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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 3일째, 남군의 절망적인 피켓 돌격
[ 영화 <게티스버그> ]
이 작품은 미국 남북전쟁의 분수령이자 가장 유명한 게티스버그 전투 사흘간을 그린 영화입니다. 원작은 풀리쳐 상에 빛나는 마이클 사라의 <The Killer Angels>입니다. 지금은 게티즈버그 국립 군사 공원으로 바뀌었지만, 당시 그곳에서 벌어졌던 피 튀기는 전투 장면 촬영에는 5천 명의 엑스트라들이 동원되었습니다. 제작자 켄 번즈가 북군의 핸콕 장군의 부관으로, CNN사장 테드 터너가 보병 렙으로 찬조 출연한 것도 이색적입니다.
뛰어난 배우들이 온통 턱수염을 기른 채 펼치는 연기도 훌륭했습니다. 내용도 곁가지 없이 전투와 전략 그 자체를 온전히 담는 데 노력했다는 점도 돋보였습니다. 어쨌든 본고장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을 남부인의 시각에서 다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대한 테드 터너의 대답으로 불리며 화제를 모았던 영화였습니다.
러닝타임이 무려 271분(4시간30분)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미니시리즈로 계획하였으나 극장용으로 다시 편집하여 1993년도에 개봉하였습니다. 그래도 너무나 긴 상영시간 때문에 미국에서 흥행은 크게 성공을 하지 못했죠. 후에 TV물로 다시 방영되기도 하였습니다.
* 전투 2일째, 리틀 라운드 탑 근처에서의 전투
한국에서도 개봉할 예정이었지만 역시 긴 상영시간 때문에 영화사들마다 수입을 포기하였습니다. 결국 DVD로 출시되고 몇 년 후 HBO에서 특선 시리즈로 방영되었습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다 실존인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북군과 남군의 전쟁 상황을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한 시각으로 미국 역사의 최대 사건을 스펙터클하게 묘사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국 시청자들에겐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대표작 하면 TV 시리즈물 <남과 북>을 많이 기억하는지 <게티스버그>는 의외로 잘 안 알려져 있습니다. <남과 북>의 메인타이틀 음악 못지않게 지금 흐르는 <게티스버그>의 메인테마 역시 베스트 오브 베스트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 간략한 줄거리 ]
* 전투 3일째, 피켓 돌격 직전
영화는 결전 장소가 선택되는 과정부터 보여줍니다. 최대의 결전지인 게티스버그를 전장으로 결정한 자는 남군의 리 장군도, 북군의 미드 장군도 아니었습니다.
전장은 다름 아닌 1863년 6월 30일 북군의 정찰 기병대를 이끄는 존 뷰퍼드에 의해 결정됩니다. 뷰퍼드는 게티스버그 바로 남쪽의 고지대가 갖는 전술적 중요성을 바로 알아채고 남군보다 북군이 먼저 이를 점령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 병력 수에 있어 절대적 열세였던 그는 서쪽 능선의 지형을 활용해 본대 병력이 증원될 때까지 남군의 공격을 지연시키고자 했습니다.7월 1일 오전의 전투에서 뷰퍼드는 히스 사단이 증원될 때까지 남군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냈습니다. 그런데 오전 소규모 전투에서 시작된 이 전투는 리 장군의 의도와 다르게 오후에 들어서는 대규모 전투로 확대됩니다.
결국 병력 수에 밀린 북군은 철수해야 했지만, 전술적 중요지점인 남쪽 고지대는 아직까지 그들의 수중에 있었습니다. 리 장군은 당시 철수하는 북군을 향해 남쪽 고지대 묘지 언덕을 점령하라는 명령서를 휘하의 이월 장군에게 보냈습니다.
* 당시 북군, 흑인도 보입니다
그러나 애매한 명령 내용 탓에 이월은 쉽게 묘지 언덕을 점령할 수 있는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맙니다. ‘가능하면 공격하라’는 명령이었던 것이죠.
절호의 기회를 놓친 이 시기를 틈타 북군은 병력을 점차 늘려갔고, 전술적 고지의 이점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이제 첫날의 즉흥적인 전투는 이튿날부터 치열한 결전으로 내닫습니다. 7월 2일 북군은 게티스버그 남쪽 고지대를 중심으로 '낚싯바늘' 같은 모양으로 방어태세를 갖췄습니다.
