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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시험하심
삿 2:20-23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3 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지 아니하셨더라
2:20-23 / 급기야 여호와께서 화를 내시면서 이렇게 선언하셨다. `내가 예전에 그 선조들과 맺었던 계약을 이 백성이 깨버리는구나! 또한 내 말은 한마디도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다니! 21) 너희가 그렇게 행동하니 나도 여호수아가 미처 몰아내지 못하고 남겨 두었던 뭇 족속을 너희 앞에서 하나도 몰아내지 않으리라. 22) 그리고 이스라엘이 앞으로 어떻게 하나 지켜볼 셈이다. 그 조상들이 나의 말을 잘 따르고 살았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정말로 내 말을 잘 들을지 두고 볼 참이다.' 23) 여호수아를 시켜서 뭇 백성을 완전히 몰아내지 않고 그들과 함께 이스라엘이 섞여 살게 하신 까닭은 바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처신할지 지켜보시려는 생각에서였다.
본문에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사람의 연약함과 불순종 마저도 선하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납니다.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20-2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향하여 분노하셨습니다. 이 백성의 조상들과 언약을 맺을 때 명령한 대로 살지 않았고 전혀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미처 몰아내지 못하고 남겨 두었던 이방 족속을 너희 앞에서 하나도 몰아내지 않겠다는 심판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을 정복해 산다 할지라도 한 집에 두 동거인이 살아 분쟁하는 것처럼 남은 원주민이 멸절되지 않은 채 강성하게 계속 남아서 서로 먹히고 먹는 싸움이 계속되고 갈등관계로 남겨질 것을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22) 하나님께서는 남겨 두었던 이방 족속들을 이용해서 이스라엘을 시험하겠다고 하십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조상처럼 나 여호와의 명령을 따르는지를 지켜볼 것입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를 떠나서 범죄 한다면 남았던 가나안 족속을 강성케 하여 이스라엘이 연단을 받게 하십니다. 남겨진 원주민을 이스라엘 자손의 가시들로, 옭아매는 덫으로, 하나님의 징계의 막대로 사용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날 하나님께서 우리들 곁에도 큰 가시와 같이 괴롭게 하는 사람이나, 시험거리들을 남겨두신 이유는 동일합니다. 우리들을 단련시켜 완전한 성숙과 온전한 거룩함으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벧전 1:6-7; 욥 23:10).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지 아니하셨더라(23)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몰아내지도 않고 오히려 그 땅에 남아 있게 하셨습니다. 여호수아의 손에 그들을 완전히 넘겨주시지도 않으셨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가나안 정복사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완전한 순종을 선하게 사용하셨다는 측면이 숨겨져 있습니다(수 9:15). 사명을 다 이루기 전에 여호수아는 노쇠하였고 남은 정복 역사를 완전히 이룰 수 없었습니다(수 23: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남은 원주민도 완전한 진멸을 가져 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대로 두어 이스라엘 자손을 연단하는 풀무로 사용하시겠다는 구속사적인 섭리를 보이셨습니다.
적 용 : 지금도 우리들 곁에 큰 가시와 같이 괴롭게 하는 사람이든, 시험거리들을 남겨 연단하시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당신을 완전한 성숙, 완전한 거룩함으로 이끌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계시는 풀무불은 무엇입니까?
구운 과자는 부서지기 쉽습니다. 살짝만 눌러도 길게 금이 가면서 두개로 쪼개집니다. 그러나 삶은 요리는 이와 다릅니다. 딱딱하게 건조된 국수를 삶으면 부드러워지고 몰랑몰랑해집니다. 인생에서도 보면 부서지기 쉬운 사람과 부드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압박이 가해질 때 깨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인생에서 맛보는 ‘뜨거운 고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참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은 부드러워집니다. 그리고 부드러워지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상처도 기쁨도 함께 느끼며 동정하며 그들과 함께 어려움을 겪습니다. 부서지기 쉬운 사람을 부드러운 성자로 바꿔 나가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습니다.
