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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월 기록에 없음
5. 계사년 5월 (1593년 5월)
242
5월 초1일 (갑인) 맑다. [양력 5월 30일]
243
새벽에 망궐례를 하였다.
244
5월 초2일 (을묘) 맑다. [양력 5월 31일]
245
선전관 이춘영(李春榮)이 임금의 분부(宥旨)를 가지고 왔다.
246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섬멸하라"
247
는 것이었다.
248
이 날 보성군수(김득광) ∙ 발포만호(황정록) 두 장수가 와서 모이고, 나머지 여러 장수들은 정한 기일을 물렸기 때문에 모이지 못하였다.
249
5월 초3일 (병진) 맑다. [양력 6월 1일]
250
우수사(이억기)가 수군을 거느리고 왔는데, 수군들이 많이 뒤떨어져 한탄스럽다.
251
선전관 이춘영이 돌아가고, 이순일(李純一)도 왔다.
252
5월 초4일 (정사) 맑다. [양력 6월 2일]
253
오늘이 곧 어머니 생신날이건만 이런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 한이 되겠다.
254
우수사 및 군관들과 함께 진해루에서 활을 쏘았다. 순천부사도 모여서 약속하였다.
255
5월 초5일 (무오) 맑다. [양력 6월 3일]
256
선전관 이순일(李純一)이 영남에서 돌아왔다. 아침밥을 대접하였다.
257
명나라에서 내게 은청금자광록대부(명나라의 직품)를 주었다고 한다. 아마 잘못 들은 것이리라.
258
저녁나절에 우수사 ∙ 순천 ∙ 광양 ∙ 낙안의 영감들과 함께 같이 앉아 술을 마시며 이야기했다.
259
또 군관들을 편을 갈라 활을 쏘게 하였다.
260
5월 초6일 (기미) (흐린 뒤에 비가 내렸다.) [양력 6월 4일]
261
아침에 친척 신정(愼定)과 조카 봉이 게바우개(蟹浦)에서 왔다.
262
저녁나절에 퍼붓 듯 내리는 비가 온 종일 그치지 않았다. 내와 개울물이 넘쳐 흘러 농민들에게 희망을 주니 참으로 다행이다.
263
저녁 내내 친척 신씨와 같이 이야기했다.
264
5월 초7일 (경신)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6월 5일]
265
우수사(이억기)와 함께 아침밥을 먹고 진해루로 옮겨 앉아 공무를 돈 뒤에 배를 타고 떠나려는데, 발포의 도망간 수군을 처형했다.
266
순천의 이방(吏房)에게는 입대에 관한 일을 태만히 한 죄를 처형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267
미조항에 이르자, 샛바람이 세게 불어 파도가 산같아 간신히 이르러 대고 잤다.
268
5월 초8일 (신유)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6월 6일]
269
새벽에 출항하여 사량 바다가운데에 이르니, 만호(이여염)가 나오므로 우수사가 있는 곳을 물었더니, 지금 창신도(남해군 창선도)에 있다고 하며, 군사들이 모이지 않아 미쳐 배를 타지 못했다고 했다.
270
곧바로 당포에 이르니,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보고, 수사(원균)의 망녕된 짓이 많음을 자세히 말했다.
271
잤다.
272
5월 초9일 (임술) 흐리다. [양력 6월 7일]
273
아침에 출항하여 걸망포(巨乙望浦)에 이르니, 바람이 불순했다.
274
수사(이억기) ∙ 가리포첨사(구사직)과 한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하며 의논했다.
275
저녁에 수사 원균(元均)이 배 두 척을 거느리고 왔다.
276
5월 초10일 (계해)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6월 8일]
277
아침에 출항하여 견내량에 이르러 저녁나절에 작은 마루위로 올라가 앉았다.
278
흥양(고흥)의 군사를 점검했다. 기약한 날짜를 어긴 여러 장수들의 죄를 처벌하였다.
279
우수사 ∙ 가리포첨사도 모이어 같이 이야기했다.