당시 리 장군 휘하의 가장 측근이었던 롱스트리트 장군은 리 장군에게 공격보다는 우회를 통한 퇴로 차단 방법을 권고했지만, 시간이 촉박했던 리 장군은 방어선의 왼쪽을 공격해 결정적인 승리로 이끄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북군 방어선 왼쪽 끝 지역은 공격에 불리한 최악의 지형으로 악마의 소굴이라고 불리는 바위산 지형이었습니다. 지형의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남군은 불굴의 의지로 정면으로 공격하면서 북군의 저항을 하나하나 깨부숴 나갔습니다.
하지만 끝내 남군의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북군의 고지 사수 의지와 탁월한 지휘관의 지도력 때문이었습니다.
* 리 장군과 수뇌부
특히 영화에서는 북군 좌측 끝 연대인 체임벌린 부대에 주목합니다. 이 부대의 퇴각은 퇴로 차단에 의한 섬멸로 이어져 바로 북군의 패배로 곧바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반복되는 남군의 끊임없는 공격 속에서도 체임벌린은 적시 적절한 지휘로 고지(리틀 라운드 탑)을 사수해야만 했습니다.특히 그는 부대가 실탄이 다 떨어져 철수해야 하는 극단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철수가 아닌 또 다른 선택을 합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착검! 돌격!
* 착검! 돌격!을 외치는 체임벌린 대령
즉, 공격하는 남군을 향해 총알이 없는 총에 착검을 해 역으로 돌격해서 뛰어 내려간 것입니다. 졸지에 착검해서 달려드는 북군을 보고 남군은 혼비백산하면서 항복하거나 쫓겨내려갑니다. 이와 같이 거의 승리할 뻔했던 리 장군의 공격은 북군의 불굴의 전투의지로 무산됐습니다. 마지막 날 7월 3일의 결정적인 전투는 북군 정중앙으로 돌진하면서 벌어집니다. 2일에 왼쪽 측면을 공격해 거의 승리할 뻔했던 리 장군은 계속 측면을 공격하기보다 적의 허(虛)를 찌를 수 있다는 의도에서 중앙을 공격합니다.
또 다시 롱스트리트 장군은 정면 공격이 아닌 우회를 통한 퇴로 차단을 건의하지만, 리 장군은 이를 묵살합니다. 보병의 돌격 이전에 충분하게 포병이 적 전열을 무너뜨려 준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던 겁니니다.하지만 북군에 비해 결정적으로 포병 탄약이 부족했던 남군은 북군의 전열을 충분히 포격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포탄을 북군 머리 위로 포탄을 날려 버립니다. 자욱한 포연 속에서 정확도 여부를 판단할 수 없었던 점도 문제였습니다.
결국 충분치 못했던 포병대의 포격 이후, 남군 병사들의 지옥의 행진이 시작됐습니다. 병사들의 행진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 중의 백미이며, 실제 게티스버그 전투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 북군 정찰기병대 대장 뷰포드, 사실 게티스버그 전투의 승리는 뷰포드에 큰 힘을 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지역을 전투장으로 단번에 찍었고 지리적인 잇점을 확보할 수 있었
기 때문이죠
*게티스버그 컬프스 힐에 있는 그의 동상과 그림
관객들은 병사들의 행진, 즉 피켓 사단의 돌격 장면을 바라보며 마치 생도들의 분열 모습을 보는 것처럼 감동합니다. 그러나 포병화력의 부족 탓인지, 그들의 두려움 없는 돌격에도 불구하고 북군의 맹렬한 포격과 사격으로 남군의 공격은 지리멸렬, 또다시 실패로 끝이 납니다.
이후 2년간 남북전쟁은 더 이어지지만 이 게티스버그 전투에서의 남군의 패배는 남군의 하락과 항복으로 연결됩니다. 남북전쟁의 분수령이 되는 역사적인 전투였습니다.
