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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국 훈독경 제3권 제 7 일
완전복귀
날짜 : 1972. 5. 21(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선과 악의 갈림길에 선 인간
우리는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가 죄악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일생을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임종시에 자기의 생애를 반성해 볼 때 자기가 과연 선하게 살았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선하게 산 자신보다 선하게 살지 못한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에서 선한 일과 악한 일을 하나하나 빼낸다면 최후에 남는 것이 선이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소망이지만 선보다는 악이 남기 쉬운 것이 우리 인생의 행로입니다. 이 시대의 인류를 종합해 보면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이고 사회도 악한 사회라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선한 세상이 아니라 악한 세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왜 이렇게 악하게 되었느냐? 선이 먼저 심어진 것이 아니라 악이 먼저 심어졌습니다. 선한 바탕 위에 악이 심어졌다는 것입니다. 악한 바탕 위에 악이 심어졌다면 악으로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선한 바탕 위에 악이 심어졌기 때문에 선한 면과 악한 면이 뒤넘이치면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한 바탕 위에 악이 심어졌으므로 최후에 남아지는 것은 선이 아니라 악이 남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악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악할 수밖에 없지만, 만일 선한 절대자가 계신다면 그 절대자는 어떠할 것이냐? 혹은, 절대자가 있는 반면에 그 절대자를 반대하는 악한 사탄이 있다면 그 사탄은 어떠한 존재일 것이냐?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볼 때, 하나님만은 절대적인 입장에서 선해야 될 것입니다. 그분은 처음도 선해야 되고, 과정도 선해야 되고, 끝도 선해야 될 것입니다. 그분이 걸어온 과거와 섭리를 추진시키는 현재 그리고 미래도 그분에게 있어서는 선만이 남아지는 것이고 악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반대적인 사탄이 있다면 그 사탄은 어떠한 존재냐? 그에게 있어서는 선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출발부터 악한 것이요, 과정도 악한 것이요, 결과도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만일 사탄이 선한 입장을 취할 수 있다면 우리 인간이 선한 길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 혼선을 빚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은 어디까지나 악한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작도, 끝도 사탄은 악해야 됩니다.
그런데 선한 하나님과 그 반대적인 악한 사탄 둘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생을 두고 내가 선을 추구하며 가게 될 때는 선하신 하나님이 같이하는 것이요, 그 반대에 서게 될 때는 악한 사탄이 같이하는 것입니다.
일생의 노정에 있어서 선하신 하나님을 그리워하면서 선만을 남길 수 있는 그 길을 어떻게 세워 나가느냐 하는 것이 인간이 무엇보다 희망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선을 중심삼고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 인간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그분과 하나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데서만이 우리의 인생행로가 선으로 시작되고 선의 과정을 거쳐서 선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다 살고 나서 선과 악을 하나하나 제하고 났을 때 악이 선보다 많게 되면 악한 주관권 내에 귀결되는 것이고, 선이 악보다 하나라도 더 남아질 때는 선한 주관권 내에 귀결된다는 것입니다. (57-12)
타락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인간
우리 인간이 타락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일생 동안 완전히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리를 완성하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고 자식으로서 일생 동안 사랑을 받는 입장에서 출발했을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은 완전히 사랑하시기 위해서 인간을 지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사랑하시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절대적인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도 절대적인 결과를 가져와야 될 것인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고,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출발해야 할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타락된 인간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출발을 보시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기필코 성사시키시지 않으면 절대적인 하나님으로서의 권위와 위치를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러한 기준을 다시 찾으시기 위해서 어려움을 극복하며 나오시지 않을 수 없다고 우리는 여기에서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들로서 완전한 사랑을 받고 난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이냐? 완전한 부부로서 사랑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담은 태어나기를 남자로 태어났고, 해와는 태어나기를 여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들이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자라고 하나님의 완숙한 사랑권 내에서 성숙했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부로서 완전한 사랑권 내에서 출발을 보았을 것은 두말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 부부야말로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부부가 하나되었기 때문에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삼은 상대적인 입장에서 행복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갖고 있었던 물건은 상대적인 입장에 있었던 그들의 물건이 될 수 있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던 그 기쁨은 하나님만의 기쁨이 아니라 상대적인 존재의 기쁨도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주체로 계시던 하나님의 기쁨은 아담 해와의 기쁨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기쁨이 아담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해와의 기쁨이 되고, 아담의 기쁨이 해와의 기쁨이 되고, 해와의 기쁨이 아담의 기쁨이 되고, 아담 해와의 기쁨이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었던 그야말로 통일된 기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는 그러한 출발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타락이 가져 온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다음에는 부모로서 완전한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식을 낳았더라도 완전히 사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부모가 완전한 사랑을 체휼하면 자식도 완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사랑을 체휼하지 못한 입장에서 자식을 낳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자기들이 체휼한 이하의 사랑이지 그 이상의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서도 부모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세상의 부모들도 생명을 무릅쓰고 자식을 사랑합니다. 타락의 사랑으로 인연된 그 부모도 생명을 희생하면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볼 때, 타락하지 않고 완전한 부모로서 자식을 낳는다면 그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강할 것이냐? 그 사랑 앞에 하나님도 눈물을 흘리시고, 그 사랑이 없으면 슬픔을 느끼실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절대자도 주관할 수 있는 것입니다. (57-15)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이유