< 설 교 >
가시 같은 이웃
사사기 2:20-3:6
■ 먼저 헤리 채핀(Harry Chapin)이 지은 한 글을 소개하고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제목은 “요람 속의 고양이”입니다. 어느 날 내게,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세상에 왔지만, 그러나 아이에게는 홀로 밟아야 할 단계가 있었고, 지불해야 할 계산서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내가 알지 못하는 동안 걸음마를 배웠습니다. 또 내가 보지 못하는 사이에 말도 배웠습니다. 나는 항상 바쁜 사람이었기에 아이가 언제 그런 것들을 배웠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늘 내게 말했습니다. “아빠, 나는 이 다음에 크면 아빠 같은 사람이 될래요. 아시겠죠? 난 반드시 아빠 같은 사람이 될 거예요.” 아이가 물었습니다. “아빠 언제 집에 오실 거예요?” 내가 대답했습니다. “글쎄, 바빠서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아빠가 시간이 나면 그 때 놀자꾸나. 그 때 우리는 즐겁게 놀 수 있을 거야.” 어느 날, 열 살이 된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빠, 공을 사 주셔서 고마워요. 오늘은 저랑 함께 놀아주시겠어요? 공 던지는 법도 좀 가르쳐 주시고 말이에요.” 내가 대답했습니다. “얘야, 오늘은 안 된단다. 오늘은 할 일이 너무너무 많거든” 그러자 아들은 알았다며 혼자 공을 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렇다고 아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들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나는 이 다음에 크면 아빠 같은 사람이 될 거야.” 아들이 물었습니다. “아빠 언제 집에 오실 거예요?” 내가 대답합니다. “글쎄, 오늘도 바빠서 늦을 것 같구나. 하지만 이 다음에 아빠가 시간이 나면 그 때 아빠랑 함께 지내자꾸나. 그 때 우린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 거야.” 세월이 흘러 어느덧 아들은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내가 먼저 아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들아!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이리 외서 내 겉에 앉아 보렴.” 아들이 머리를 저으면서 미소 띤 얼굴로 말했습니다. “아빠! 제게 지금 필요한 건 아빠 자동차 열쇠랍니다. 물론 빌려주시겠죠? 그럼 나중에 뵈요.” 세월이 자꾸 흘러 나의 머리가 점점 희어져 갑니다.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아! 언제 집에 올 거니?” 아들이 대답합니다. “글쎄요. 아버지 바빠서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제가 한가해지면 그 때 함께 지내도록 해요. 아셨죠? 그 때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 거예요.” 그 후, 더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는 은퇴하여 집에 있은 지 오래 되었고, 아들은 먼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어느 날, 나는 아들이 너무나 보고파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들아! 너만 괜찮다면 널 한번 보고 싶구나!” 아들이 대답합니다. “아버님! 저도 아버님을 무척 뵙고 싶습니다. 그런데 통 시간이 나질 않습니다. 아버님도 아시다시피, 요즈음은 세상 살기가 너무나 힘들고 바쁘답니다. 게다가 지금 제 아이들이 심한 감기에 걸려 있습니다. 아무래도 아버님께서 양해해 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버님! 죄송하지만 이해해 주십시오.”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불현듯, 생각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빠! 나는 이 다음에 크면 아빠 같은 사람이 될래요. 아시겠죠? 난 반드시 아빠 같은 사람이 될 거예요.” 그 아이는 꼭 나 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내 아들은 나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하던 행동을 자녀가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쟤는 도대체 누굴 닮아서 저래? 우리 집안에 저런 애가 없는데, 도대체 어디서 저런 애가 나왔어?”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누굴 닮긴 누굴 닮았겠습니까? 자녀는 이웃집 아저씨, 아줌마를 닮지 않고 부모를 고스란히 닮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미래의 모습이고, 자식은 부모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에 의하면 사사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자녀교육의 실패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그들은 첫째로 자녀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남기지 못했고, 둘째로 자녀들에게 본을 보이지 못했고, 셋째로 하나님 말씀으로 자녀들을 확실하게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자손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우상들을 섬기게 되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사방의 대적들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한창 힘들여 농사짓고 있는 논밭에 갑자기 몰려와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기도 하고, 추수 때가 되면 갑자기 쳐들어와 힘들게 거두어들인 곡식을 탈취하기도 하고, 금이야 옥이야 키워놓은 자녀를 보는 즐거움에 살아가던 어느 날 저녁 떼로 몰려와 사랑하는 딸들을 업어가기도 하는 등,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원주민들로부터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시 같은 이웃이 주는 교훈을 몇 가지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가시 같은 이웃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이웃으로 말미암아 내가 고통을 당할까요?