[ 남북전쟁의 분수령, 게티스버그 전투 ]
* 게티스버그 지도
미국의 남북전쟁(1861년~1865년)이 오늘날의 미국을 이룩하는데 중요한 전쟁이었다면 게티스버그 전투는 그 남북전쟁의 분수령을 이룬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그러니까 게티스버그 전투야말로 현재의 미국을 얘기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그 게티스버그 전투에 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게티스버그 전투는 남북전쟁이 거의 절반이 지나간 시점인 1863년 7월 1일부터 3일까지 3일 동안 워싱턴 북쪽(자동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펜실바니아주의 게티스버그라는 자그마한 도시 근처에서 벌어졌습니다.
당시 남군과 북군의 대치상황을 개략적으로 살펴봅니다. 남서부전선에서는 미시시피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는 빅스버그라는 강변 도시 안에 남군이 그랜트가 지휘하는 부군에 포위되어 항복 일보 직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군의 수도 와싱턴과 남군의 수도 리치먼드가 있는 동부전선에서는 포토맥군(북군)과 북버지니아군(남군)이 서로 치고 받으면서 혈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 리틀 라운드 탑의 전투, 착검을 한 북군의 맹렬한 돌격
이 때 남군을 지휘하고 있는 로버트 리 총사령관이 난국을 타개하고자 획기적인 전략을 수립하게 됩니다. 즉 그때까지 일방적으로 밀고 내려오는 북군을 버지니아에서 맞아 싸우기만 했지만 이번에는 병력을 이끌고 북부로 깊숙히 쳐들어가서 북군과 일대 자웅을 결해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배경에는 고전하고 있는 서부의 빅스버그에 대한 북군의 압박을 풀어보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북부 깊숙한 곳에서 북군을 쳐부숨으로써 그때까지 북쪽 정부와 남쪽 정부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저울질을 하던 유럽 열강들(영국,프랑스 등)을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의도도 깔려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궁극적으로 북군과의 화평 교섭을 이끌어내어 애초의 의도대로 연방으로부터 남부 연맹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리 장군이 이끄는 남군인 북버지니아 군대는 총 7만 5천명이었고, 미드 장군(전임 후커의 후임으로 새로이 임명됨)이 이끄는 북군이 포토맥 군은 총 8만 8천명이었습니다. 이들 양쪽 군대는 우여 곡절 끝에 워싱턴 북방의 조그만 도시 게티스버그에서 역사적인 결전을 벌이게 됩니다.
리 장군의 남군은 첫 날(7월 1일)에는 북군의 우익을 때려 보았고, 둘째 날(7월 2일)에는 북군의 좌익을 때려 보았지만 결정적인 승기를 잡을 수 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마지막 3일째 되는 날(7월 3일)에는 최후의 시도로 중앙 공격을 시도해 보았지만 이도 역시 대실패로 귀결되고 맙니다. 바로 이 세 번째 날에 벌어진 남군의 공격을 '피케트(중앙 공격을 맡은 남군의 장군) 돌격'이라고 하여 오늘날에도 남북전쟁의 사가(史家)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회자되고 있습니다.
아래는 3일 동안 벌어진 상세한 전투개황입니다.
7월1일
* 첫날 전투, 남군(이월과 힐 군단)은 게티스버그를 지나면서 아래로 밀고 내려오면서
세미터리 힐에서 멈춥니다. 밀어붙이는 김에 세미터리힐과 컬프스힐을 점령하였다면...역사는?
리의 선봉 부대와 최초로 만난 북군 부대는 새로이 포토맥군의 수장이 된 미드가 내보낸 기병정찰대였습니다. 6월 28일에 후커가 사임한 후 사령관이 된 미드는 남군의 북상 소식에 접하자 즉시 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뷰포드 휘하의 정찰대를 내보냈는데, 뷰포드의 정찰대가 7월 1일에 게티즈버그 인근에서 남군 부대 일부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뷰포드는 처음에 힐의 남군 부대와 2시간 동안 물러나지 않고 총격전을 벌였지만, 이웰이 이끄는 남군 후속 부대가 도착하면서 전투를 포기하고 물러났습니다. 뷰포드는 물러나면서 게티즈버그의 바로 남쪽에 있는 말발굽 모양의 고지인 세메터리 릿지(Cemetery Ridge)에 부대를 배치시켰습니다.
