적인 조건”으로 규정하였는데,133) 이러한 공동선 개념은 모든 이들이 혜택을 받는 가치재로서 개인 자신들의 다양한 목적을 추구하는 데에 공통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도구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134) 이렇게 공동선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므로, 심의 민주주의자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공동선 개념은 어떤 것이며, 그것이 정치적 공동체의 공동선 개념으로서 지니는 장점은 무엇인지에 대해 자세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단적으로 말하면 심의 민주주의 이념의 공동선
개념은 일단 정치 공동체를 도덕적 공동체로 간주하는 것을 전제하며, 그러한
공동체 안에서 도덕적 행위자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바랄 수밖에 없는 가치인
정의(justice)의 개념으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 조심스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심의 민주주의자들이 공동선을 거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가령
롤즈처럼 정의관과 도구적 의미의 가벼운 공동선 개념을 병렬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굳이 두 개를 연결하여 정의를 공동선으로 제시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어떤 것이 공동선이라는 명칭에 합당하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정의임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앞서 2장 1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버마스는 정의를 여러 가치들 중의 하나로 간주하는 약한 인지주의와 정의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강한 인지주의를 구분하고 후자를 옹호하였다. 이와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심의 민주주의자들은 여러 가치(선)들 중에서
정의가 특별한 이유를 바로 그것이 모두에게 동시에 선이 아니면 성립할 수 없는 가치, 문자 그대로 공동의 선이라고 보기 때문인 듯하다. 예를 들어 탁월함이라는 가치는 개인적으로 추구하여 성취할 수 있는 선이다. 어떤 이의 탁월함은 그 사람의 이웃이 동시에 탁월하지 않더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의는 본질적으로 관련된 어떤 이가 합당한 고려에서 배제되는 순간 성립이 불가능해지는 선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공동선의 개념을 쉽게 거부하거나 ....
132) Iseult Honohan, Civic Republicanism, Routledge, 2002, (이하 Honohan 2002로 표기)
pp.150~151.
133) Rawls 1993, p.246 (번역본, p.263)
134) Honohan 2002, p.152
- 90 -
이 다음은 심의민주주의에 관한 (02) 로 이사하였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