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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오 나의 아버지
- 아들이 그리는 추식(秋湜)의 삶과 문학
추호경(법무법인 대륙아주 변호사)
□ 먼저 인간이 돼라
아버지는 1920. 10. 20.(음력 9. 9.)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1987. 5. 10.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있는 국화아파트에서 돌아가셨다. 맏며느리인 아내가 나를 당시 근무지인 부산에 떼어놓고 아이들과 먼저 상경하여 폐암 확진을 받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있었다. 항암 치료 등을 받으시며 무척 고통스러우셨을 텐데도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으시고 끝까지 의연한 모습으로 깔끔하게 생을 마감하신 아버지가 참으로 존경스럽다고 아내는 지금도 얘기한다.
장례를 치르고 얼마 뒤 방송작가 한운사 선생께서 짤막한 편지를 보내셨다.
“… 秋君은 이제 고아일세. 선친께서는 항상 자네 걱정을 했다네. ‘검사이기 전에 먼저 인간이 돼야 할 텐데…’ 하고 말이야. 나한테 잘 지켜봐 달라고 부탁했네만, 秋君 스스로 그 뜻을 잘 받든다면 나는 선친과의 약속을 쉽게 지키게 되는데…. 雲史”
아, 아버지는 임종을 앞두고도 검사 노릇을 하고 있는 내가 인간다운 모습을 잃어가지나 않을까 불안해하셨던 것이다.
어느 평론가는 아버지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 그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이다. … 우리는 과연 그가 문학정신을 통해 무엇을 구하고 호소하려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가 구하려는 것은 인간이고 호소하는 것은 그 인간성의 옹호이다.”라고 했다(장백일 「추식론 - 삶과 불신시대의 얼굴들」)
내가 검사 발령을 받았을 때 아버지는 “미워하지 마라. 네가 검사로서 만나는 사람들을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고 당부하셨다.
또 다른 평론가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사회의 암흑과 생의 절망을 노래하고 있을 때에 그는 보다 더한 암흑과 절망의 세계에 있으면서도 맑은 음성으로 노래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옵티미즘이 타고난 성격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선의(善意)에 대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정창범 「욕구불만의 인텔리 – 왜가리」)고 했다.
“작가 추식은 어느 경우에도 휴머니즘이라는 당면과제를 잊지 않으려 했다.”는데(조미숙 「1950년대 휴머니즘 문학 –추식을 중심으로-」) 그 아들인 나는 어떤가?
한운사 선생의 편지를 받고나서 나는 내가 좀 달라져야겠다고 다짐했다.
□ 나에게 아버지는 누구인가
아버지는 참으로 자상하셨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우리는 대전에 살았는데 신문기자인 아버지는 출장을 자주 다니셨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는 날은 초저녁잠이 많은 나도 누나와 함께 밤늦게까지 기다렸다. 아버지는 대개 통금 직전에야 귀가하셨는데 자는 척하는 우리의 뺨을 부비면서 ‘나마가시’(생과자)를 내놓으셨다. 어디서 그렇게 맛있는 걸 구해 오셨는지 그때 먹었던 생과자 속의 달콤하고 상긋한 ‘앙꼬’(팥소)는 지금도 생각하면 침이 솟는다.
아버지의 자상하신 점은 담배와도 연결된다. 대학입시 구술시험을 마치고 우리 집으로 함께 온 친구가 권하는 바람에 나는 생애 첫 담배를 피우게 되었다. 그 날 그 친구와 나는 멋진 대학생활을 기대하며 밤늦게까지 많은 얘기를 나눴고 담배도 꽤 피워댔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까 내 머리맡에 ‘파고다’ 담배 한 갑과 새 깃털 모양이 새겨진 라이터(상표가 ‘Storm Master’였던 것으로 기억됨)가 놓여 있었다. 아버지는 ‘너 이제 담배 피워도 돼.’ 하는 허여(許與)의 의사표시를 이렇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삶의 고비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아버지는 언제나 내 의견을 존중해주셨다. 고등학교 3학년 말 철학과를 지망하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잘 생각했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되려고는 하지 마라. 카뮈라면 몰라도….” 하며 나를 지지하셨다. 철학적 깊이가 있는 소설을 쓰기 위해 철학을 전공하겠다는 것이 순진하고 어설픈 생각이란 것을 잘 아셨겠지만 일단 내 판단을 밀어주신 것이다. 물론 그 훨씬 전에 내가 소설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도 아버지는 흔쾌히 승낙을 하셨다. 아버지는 일단 상대방의 의견에 적극 찬동한 다음 약간의 보충의견을 다는 그런 화법을 잘 쓰셨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작품을 아버지에게 보여드리자 꼼꼼히 읽어보시고는 “잘 썼다. ‘교차로 맨 가운데의 이정표는 확실히 0km였다.’로 마무리하면서 자신의 방황이 끝났음을 표현한 것은 정말 감탄할 만하다. 그런데 관념의 과잉은 좀 ….”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대학 2학년 때 ROTC 지원을 하겠다고 했을 때도 “좋지. 장교로서의 리더십은 사회생활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 뭐 소설가가 꼭 모범적일 필요까지는 없지만….”이라고 하셨다.
