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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시
(젊은시절의 그루시)
엠마누엘 드 그루시는 1766년 수도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수아 자크 드 그루시 후작이었다. 그루시는 아홉 살 때 왕립군사학교에 입학하여 교육받고 1779년에 포병대에 소속되었다. 3년 후, 그는 기병대로 병과를 바꿨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수한 근무성적으로 근위대에 들어갔다.
아버지인 프랑수아 그루시는 루이 15세의 시종직을 수행했는데, 향간에는 왕족의(심지어는 루이 15세의) 서자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만큼 아버지는 궁정에서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그런데 아들은 이런 아버지와는 딴판이었다. 1789년에 혁명이 발생하자, 그루시는 혁명을 옹호하고 인권선언을 찬양했다. 이때문에 그의 진급은 차질을 빚었다.
그루시는 열렬한 혁명 찬동자였다. 이 덕분에 그는 얼마 뒤 혁명 정부의 인정을 받고 혁명군의 기병 연대에서 지휘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1792년에는 혁명군의 대령으로 승진했다. 그루시는 프랑스 남동부로 파견되어 거기서 스페인군과 맞서 싸워야 했다. 그의 부대는 벙테 전역에서 크게 활약하여 스페인군을 격파했다. 그 공을 인정받은 그루시는 사단장으로 승진한다.
그런데 얼마 뒤 공포정치가 성립되었다. 로베스피에르는 귀족을 비롯한 혁명의 반대자들, 더 나아가 자신의 정적들을 모조리 혁명의 이름하에 숙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군 장교들 역시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 했다. 그루시는 귀족 출신이었기에 결국 이 심사에서 탈락당해 군대에서 퇴출된다. 그 이후, 그루시는 한량으로 지내야 했다.
그러다가 얼마 뒤,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었다. 그뒤 총재정부가 성립되었는데, 그 정부는 입지가 취약한데다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외적을 막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했다. 그러한 사정으로, 그루시는 1795년에 복직되어 혁명군의 아일랜드 공격에 참모로 참전했다. (하지만 아일랜드 공격은 영국 해군의 방해로 무위로 돌아간다.)아일랜드 전역 이후, 그루시는 2년 동안 고위 장성으로서 행정성의 업무들을 수행했다. 그러다가 1799년 대전쟁이 발발하자, 그루시는 사단장으로서 프랑스 동부 전선에서 복무했다.
(노비전투)
그런데 불행히도 그가 본무한 군대의 지휘관은 무능한 인물이었다. 1799년 8월, 이들 군대는 노비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동맹군에게 격파당했다. 이때 그루시는 자신의 사단을 동원하여 최후위에 남아 후퇴하는 아군을 엄호하고 추격하는 오스트리아군을 막았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그루시의 사단은 모조리 죽거나 포로로 잡혔고, 그루시 역시 열 네 군데나 총을 맞고 쓰러져 그대로 포로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오스트리아군은 그를 석방시켜준다.1799년 11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쿠데타를 감행하여 통령정부를 수립한다. 그루시는 이 정부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지만, 계속 군에 복무했다.
(호헨린덴 전투)
1800년 12월, 그루시는 모로 장군 휘하에 들어가 호헨린덴 전투를 치뤘다. 이때 그루시는 자신의 사단을 지휘하여 오스트리아군의 공세를 격퇴하며 완강히 전선을 유지했다. 그루시의 사단이 단호하게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동안, 다른 부대들이 다른 방향으로 치고 들어가, 마침내 승리를 쟁취했다. 이 전투 이후 그루시는 나폴레옹의 주목을 받게 된다.
