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142/200424]깨복쟁이 친구와 내 별명
소싯적(국민핵교 시절) 내 별명을 용케도 기억하여, 지금도 나를 보기만 하면 대뜸 별명을 불러대는 ‘깨복쟁이 친구(냇가에서 옷을 홀라당 벗고 헤엄을 치고 놀던 동무. 유식한 말로는 죽마고우竹馬故友일 것이다)’가 있어 나는 행복하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있으니. 물론 나도 그 친구들을 보자마자 그들의 별명이 튀어나온다. ‘6학년 4반’ 주제에 체신머리가 없다고 할 것인가? 천만의 말씀. 생각해 보면 다시 없을 소중한 사이이고, 얼마나 정겨운 풍경인가 말이다.
나의 별명은 ‘알록이’였다. 친구들의 별명은 ‘곤서’와 ‘딸랭이’ 또는 ‘뚜부(두부)’였다. ‘곤서’야 이름이 ‘종서’여서 그렇다치지만, 한 친구의 부모가 두부장사를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지어졌는지 별명의 어원語源은 모르겠다. 동네의 또 한 친구 이름은 '종두'여서 별명이 '곤두'였다. 그 친구는 20대부터 고향을 지킨 터줏대감으로, 복숭아농원을 엄청 크게 하는데, 지난해에만도 1만7천상자를 가락동에 납품한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우리 농업인 친구이다. 나의 별명은 이웃집 아저씨(면서기였는데 병철이양반이라고 불렀다)가 나를 항상 ‘알록이’라고 놀리는데서 비롯됐다. 중학교 때까지는 키가 반班에서 중간쯤이고, 얼굴이 제법 곱상했다(흐흐). 아들 넷 중 막동이라고 옷(명절 빔)도 예쁜 것들만 골라 사주셨을까? ‘알록이’야 당연히 ‘알록달록’의 줄임말. 그 뜻을 말하라면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이 글을 쓰면서 국어사전을 처음으로 찾아봤다. ‘여러 가지 밝은 빛깔의 얼룩이나 줄무늬 따위가 고르지 않게 무늬를 이룬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란다. 지금도 내 별명을 지어준 그 아저씨가 고맙다. 때때옷이나 가을 형형색색의 단풍을 떠올리면 어울리는 단어. 그때는 그렇게 놀려대는 것이 무척 싫었지만.
아무튼, 대부분 자기의 어릴 때 별명을 부르면 경기驚氣를 하듯 싫어한다지만, 나는 내 별명이 좋다. 아무 걱정이 없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서일까. 나는 지난해 7월 귀향을 하고, 딸랭이도 좋고 두부도 좋은 그 친구는 가을에 홀연히 고향에 나타났다.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한 후, 선교 미션의 안디옥교회 장로가 되어 있었다. 저수지 옆에 양어장을 만들고 메기를 키우겠다는 ‘야심찬’ 노후생활 포부를 밝혀 놀랐다. 하여간, 거의 매일 얼굴을 맞대니까 좋다. 깨복쟁이 친구가 아닌가? 게다가 보기만 하면 서로 별명을 불러대니, 특히 그것이 좋다. 한 친구는 전남 광양에서 사업을 하고 있으니 보기가 쉽지 않다. 지난 연말, 모처럼 ‘한 동네’ 4인이 여수에서 모여 ‘전어 세트’로 포식을 하고, 노래방에서 실컷 회포는 풀었지만, 늘 그리운 친구들이다. "딸랭아, 곤서야, 대신야, 너그(너희)도 그렇지?"
중장비가 동원되지 않으면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농촌 현실. 그 친구는 양어장 400여평을 만드느라 고생깨나 하고, 지금도 전주에서 날마다 출퇴근을 거듭하고 있다. 나아가, 인근 종중산을 사 개간사업까지 벌였다. 무슨 큰 욕심이 있어서는 아닐 터이고, 이 ‘젊은 나이’에 손만 빨고 있을 수 없는지라 뭔가 ‘하는 일’이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자유인’의 변명이다. 당연한 말이다. 더구나 그것이 ‘생산적인 일’임에야. 잘 되기만을 빈다. 그리고 마저 우리 동네에 정착하여 같이 살게 되면 더욱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나의 별명 이야기는 조금 더 길어진다. 두 아들이 초등학교 시절, 학교 숙제로 ‘가족신문’ 만들기가 있었다. ‘신문 제작’은 나의 젊은 시절 특기特技(신문사 편집기자)가 아니었던가. 아이들에게 ‘걱정말라’며 큰 소리를 쳤겠다. 신문 제호題號부터 밋밋하고 흔한 이름을 붙이지 싫어, 고민하다 정한 게 ‘알록달록 우리소리’였다. 큼직한 글씨 아래 작은 글씨로 제호의 의미를 덧붙였다. <‘알록’은 가장家長인 나의 별명이며, ‘달록’은 내가 아내에게 선사하는 별명이다. ‘우리’은 큰아들 이름인 ‘한울’이의, ‘소리’는 작은 아들 ‘한솔’이의 연음連音에서 따온 것이다>. 내용은 차치하고 ‘알록달록 우리소리’라는 가족신문 제호가 멋드러졌다. 혹시 ‘뻬다시로’라는 일본말을 아시는가? 우리는 직장에서 귀가 아프게 들었던, 상용화된 일본어잔재 신문용어였다. ‘검정색 바탕에 흰 글씨’를 말한다. 일단 자극적인 컷 때문에 제호가 눈에 확 들어올 것이 아닌가.
그때는 제법 사진 찍는 것도 즐겨한 덕분에, 칼라가 아닌 흑백사진을 켄트지 한 장 둘레에 작은 영화필름이 돌아가듯 빙 둘러붙였다. 지금도 갖고 있다. 1호, 2호, 3호. 창간 축시와 가장의 당부, 엄망의 육아와 성장일기, 큰아들의 지금 봐도 질리지 않는, 귀엽기 짝이 없는 만화 네 컷, 아들들의 천진난만한 칼라사진 등을 실었다. 그때 그 아름답고 그리운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일 터, 이제 다섯 살 손주의 재롱에 좋아 어쩔 줄 모르는 60대 초로初老의 할아버지인 것을.
별명이 간혹 짓궂은 아이들이 친구들을 왕따시킬 때 ‘필요악’으로 작용한다하지만, 나는 ‘알록이’라는 내 별명이 정말 좋다. 세상을 평생 소풍날처럼 ‘알록달록’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세 명의 여동생들이 부르는 별명(애칭이라고 해야 하나?)이 하나 더 있다. ‘꼬까오빠’가 바로 그것. 어원이야 ‘알록이’와 비슷한 데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싶다. 까박 '죽여주는 호칭'이다. 그렇게만 불러준다면 무엇이든 퍼주어도 '1도' 아깝지 않을 듯하다. 둘째 동생은 내 이름을 핸드폰에 아예 ‘꼬까오빠’라고 저장해놓아 나를 감동시켰다. 키가 가장 큰(185cm) 오빠라고 ‘꺽새오빠’, 이름 ‘영길’을 본딴 ‘홍길이오빠’ 등 피붙이들의 별명은 또 얼마나 애틋한가. 그렇게 알록달록, 아롱다롱, 한 지붕 밑에서 자랐거늘.
하여간, 나는 두 친구가, 사랑하는 세 여동생이 나의 별명을 오래도록 불러주면 좋겠다. '알록달록한 ‘꼬까오빠’ 만세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