나는 보병 소대장과 통역장교로 근무하고 제대를 한 후 한 동안 내 청춘을 총 결산하는 멋진 소설을 써 보겠다고 대들었다. 그러나 여러 달 동안 원고지 파지만 양산하고 내가 소설가가 될 자질이 부족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결국 나는 작가의 길을 포기하고 무모하지만 사법시험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내 결심을 고하자 아버지는 역시 “잘 생각했다. 넌 분명히 훌륭한 법관이 될 거야.”라고 적극 지지하셨다. 이제야 말하지만 정말 이때만은 아버지에게 몹시 서운했다. 아버지는 나의 롤 모델이셨고, 나의 멘토이셨으며, 아버지를 이어 훌륭한 소설가가 되겠다는 것이 확고한 나의 포부였는데, 그걸 포기하겠다고 하는데도 이렇게 쉽게 승낙을 하시다니….
검사 임관 후 내가 서울대 보건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했을 때도 “참 좋은 생각이다. 이 사회를 진짜로 건강하게 좀 만들어 봐라.”고 북돋아주셨다. 그 덕분에 나는 보건학 석・박사 과정을 잘 마칠 수 있었고, 많은 보건・의료 사건은 물론 사인(死因)을 정확히 밝혀야 할 연세대생 이한열 최루탄 사망 사건이나 오대양 집단변사 사건 같은 것도 맡아서 잘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나만 아니라 5남1녀의 자녀들을 하나같이 따스하게 보살피셨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다 그렇겠지만 아버지의 내리사랑은 정말 남달랐다. 둘째가 고1 때 가출하여 마산의 중식당에서 ‘시다’ 노릇을 하는 것을 찾아 와서는 목욕물을 따뜻하게 데워 땟국이 흐르는 몸뚱어리와 동상 걸린 발을 손수 씻겨주셨는데, 이런 아버지의 모습은 그대로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나를 따로 부르셔서, 마음 여린 둘째는 물론이고, IQ가 150이나 되면서도 이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셋째, 갓 결혼해서 생활이 어려운 넷째, 해병대 군 복무 중인 착하기만 한 막내, 그리고 시집가서 잘 살고 있는 누나까지 하나하나 거명하면서 당신께서 충분히 잘해주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물론 장남인 나에게 가족들을 잘 보살피라는 유언 같은 말씀이었지만 참으로 애절하게 느껴졌다. 생각과 행동이 자유스러운 아버지를 얽매는 게 딱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가족, 특히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한다.
아버지는 친자식만 아니라 며느리들에게까지 ‘난정(蘭汀)’, ‘옥계(玉溪), ‘가은(嘉恩)’ 같은 예쁜 호를 붙여 부르실 정도로 자상하시고 다정다감하셨다.
□ 소설가로서의 아버지
어릴 때 내가 한번 “아버지는 기자예요, 소설가예요?”라고 물었는데, 아버지는 머뭇거리지 않으시고 “나는 소설가 추식이다.”라고 대답하셨다.
그렇다! 아버지는 소설가이고 끝까지 소설가이고 싶으셨던 것이다. 사회부 기자로서 부조리한 현실을 직접 현장취재하신 많은 경험이 아버지를 더 이상 기자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소설가로 내몬 것이다.
아버지는 1955년 「부랑아」로 데뷔하신 이래 1961년까지 약 6년에 걸쳐 30여 편의 장・단편 소설을 쓰셨다(대중잡지에 실린 ‘명랑소설’까지 합치면 그 배 가까이 된다). 정말 대단한 필력이다. 어린 시절 나는 새벽에 소변이 마려워 잠이 깨면 아버지가 그때까지 서재에서 담배 연기를 뿜으시며 원고를 쓰시는 것을 보면서 자랐다. 그러고도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신문사에 출근하셨다. 1962년 언론사 통폐합 사태가 일어나자 아버지는 이를 계기로 신문기자 생활을 접으시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셨다. 아버지의 첫 작품집 『인간제대』의 발문(跋文)에서 ‘이제는 올 데까지 온 모양이니 딴 짓은 하지 말자.’고 쓰셨는데 정말로 한눈팔지 않으시고 글만 쓰셨다. 이때 지방신문에 연재소설을 쓰시기도 하고, 낙도(落島) 분교에 부임한 여선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장편소설 『가시내 선생』을 내시기도 했다. 『가시내 선생』은 아버지가 신문사 재직하실 때 벌이셨던 ‘어깨동무학교운동’(도서・산간의 벽지 학교와 서울 학교를 연결하여 서로 도와주는 운동) 경험을 토대로 한 작품인데, 그때 을유문화사의 ‘한국신작소설전집’의 하나로 같이 출간된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과 함께 인기 좋은 베스트셀러였다. 쇄(刷)를 거듭할 때마다 판권 인지에 아버지 도장을 내가 찍었는데, 한번은 3,000번을 연달아 찍는 바람에 손가락에 물집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곧 타협하시고 만다. 한창 커 가는 자식들을 서울서 제대로 먹이고 공부시키려면 소설 원고료만으로는 태부족이라는 것을 절감하시고는 본격적으로 라디오 드라마 집필을 시작하신다. 그 첫 번째 작품이 <단골지각생>이었는데 인기가 대단하여 바로 임권택 감독에 의하여 영화화되었고, 그 뒤 연달아 발표하신 <동백아가씨>, <김순경>, <마포 사는 황부자>, <사랑의 배달부>, <색스폰 부는 처녀> 등도 모두 인기를 끌었고 거의 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어느 달은 KBS, DBS, TBC 세 방송국에 겹치기가 되어 그때 하루에 120장의 원고를 써대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가히 초인(超人)의 그것이라 할 정도였다. 그 덕에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윤택해졌고 나도 아르바이트를 안 하고 학업에만 열중할 수 있었다. 이 점 아버지께 고맙고 또 고맙다. 그러나 한편 나와 가족들 부양 때문에 소설가로서의 순수성을 지키시지 못하게 된 것이 몹시도 안타깝고 송구스럽다.