280
조금 뒤에 선전관 고세충(高世忠)이 임금의 분부(宥旨)를 받들고 와서 전하였는데 보니,
281
"부산으로 후퇴하여 돌아가는 왜적을 무찌르라."
282
는 것이었다. 부찰사의 군관 민종의(閔宗義)가 공문을 가지고 왔다.
283
저녁에 영남우후 이의득(李義得) ∙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봤다. 앉아서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져 돌아갔다.
284
봉사 윤제현(尹齊賢)이 본영에 이르렀다는 편지가 왔다. 곧 답장을 보냈다. 그것은 본영에서 좀 기다리라는 내용이다.
285
거제도 견내량 진중에는 전라우대장(全羅左右大將) ∙ 경상중위장(慶尙中衛將) 김승룡(金勝龍) ∙ 경상우대장 전위장(慶尙右大將 前衛將) 기효근(奇孝謹) ∙ 좌중위장(左中衛將) 권준(權俊) ∙ 우중위장(右中衛將) 구사직(具思稷) ∙ 좌좌부장(左左部將) 신호(申浩) ∙ 전부장(前部將) 이순신(李純信) ∙ 중부장(中部將) 어영담(魚泳潭) ∙ 척후장(斥候將) 김완(金浣) ∙ 김인영(金仁英) ∙ 유군장(遊軍將) 황정록(黃廷祿) ∙ 우부장(右部將) 김득광(金得光) ∙ 후부장(後部將) 가안책(賈安策) ∙ 대장(代將) 송여종(宋汝悰) ∙ 참퇴장(斬退將) 이응화(李應華)
286
5월 11일 (갑자) 맑다. [양력 6월 9일]
287
선전관이 돌아갔다.
288
저녁나절에 우수사의 진중으로 갔더니, 이홍명(李弘明)과 가리포첨사도 와었다. 바둑을 두기도 했다. 순천부사가 또 오고, 광양현감이 이어서 왔다. 가리포첨사가 술과 고기를 내었다.
289
조금 있다가 영등포(거제시 장목면 구영리)로 적정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보고하여 말하기를,
290
"가덕도 앞바다에 적선이 무려 이백 여 척이나 머물면서 드나들며 웅천에는 전일과 같다."
291
고 했다. 선전관이 돌아갈 때임금의 분부를 집행하는데 관해서 도원수 ∙ 체찰사에게 삼도의 공문을 한 서류로 만들어, 그걸 가지고 가는 사람도 함께 떠나 보냈다.
292
이 날 남해현감도 와서 봤다.
293
5월 12일 (을축) 맑다. [양력 6월 10일]
294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그 편에 순찰사의 공문과 시랑 송응창(宋應昌)이 패문을 가지고 왔다. 사복시(司僕寺)의 말 다섯 필을 중국에 보낼려고 올려 보내라는 공문도 왔다. 그래서 병방 진무를 띄워 보냈다.
295
저녁나절에 영남에서 온 선전관 성문개(成文漑)가 와서 봤다.
296
피란 중에 계신 임금의 사정을 자세히 전하였다. 통곡 통곡함을 가누지 못했다.
297
새로 만든 정철총통(正鐵銃筒)을 비변사로 보내면서 흑각궁 ∙ 과녁 ∙ 화살을 넉넉하게 보냈다. 앞의 성이라는 사람(성문개)은 순변사 이일(李鎰)의 사위이라고 한 때문이다.
298
저녁에 이영남(李英男) ∙ 윤동구(尹東耈)가 와서 봤다. 고성현령 조응도(趙應道)도 와서 봤다.
299
이 날 새벽에 좌 ∙ 우도 체탐인을 정하여 영등포 등지로 보냈다.
300
5월 13일 (병인) 맑다. [양력 6월 11일]
301
식사를 하고나서 작은 산봉우리에 과녁을 쳐 메달아 놓고, 순천부사 ∙ 광양현감 ∙ 방답첨사 ∙ 사도첨사 및 우후 ∙ 발포만호가 편을 갈라 활을 쏘아 자웅을 겨루다가 날이 저물어 배로 내려왔다.
302
밤에 소문에 영남우수사에게 선전관 도언량(都彦良)이 와 있다고 한다.
