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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좋아할수록 서운한 마음이 커집니다
“제가 지금 친하게 지내는 여성이 한 명 있는데 친하게 지낼수록 좋아하는 마음이 점점 커집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물론 기쁜 마음도 커지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함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이 들 때는 그대로 누리고, 서운한 마음이 들 때는 최대한 잠재우려고 합니다. 기쁜 마음을 누리는 것과 서운한 마음을 잠재우는 것 중에 하나만 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저는 서운한 마음을 잠재우는 것에 최대한 힘쓰고자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서운한 마음도 커질 텐데, 어떻게 하면 서운한 마음을 제가 다스릴 수 있을까요? 애초에 좋아하는 마음을 통제해야 할까요, 아니면 이 마음을 계속 키워나가도 괜찮을까요?”
“좋았다가 서운했다가 하는 건 본인의 선택이니까 질문자 인생은 본인이 선택해서 살면 됩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은 크게 하고, 서운한 마음은 없도록 하는 방법은 없습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질문하는 내용을 보니 출가할 가능성이 있어 보이네요. (웃음)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면 즐거움이라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괴로움이라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늘 고(苦)와 락(樂)이 되풀이됩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풀이되는 것을 윤회라고 해요. 인도 전통 사상에서 윤회는 사람이 죽었다 다시 태어나는 걸 말하지만, 그건 그냥 믿음일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관찰해 보면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풀이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어서 즐거움은 갖고 싶고 괴로움은 없앴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될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종이의 이쪽 면은 '고', 반대쪽 면은 '락'이라고 하면 아무리 분리하려고 해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즐거움의 높이가 크면 괴로움의 깊이도 깊어지고, 즐거움의 높이가 작으면 괴로움의 깊이도 얕아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즐거움만 구하고 괴로움을 없애려고 하는데, 이것을 쾌락주의라고 합니다. 질문자의 마음 상태는 철학적으로 굳이 말하자면 쾌락주의에 해당합니다. 쾌락주의란 쾌락만 구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이 뭐든지 충족되기를 바라는 것을 말해요. 대부분의 종교에서 '네가 바라면 다 이루어진다'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욕망이란 충족이 되어도 끝이 안 나는 성질을 갖고 있어요. 욕망은 충족이 될수록 더 커져 버립니다.
처음에는 내가 저 여자에게 말이라도 걸어봤으면 좋겠다 싶은데, 접근조차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다 어떻게 해서 인사를 하게 되고 접근을 해서 통성명도 하고 대화를 나누게 되면 엄청나게 기쁩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좀 더 가까이 지냈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일어납니다. 어찌어찌해서 가까이 지내게 되면 기분이 엄청 좋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아요. 서로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또 올라옵니다. 그래서 서로 좋아하게 되면 또 즐거움이 커지는데 그만큼 욕망이 또 올라옵니다. 만약 그 사람과의 관계가 거기서 더 이상 발전이 안 되면, 곧바로 괴로움에 빠집니다. 욕구가 계속 충족이 될 수는 없잖아요. 언젠가는 충족이 안 될 때가 생깁니다. 그러면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괴로움과 즐거움이 되풀이되는 겁니다.