아버지는 문학지망생인 나를 멘토로서 잘 이끌어주셨다. 어떤 때는 주제와 문체 같은 것을 두고 토론하다가 밤을 꼬박 새운 적도 있는데, 한번은 내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Ulysses)』 원서를 사 들고 와 자랑삼아 세계에서 가장 난해하다는 이 소설을 독파해 보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아버지는 “너는 충분히 『율리시즈』를 읽을 실력이 될 거야. 그런데 체홉이나 효석의 단편들은 다 읽었냐?”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는 아버지가 체홉과 효석을 그리 높이 사는 이유가 잘 이해가 안 갔었다. 도스토예프스키나 이상(李箱)이라면 또 몰라도…. 나로서는 사회적 약자의 삶을 진정성 있게 따스한 시선으로 그린 체홉의 여러 단편들이나 우리 고유의 정서를 잘 담아낸 향토색 짙은 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같은 깔끔한 단편도 좋지만 주제가 묵직하여 메시지가 강한 아버지의 단편들이 더 좋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한국문학가협회상을 받으시는 그 시상식에 갔었는데, 유명한 작가들이 많이 나오시고 월탄 박종화 선생께서 시상을 하시는 걸 보고 너무나 근사해 보여 나도 빨리 멋진 소설을 써서 이 상을 받아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그 상의 수상작 「인간제대」는 그보다 훨씬 뒤 고등학생이 돼서야 읽었는데, ‘아내를 죽이지 않은 것만은 다행이었다.’로 시작되는 첫 대목부터 전율을 느꼈다. 낯익은 사람들이 하나도 없는 서울역에 가서는 그 틈새에 끼지 못하고 그들을 그냥 떠나보내는 주인공의 ‘군중 속의 고독’이 절실하게 내 가슴에 전달됐다. 또 마지막에 “나는 정신분열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확실히 아내를 죽였습니다. …”라고 절규함으로써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질 때는 짜릿한 쾌감까지 맛볼 수 있었다.
그 이후 나는 아버지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 ― 「부랑아」의 박달이, 「곰선생」의 강한수, 「황색시인」의 홍 선생, 「인간제대」의 ‘나’, 「기적궁」의 봉순이, 「왜가리」의 송병순, 「색시」의 철구, 「거짓말장이」의 윤구 등등과 친숙해지고 이들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이해하게 되었다. 하숙집 종업원, 창녀, 제대군인, 대안학교 선생, 소매치기, 홀아비 택시운전사, 실업자, 소년범 등등 …. 이들은 하나같이 정상적이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대열에서 영영 떨어져 나갔기에 ‘생명의 걸인(乞人)’이라 할 수 있다(이어령 「패자의 곡예 – 인간제대」). 이들은 현실세계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외톨이가 되어 정상적인 사회에서 배제된 채 삶을 무의미하게 소비하며 지낸다. 아버지는 이들의 비참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 전후 사회의 모순된 현실을 드러내지만 이들을 방치하지 않고 따스한 시선으로 감싸주신다(구창환 「비인간사회의 인간성 추구 – 추식의 문학세계」). 어쩌면 내가 검사 생활을 하면서 만나게 된 인간 군상들도 이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는데, 나는 그들을 따스하게 보듬어주지 않고 그저 처리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겨 온 것이 아닌가 반성해 본다.