1.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우리 주위에 가시 같은 이웃이 생깁니다.
물론 저의 이 말에 오해하지 마십시오. 모든 고통을 죄의 결과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욥이 당한 고통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고통을 당한 것은 그의 잘못이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당한 고통은 죄로 인한 징계가 아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으로 하여금 욥에게 고통을 가하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욥의 삶을 통하여 무언가 당신의 뜻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등장합니다. 제자들은 그를 보고 주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이 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 죄입니까?” 주님께서는 “이 사람의 죄 때문도 아니고,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다. 이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한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모든 고통을 죄의 결과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면서 ‘죄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는 식의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에는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을 보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겨 그들에게 절하고 그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다루십니까? 20과 2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렇게도 누누이 강조하며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라, 그들과 상종하지 마라, 그들의 딸들을 취하지 말고, 그들에게 아들들을 주지 말라, 그들의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신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르지 아니하자,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가나안 땅에 남아있는 원주민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가시 같은 이웃을 두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고난 가운데 두겠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 주위에 그들을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가시 같은 이웃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가시 같은 이웃으로부터 계속해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불순종은 고통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잘 압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 혹은, ‘열국의 아비’라는 별명을 받을 정도로 훌륭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본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을 자세히 살펴보면, 씻을 수 없는 한 사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네 몸에 날 자가 너의 후사가 되리라’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그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불순종하고 하갈이라는 여종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안주인과 여종이 서로 싸움박질 하는 큰 소동이 그의 가정에서 일어나, 결국에는 한 쪽이 가출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당대에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4,000년이 지난 오늘날 까지도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스마엘 후손인 아랍 사이에 끊임없는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자살폭탄 공격을 받아 수 십 명이 죽고 다치는 참극이 벌어졌는데, 이 비극은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 끝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가정이지만,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비극은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가시 같은 이웃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가시 같은 이웃이 이스라엘 주위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이 내가 살고, 우리 가정이 살고, 우리 교회가 살고, 우리의 사회가 사는 비결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순종의 삶’이 이처럼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순종을 하지 않습니다. 오죽하며 순종을 빗댄 유머가 나왔겠습니까? 2차 대전 말, 2개월간 재교육 소집 명령을 받은 어떤 중위가 다음과 같이 전보를 쳤습니다. “소집에 응할 수 없어 유감임. 누가복음 14장 20절을 참조하기 바람.” 그 전보를 받은 육군성 직원이 성경을 찾아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육군성 직원도 전보로 다음과 같이 회신을 보내었습니다. “귀하의 전문에 관하여 마태복음 8장 9절을 참조하기 바람.” 그 성경 구절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2주 전에 오셨던 시드니순복음교회의 홍금란 사모님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요즈음 순종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없습니다. 다 순종의 중요성을 압니다. 그러나 문제는 순종보다 제사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은 제사보다 낫다고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순종은 하지도 않은 채 예배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순종의 중요성을 알고 있지만, 실제로 성가대나 교사나 구역장 등의 봉사부서에 임명할 때는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순종의 중요성을 알고 있고, 기도할 때는 무슨 일이든 순종하겠다고 하고, 자녀들에게는 순종을 요구하지만, 정작 본인은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보다 더 완벽한 신앙은 없습니다. 순종은 신앙의 절정입니다. 여러분!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회사 최고 경영주의 입장에서 누구를 쓰겠습니까? 항상 잔머리나 굴리는 사람을 쓰겠습니까? 아니면 비록 머리는 조금 부족하지만 오더를 내리는 것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을 쓰겠습니까? 경영주는 머리는 부족해도 지시를 잘 따르는 사람을 씁니다. 스포츠 감독도 마찬가지입니다. 작년 월드컵 축구 4강의 영웅이었던 히딩크 감독이 어떤 선수를 좋아한 줄 아십니까? 순종하는 선수였습니다. 자기 지시에 철저하게 따르는 선수를 선발하고 그 선수를 기용했습니다. 그런데 감독에 오더에 따르지 않는 선수는 가차 없이 선발에서 제외했습니다. 대표적인 선수가 꽁지머리를 날리며 골 넣는 골키퍼라고 해서, 한 때 최고 인기선수였던 골키퍼 김병지 선수입니다. 그 선수가 자기 골문을 비워두고 중앙선까지 몰고 가다가 볼을 빼앗겨 골을 먹을 뻔한 이후, 김병지 선수는 오랫동안 대표선수로 기용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어렵사리 월드컵 대표단에 합류가 되었습니다만, 선수로 뛰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스포츠 감독은 순종하는 선수를, 자기의 지시를 잘 따르는 선수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쓰실까요? 똑똑한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이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비록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는 주님의 귀한 백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테스트하기 위해 우리 주위에 가시 같은 이웃을 남겨놓습니다.
