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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8:21-24 너희 죄 너희 믿음
먼저 요한복음 8:21-24절과 마태복음 9장28-31절부터 보겠습니다.
(요 8:21-24) 『[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2]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가운데서 죽으리라』
(마 9:28-31)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 [31]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
성경을 읽다 보면 사람들이 성경의 의미와 하나님의 감추어진 진리에 대한 올바른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바르게 알지 못한 것을 진리인양 확신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못 알고 사는 그 자체가 성경은 죄라고 말씀하지만 자신은 그것을 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사울일 때, 그는 사람이 유대교의 교리인 율법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으로 잘 못 알아 그리스도인들을 진멸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행동한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는 죄로 역사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는데도 본인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을 살 때 삶에 반드시 어떠한 것이 절대로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 있기도도 합니다. 그래서 돈이 있어야 된다든지, 재물이, 종교가 있어야 된다고 절대적인 신념능 믿음인양 여기고 그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그것이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의식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돈이 있어야 쌀도 사고, 반찬도 사서, 자식들을 먹이고, 키우고, 가르치는, 이것이 당연한 것이지 어찌 죄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가 그렇기 때문에 (그런 세상것들에 대한 믿음이 영적인 것을 부정하거나 가로 막기 때문에) 바로 너희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너희 죄를 알게 하는, 소위 유명한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유대인들이 끌고 가서 돌을 들어 치려하는 장면부터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유대교를 믿고 있어서,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는 확신으로 그런 여자를 돌로 쳐 죽여야 된다고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자기들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모세의 계명이라고, 그래서 이 여자를 죽여야 된다. 라고 주장합니다.
어찌 보면 유대교의 하나님을 말씀대로 믿고 있다는 자신들의 믿음의 판단과 확신은 틀리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바로 그들의 죄라고 지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롬8:7절에서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간음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살인 죄 짓지 않은 사람 많습니다. 부모를 계명대로 잘 공경했습니다.
그런데도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라고 말씀할 때 왜 다 도망쳤느냐 하면 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죽이려는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대 마태복음 9장은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대단히 좋은 교훈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 ‘소자야 안심하라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무엇이라고 말하였느냐 하면 ‘야!참람하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해 줄 수 있는가!’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율법의 사고로 사는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왔음에도 저들의 확신은 오심을 인정하거나 믿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음)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으로 믿지 않음도 봅니다. 바로 이것이 죄입니다.
마 9장에 두 번째 사건은(9~13), 세리 마태의 집에 들어가셔서 점심을 잡수시니까 바리새인들의 하는 말이 ‘어떻게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을 수 있느냐’라는 말을 합니다. 저들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그들은 죄인과 함께 먹으면 안 된다는 잘 못 된 확신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롬 8장에 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사건을 보면서 우리도 아직 우리가 가진 의식 속에 너무나 많은 죄들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는 믿는 자이니, 술주정뱅이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술을 마시고 몸이나 파는 못된 여자들은 도저히 이 말씀 받을 수 없다고 우리는 믿고 있으면서 종교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는 중요한 것은 그런 너희 믿음이, 너희 죄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죄가 되는가 하면, 차별의식이나 편견 의식들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좀 먹게 하고, 나로 하여금 그런 의식의 벽 속에 갇히게 하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으로 가는 길을 막는, 그래서 죄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세리를 보아도 세리의 의식이 없어야 됩니다. 죄인을 보아도 죄인의 의식이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되는 것이, 성경을 가지고 교리나, 종교를, 만들어 그것을 확신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너희 죄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건은(마9:14절~17절),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바리새인과 우리는 금식을 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묻는 사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는 자 이기에 금식해야 된다고 하는 의식!
신학 공부를 해야, 전도사 목사가 되어야, 장로 집사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입니다.
이는 우리가 교회를 나오면서 우리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어떻게 되어야 된다고 하는 것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믿는 자이기에 교회에서도, 또 세상에서도, 어떻게 살아야만야 한다는 확신의 신념을 신앙으로 알고 분명하게 갖고 있다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의 생명과 관계가 없는 그렇한 것들이 혹 우리들의 죄가 아닙니까?
마9:18절부터는 유대교로 “만들어진 너희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살펴보면, 한 직원이 자기 딸이 병들어 방금 죽게 되어 있습니다. “오셔서 손을 얹으시면 낫겠나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가시던 도중에 열두 해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내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낫겠다 해서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22절을 보면“예수께서 돌이켜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 당시에 그 유대 사회에서의 예수님은 일종의 거렁뱅이 (거지)였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지금 그리워하고 상상하는 그러한 예수가 아닙니다.
적어도 강도처럼 끌어다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릴 수 있는 그런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아닌 멀고 먼 시골의 베들레헴의 촌 사람? 정도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때 당시 역사도 예수 사건에 대해서 크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요세푸스의 야사에 잠깐 나왔을 뿐입니다.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마태복음에 기록 된 앉은 뱅이나 눈먼 자들은 그 시골에서 온 거렁뱅이를 통해서 구원자 그리스도로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기록 된 믿음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노아는 청천 하늘에 별들도 많은데 하루 이틀도 아닌, 수없이 많은 날에 방주를 지어야 했습니다. 노아는 방주 짓는 것이 그냥 삶이었습니다.