아버지의 소설을 말할 때 배경이 된 시대상황과 주제에 관하여만 주로 논의를 하는데, 나는 문체에 대하여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아버지의 문장은 참으로 간결하다. ‘박달이는 삘기새끼를 잡는 재미가 여간 꼬솜하지 않았었다.’(「부랑아」), ‘봉순이는 숫제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로써 쏟아놓지 않기로 작정했다.’(「기적궁」), ‘늦게사 왠 그런 도벽이 생겼는지 모르겠다.’(「도묘기」), ‘윤구는 자기 자신이 미워졌다. 그리고 무서워지기까지 했다.’(「거짓말장이」), ‘나는 사람을 죽였다, 아무도 모른다.’(「다락 속의 서노인」), ‘그저 그런 마을이다.’(「참초」), ‘그것이 단순한 버릇인지 아니면 영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인지 한 선생 자신도 단정을 내릴 수 없었다.’(「무골충」)와 같은 단편들의 첫머리를 보면 그야말로 간결하면서도 작품의 주제나 전개과정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나에게 “사람은 너저분하면 안 돼. 단정해야지. 글은 그보다도 더 깔끔해야 되고.”라고 하시며 문체에 대하여 지도를 해주셨다.
아버지가 소설에서 사용하신 그 어휘의 풍부성도 대단하다. 삘기새끼, 피조리, 초간나, 꽃제비, 쫄망구니, 씽, 돛달다 등등의 은어가 많이 나와 현장감과 리얼리티가 살아나는 것도 그렇지만, 적재적소에 그 단어가 아니면 안 될 적확한 단어를 골라 쓰시는 것은 정말 놀랍다. ‘집가심을 해야 한다고 북새를 놓는 것이었다.’(「부랑아」), ‘눈만 끄먹거리고 헐커니 앉아’(「대도신문사」), ‘눈살이 깔쿠랑해가지고 앵돌아지는 것이었다.’(「귀순 어머니」), ‘북데기 단 같은 머리채를 움켜잡고 추스르자 썩은 고주박처럼 …’(「인간제대」), ‘추근추근 걸으면 해동갑해서 ….’(「귀촌」), ‘달이 삐줌히 비친다. 바다 한복판에서 말랑말랑한 홍시 빛깔의 달이 삘겨져 오르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니….’(『가시내 선생』), ‘족제비만은 이씨라는 성조차도 사그랑이가 됐다.’(「참초」) 등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언젠가 아버지는 “소설가라면 벽초(碧初: 『임꺽정』을 쓴 홍명희) 정도로 우리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해야 하는데….” 하셨다.
아버지가 쓰신 작품은 단편소설, 장편소설, 콩트, 방송극, 시나리오, 희곡, 수필, 기행문 등 실로 다양하기가 그지없다. 그러나 아버지의 작품의 본령은 역시 단편이다. 아쉽게도 발표된 단편 중에서도 ‘작품’으로 대접받고 있는 것은 30여 편뿐이다. 그런데 이런 단편들 말고도 아버지가 쓰신 장・단편들이 무수히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문학에 대하여 결벽이 있었던 나는 아버지의 소설이 순수문예지가 아닌 《아리랑》, 《명랑》, 《소설계》, 《실화》 같은 대중잡지에 실리는 것을 무척 싫어했었다. 그 제목만 봐도 내용이 짐작되는 「종아리를 때려라」, 「하필이면 요 꼴로」, 「간지러워라」, 「50점짜리 신랑」, 「왈패구락부」, 「그게 아니래도」, 「네가 도둑놈이다」, 「그 노처녀 잘됐다」 같은 식이었는데, 그래서 어느 잡지에서는 아버지를 ‘명랑소설가’로 소개하기도 했다.
“나는 이제 상업작가가 돼버렸다.”
아버지가 생전에 하셨던 말씀이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아버지의 라디오 연속극들이 방송계를 휩쓸다시피 하고 영화화도 많이 되어 속된 말로 한창 잘 나가실 때였던 것 같다. 나는 위로한답시고 “아버지, 체홉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여러 오락잡지에 기고를 많이 했었죠. 그러나 아무도 그의 남작(濫作)을 비난하지 않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더 이상 말씀 없이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아버지는 작가로서의 당신에 대하여 부족한 점이 많다고 자책하셨지만 나는 아버지가 여전히 훌륭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명랑소설이나 방송극 같은 대중적인 것에 대하여는 ‘작품’으로 평가를 잘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가 쓰신 작품은 예컨대 《소설계》에 실렸던 단편 「독사와 장미」, 라디오 연속극 <동백아가씨>, <마포 사는 황부자>, <나는 몰랐다>, <삽다리 총각>, TV 연속극 <미스터 곰> 등 그 어느 것이든 거기에는 아버지가 아니면 도저히 창출해 낼 수 없는 풍자와 페이소스 그리고 인간성에 대하여 포기할 수 없는 신뢰 같은 것이 담겨 있어 그냥 ‘대중문학’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그 무엇이 있다.
□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여기서 나는 아버지를 롤 모델로 삼은 멘티 추호경은 끝내 소설가가 되지 못하고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작가일 수 있었는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미련하게도 나는 최근에 와서야 그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한마디로 아버지는 증인으로서 세상을 관찰하신 반면 나는 법관의 시각으로 세상사와 사람들을 판단해 온 것이 아닌가 한다. 판단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은 규범이다. 법관은 판단기준인 규범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규범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지 못한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아버지가 “작가라면 그 시대상황을 충실히 기술하는 객관적 증인이 돼야만 하지.”라고 말씀하신 것 같다. 증인은 판단하지 않고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오직 진실만을 말하면 된다.