303
이 날 저녁 달빛은 배에 가득 차고, 홀로 앉아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니 온갗 근심이 가슴을 치민다.
304
자려해도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닭이 울때에야 풋잠이 들었다.
305
5월 14일 (정묘) 맑다. [양력 6월 12일]
306
선전관 박진종(朴振宗)이 왔다.
307
같은 시각에 선전관 영산령(寧山令) 예윤(禮胤)이 또 임금의 분부(宥旨)를 받들고 왔다. 그들에게서 명나라 군사들의 하는 짓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308
나는 우수사(이억기)의 배에 옮겨 타고 선전관과 이야기하며, 술을 두어 순배 돌리자, 영남우수사 원균(元均)이 나타나서 술을 함부로 마시고 못할 말이 없으니, 배안의 모든 장병들이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럴듯이 속이는 것을 말할 수 없다. 영산 영감이 취하여 엎어져 인사불성이 되었으니 우습다.
309
이 날 저녁에 두 선전관이 돌아갔다.
310
5월 15일 (무진) 맑다. [양력 6월 13일]
311
아침에 낙안군수(신호)가 와서 봤다. 조금 뒤에 윤동구(尹東耈)가 그의 대장이 장계한 초본을 가지고 와서 보이는데, 그럴 듯이 속이는 것이라 말할 수 없다.
312
순천부사 ∙ 광양현감이 와서 봤다.
313
늦은 아침에 조카 해와 아들 울(蔚)이 봉사 윤제현(尹濟賢)과 함께 왔다.
314
마침 정오에 활쏘는 곳에 이르러 순천 ∙ 광양 ∙ 사도 ∙ 방답 등과 자웅을 겨루는데, 나도 쏘았다.
315
저녁에 배로 돌아와 봉사 윤제현(尹濟賢)과 자세히 이야기했다.
316
5월 16일 (기사) 맑다. [양력 6월 14일]
317
아침에 적량만호 고여우(高汝友) ∙ 감목관 이효가(李孝可) ∙ 이응화(李應華) ∙ 강응표(姜應彪) 등이 와서 봤다.
318
각 고을에 공문과 솟장(所志)을 써 보냈다.
319
조카 해와 아들 회가 돌아갔다.
320
몸이 몹시 불편하여 베개를 베고 신음하다가, 명나라 장수가 중도에서 늦추며, 머무르는 것은 무슨 교묘한 술책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으니, 나라를 위해 걱정이 많은 중에 일일이 이러하니, 더욱 더 한심스러워 눈물이 쏟아졌다.
321
점심을 먹을 때 윤동구(尹東耈)에게서 서울 관동(館洞: 서울)의 숙모가 양주의 천천(楊州 泉川: 양주군 회천읍 회천)으로 피난갔다가 거기에서 작고하셨다는 말을 듣고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그러나 언제부터 세상사가 이토록 가혹한가! 장사 지내는 일은 누가 맡아서 지내는지! 대진(大進)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으니, 더욱 애통하다.
322
5월 17일 (경오) 맑다. [양력 6월 15일]
323
새벽에 바람이 세게 불었다.
324
아침에 순천부사 ∙ 광양현감 ∙ 보성군수 ∙ 발포만호 및 이응화(李應華)가 와서 봤다.
325
변존서(卞存緖)가 병으로 돌아갔다.
326
영남수사(원균)가 군관을 보내어 진양의 보고서를 가지고 왔다.
327
보았더니,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지금 충주에 있다 하고, 적도들은 사방으로 흩으져 분탕질하며 약탈을 일삼고 있다고 한다.
328
통분하고도 통분하다.
329
종일 바람이 세게 부니, 마음이 어지럽다.
330
고성현령이 군관을 보내어 문안하고, 또 추로수(秋露水: 약술이름)와 소고기 요리한 꼬치와 꿀통을 가져 왔다고 한다.
331
복중(服中)이라 받자니 미안하고, 그렇다해서 정으로 보낸 것을 의리상 돌려 보낼 수도 없으므로 군관들에게 주었다.
332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일찍 선실로 들어갔다.