리는 이웰에게 세메터리 릿지를 점령할 것을 주문하였습니다. 미드가 남군의 위치를 파악한 이상 부대를 이끌고 진격해오고 있을 것이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미드의 본군과 전투가 벌어지기 전 인근의 고지를 장악하는 것이 필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리가 이웰에게 내린 명령문에는 ‘가능하면’ 고지를 점령하라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애매한 문구였습니다. 반드시 점령하라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웰은 세메터리 릿지에 포진한 북군의 수비가 너무 단단하다고 여기고 즉각적인 공격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남쪽에서 북군의 증원군이 도착하였고 세메터리 릿지의 북군 방어진은 오히려 강화되었습니다. 만약 이때 기회를 포착하는 데 천부적인 감각이 있는 잭슨(리 장군의 핵심 부하)이 살아 있었더라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잭슨은 바로 이전 전투인 첸슬러즈빌에서 전사한 뒤였습니다.
북군 병력이 세메터리 릿지로 속속 도착함에 따라 북군은 세메터리 릿지를 따라 길게 수비진을 구축하였습니다. 아울러 세메터리 릿지의 왼쪽인 컬프스 힐에도 방어선을 만들고 남군의 공격을 대비하였습니다. 게티즈버그 북쪽에 있던 리는 북군이 강력한 방어선을 만든 것을 보고 어찌해야 할지 고심하였습니다. 일단 리는 양면 공격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동시 공격이 아니고 적절히 시차를 두어 공격할 계획이었습니다. 롱스트리트가 이끄는 군단으로 세메터리 릿지의 북군 좌익을 먼저 치면 위기에 몰린 좌측을 구하기 위하여 미드가 컬프스힐에 있는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좌측을 보강할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본군으로 컬프스 힐을 공략하여 돌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롱스트리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고지에 자리를 잡은 적을 치는 대신 남군 전부를 남쪽으로 돌릴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남군 병력 전체가 북군 수도 워싱턴으로 향하게 되면 결국 미드는 어쩔 수 없이 남쪽으로 가는 남군을 막기 위하여 고지에서 내려올 것이라는 예상이었습니다. 어찌보면 합리적인 건의였지만 리는 롱스트리트의 건의를 묵살하였습니다.
일설에는 전투 전의 경미한 심근경색 증세로 인해 리의 정신이 다소 혼미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리가 자신감을 넘어 자만에 빠졌다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설명일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이전 프레데릭스버그와 챈슬러즈빌 전투에서 북군을 연파한데다가, 병사들은 여러 전투를 통하여 경험을 쌓았으며, 많은 보급 물자를 노획하였기 때문에 군의 사기가 충천한 상태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7월2일
* 전투 이틀째, 북쪽에서는 컬프스힐 점령을 둘러싸고 격전을...남쪽에서는 복숭아 과수원과 리틀 라운드 탑
(바위 등성이)을 사이에 두고 혈전을 벌였으나 남군의 쓰디쓴 패배가 이어지고...
리는 이와같이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데다 경험 많은 자신의 병사들이, 사기도 떨어지고 겨우겨우 훈련을 마친 북군 풋내기들과 싸워서 질 리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롱스트리트는 리의 거부를 의아하게 생각하였지만 어찌되었건 명령은 명령이었습니다. 롱스트리트는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북군 좌측에 대한 공격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시클즈의 북군 병력이 세메터리 릿지의 남쪽 끝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와 남군의 진격로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시클즈는 좌측 끝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지만, 단순히 지키기만 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원래의 방어선 보다 앞으로 나온 것입니다. 롱스트리트는 시클즈의 북군 병력 뒤에 있는 리틀 라운드 톱(Little Round Top)이라는 언덕을 눈여겨 보고 있었습니다.