2장 22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또 3장 1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또 3장 4절을 보겠습니다. “남겨 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 계속해서 반복되는 단어는 ‘시험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이 ‘시험’이라는 단어와 ’유혹’이라는 단어가 구별 없이 똑같이 ‘시험’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성경에는 test 라는 ‘시험’과, temptation인 ‘유혹’이라는 단어가 구별되어 있습니다. test와 temptation이 어떻게 다릅니까? test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반면에 temptation은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test는 궁극적으로 그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므로 언제나 건설적이며 교육적인 목적이 그 배후에 있습니다. 그러나 temptation은 언제나 파괴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test하시지만, temptation하지는 않으십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에 나오는 “하나님은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test가 아니라, temptation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유혹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를 test하십니다. 이 test는 매우 중요합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test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학생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학생들을 망하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test는 학생들을 사랑하고, 유익을 도모하기 위한 선생님의 배려입니다. 만약 숙제도 없고 test도 없다면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도 원하는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test를 통해서 학생들은 자기의 부족한 면을 발견하게 되고, 보충해야 할 부분을 알게 됩니다.
온누리교회 하용조목사님께서 온누리교회 부설 두란노서원에서 목사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갑자기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훌륭한 분위기에서, 훌륭한 강사를 초빙해서 목사님들을 훈련시켰는데, 원하는 수준까지 도달하지 않더랍니다. ‘그 이유가 뭘까?’하고 하용조목사님께서 고민하다가 드디어 그 원인을 찾았다고 합니다. test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test가 없었기 때문에 세미나에 참석한 목사님들이 공부를 등한히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처럼 test는 꼭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test하기 위해서 가시 같은 이웃을 우리 곁에 두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시 같은 이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때로는 가시 같은 이웃으로 인하여 나의 삶이,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한 단계 Up-grade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로마라는 가시에 의해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극심한 핍박 가운데에서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사도행전 4장 29절을 보면 그들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 그들은 로마라는 가시를 제하여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로마의 극심한 핍박 속에서도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며 엄청난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니까 로마라는 가시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일으킬 수 있는 실력자로 만들어준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힘들게 하는 가시 같은 이웃이 하나님께서 나를 test하시는 시험지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주위에 가시 같은 이웃이 있다할지라도 너무 고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test를 잘 통과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훈련하기 위해 우리 주위에 가시 같은 이웃을 남겨놓습니다.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열국은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하나님께서 가시 같은 이웃을 남겨놓으신 것은 그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가나안 전쟁을 치러보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통해서 전쟁 기술을 가르치시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대비하여 이들도 여호수아 때처럼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만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승리의 비결을 가르쳐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가시 같은 이웃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우리에게도 각자마다 나름대로 독특한 가시 같은 이웃이 있습니다. 얼른 생각하면 고통스럽고 원망스럽습니다. ‘왜 내가 이런 어려움을 겪어야 하나? 하필이면 우리 가족이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나?’라고 탄식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가지는 명심하십시오. 가시 같은 이웃이 나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을 결코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가시 같은 이웃도 우리 주위에 남겨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감당할만한 시험이기에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등산을 가르치는 교관이 한번도 등산을 해 본 적이 없는 왕초보 등산가에게 어떻게 합니까? 처음에는 쉬운 코스를 택하여 오르는 훈련을 시킨 후, 점차로 암벽 타기 등의 어려운 코스를 오르는 훈련을 시키고 결국에는 높은 산의 정상에 도전하게 합니다. 수영코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실내수영장에서 수영을 가르칩니다. 그곳에서 어느 정도까지 훈련을 진행하다가 다음에는 넓은 강을 건너게 하고, 나중에는 넓은 바다를 건너는 모험도 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들을 훈련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만한 한계 내에서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그리고 그 훈련을 통해 우리의 실력을 계속해서 향상 시키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 있는 가시 같은 이웃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시 같은 이웃을 통해서 나의 삶이 훈련되어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 훈련되어지며 성숙되어집니다.