아버지는 나의 모범생적인 사고방식과 생활태도를 진즉부터 간파하셨고, 그래가지고는 작가가 될 수 없음을 아셨기에 내가 사법시험 얘기를 꺼냈을 때 “넌 분명히 훌륭한 법관이 될 거야.”라고 작가의 길을 포기하도록 종용하셨던 것이다.
그렇다! 아버지는 나와 달리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셨고, 그것이 바로 아버지를 작가가 되도록 한 동력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어느 것에건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셨다. 이념적으로도 그러하셨고, 어떤 정파나 단체에 소속되어 그 울타리에 갇히는 것도 싫어하셨다. 나는 현재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벗어나야 할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현실에 충실하려고 하는데 아버지는 그런 나와는 정반대다. 아버지의 멋진 아호 ‘고우(古雨)’는 ‘GO’로도 읽을 수 있는데(아버지와 칼럼을 번갈아 쓰시던 심연섭 선생은 호를 ‘수탑(須塔: STOP)’이라고 하셨음), 어느 것에도 안주하지 않으시는 아버지의 성품과 잘 맞는 것 같다. 아버지가 어느 한 직장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시고 집 이사를 자주 하시고 하는 것도 이러한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아버지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개 자신이 속한 공간을 부정하는 경향을 보여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을 자신의 정착지라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곳을 떠남으로써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리라 믿는 것도(김영애 「추식 소설 연구-‘인간제대’를 중심으로」) 아버지의 이러한 내심이 투영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얽매이지 않으시는 성품이니 체면이나 주위 평판에도 그렇게 예민하지 않으셨다. 나는 주위 사람에게 비쳐진 나에 대한 평가에 신경을 쓰는 편이지만, 아버지는 어떤 기준을 지키기보다는 당신이 하고 싶으신 대로 거리낌 없이 사셨다. 아버지는 일찍부터 빨간 소형승용차를 직접 몰고 다니셨는데, 한번은 동생이 “빨간색은 좀 심하지 않나요?” 하니까 아버지는 “내가 좋은데 뭐.”라고 답하셨다.
여자관계만 해도 그렇다. 어려서부터 나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는 일종의 팬덤 같은 많은 여성들을 보아왔다. 짓궂게도 나는 그 여자 분들에게 ‘진짜 아줌마’, ‘가짜 아줌마’ 같은 별명을 붙이기도 했는데, 지금의 새어머니도 아버지의 팬 중의 한 분이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아버지 주변에는 젊은 여성들이 많이 모였는데, 돌아가신 후 기일이나 명절이 되어 아버지의 산소에 가면 누군가 다녀간 흔적인 꽃다발이 많이 보였던 걸 보면 아마도 내가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여성 팬이 더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생전에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너무 소홀히 하시는 것 같아 아버지의 ‘여성편력’(?)이 못마땅하다는 의견을 말씀드린 적이 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야, 그렇다고 나를 찾아온 여자들을 어떻게 매정하게 쫓아내냐? 그리고 그 여자들이 내 작품의 등장인물이 되기도 하거든.”이라고 하셔서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여서 특별히 어느 한 여성에게만 집착하지는 않으셨다.
아버지는 생각과 행동에 거리낌이 없는 만큼 권위나 권력 같은 것에 결코 타협하지 않고 저항하는 정신을 가지고 계셨다. 아버지 소설의 기본적 시각을 ‘탈권위적’으로 보기도 하는데(김택호 「오래된 권위에 대한 냉소적 시선 - 추식 소설론」) 맞는 것 같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신문사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셨으면서도 한 군데 오래 버티시지 못한 것도 기사나 논설에 대한 사주와의 의견 충돌 때문인 것으로 안다(단편 「대도신문사」나 「왜가리」 같은 데서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 작가로서도 절필하면 했지 결코 곡학아세하는 글은 쓸 수 없다는 철저한 의식을 가지고 계셨다. 10월유신으로 공안기관의 서슬이 퍼랬던 시절 아버지는 동아일보의 ‘청론탁설’ 칼럼에 <지문 없는 장발족>이라는 글을 쓰셨는데, 그 글 속에 농촌의 젊은이들은 너무 바빠 이발할 틈이 없고 손금이 닳을 정도로 일을 많이 하는데 무슨 장발 단속과 지문 채취냐고 정부를 빗대어 강하게 비판하셨다. 또 일본 조총련계에서 남·북한 단편소설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수록한 『三人の靑年』을 발간한 일이 있는데, 북쪽의 소설들은 ‘위대한 령도자’의 뜻을 받들어 조국 건설에 매진하는 희망적 내용이었음에 비하여 남쪽의 소설인 아버지의 「인간제대」는 우리의 암울한 현실을 너무나 어둡고 절망적으로 그린 것이었다. 이 때문에 공안기관으로부터 모종 의심을 받아 약간의 고초를 겪기도 하셨다. 그밖에도 밝히기 껄끄러운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지만, 아무튼 아버지는 ‘힘 있는 자’에 대하여는 끝까지 냉소적이셨다.