괴로움은 꼭 나쁜 사람하고 만나야만 생기는 게 아니에요. 좋은 사람하고 만나도 괴로울 수 있습니다. 애인과 언제 만나기로 약속 시간을 잡으면 너무 즐겁습니다. 그런데 약속 시간에 애인이 안 나타나면 괴롭습니다. 나와 별 상관없는 사람이 약속 시간에 안 나타나면 별로 안 괴로워요. '안 오면 다른 일 하지 뭐' 이렇게 되는데, 애인은 안 오면 가슴이 조마조마해지고 온갖 상상이 일어나고 번뇌가 커집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을 분리해서 한 개만 추구하려 하지만 사실은 분리가 안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철학이 또 하나 나왔어요. 욕망 자체가 모든 고의 근원이므로 욕망을 용납하지 말아야 된다는 새로운 수행법이 나오게 됩니다. 이걸 ‘금욕주의’라고 합니다. 금욕주의는 심지어 먹고 입고 자는 기본 생활의 욕구마저도 억압을 합니다. 그래서 극단적 고행주의자가 나오게 된 거예요. 부처님은 29살 이전에는 욕망을 따라가는 왕자의 생활을 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저 사람은 무슨 바람이 있겠는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고뇌가 많았어요. 그래서 혼자서 고뇌하다가 고행주의자를 만났는데 오히려 그가 더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출가를 동경했지만 부모가 허락을 안 해서 십몇 년을 고심하다가 부모 몰래 출가를 해서 수행을 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고행을 했습니다. 고행을 하려면 이를 꽉 다물고 긴장과 각오를 해야 되잖아요. 이런 상태는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쾌락을 끝까지 누려봐도 진정한 행복이 아니었고, 고행을 끝까지 해봐도 진정한 행복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가?' 하고 자기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길을 발견했습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의 뿌리가 욕망에 있구나. 욕망을 따라가면 즐거움이 되고, 욕망을 억제하면 괴로움이 되는구나.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풀이되는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욕망을 부정하지도 않고 긍정하지도 않고 욕망을 다만 욕망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렇게 깨닫고 부처님은 자유로움에 이릅니다. 이걸 알아차림이라고 해요. 욕구가 일어나면 ‘욕구가 일어나네’ 이렇게만 자각하는 겁니다. 욕구를 따라가려고도 하지 않고, 욕구를 억누르지도 않는 겁니다. 그냥 '담배를 피우고 싶네' 이렇게 알아차리기만 하지, 담배를 피우지도 않고, 안 피우려고 각오도 하지 않는 제3의 길을 따라 수행을 하면 우리도 부처님처럼 자유로움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중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자는 조금만 고민을 더 발전시키면 출가를 할 수도 있겠다고 농담을 한 겁니다. 질문자는 깨달음의 길로 가는 초보 단계에 있어요.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풀이되는 원리는 알았는데 ‘괴로움은 없애고 즐거움만 가질 수 없나?’ 하는 고민이 다시 생긴 겁니다. 그건 이미 2600년 전부터 사람들이 시도해 보았지만 안 됐습니다. 왜냐하면 즐거움과 괴로움은 욕망이라는 같은 뿌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선택을 해야 합니다. 즐거움이 높은 것을 구할수록 괴로움이 깊은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됩니다. 누군가를 내가 열렬히 좋아하면 그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의 아픔을 이미 각오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설사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럼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는 설사할 각오를 해야 됩니다. 입 안에 그 달콤함을 맛보려면 조금 있다가 설사할 것을 아예 각오해야 하고, 설사하는 것이 싫으면 달콤함을 포기해야 되는 겁니다.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달콤함을 선택하고 설사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둘째, 설사가 싫으면 달콤함을 포기한다. 이 둘 중에 어떤 길을 갈 건지는 자기가 선택을 하면 됩니다. 둘 다 수행이에요. 달콤함만 받아들이고 설사는 안 받아들이겠다고 할 때 괴로움이 생기는 겁니다. 설사를 받아들이면 괴롭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사가 싫어서 달콤함을 포기할 때 그걸 아쉬워하면 안 돼요. 설사를 생각하면서 '그건 몸에 해로운 거야' 하고 딱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어느 쪽을 선택하든 상관이 없어요.
아이를 낳았다고 너무 좋아하면 그 아이가 나중에 병이 나거나 죽으면 엄청난 괴로움이 생깁니다. 즐거움만 갖고 싶고 그 어떤 불행도 안 일어나면 좋겠다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인데, 현실은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 그만한 고뇌를 감수해야 합니다. 고뇌를 피하려고 하면 안 돼요. 가슴 조이는 아픔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성숙해지는 겁니다.”
“스님, 사실 괴로움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신경이 쓰이는 것은 저의 괴로운 기분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화내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요?”
