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밝게 더 기쁘게
어제 독서에서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제우스, 헤르메스로 신격화 해서 제물을 바치려고 한 사람들에게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옷을 찢으며 마다하는 모습이 전해졌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갑작스럽게 상황이 달라져서 바오로가 돌을 맞고 버려지는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온 유다인들이 군중을 설득해서 비방하고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이 유다인들은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쫓아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적개심과 분노가 식지 않아서 이제 멀리 리스트라까지 쫓아와서 바오로에게 돌을 던지게끔 조작했다는 것입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했다는 것도 있겠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유대교에 대한 열성으로 했던 겁니다. 얼마나 미워했으면 170km, 45km나 떨어진 곳에서 리스트라까지 달려갔을까...
예전에 바오로가 사울이었을 때에 교회를 박해했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제대로 된 신앙이 아닌 잘못된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 이렇게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자기 자신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는 돌에 맞아 죽을 정도로 세게 얻어맞습니다. 그래서 정말 죽은 줄 알고 도시 밖으로 내다 버렸지요. 유대인들은 성안에서 돌로 치는 것은 또 부정하게 여겼기 때문에 성밖에서 돌을 던져야 하는데 성안에서 사람을 죽였으니, 바오로에 대한 분노가 엄청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안에서 돌로 죽이면 부정하고 성밖에서 돌로 죽이면 정하는 것도 정말 웃기지요.
암튼 이렇게 죽은 것처럼 내팽개쳐진 바오로를 제자들은 장례를 치르려고 둘러싸는데 바오로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도시 안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무언가 마무리지어야 하는 일이 있는 것처럼 자기를 죽인 사람들이 있는 그 리스트라 성으로 다시 들어가는 겁니다.
예전에 제가 주말의 명화에서 드라큘라라는 흑백영화를 보는데 정말 무서웠습니다. 드라큘라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드라큘라를 죽이려고 쇠말뚝과 망치를 들고 드라큘라를 쫓는 그 불굴의 의지, 그 투지가 엄청나게 무서웠던 겁니다. 의지가 없는 사람은 바로 도망갔을 겁니다. 자기를 죽인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거길 다시 들어갑니까... 그런데 의지가 있는 사람은 무섭습니다. 바오로는 한번 죽다 살아났기 때문에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투지, 의지, 열망이 자기 목숨보다 더 컸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일행은 리스트라에서 데르베로 갔다가 다시 리스트라, 이코니온, 안티오키아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피시디아를 가로질러 팜필리아로 갔다가 페르케, 아탈리아, 또다시 안티오키아로 옵니다.
바오로가 오늘 독서에서 한 말은 딱 한마디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많은 환난이 필연적인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자신이 겪었고 많은 순교자들, 증거자들, 고백자들이 겪었고, 많은 선교사들, 많은 신자들, 아니 모든 신자들이 겪어야 되는 필연적인 환난입니다.
쉬운 신앙생활 없습니다. 마음의 평화? 저 하늘나라에서 만끽하는 거지, 우리는 이 땅에서 누리게 되는 평화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을 겪을 수밖에 없고 환난을 통해서만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을 겪어야만 됩니다. 그래서 그냥 적당한 마음가짐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굳은 믿음, 투지, 열망, 의지를 가지고 복음을 살고 전하고 지켜내는 것입니다.
적당~한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말이 안되는 겁니다. 어떻게 신앙이라는 것을 대~충, 적당~히 합니까... “정성”이라는 것을 대충, 적당히 한다는 게 말이 안되지요. 어떻게 대충, 적당~히 정성을 들입니까... 마찬가지로 신앙도 대충, 적당히 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성보다 더한 정성으로 신앙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도 해도 모자른 게 신앙입니다. 불굴의 의지로 우리의 신앙이 꺾이지 않기 위해 말씀, 성사, 은총, 기도로 무장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첫댓글 우리의 신앙이 꺾이지 않기 위해 말씀, 성사, 은총, 기도로 무장하도록 합시다... 아멘...
ㅎㅎ 마음의 평화를얻기위해 ,..
저의 20대시절 입교이유를 예기 할때 했던말이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