원래는 시클즈가 방어선 끝에 있어야 했지만 시클즈가 명령을 어기고 부대를 함부로 이동시키는 바람에 남군에게 노출된 것입니다. 롱스트리트 생각으로는 만약 이를 점령할 수 있다면 북군의 진지를 완전히 우회함은 물론 야포를 올려 보내 노출된 북군 진지를 뒤에서 포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롱스트리트의 공격은 먼저 시클즈의 부대에 집중되었고 시클즈의 부대는 퇴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미드는 시클즈의 부대가 위치를 이탈해 있음을 알아채고 재빨리 방어선을 보강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시클즈의 부대가 한창 남군과 전투를 벌이는 동안, 리틀 라운드 톱에는 미시간 제16연대, 펜실베이니아 제83연대, 뉴욕 제44연대, 그리고 체임벌린의 메인 제20연대가 허겁지겁 올라가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이로써 기회가 되면 리틀 라운드 톱을 차지하려고 했던 롱스트리트의 계획은 무산됩니다.
북군의 이런 배치 현황을 살핀 롱스트리트는 일단 휘하의 후드 소장이 이끄는 남군 부대로 하여금 리틀 라운드 톱에 대한 전면 공격을 지시합니다. 그러나 수차례에 걸친 돌격이 모두 격퇴되었으나 리틀 라운드 톱을 지키는 병력이 부족하였던 탓에 북군은 저녁 무렵에 위기를 맞게됩니다.
참호선 왼쪽 끝을 지키고 있던 체임벌린이 이끄는 메인 20연대는 남군의 돌격을 막아내느라 싸울 만한 병력이 부족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탄약도 모두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이에 체임벌린은 남군이 돌격해오기 전에 연대 병력을 일렬로 배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착검!’을 명한 다음, 진격해 올라오는 남군에게 그대로 돌격을 명하였습니다.
* 체임벌레인 대령, 나중에 소장으로 진급하고 은퇴후 메인 대학 총장과
메인주 주지사를 지냅니다. 아래는 착검 돌격을 외치는 체임벌레인
그는 원래 메인 대학 교수였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대령 계급으로 참
전하게 됩니다. 남북전쟁의 참뜻을 이해하던 지성인이었습니다
이에 돌격해오고 올라오고 있던 남군 병력은 혼비백산하여 다수가 포로가 되거나 꽁지빠지게 아래로 달아났습니다. 물론 북군이 탄약이 떨어져 착검해서 달려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이런 상황은 연출되지 않았을 겁니다.
하여튼 많은 병력이 포로가 되고 남군의 돌격은 멈추었습니다. 리틀 라운드 톱의 전투는 다음날 5군단 소속 제3사단이 구원에 나서면서 북군의 승리로 마감되고 롱스트리트의 우회기동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와 더불어 컬프스 힐에 대한 남군 본대의 공격도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북군의 우측과 좌측 공격에 모두 실패한 리는 다음날 중앙 정면 공격을 결심합니다. 롱스트리트는 북군이 비록 좌측을 강화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약하니 북군의 좌측을 돌아 워싱턴 방면으로 진출, 지리적 잇점을 취해 결전을 벌이자고 재차 건의합니다. 그러나 리는 또 다시 롱스트리트의 건의를 묵살하고 다음날 북군 중앙에 대한 돌격을 지시합니다.
* 현재 리틀 라운드 탑 근처의 기념비, <메인주 20연대> 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7월 3일
* 운명의 전투 3일째, 북군이 진치고 있는 세미터리 릿지를 향하여 남군의 피켓 돌격,
그러나 처절한 살육이 벌이지고 남군의 완패, 역사는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그의 생각으로는 이틀간 계속된 전투로 북군 본대 역시 약화되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습니다. 마침 증원군 1만이 도착하면서 리는 증원 병력으로 북군의 중앙을 공격하여 돌파한 뒤, 돌파구로 예비 병력을 투입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7월 3일 오후 1시경 남군 포병대의 포격으로 전투가 개시됩니다. 이 포격은 2시간 동안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중앙에 포진하고 있는 북군 포병들은 잠시 반격을 하다말다 하고 포격을 그쳤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멀거니 남군의 포격을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리는 남군의 포격이 북군 포병대를 궤멸시켰다고 생각하고 피켓 소장의 병력 1만에다 힐 소장의 사단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15,000의 돌격대를 준비 시켰습니다.