“그거야 다른 사람들이 각자 알아서 받아들이겠죠.”
“스님께서도 안 좋은 기분이 드실 때는 상대에게 표출을 하시나요?”
“안 좋은 기분을 표출하면 저만 손해죠. 같이 사는 사람들이 저에 대한 존경심이 떨어질 것 아니겠어요? 화를 내면 존경심이 떨어지는 것을 감수해야 됩니다. 만약 존경심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싶으면 적절하게 자기를 살펴야죠.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스님을 특별히 존경하지 않는 이유는 스님도 흠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고 스님을 특별히 내치지 않는 이유는 그래도 괜찮은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헤어지지 않고 이렇게 사는 거예요.
스님이 완전할 것이라고 기대하면 흠결이 보이기 마련이고, 스님이 별로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괜찮은 점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못 헤어지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 구석이 있어서이고, 불만이 있는 것은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불만이 있으면서도 헤어지지 않는 것은 아직 이익을 얻을 게 좀 있어서입니다. 그래서 구시렁구시렁 하면서도 헤어지지 않고 사는 겁니다. 이런 원리를 알면 약간 안 맞는 것이 있어도 불평을 덜 하게 되죠. 기분이 약간 나빠도 금방 돌이키게 됩니다. 그것은 카르마에 의해 반응하는 것일 뿐이니까요. 그래서 서로 맞춰가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혼 초에 상대에 대해 너무 기대가 크면 안 좋은 것들만 계속 보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남자, 제일 좋은 여자를 골라서 결혼하면 행복할 것 같은데 곧바로 불행해집니다. 기대가 너무 커서 안 좋은 것만 계속 보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길 가는 사람과 만나서 결혼하면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좋은 점이 많이 보여요. ‘저 남자는 참 쓸만하네’, ‘저 여자는 밥도 할 줄 아네’ 이렇게 좋은 점만 자꾸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 친구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아무 기대도 안 했는데 괜찮은 점들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고향이 같네’, ‘종교가 같네’, ‘취미가 같네’ 이러면서 친구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몇 가지가 같다고 친구가 되면 다른 것도 다 같은 줄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밥을 같이 먹어보면 ‘음식 취향도 다르고, 뭐도 다르네’ 하면서 또 헤어지게 되는 거예요. 다르다고 전제하면 같은 것이 발견되고, 같다고 전제하면 다른 것이 발견됩니다. 낯선 사람은 보통 서로 다르다고 인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얘기를 해보면 같은 것이 발견되어서 서로 친해지죠. 친해지면 다른 것도 다 같을 것이라고 전제를 해 버려요. 그러면 이제 다른 것들이 계속 눈에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결혼하면 남편이 변기에 소변을 흘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수건 쓰고 나서 아무 데나 두는 것까지 하나하나 다 거슬리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심리적 갈등이 생겨서 티격태격할 때 아기를 낳으면 엄마의 마음이 불안해서 아기도 심리적으로 불안해지게 됩니다. 육체의 대물림처럼 정신적인 것도 다 대물림이 되거든요.
좋은 마음이 생기면 기대가 생기게 되고, 기대가 생기면 실망이 따르게 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의 문제로 보지 말고 ‘내 마음이 이렇구나’ 이렇게 살펴야 합니다. 그러면 조금씩 마음이 진정이 되어 갑니다.”
“네, 다양한 방법으로 마음을 최대한 다스려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움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을 자각하면 출가를 하게 되는 거예요. ‘즐거움이 곧 괴로움이구나’ 하고 둘 다를 쫓아내 버리는 것이 출가입니다. 그럼 해탈의 길로 갑니다. 질문자의 출가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웃음)
“감사합니다. 마음속에 부정적인 마음이 들 때 가만히 알아차리기만 하면 저절로 천천히 사라진다는 것을 잘 새기겠습니다. 그래도 신경이 많이 쓰이면 그때 다시 마음을 다스릴 방법을 고안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아이스크림을 먹고 설사를 하겠다는 거네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