333
5월 18일 (신미) 맑다. [양력 6월 16일]
334
이른 아침에 몸이 무척 불편하여 온백원(위장약) 네 알을 먹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우수사와 가리포첨사가 와서 봤다. 조금 있다가 시원하게 설사가 나오니 좀 편안해진다.
335
종 목년(木年)이 게바우개(蟹浦: 아산시 염치읍 해암리 해포)에서 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한다. 곧 답장을 써 돌려 보내며 미역 다섯 동을 함께 보냈다.
336
이 날 접반사에게 적세에 관한 공문을 삼도에 한 서류로 만들어 보냈다.
337
전주부윤(권율)이 공문을 보냈는데, 지금 겸순찰사 절제사를 맡게 되었다고 하면서 도장은 찍지 않았으니, 까닭을 모르겠다.
338
방답첨사가 와서 봤다.
339
대금산과 영등포 등지의 척후병이 돌어와 보고하기를, 왜적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리 큰 음흉한 꾀는 없다고 했다.
340
새로 협선 두 척을 만드는데 못이 없다고 한다.
341
5월 19일 (임신) 맑다. [양력 6월 17일]
342
아침밥을 봉사 윤제현(尹濟賢)과 같이 먹는데, 여러 장수들이 몹시 권하고, 몸이 불편해도 억지로 입맛을 내게 하니 더욱 더 비통하다.
343
순찰사의 공문에는 명나라 장수(劉員外)의 패문에 의하여 부산바다 어귀는 벌써 끊어 막았다고 한다.
344
곧 공문을 받았다는 확인서를 써 보내고 또 공무에 관한 보고를 써서 보성 사람이 지니고 가게 했다.
345
순천부사가 소고기 등 일곱 가지를 보내 왔다.
346
방답첨사 및 이홍명(李弘明)이 와서 봤다. 기숙흠(奇叔欽)도 와서 봤다.
347
영등포 척후병이 와서 다른 변고는 없다고 했다.
348
5월 20일 (계유) 맑다. [양력 6월 18일]
349
새벽에 대금산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는데 역시 영등포의 척후병과 같았다.
350
저녁나절에 순천부사가 오고 소비포권관도 왔다.
351
오후에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여 말하기를, 왜선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본영군관 등에게 왜놈의 물건을 실어올 일에 관한 편지를 썼다. 흥양 사람이 지니고 가게 일러서 보냈다.
352
5월 21일 (갑술) [양력 6월 19일]
353
새벽에 출항하여 거제 유자도(통영시 한산면 유자도. 한산도와 서좌도 사이) 가운데 바다에 이르니, 대금산 척후병이 와서 왜적의 출몰이 여전하다고 한다.
354
우수사와 같이 저녁내내 이야기했다. 이홍명(李弘明)도 왔다.
355
오후 두시쯤에 비가 왔다. 농민이 바라던 것을 조금이나마 생기가 돌게 했다.
356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봤다.
357
수사 원균(元均)이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보내어 대군을 동요케 했다.
358
군중에서 조차 속임이 이러하니, 그 흉측함을 말할 수 없다.
359
마침내 밤에 미친듯이 비바람이 일었다. 먼동틀 무렵 거제도 선창(船滄)에 배를 대니 곧 22일이다.
360
5월 22일 (을해) 비가 내렸다. [양력 6월 20일]
361
사람들이 바라던 차에 아주 흡족하게 왔다.
362
늦은 아침에 나대용(羅大用)이 본영에서 명나라 시랑(송응창)의 패문을 가지고 왔는데, 파견원과 본도 도사행(낮은 직책으로 높은 품계를 맡은 것) 상호군 선전관 한 사람이 먼저 기별을 가지고 왔다. 그건 송시랑이 파견한 사람이 전선을 시찰하러 온다고 했다. 곧 우후로 하여금 영접하도록 내보내고, 오후에 칠천량으로 옮겨 대었다.
363
나대용(羅大用)으로 하여금 문안하는 일로 내어 보냈다.
364
저녁에 방답이 와서 명나라 사람 접대할 일을 말했다.