오후 3시경, <피켓의 돌격(Pickett’s Charge)>이라고 알려진 그 유명한 돌격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돌격이 시작되는 지점으로부터 북군의 진지까지는 약 1km 정도의 거리였고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개활지였습니다. 돌격은 처음에 비교적 조용히 진행됐습니다. 처음 20분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남군이 개활지의 중간쯤에 도착하자 북군 포병대의 대포 80문이 일제히 포격을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 남군의 포격이 개시되자 곧 돌격이 이어질 것임을 눈치 챈 포병대장이 발포를 멈추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일제히 포문을 연 것입니다. 빗발치는 포격 속에 팔다리가 떨어나가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가는 아비규환 속에서도 피켓의 군단은 돌격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북군 진지로부터 약 200야드 지점에 이르자 언덕 위의 북군 보병들의 일제 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엄청난 피해에도 불구하고 돌격대의 병력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고 일부는 북군이 있던 방어선에 난입하여 쌍방간에 치열한 육박전이 벌어졌습니다. 만약 남군이 제2파를 보냈다면 돌파가 가능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남군에게는 병력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미드는 전날 저녁에 1만의 증원군까지 지원받은 후였습니다. 남아 있는 돌격대로는 북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남군은 올라온 길로 다시 후퇴를 시작하였고, 피켓의 돌격은 결국 7,5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 피켓 돌격 장면도
7월 4일
남군은 다음날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버지니아로의 긴 퇴각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전의 역대 북군 사령관들과 마찬가지로 우유부단한 미드는 리의 남군을 적극적으로 추격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공교롭게도 쏟아지는 비로 포토맥 강이 갑자기 불어나 남군은 강가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는데, 만약 미드가 전군을 몰아 추격하였더라면 포토맥 강변에 고립된 리의 군을 궤멸시켰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 피켓 돌격이 실패하고 퇴각하는 남군, 리가 고개를 숙이고 '나의 잘못'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미드 역시 소극적인 대처로 그럴 기회를 놓쳤습니다. 링컨은 미드 후임으로 그란트를 임명하였고 이후부터는 그 지긋지긋하던 북군의 우유부단은 사라집니다.
이제 남군은 게티즈버그에서 분명히 패하였고 이제는 더 이상 북진을 할 여력이 없어졌습니니다. 게티즈버그는 남북 전쟁 중에서 남군의 전력이 가장 최고점에 이르렀던 때였습니다.이 전투 이후 남군의 동력이 사라지고 남북전쟁은 이후 2년간 지속됩니다. 그러나 이 전투를 분수령으로 남군과 남부의 몰락이 시작됩니다.
승리의 쾌보가 워싱턴에 전달된 것은 다음날이었습니다. 승전보는 북쪽 지방 전체를 전율케 하였습니다. 특히 7월 4일 독립기념일에 전달된 승전 소식은 워싱턴을 더욱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습니다. 3일 후 접수된 또 하나의 승전보. 남서부 전선의 빅스버그에서 북군의 그랜트가 거둔 남군의 항복 소식은 이들의 열광을 광희로 만들었습니다.
기쁨에 넘친 링컨은 백악관 발코니에 나와 환호하는 군중들을 향해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인간은 누누가 평등하다는 우리의 주의주장을 꺾으려던 반란군 집단이 마침내 우리의 영웅적인 아들들에게 굴복하였습니다."
<전투 뒷이야기>
* 피켓 돌격
미국사의 클라이막스가 남북전쟁이라면, 그 남북전쟁의 클라이막스는 게티스버그 전투라고 할 수 있지요, 또한 게티스버그 전투의 클라이막스야 말로 '피케트 돌격'이라고 남북전쟁의 작가인 스튜어트가 말했습니다. 7월 3일 그날, 역사상 유례없는 일대 돌격이 펜실바니아주 평화로운 들판에서 이루어지면서 엄청난 도살이 펼쳐졌습니다.
들판 서쪽 숲속으로부터 남군 주력부대 1만 5천명이 총검을 내밀면서 대오를 갖추고 푸른 사단기와 남부 연맹기를 중심으로 수많은 군기를 휘말리면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내 생애를 통해 내가 본 가장 아름답고 가장 장엄한 광경이었다" 이는 전투가 끝난 후 어느 북군 장교가 남긴 말이었습니다.