1801년 이후, 그루시는 항상 나폴레옹의 참모 역할을 수행했다. 그루시는 사단장 또는 기병군단장 역할을 맡았다. 그는 나폴레옹의 모든 전쟁에 참여했다. 프러시아 전역, 폴란드 공격, 아일라우 전투, 프리틀란트 전투에 참가한 프랑스 참모들의 명단엔 항상 그루시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181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감행했다. 이때 그루시는 기병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러시아 원정에 참가했다. 그는 스몰렌스크 전투, 보로디노 전투, 모스크바 후퇴에 모두 참전하여 타격, 호위, 엄호 임무를 모조리 수행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의 참담한 실패는 외세의 대규모 침공을 야기했다. 1813년 나폴레옹은 곳곳에서 승전을 거뒀으나, 10월에 라이프치히에서 패전당하고 만다. 이후 연합군은 프랑스로 진격하여 1814년엔 파리 근방에 진입했다. 이때 그루시는 프랑스 방어전에 투입되었다. 1814년 3월, 그뤼시는 네 원수의 기병군에 소속되어 크라온느 전투를 수행했다. 이때 그는 프러시아군을 상대로 돌격하다가 총상을 입고는 쓰러져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그는 나폴레옹의 폐위 떄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완쾌되었을 때는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였다. 그루시는 결국 군에서 퇴출당하고 쓸쓸히 여생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그에게 또한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1815년, 나폴레옹이 돌아온 것이다! 그루시는 존경하는 황제에게 달려가 합류했다. 당시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 마르몽, 뮈라 등의 배신으로 마음이 깊이 상해있었다. 그런던 때에 그뤼시가 자신을 위해 싸우겠다고 찾아왔으니 얼마나 고마웠겠는가! 나폴레옹은 그 보답으로 그를 제국 원수에 임명시켰다.
나폴레옹의 재집권은 유럽을 경악시켰다. 영국, 오스트리아 등은 온힘을 기울여 나폴레옹을 퇴진시키고 말겠노라고 다짐했다. 나폴레옹은 이를 막기 위해 병력을 규합하여 쳐들어오는 외국 군대에 맞서 싸웠다. 이때 그루시는 3만 3천명의 군대로 프랑스군의 좌익을 지휘한다. 1815년 6월 16일, 나폴레옹은 먼저 블뤼허의 프러시아군을 리그니에서 격파시켰다. 프러시아군이 퇴각하자, 나폴레옹은 그루시에게 프러시아군을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루시는 이 명령을 굳게 따르기로 마음을 다지고 바브르 방면으로 후퇴하는 프러시아군을 추격한다.
(워털루전투 중 프러시아군의 공격)
그리고 1815년 6월 18일, 나폴레옹은 워털루 인군에 주둔한 웰링턴의 영국군과 대치했다. 새벽 4시에 그루시는 편지를 통해 나폴레옹에게 다음 작전행동을 물었다. 나폴레옹은 6시간 후인 오전 10시에 '바브르 방면으로 계속 진격하여 프러시아군을 압박하라.' 라는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나폴레옹은 아침식사를 끝낸 뒤 회의를 소집했다. 이때 곁에 있던 슐트 원수가 나폴레옹에게 건의했다.
"폐하. 그루시의 군대를 불러들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지금의 병력만으로는 웰링턴을 완전히 제압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이렇게 대답했다.
"자네들이 모두 한번씩 웰링턴에게 패배를 겪었다고 해서(슐트는 스페인 전역에서 웰링턴에게 패배했었다.) 웰링턴이 훌륭한 장군이 되는 건 아니네. 웰링턴은 못난 지휘관이야. 영국군은 형편없는 군인들이고. 이전투는 아침식사거리 밖에 안될걸세."
이때, 첩보가 들어왔다.
'프러시아군이 바브르에서 돌아와 영국군과 합세하려 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코웃음을 쳤다.
"바브르에서 온다고? 너무 멀어서 제 시간에 못 맞출 걸! 그리고 프러시아군은 그루시가 알아서 처리해줄걸세."
하지만 영국군은 그리 허술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집요하게 영국군을 공격했지만, 웰링턴은 밀리면서도 끝까지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에 나폴레옹은 네 원수에게 기병돌격을 지시했다. 그의 공격은 거의 성공하는 듯 싶었으나, 막판에 영국군의 분전과 네 원수의 결단력 부족(그는 막판에 후퇴령을 내렸다.)으로 인해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어쨋든 간에 영국군은 큰 피해를 입으며 패배의 기운에 빠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프러시아군이 접근해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아니?! 그루시에게 쫓기고 있어야 할 프러시아군이 벌써 여기까지 오다니? 그루시는 대체 뭘 하고 있었는가?"
황망하기 짝이 없는 기분이 든 나폴레옹은 오후 1시에 다시 그루시에게 "당장 돌아와 워털루로 근접해오고 있는 블뤼허의 프러시아군을 들이치라"는 내용의 편지를 급파했다.
이때 그루시는 뭘 하고 있었을까? 그루시는 바브르로 진군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답장("바브르 방면으로 도주하는 블뤼허를 추격하라")에 따른 행위였다. 이때 참모장 제라르가 건의했다.