365
영남우수사의 군관 김준계가 와서 저희 장수의 뜻을 전했다.
366
비가 종일 그치지 않는다.
367
흥양군관 이호(李琥)가 죽었다고 들었다.
368
5월 23일 (병자) 새벽에 흐리고 비는 오지 않더니, 저 녁나절에 비가 오락가락하다. [양력 6월 21일]
369
우수사가 오고 이홍명(李弘明)도 왔다. 영남우병사의 군관이 와서 적의 소식을 전했다.
370
본도(전라도)의 병마사(선거이)의 편지 및 공문이 왔는데,
371
"창원에 있는 적을 치고 싶으나, 적의 형세가 거세기 때문에 경솔히 나아갈 수 없다."
372
고 한다. 저녁에 아들 회가 와서,
373
"명나라 관원이 영문에 와서 배를 타고 떠나온다"
374
고 전했다.
375
어두울 무렵 영남수사(원균)도 명나라 관원을 접대하는 일로 와서 의논하였다.
376
5월 24일 (정축) 비가 오락가락했다. [양력 6월 22일]
377
아침에 거제 앞 칠천량 바다 어귀로 진을 옮겼다.
378
나대용(羅大用)이 명나라 관원을 사량 뒷바다에서 발견하고 먼저 와서 전하되,
379
"명나라 관원과 통역 표헌(表憲)과 선전관 목광흠(睦光欽)이 함께 온다."
380
고 했다.
381
오후 두 시쯤에 명나라 관원 양보(楊甫)가 진문에 이르므로, 우별도위 이설(李渫)을 배웅하고 마중하게 하여 배로 안내하여 오니, 매우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382
우리 배로 청하여 오르게 하고, 황제의 은혜를 재삼 사례하며 마주 앉기를 청하니 굳이 사양하였다.
383
그는 앉지 않고 선 채로 한 시간이 지나도록 이야기하며 수군이 장하다고 매우 칭찬하였다.
384
예물 명단을 올리니, 처음에는 굳이 사양하는 듯하더니, 마침내 받고는 매우 기뻐 하며 두번 세번 감사하다고 했다.
385
선전관이 표신을 평상에 놓은 뒤에 조용히 이야기했다.
386
아들 회가 밤에 본영으로 돌아갔다.
387
5월 25일 (무인) 맑다. [양력 6월 23일]
388
명나라 관원과 선전관은 숙취로 술이 깨지 않았다.
389
아침에 통역 표헌(表憲)을 다시 청하여 맞아들여 명나라 장수가 하는 일을 물었더니니,
390
"명나라 장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왜적을 쫓아 보내려고만 할 따름이다."
391
고만 하였다. 또 말하기를,
392
"송시랑이 수군이 허실을 알고자 하여, 자기가 데리고 온 군중탐정(夜不守) 양보(楊甫)를 보낸 것인데, 수군의 위세가 이렇게도 장하니 기쁘기 한이 없다"
393
고 했다. 늦게야 명나라 관원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증명서를 준것도 있다.
394
오정에 거제현 앞 유자도 앞 바다가운데에 진을 옮기고서 우수사(이억기)와 작전을 토의하였다.
395
광양현감이 오고, 최천보(崔天寶) ∙ 이홍명(李弘明)이 와서 바둑을 두고 헤어졌다.
396
저녁에 조붕(趙鵬)이 와서 보고 이야기하고 보냈다.
397
초저녁이 지나서 영남에서 오는 명나라 사람 두 명과 우도관찰사의 영리(營吏) 한 사람과, 접반사 군관 한 사람이 진문(陣門)에 이르렀으나, 밤이 깊어 들이지 아니 하였다.
398
5월 26일 (기묘) 비가 내렸다. [양력 6월 24일]
399
아침에 명나라 사람을 만나 보니, 절강성의 포수 왕경득(王敬得) 인데, 문자는 좀 안다. 한참 동안이나 이야기했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답답했다.
400
순천부사가 집에다 노루고기를 차려 놓았다. 광양현감도 왔다. 우수사 영감이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가리포는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401
비가 저녁내 그치지 않고 밤새도록 퍼부었다.