이 벌판에서 일대 살육전이 벌어졌습니다. 최초 남군 포격에 의해 제압되었다고 여겨졌던 북군의 포대가 시퍼렇게 살아 있었고, 이 북군의 포 사격에 의해 벌판을 가로 질러오는 남군을 갈기갈기 찢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맹렬한 북군의 포 사격에도 불구하고 남군은 꾸역꾸역 벌판을 가로질러 전진을 계속했습니다.
포격을 가까스로 피해 북군 진영으로 가까이 접근한 기다리고 있던 북군들의 총알 밥이 되거나 총검으로 살육되기 시작하였던 겁니다. 남군의 처절한 패배, 30분간 잠깐 사이에 일어난 완패였습니다. 1만 5천명의 남군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패하고 돌아오는 일부 부하들에게 리 장군은 "걱정 말게, 모두가 내 잘못이네, 패전한 것은 나야, 남은 일을 해나갈 수 있게 나를 좀 도와주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리 장군다운 말이었겠지요.
* 북군의 반격
* 남군의 패배 원인
그러면 게티스버그 전투의 남군의 패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리 장군이 너무 자신만만해서 세 번째 날, 무모한 중앙돌파를 시도했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입니다. 사실 그동안 리 장군이 이끄는 북버지니아군은 북군과 싸워서 거의 진적이 없었습니다. 상승군에 대한 굳은 믿음 때문이었을 겁니다.
또 다른 가설은 리 장군이 가장 믿고 있는 롱스트리트 장군의 소극적 자세에서 비롯되었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실제 롱스트리트는 이번 전투를 탐탁치 않게 여겨 직속 상관인 리 장군에게 게티스버그에서의 전투를 피하고 워싱턴 방향으로 군대를 돌려 좋은 지형을 확보하여 북군과 일전을 벌이자고 몇 번이나 건의를 했으나 리 장군은 거부했습니다.
* 전투가 끝난 후
한편으로는 3일째 피케트 돌격 직전에 남군 포대가 최후의 한발까지 퍼부은 포격이 정밀하지 못해 북군 포대를 잠재우지 못한 점도 패인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나중에 알려졌지만 남군의 포탄들은 대부분 북군의 진지 뒤편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리가 간과한 것은 북군의 전력이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점이었습니다. 허구 헌날 어웨이 게임(버지니아에서 벌어진 전투를 말함)에서 깨지던 북군도 이제 홈 게임에서만은 질 수 없다는 단단한 각오로 나섰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게티스버그 전투장에서의 북군의 전투 의지는 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 남군의 로버트 리 장군
인격자이자 불세출의 명장, 미국에서는 아직도 군신(軍神)으로까지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링컨은 리에게 북군 총사령관직을 제의합니다. 그러나 리는 자기는 고향(남부측 버지니아) 을 향하여 총뿌리를 겨눌 수 없다고 남군으로 향합니다. 그래서 남부군의 총사령관을 맡게되고... 차라리 그가 없었더라면 남북전쟁은 일찍 끝났을(북군의 승리)거라는 얘기도 전해집니다.
현재 워싱턴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 자리는 전쟁 전에는 바로 그의 농장(버지니아)이었습니다.
** 리의 오른팔 왼팔이었던 스톤월 잭슨과 롱스트리트
* 롱스트리트 장군
들소같은 완강함과 지칠줄 모르는 강인함을 지닌 장군, 그러나 게티스버그 전투에서는
리 장군과 의견이 안맞아 마지못해 전투에 임하는 바람에 남군의 패배에 일조를 했다는
구설수에 오릅니다.
게티스버그 전투에서는 북군이 고지 쪽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롱스트리트로서는 정말 피하고 싶은 전투였을 겁니다. 그래서 마지못해 전투에 임하는 롱스트리트를 과감히 다른 장군으로 교체했어야 했다는 일부 史家들의 의견도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롱스트리트는 게티스버그 전투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리를 비난하여 구설수에 올랐지만 리는 롱스트리트에 대하여 한마디도 안했다고 합니다. 단지 스톤월 잭슨(돌담 잭슨)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만 토로했다고 합니다.
* 스톤월(돌담) 잭슨 장군
게티스버그 전투 직전 첸슬러스빌 전투에서 아군의 오인 사격으로 전사합니다. 리 장군의 탁월했던 오른팔이었던 그는 신출귀몰하는 용병술로 싸우는 족족 북군에 패배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북군이 상당히 애먹었을 겁니다. 본명은 토머스 잭슨인데 전투시에 돌담처럼 완강하다고 해서 스톤뤌 잭슨이라고 불리웠습니다.