"각하. 그 명령은 프러시아군을 추격하라는 것이지 바브르로 진군하라는 게 아닙니다. 포성이 울리는 방향으로 진군합시다."
하지만 그루시는 "나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바브르로 진군한다." 라며 그대로 바브르로 진격했다. 결국 그루시와 그의 군단 3만 3천명은 바브르에서 적을 찾아 헤메었다. 나폴레옹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외쳤다.
"그루시는 대체 어디있는거야?!"
얼마 뒤... 프러시아군이 당도하여 프랑스 군 우익을 격파한다. 나폴레옹은 최후의 반격으로서 자신의 근뒤대를 투입시켰지만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 웰링턴은 이 원군과 함께 총공격을 감행하여 마침내 프랑스군을 대파하였다.
한편, 그루시는 1815년 8월 19일까지 바브르에 머물면서 티엘레만 장군이 이끄는 프러시아군을 격파한다. 그리고는 다시 프랑스로 질서정연하게 철수했다. 그리고 그는 곳곳에 산개한 패전병들을 규합하여 규율과 질서를 유지시킨 채 상당 규모의 부대를 다시 방어전에 배치시켰다. 그러나 얼마 뒤, 회한과 절망에 빠진 나폴레옹이 항복하면서 이 모든 것은 무위로 돌아갔다.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된 뒤, 프랑스에서는 군사재판이 열렸다. 그루시는 군사재판에 회부될 뻔했지만 귀족출신이라는 이유로 간신히 이는 모면했다. 하지만 그는 직위를 박탈당한 채 추방당했다. 그루시는 미국으로 건너가 거기서 도피생활을 한다.
1822년, 그루시는 부르봉 왕가의 용서를 받고 프랑스에 귀국했다. 하지만 이제 그를 맞이하는 것은 비웃음 뿐이었다. 이전의 동지들, 이전의 적들, 이전의 부하들은 모두 그루시는 비웃거나 비난했다. 그루시는 이때문에 매우 힘겨운 여생을 보내야 했다.
1830년 7월 혁명 이후 집권한 루이 필립은 그루시를 다시 후작에 복권시켰고 명예 원수봉을 하사했다. 하지만 그루시의 실추된 명예는 더이상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는 회고록을 쓰며 지내다가 1847년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출처: http://cafe.naver.com/booheong.cafe
그루시입니다.. 그루시는 나폴레옹의 충신중 한명이었고 나폴레옹의 전투에 거의 참가하였으며 그는 도망친 뮈라와 반대로 러시아원정중에도 한마디 불평없이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한 명장이자 충신이었습니다. 퇴각시에도 마지막까지 후미에서 추격하는 적을 막아 전열을 유지하였죠. 그루시는 비난할수 없는 나폴레옹의 충신이자 능력이 출중한 장군이었죠..
하지만 신은 얄궂죠.. 그루시는 실수 그 단 한번의 실수로 나폴레옹 패망에 기여해 버리고 말았으니...안타까운 일입니다.
첫댓글 나폴레옹을 배신한 원수들이 있었는데도, 단 한번의 실수때문에 비난받고 비웃음을 당했다니ㄲㄲㄲㄲ
사람들이 참 사악하게도 나쁜놈들을 욕하기보다는 멍청한 사람들을 더 욕하더군요.
리니전투직후 그루시의 진언데로 바로 프로이센군을 추격했다면 정말 역사는 달라졌겠죠 바보 나폴레옹
막판에 삽질하나로 모든것을 잃다니 안타깝네요
그루시의 잘못인가요...뭐
그냥 그러한 중임을 맡길만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나폴레옹 말기 인재 부족을 여실히 드러내는 부분이죠, 사실.
그루시의 실수죠... 너무 고지식했다는것이 문제였죠... 나폴레옹의 1급들인 마세나나 란 다부에는 못미치지만 그루시도 유능한 장군이였습니다.. 블뤄허를 저지 한다는 임무는 충분히 맡길수 있었죠..
아~ 그루시는 왜 참모의 얘기를 안들었을까? 그루시만 빨리 왔더라면...
그루시와 네의 역할을 바꿧다면 역사가 달라졌을듯.. 과격한 네원수는 아마 블뤼허를 단번에 추격했을것이고 신중한 그루시는 웰링턴과의 대치상황에서 좀더 냉철한 시각으로 전장을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