□ 해학과 여유로운 마음
아버지는 유머로써 주변 사람들을 달래는 독특한 장점을 가지고 계셨다.
한 예를 들어 보자. 나는 호적에 실제보다 1년 먼저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검사가 된 후 “왜 1년 빠르게 출생신고를 하셔서 저를 중늙은이 검사를 만드셨어요?”라고 푸념을 한 일이 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이렇게 받아넘기시는 것이었다. “인마, 난 정확하게 신고했어. 니 엄마한테서 나온 거가 아니라 나한테서 나온 걸 기준으로 했을 뿐이지.” 그러니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더 이상 할 말을 잊을 수밖에….
아버지는 일상생활에서 유머를 많이 쓰셨는데, 화가 치미는 일이 생기거나 스트레스가 쌓일 때 곧잘 유머로 이를 해소하셨다. 한번은 원고 심부름을 하던 사람이 영화사에서 방송극 원작료를 받아가지고는 그대로 종적을 감췄다. 그 돈의 액수가 제법 컸고 그때 우리 집에는 그 돈이 꼭 필요했기 때문에 꽤나 난처한 상황이었는데 아버지는 “내 돈은 꼭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한테로 간단 말이야.” 하고 웃어 넘기셨다. 또 한때 손목 관절을 다치셔서 문하생처럼 우리 집에 기식하던 사람이 아버지가 불러주시는 대로 원고지에 이를 받아 적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방송국마다 다니면서 아버지 작품은 다 자기가 쓴 거라고 떠들고 다녔다는데, 방송국 PD 한 분이 이를 귀띔해주자 아버지는 “그거 그 친구가 다 쓴 거 맞아. 어쩜 내가 구상한 거와 글자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쓰는지 나도 감탄할 정도야.”라고 응수하셨단다.
아버지의 해학 능력은 아버지가 쓰신 수많은 ‘명랑소설’들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 형제들을 모델로 해 《학원》에 연재했던 「미완성부대」는 10대의 유머러스한 감성을 잘 어루만져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특집화보가 나가기도 했다. 라디오 드라마 쪽 예를 하나 들면, 요즘도 일본사람이 우리말을 하는 투를 ‘…했으무니다.’ ‘…아니무니다’. ‘…그랬으무니까?’ 하는 식으로 꼬집는데, 이 해학적 표현도 아버지가 MBC 라디오 연속극 <태양은 내 것이다>에서 쓰신 것이 원조다. 아버지는 익살스러운 연기를 직접 하시기도 했다. 문인극(文人劇) <살구꽃 핀다>에서 고집쟁이 방앗간 주인 역도 잘 하셨지만, <춘향전>에서 방자 역을 맡고서는 아예 당신이 주인공인 것처럼 관객들을 웃겨대며 무대를 독차지하셨다(오랜 시간 뒤 영화 <방자전>에서 김주혁이 하는 코믹한 연기를 보면서 한참 웃던 나는 아내 몰래 손수건을 꺼내어 눈가를 눌렀다).
아버지는 또한 위기나 난처한 입장에 처했을 때도 그것을 이겨내는 도구로도 유머를 잘 활용하셨다. 아버지가 유명 여성잡지의 여기자와 사귀시다가 그만 그 사이에서 어린애가 태어났다. 그때도 몹시 화가 나 있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미안하오. 그렇지만 당신 배 하나 안 아프게 하고도 아들 하나 선물한 것 아니오.”라고 눙을 치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어이없어 하시면서도 “선물을 주신다니 받아야죠.” 하시며 그 여기자의 거처로 달려가 바로 그 애를 데려오셨다. 그러고는 함께 따라온 그 여자 분을 가리키며 우리들에게 “야, 니들 아빠가 엄마 하나를 더 너희들에게 선물하신단다.”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부터 한 집에서 두 어머니를 모시게 됐으며, 그때의 그 갓난아기는 우리 집 막내로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고 커서는 우리 형제들의 귀찮은 대소사를 도맡아서 잘 해결해주는 보배가 되었다.
□ 소금이 달다
중학생 때 읽은 『현대수양전집』(좌우명편)이란 책에 아버지의 좌우명도 나왔는데 “소금이 달다!”였다. 6・25 때 상당 기간 지하 토굴에 은신하며 지내셨는데, 그때 어머니가 몰래 들여 넣어준 주먹밥과 소금이 그렇게 꿀맛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 소금이 달다고 느끼게 됐으며,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그때를 생각하면 다 이겨낼 수 있었다고 쓰셨다.