402
밤 열 시쯤부터 바람이 세게 불어 각 배가 가만히 있지 못했다. 처음에는 우수사의 배와 맞부딪치는 것을 겨우 구해 놓았더니, 또 발포만호(황정록)가 탄 배와 맞부딪쳐 거의 부서질 뻔하다가 겨우 면하고, 내 군관 송한련(宋漢連)이 탄 협선은 발포 배에 부딪쳐 많이 다쳤다고 한다.
403
늦은 아침에 영남우수사(원균)가 와서 보고는 돌아갔다.
404
순변사 이빈(李濱)이 공문을 보냈는데, 허튼소리가 많으니 가소롭다.
405
5월 27일 (경진) [양력 6월 25일]
406
비바람에 부딪친 까닭에 진을 유자도(柚子島)로 옮겼다.
407
협선 세 척이 간 곳이 없더니, 저녁나절이 되자 돌아왔다.
408
순천부사와 광양현감이 와서 노루고기를 차려 놓았다.
409
영남병마사(최경회)의 답장이 오고, 그걸 보니 수사 원균(元均)은 경략 송응창(宋應昌)이 보낸 화전을 혼자서 쓰려고 꾀를 내었다. 우습고도 우습다.
410
전라병마사(선거이)의 편지도 왔는데,
411
"창원의 적들은 오늘 토벌하려 했다가 비가 오고 개이지 않아 아직 나가 치지 못했다"
412
고 했다.
413
5월 28일 (신사)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6월 26일]
414
순천부사와 이홍명(李弘明)이 와서 이야기했다.
415
광양사람이 장계를 가지고 왔다.
416
독운어사 임발영(任發英)을 위에서도 몹시 좋지 않게 여겨 아울러 조사하여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수군으로 한 가족을 징발하는 일에 대해서도 전에 내린 명령대로 하라고 했다.
417
비변사에서 공문이 왔다. 광양현감은 그대로 유임시킨다는 것이었다.
418
승정원의 관보를 가져왔기에 이를 대강 보았더니 얼마나 통분한지 알수가 없다.
419
의병 용호장(龍虎將) 성응지(成應祉)에게 그 배를 바꿔 달 수 있도록 명령서를 써서 본영으로 내 보냈다.
420
5월 29일 (임오) 비가 내렸다. [양력 6월 26일]
421
방답첨사와 영등포만호 우치적(禹致績)이 와서 봤다. 공문을 만들어 접반사(김수) ∙ 도원수(김명원) ∙ 순변사(이빈) ∙ 순찰사(권율) ∙ 병마사(선거이) ∙ 방어사(이복남) 등에게 보냈다.
422
밤 열 시에 변유헌(卞有憲)과 이수(李銖) 등이 왔다.
423
5월 30일 (계미) 종일 비가 내렸다. 오후 네 시쯤에 잠깐 개다가 도로 비가 왔다. [양력 6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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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봉사 윤제현(尹濟賢) ∙ 변유헌(卞有憲)에게 왜적에 관한 일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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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명(李弘明)이 와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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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원균(元均)은 경략 송응창(宋應昌)이 보낸 화전을 혼자만 쓰려고 꾀하다가 병사의 공문에 나누어 보내라는고 하니까, 그는 공문도 내려고 하지 않고 무리한 말만 자꾸 지껄였다고 한다.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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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고관이 보낸 화공(火攻)무기인 화전 천오백서른 개를 나누어 보내지 않고 독차지하여 쓰려고 한다니 그 꾀부리는 꼴을 말로 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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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조붕(趙鵬)이 와서 이야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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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현령 기효근(奇孝謹)의 배가 내 배 곁에 대이었는데, 그 배 안에 어린 계집을 태우고 남이 알까봐 두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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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소롭다. 이 나라가 위급한 때를 맞았는데도 미인을 태우고 놀아나니 그 마음 씀씀이야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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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대장 원균(元均) 수사부터 역시 그러하니 어찌하랴! 봉사 윤제현(尹濟賢)이 일이 있어 본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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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량미 열넉 섬을 실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