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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29일(종려 주일)
마태복음 21:1~11
겸손하신 왕, 예언의 성취자
하늘사랑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본문 접맥적 주제설교 형식
김규태 목사
*설교 주제: 예수님은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셨다.
*설교 목적: 우리는 겸손히 말씀에 순종함으로 왕이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when?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 주일입니다. ‘종려 주일’(Palm Sunday)이라는 말은 예루살렘 주민들이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도록 길에 깔았던 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주민들은 길에 종려나무 가지를 깔아놓고,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놓고 큰 소리로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종려나무는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주로 중독 지역의 건조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대추 야자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나무는 줄기가 길고 곧게 생겼고, 그 꼭대기에는 부채 모양의 잎이 퍼져 있습니다.
종려나무는 열매도 매우 중요합니다. 종려나무가 맺는 열매를 ‘대추야자’(dates)라고 부르는데, 이 열매는 매우 달고 영양가가 높아서 건조한 지역에서는 중요한 식량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종려나무를 풍요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또 예루살렘 주민들은 예수님을 맞기 하기 위해서 길바닥에 자기들의 겉옷을 깔아놓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겉옷’은 단순한 의복의 차원을 넘어서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의복’은 보호를 상징합니다. 유대인들은 낮에 겉옷을 입고 생활하지만, 밤이 되면 겉옷은 이불로 바뀝니다. 그들은 겉옷을 이불이나 담요로 사용할 만큼 생존이나 보호에 꼭 필요한 필수품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이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출 22:26)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겉옷을 길바닥에 펼치는 행동은 ‘헌신과 존경’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열왕기 하에 보면, 유대인들이 왕을 맞이하기 위해서 자기의 옷을 바닥에 깔았는데, 이는 “내 것을 내려놓고 당신을 왕으로 모십니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백성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모여드는 시기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예루살렘 주민들은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든 순례객들을 맞이하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시편 118:25~26)
“호산나”(hosan-na)는 아람어로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었습니다. 레위인들은 초막절을 지킬 때, 제단에 물을 부으며 시편 118편을 불렀는데, 이때 제사장들은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를 외쳤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를 불러 메시아로 영접했습니다. 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러 ‘정치적 왕’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했지만, 일주일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을까요?
who?
만약 예수님이 많은 유대인의 기대대로 멋진 옷을 입고, 멋진 군마를 타고, 많은 호위병을 거느린 채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면 어땠을까요? 실제로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 왕에게 반란을 도모할 때, 자기를 위해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50명을 자기 앞에 세웠습니다(삼하 15:1). 압살롬은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이러한 일을 행했지요.
그러나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까? 성경에 보면, 나귀, 그것도 ‘아직 사람이 한 번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생각해봅시다. 멋진 호위병은 고사하고, 다 큰 성인이 짐이나 싣고 다닐만한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다니요?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나 확실히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외모를 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내면을 가꾸려 기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외모나 학벌, 배경을 가꾸기 위해 노력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 따르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설마 그런 분이 유대인의 왕 일리는 없습니다. 비록 예루살렘 주민들이 예수님을 환영했지만, 만약 그들의 기대와 요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마음을 바꾸어 예수님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와 요구를 따라 행한다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더 많이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을 자신의 삶으로 성취하기 위해 나귀를 타셨습니다. 마태는 스가랴 9장 9절을 인용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서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약 520년 전에 기록된 책이었습니다. 그때 유대 민족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귀환했지만, 여러 어려움에 부딪혀 성전 재건이 중단된 상태였지요. 그때 하나님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중단된 성전 재건 공사를 진행하라고 명령하셨죠.
과연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명령하신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 가운데 머무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전 재건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르게 될 때, 하나님은 유대 백성들의 죄와 부정함을 정결하게 하실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행하실 일의 절정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장차 메시아께서 예루살렘에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는 사람들의 기대와 요구와 달랐죠.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힘 있고 강한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는 공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 중에서도 작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가난과 나약함을 상징하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지만, 그 일은 절대 예수님이 힘이 없거나 형편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겸손하신 예수님은 예언을 이루기 위해 겸손히 나귀를 타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겸손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겸손의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예수님은 단순히 겸손의 왕으로 오셔서 나귀를 탄 것뿐 아니라,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자신이 겸손의 왕이심을 나타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 뜻 앞에 자신을 내려놓는 순종입니다.
how?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 사람들은 겸손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합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는 영원히 떠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늘 높이 날지만 언젠가는 내려가야 하는 것이 비행기의 운명입니다. 비행기는 자기 의지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것이 ‘착륙’입니다. 자기 의지에 반해서 내려간다면 그것은 착륙이 아니라 ‘추락’입니다.
우리의 삶도 비행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로 내려가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내려가는 것을 거부하고 끝끝내 버티다가는, 추락할 수 있습니다. 내려가야 할 때 흔쾌히 내려가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오를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출처: 강준민, 「겸손과 영적 성숙」(두란노, 2011); 「생명의 삶」(두란노, 2017년 3월호), 139쪽에서 재인용.
겸손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두 제자를 맞은편 마을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인데, 그것들을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만일 나귀 주인이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왔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음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겸손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겸손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 앞에서 겸손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교만을 깨트리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교만을 깨트려서라도 당신의 뜻에 순종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어떤 목사님이 지인에게 과자를 선물 받았다고 합니다. 과자 이름이 무척 생소했는데, 포장지에는 ‘슈니발렌’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선물 포장을 뜯어보니 상자 속에는 코코넛 같은 딱딱한 과자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작은 설명서도 들어 있었는데, 순서에 따라 먹으라는 가이드가 적혀 있었습니다.
충격적인 것은, 과자 안에 ‘망치’도 들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과자 선물에 웬 망치?’ 호기심 반, 재미 반으로 설명서를 따라 먹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순서는 이랬습니다. 우선 포장지를 편 후에 망치를 들고 과자를 꺼내 도마나 쟁반 위에 놓고 세게 내리쳐 잘게 부숩니다. 그다음, 그것들을 그릇에 담아 크림과 함께 범벅을 만들어 비빔밥처럼 먹으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망치로 과자를 부수어 먹는다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맛은 일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과자를 먹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내 완악한 마음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높아진 교만과 자아를 이처럼 부서뜨리지 않으실까요?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망치로 과자를 부서뜨리듯 우리의 교만을 꺾지 않으실까요?
-출처: 김상수, 「풀타임 크리스천」(두란노, 2023);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6월호), 165쪽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목적은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화목제물로 내놓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지 일주일 만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실 정도로 무기력한 왕처럼 보였지만,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처럼, 그분은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십니다.
여러분은 겸손으로 언약을 이루신 예수님을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겸손하신 예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십자가로 나타났고, 우리의 겸손은 순종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을 따르기 위해 겸손히 말씀에 순종해야 할 영역은 무엇입니까?
저는 여러분이 고난주간을 맞아 자신이 내려놓아야 할 교만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고,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겸손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