아버지 세대의 다른 분들도 다 그러셨겠지만 아버지는 참으로 치열하게 세상을 사셨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엉겁결에 가장이 된 아버지는 학업도 포기하고 바로 충북도청 산림과에 취직을 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셨다. 얼마 뒤 공직을 그만두신 다음엔 극단을 조직하여 희곡을 집필하고 무대에도 서셨으며, 지원병으로 나간 주인공이 백골 상자로 돌아오는 내용 때문에 상당 기간 고등계 형사의 감시를 받기도 하셨다. 작품 내용에 대한 극단주와의 의견 충돌로 극단을 나와 만주 외숙의 농장에서 식객 노릇을 하며 희곡을 쓰셨고, 다시 청주로 돌아오셔서 홈스펀 방직공장 등을 경영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셨다. 그 뒤 심기일전하여 신문기자의 길로 들어서시는 등 참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아버지는 언론 관계 지식도 독학으로 습득하셨는데, 어릴 때 아버지의 서재에 꽂혀 있던 12권짜리 『現代ジャーナリズム講座』 총서를 펼쳐 본 나는 그 책들 여백에 빽빽이 각주처럼 적혀 있는 깨알 같은 메모를 보고는 경외심마저 가졌었다. 나중에 내가 사법시험 공부를 할 때도 그렇게 열심히 하지는 않은 것 같다. 아버지가 지방신문의 편집을 맡으셨을 때 인쇄용 잉크가 떨어져 조판을 마치고도 신문을 못 찍게 되자 임기응변으로 난로 연통의 검댕과 모빌유를 섞어 인쇄를 하셨다는 전설 같은 얘기도 남아 있다. 대전에서는 민둥산 허허벌판 일부를 불하받아 집을 지으셨는데 우물을 아무리 깊이 파도 물이 안 나왔다. 착정(鑿井)을 맡은 업자도 포기하다시피 하고 모두 그만두라고 말렸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파 보자고 밀어붙여 결국 토관 42개의 깊이에서 물길을 찾았는데, 그때 “내 이름이 湜(물 맑을 식)인데 맑은 물이 안 나오고 배겨?”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런 식의 근성은 글을 쓰시는 데도 보이셨는데, 한 소설가는 아버지가 추운 겨울 날 난방이 안 되어 잉크까지 얼어붙는 냉골 여관방에서 손가락 동상을 입어 가면서도 소설 원고를 완성하셨고, 장맛비에 물난리가 나서 방까지 물이 차오르는데도 그 방보다 조금 높은 곳의 아직 물이 차지 않은 툇마루로 소반을 들고 가 다음날 마감인 원고를 마저 쓰셨다는 에피소드를 전해주기도 한다(정태륭 「한국 문단사 - 전후문학의 빛나는 별, 추식선생」).
아버지는 ‘소금이 달다!’ 정신으로 무장이 돼서 그러신지 상당히 진취적이셔서 어떤 난관이 닥쳐도 그대로 주저앉지 않으시고 그것을 이겨내셨다. 환갑 조금 전에 손목 관절통이 너무 심하여 펜을 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는데 바로 한글타자기를 구입하셔서 독수리타법으로 열심히 타자연습을 하신 다음 바로 깔끔하게 작성된 원고를 방송국에 보내셨다. 나중에는 전동타자기로 바꾸어 더욱 효율적으로 세련된 원고 작성을 하셨는데, 다른 작가들에게도 타자를 권해 이때부터 많은 작가들이 타자로 원고를 작성하게 됐다고 한다(박서림의 從心漫筆⑮ - 「추식 선생의 전동타자기」).
□ 미완에 대한 그리움
2012년 나는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초대원장으로 취임했다. 이 기관을 운영하면서 나는 원훈(院訓)을 ‘바르게, 따뜻하게’로 정했다. 감정(鑑定)과 조정(調停)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함은 물론, 의료사고로 인해 정신적・경제적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 측과 의료분쟁으로 시달려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의사 측 모두를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것이 그 조직의 과제라고 생각한 것이다. 검사 시절에는 그 어느 쪽도 편을 들지 않는[impartial] ‘차가운 정의’를 지향했지만, 늦게나마 양쪽 당사자 모두를 보듬는[omnipartial] ‘따스한 정의’를 실현하자고 한 나를 아버지가 보셨다면 어떻게 말씀하실까? 이제 인간이 좀 돼 간다고는 하실까?
아버지가 그립다. 아버지는 나를 깨우쳐주신 분이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아니 돌아가시고 나서도 내가 잘못되지 않도록 길을 일러주신 것이다.
지금 이 사회는 어떠한가? 아버지의 초기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50년대 중・후반을 모두들 암울한 ‘비인간화’의 시대라고들 칭한다. 그러면 지금은 ‘인간화’된 사회인가? 아무도 쉽게 긍정하지는 못하리라.