농사꾼이 농사짓는 것처럼, 장사꾼이 장사하는 것처럼, 공무원이 직장에서 근무하는 것처럼, 선생이 학생들 가르치는 것처럼 그냥 생활이었습니다.
하늘에서 소낙비가 쏟아지건, 별이 총총하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이 돈벌이가 되건 안 되건 상관이 없습니다. 산에서 나무 잘라서 날마다 한 칸 한 칸을 막고 벽을 쌓는 것이 노아의 신앙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가지고 있었던 믿음은 자기가 만들어서 가지게 된 믿음이 아닌 하나님의 경고하시는 말씀을 믿는 믿음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런 행동을 수십 년간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생각해 봅시다.
갈대아 우르의 생활이 안정되었습니다. 고향 친척이 있습니다. 가축 떼가 많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가축 떼를 이끌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큰 부자였습니다. 아버님도 노쇠하여 하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여러 가지 상황들이 떠나기는 좋지 않습니다. 남아 있기는 좋습니다.
그런데도, 도리어 보장도 없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믿음 있게 되어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며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한복음 8장에 오늘 본문이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가지고 살던 유대인들처럼 기독교 라고 하는 종교 교리를 가지고 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알지 않는다면 그 삶이 곧 죄의 삶이요, 죄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점은 우리가 성경책의 글로 만난 그리스도에 대하여 생각할 때 그가 아직도 2천 년 전의 글 속에 있는 그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주님 당시에 알던 인간 예수, 힘을 가진 예수가 아닌, 구원자 예수, 영혼을 구원하시는 구원자인 그리스도로 알고,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그분의 생명이 우리를 지배하심을 믿어 깨달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예수의 의식만 갖고 있어서 지금도 예수하면 수염나고 머리가 긴 그런 사람, 병자 고치고, 기적을 가지고 놀랍게 하신.... 그러한 인상을 갖고 있다면 그 가진 믿음은 곧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 말씀을 계속해서 보면,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자! 눈을 만졌기 때문에 띄워졌다 그렇게 떠들 수 있습니까요?
우리가 공부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 우리가 어디서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생명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한 의식들이 바로 우리의 죄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 중풍 병자를 고치느냐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 중풍 병자는 문자 그대로 만신창이입니다. 자동차 같으면 엔진 한 부분만 나쁜 것이 아니라 전체가 다 낡아버린 것입니다. 무엇인가 원인이 있어서 자꾸만 낡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동차를 굴러가게 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조금 구르다가 또 어딘가 고장이 납니다. 근본적으로 원인 치료를 해야 합니다.
내가 건강한 사람을 고치러 온 것이 아니라 병든 사람을 고치러 왔다. 라고 하신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병이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그러면 죄와 병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죄는 병균입니다.
병은 죄가 발생을 해서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이 죄부터 제거하면 그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낫게 됩니다.
집안을 깨끗이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자꾸 쓸고 닦고 하면 깨끗해집니다.
마찮가지로 우리의 무엇만 없애버리면 깨끗해집니까? 죄만 제거해 버리면 자동적으로 깨끗해집니다. 쓸고 닦으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해 주는 기계가 따로 있는 것 아닙니다. 손입니다. 쓸고 닦으면 깨끗해집니다. 원인 치료를 하자는 말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이 제목과 함께 택한 것은 우리가 의를 추구하기 전에 우리의 죄를 발견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죄는 더러운 것이고,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씻어 주어야 합니다. 죄를 씻는 물은 말씀밖에 없습니다. 말씀은 들음으로서 죄를 씻어냅니다.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리니 네 눈에서 눈물을 씻겨 주리라’ 그때 당시 사람들은 샘에 가서 목욕을 합니다.
‘말씀으로 씻어 깨끗하게 하사’ 병자들은 어디에 가야 됩니까? 의원한테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죄인들은 어디에 가야 됩니까? 말씀 앞에 와야 됩니다. 말씀 앞에 와서 말씀 들으면 씻음 받습니다.
‘구원은 쉽고 간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렵게 만들어 놓고 구원받아라 할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우리가 햇볕 받는 것 어렵습니까? 공기 마시는 것 어려워요? 물 마시는 것 어려워요? 어렵게 만들어 놓았습니까? 그런 것을 통해서 살라고 하시면서 어렵게 하셨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구원 문제를 어렵게 했겠습니까?
다만 그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우리들의 의식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너희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누구의 죄에서? 너희 죄, 우리들의 죄에서…
거기에서 벗어날 때 너희 믿음이 오는 것입니다. 너희 죄가 차지하고 있던 그 자리에 너희 믿음이 와서 누구를 영접하게 합니까? 그리스도, 말씀을 영접하게 합니다.
우리, 나 자신에게 속지 맙시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이 말씀 한마디가 중풍 병자의 죄를 고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