독일에서 전해내려 오는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마을에 농부들이 농사짓기가 너무너무 괴로워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비를 요구할 때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면 안 되나요? 우리가 햇빛을 요구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햇빛을 주시면 안 되나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어떤 기도라도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부지런히 씨를 뿌렸습니다. “하나님 비가 필요해요.”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었습니다. 곡식들이 무럭무럭 자라야 했습니다. “하나님, 쨍쨍 내리쬐는 햇빛이 필요해요.”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햇빛을 내려 주었습니다. 부지런히 가꾸었습니다. 그런데 가을 녘 들판에 나가 곡식을 거두려 하는데 알곡이 많지 않았습니다. 많은 알곡들 대신 쭉정이가 널려져 있었습니다. “하나님 어찌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비를 주시고 때를 따라 햇볕을 주셨는데, 우리는 왜 알곡을 거둘 수 없는 것입니까?” 이에 하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꽃들이 피었을 때는 수분 작용을 위해서 바람이 필요 하느니라. 때로는 그 바람 때문에, 폭풍 때문에 곡식들이 신음할 수 있고, 쓰러질 수 있고, 넘어질 수 있고, 고통을 당할 수 있지만, 비바람을 통해 곡식들이 열매를 맺어가는 것이니라.”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역경이 있을 때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주는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나간 역사를 돌아보면 이것이 증명됩니다. 교회사에서 가장 경이적인 부흥이 일어나던 때가 언제인 줄 아십니까? 평탄한 때가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 때였습니다. 그 때는 생명을 걸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런 각오로 예수를 믿으니까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최고로 부흥한 교회를 들라고 하면 중국교회라고 합니다. 왜 중국교회가 부흥했습니까? 문화혁명이라는 핍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안문 사태를 기점으로 엄청난 핍박이 가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한 풀 꺾였지만, 한국교회가 10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엄청난 부흥을 이루었는데, 한국 교회가 엄청난 부흥을 이룬 시기는 평안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룬 일등공신은 북한의 김일성이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100% 다 수용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그 주장도 일리가 있습니다. 원래 한국 기독교는 장로교는 평양을 중심으로, 감리교는 인천을 중심으로 큰 세력을 가질 만큼 다분히 지역할거 주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일성이 6.25전쟁을 일으켜 이북에 있는 성도들을 다 흩어버렸습니다. 전국으로 피난민들이 골고루 퍼졌습니다. 하다못해 울릉도에도 피난민이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전국 방방곡곡에 북한에서 내려온 성도들에 의해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제주도에는 지금은 모르겠지만, 수년전까지 가장 큰 교회가 이북에서 내려온 분들이 세운 영락교회입니다. 6.25 때만 그랬습니까? 교회가 기도 안하면 이북에서 무장공비들이 내려오고, 목사들이 한심한 짓만 골라 한다 싶으면 비행기가 납치되었습니다. 조금 살만하다싶으면 불바다니 피바다니 하며 전쟁 위협을 가해왔습니다. 그 때마다 한국 교회가 어떻게 한 줄 아십니까? 기도했습니다. 텅텅 비던 금요철야 기도회에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조용하던 새벽기도회에 통곡하며 조국을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지켜 달라는 기도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한국 역사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때로는 가시 같은 이웃으로 인하여 우리가 한 단계 성장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 주위에 자꾸 여러분을 찌르는 가시 같은 이웃이 있습니까? 너무 고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못살게 하고, 나의 삶을 곤고하게 하는 가시 같은 이웃이 있다고 해서, 너무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시 같은 이웃이 자꾸 나를 찌른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생긴 가시 같은 이웃이 주위에 있든지, 나의 부족한 인격과 실수로 인해 생긴 가시 같은 환경 속에 처해 있든지, 오히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가시 같은 이웃으로부터, 가시 같은 환경으로부터 말로 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돌이켜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주님의 귀한 백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주위에 가시 같은 이웃이 있다할지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test를 잘 통과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시 같은 이웃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시 같은 이웃을 통해서 나의 인격이, 우리의 가정이, 우리 교회가 훈련되어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