아버지의 문학세계에 대하여 “… 단적으로 요약해서 전흔(戰痕)으로 실의에 빠져 생활전선을 헤매다가 차라리 인간 그것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부르짖는 전후의 인간상들이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인간성을 되찾는 얼굴들이다.”(장백일 「추식론 – 삶과 불신시대의 얼굴들」)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렇듯 전후 한국인의 실존의 허상(虛像)이 아버지의 서민문학의 주제가 되었는데(김영기 「생존조건의 어둡고 긴 터널」), 아버지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인간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회 그리고 스스로에게 항변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끝까지 지켜낸다. 예컨대 「인간제대」에서 ‘나’는 전신주에 올라가다가 떨어져 전공(電工) 시험에 실패하면서도 ‘동물원의 원숭이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자각이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만큼의 자각이라도 하고 있는가?
여기서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 「무골충」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사상》 1980년 9월호에 게재된 이 소설에 대하여 그때 잡지사 측은 “인간의 실존적 의미에 처절한 물음을 던져온 중견작가 추식이 10여년의 침묵을 깨고 다시 실존의 표적을 향해 터뜨리는 존재의 폭음!”이라고 거창하게 광고를 했는데, 사실 이 소설에는 많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남는다. 내가 사법연수원을 마칠 즈음 아버지가 구상 중인 새 작품에 대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다.
대쪽같이 꼿꼿한 국어선생이 10월유신 때 학생들 앞에서 “이게 정말 헌법이냐?”고 한탄을 한다. 한 학생이 정보기관에 근무하는 자기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고한다. 결국 그 선생은 국가모독죄인가 뭔가 하는 죄로 구속까지 됐다가 풀려난 후 낙향하여 농사를 지으며 지낸다. 농사의 ‘농’ 자도 모르면서도 생활력 강한 부인 덕으로 몇 년 동안 그럭저럭 시골 살림을 꾸려간다. 세상 돌아가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살아가던 그 선생은 뜻밖에 대통령이 안기부장이 쏜 총탄에 시해되었다는 충격적인 뉴스에 접한다. 그 이후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실없이 히죽히죽 웃어댄다. 이런 그를 보고 동네사람들은 ‘무골충’이라고 부르며 힘든 일을 마구 시켜대는데, 그는 무엇이 좋은지 히죽히죽 웃으며 그 궂은일들을 다 해준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는데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결연한 의지까지 보였다. 그런데 정작 발표된 「무골충」에선 ‘한 선생’이 교단을 뛰쳐나온 시점이 3・15 부정선거 때로 되어 있고, 부인에게서 얻어 피운 고급담배가 ‘아리랑’으로 나와 작품의 시제가 1970년보다 앞선 시점으로 보이게 된다. 시대적 배경을 1980년으로 해야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고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도 훨씬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왜 최초의 구상과 달리 10년 이상 거스른 시점으로 하셨을까? 그 답은 분명하다. 검사를 지망한 아들, 군사정권이 지속되는 5공 치하에서 곧 검사로 봉직하게 될 아들에게 어떤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이 「무골충」이 게재된 잡지의 ‘작가의 말’에서 아버지는 다시 광맥을 찾아 표토(表土)부터 차근차근 끈질지게 파들어 가겠다고 소설 창작에 커다란 의욕을 보이셨다. 그러나 그 뒤 특별히 주목할 만한 후속작이 나오지 않았다. 무엇이 아버지에게 더 이상 소설을 못 쓰게 했는지 참으로 안타깝고 죄책감까지 든다.
아, 아버지, 아버지가 그립다.
아버지가 살아계셔서 지금 소설을 쓰신다면 어떤 내용이 될까? 정치인들의 공허한 주장과는 달리 최저 생활의 절대선 밑에서 허덕이는 ‘생명의 걸인’들은 줄지 않고 오염된 정의와 가치관의 전도로 더욱 비인간화된 오늘의 우리 사회에 아버지는 어떤 메시지를 던지실까? 지금도 여전히 ‘흐느적거리면서 히죽히죽 웃는 병신을 만드는 세상’인데, 아버지가 다시 「무골충」을 쓰신다면 할 말을 다 하실까?
아버지의 미완이 안타깝고, 그래서 아버지가 더욱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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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지만 추 '영감'의 필력은 대단하오이다.
이 글에서, 다 그러하지만 특히 마음에 짚이는 구절들이 있구려.
'실의에 빠져 생활전선을 헤매다가 차라리 인간 그것을 ..... 인간성을 되찾는 얼굴들이다.'
'한국인의 실존의 허상이 아버지의 서민 문학의 주제..'
'인간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회 그리고 스스로에게 항변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끝까지 지켜낸다.'
''힘 있는 자’에 대하여는 끝까지 냉소적이셨다.' 등 등
하고, "...나한테서 나온 걸 기준으로 했을 뿐이지." 라는 말씀에는 눈이 번쩍 뜨이며 웃음이 절로 나오는구려.
참으로 기발한 '착상'이시네요.
훌륭한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원장님!
따님의 음악회엔 매번 다른 일 때문에 참석 못해 송구스럽니다.
이 원장님의 격려에 힘입어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본래 긴 글이나 책을 안읽고 공식만 겨우 외워 사는 제가 아주 긴 글 아주 잼있게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