리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어느 화사한 봄날 화이트 교수(당시 리는 버지니아 워싱턴 대학 총장이었습니다)와 말을 타고 평화로운 버지니아 들판을 산책하면서 문득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잭슨이 살아 있었으면 게티스버그에서는 내가 틀림없이 이겼을 텐데 말이야...." 말끝을 흐리는 노장의 눈에는 눈물이 비쳤다고 합니다. '잭슨이 살아 있었으면'은 '롱스트리트가 아니었으면'이라는 의미였을 겁니다. 그는 부하들의 허물을 이런 말로밖에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
우리가 민주주의를 얘기할 때 항상 입에 올리는 말,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라는 유명한 구절은 그해(1863년) 11월 19일, 링컨이 게티스버그를 방문하고 전몰자들을 위한 연설에서 언급한 말입니다.
당일 날 링컨의 연설은 불과 2~3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연설을 하던 링컨은 감정에 복 받혀 눈물까지 글썽거렸습니다. 어떤 사진사는 미처 준비하기도 전에 연설이 끝나버렸다고 마구 상소리를 해 대었습니다. 청중은 최면이라도 걸린 듯 망연자실해져 버렸습니다. 박수도 길지 않았습니다. “망쳐 버렸군!” 연단을 내려오면서 링컨이 한 말입니다.
‘런던 타임즈’는 ‘한심한 링컨 대통령의 한심한 농담으로 게티스버그 봉헌식은 한심한 꼴이 되었다’라고 혹평했습니다. ‘시카고 타임즈’조차도 ‘지적(知的)인 외국인들에게 우리 미합중국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무미건조하고 답답하고 싱거운 연설을 지껄인 통에 우리 모두가 심한 수치심을 느껴야 했다’라고 꼬집었습니다. 오직 ‘시카고 트리뷴’만이 ‘게티스버그 연설을 영원히 간직할 명문 중의 명문’이라고 격찬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링컨의 이 연설은 영문 사용권에서 전무후무한 명연설의 하나가 되어갔습니다. 아래는 바로 그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87년 전, 우리 조상들은 자유가 실현됨과 동시에 모든 인간은 천부적으로 평등하다는 원리가 충실하게 지켜지는 새로운 나라를 이 대륙에서 탄생시켰습니다.우리는 지금 대대적으로 내전 상태에 휩싸인 채, 우리 조상들이 그토록 자유가 실현되길 바라면서, 그토록 소중한 원리가 충실히 지켜지길 원했던 국가가 얼마나 오랫동안 존립할 수 있을지 우려되는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내전으로 인해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구하려다가 자신의 목숨마저 희생당한 분들에게 마지막 안식처로서 그 싸움터의 일부를 바치고자 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고도 적절한 조치로서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지만 한층 더 엄밀한 의미에서 살펴보면, 이 땅을 바치고 봉헌하고 성지로 만드는 존재는 결코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끼어들 여지도 전혀 없이, 전사자든 생존자든 여기서 싸웠던 용감한 분들이 이미 이곳을 성스러운 곳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여기서 하는 말에 대해 그다지 주목하지도 않을뿐더러 오랫동안 기억하지도 못하겠지만, 그분들이 여기서 이루어 냈던 업적만큼은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이제 우리는 살아남은 자로서 이곳에서 싸웠던 그분들이 그토록 애타게 이루고자 염원했던 미완의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마땅히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명예롭게 죽어 간 분들이 마지막 신명을 다해 이루고자 했던 대의에 더욱더 헌신할 수 있는 커다란 힘을 그분들로부터 얻고, 그분들의 죽음을 결코 헛되이 하지 않겠다고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함으로써, 우리는 이제 우리 앞에 미완으로 남아 있는 위대한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헌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처럼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일 때, 하느님의 가호 속에서 우리나라는 새롭게 보장된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우리나라는 국민의 정부이면서, 국민에 의한 정부이면서, 국민을 위한 정부1)로서 결코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 게티스버그 전사자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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