행복은 상대적인 요건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상대적인 요건이 갖추어지지 않게 될 때는 고독한 것입니다. 고독에는 만족이니 희망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인간시조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부자의 관계를 맺는 역사가 벌어졌다면 얼마나 놀라운 역사가 되었을 것이냐? 그렇게 되었더라면 하나님과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연결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사랑이 후손들에게 연결되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사랑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아담 해와가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 서 가지고 아들딸을 사랑할 수 있었던 기반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아담 해와를 통해서 자녀들에게 이어졌을 것입니다. 또, 그 자녀의 사랑은 자녀의 사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녀의 사랑이 부모 앞에 돌려드리는 기반이 되었다면 통일원리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사위기대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분에게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누가 지었느냐?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 자체가 필요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물질이 필요하신 것이냐? 물질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을 필요로 하시느냐? 사람이라는 것은 사랑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 필요하신 것이지 다른 목적이 있어서 필요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사람을 왜 지으셨느냐? 상대를 통해서 자극을 느끼기 위해서 지으신 것입니다. 사랑의 감정을 유발시킬 수 있는 대상의 실체를 필요로 하시기 때문에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에는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 이상의 아름다움이 없을 정도로 다 갖고 계십니다. 그러한 내성적인 것을 상대에게 반영시켜서 그 상대에게 반응되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범위가 넓은 사랑을 형성하시기 위해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한권을 통할 수 있는 소성(素性)이 무엇이냐? 그것은 사랑의 힘밖에 없습니다. 무한한 세계, 영원한 세계를 관리할 수 있는 본질은 권세가 아니요, 어떤 지식이 아닙니다. 사랑의 힘이 아니고는 안됩니다.
그렇게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은 대상적인 사랑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에 인간을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느냐? 사랑이 나타나는 길을 추구해 볼 때 사랑이 나타나는 맨 처음의 길은 부모의 사랑입니다. (57-17)
참된 사랑의 출발점
절대적인 하나님이 참된 사랑의 전통을 세우시는 데는 어떠한 전통부터 세우셔야 되느냐? 부모로서의 사랑의 전통을 먼저 세우셔야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버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완전한 사랑을 하셔야 됩니다. 그렇게 완전한 사랑을 받는 아들딸이 완전한 부부로서 사랑을 이루기를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바라심대로 부부의 사랑을 이룬 다음에는 부모로서 사랑을 이루어야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사랑하셨듯이 인간들도 자식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어디에 행복이 있겠느냐? 인간이 처하여 있는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행복을 찾아 나가는 것이 아니라 행복의 기준 앞에 보조를 맞추는 역사가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그러한 원칙의 기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미래의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57-20)
완전한 사랑
그러면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대상을 백 퍼센트 위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사랑이 성립됩니다. 완전한 사랑은 백 퍼센트 남을 위해주는 자리에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은 데서 사랑이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을 완전히 위해줄 수 있는 자리에서 완전한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태어났다는 데에서 사랑이 성립되는 것이지, 나를 위해서 태어났다는 데에서는 사랑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부면 부부끼리 서로 위해주는 데에서 사랑이 성립되지 “너는 나를 위하라!” 하는 데서 사랑이 성립돼요? 그것은 일시적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사랑의 이상을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57-23)
보다 큰 것을 위해 희생하면 사랑의 중심자가 된다
결국, 희생하는 사람은 사랑을 유발시킬 수 있는 주체가 됩니다.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은 나라의 사랑을 유발시킬 수 있고,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은 가정의 사랑을 유발시킬 수 있고, 동지를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은 동지의 사랑을 유발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희생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나라, 이 민족에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은 희생의 마음을 가지고 나라를 위하여 희생하게 된다면 지금까지 역사상에 나타나지 않았던 애국정신이 여기에서 현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선생님이 나라를 위해주는 것은 그 나라를 완전히 품어 가지고 세계를 위해서 희생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세계 인류 앞에 새로운 사랑의 전통을 세우게 됩니다. 그것만 심어 놓게 되면, 만민은 그 사랑의 길을 너도나도 좋아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것을 표준하고 종착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랑이 인류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 사랑을 중심삼은 평화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선생님의 사상은 나라가 복귀되는 날에는 그 백성을 묶어서 세계 인류를 위해서 희생하라고 가르쳐 줄 것입니다. 이것이 선생님이 찾고자 하는 나라입니다.
악신과 선신의 투쟁은 무엇을 중심삼고 하느냐? 사랑을 중심삼고 한다는 걸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결국에는 보다 큰 것을 위하여 희생하려는 사랑의 마음을 갖고 가는 날에는 선신이 관리하는 것이요, 그렇지 못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남을 희생시키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반대로 악신이 주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딱 갈라지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이 태어나기를 남을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남을 위하여 희생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남을 위하여 희생하면 어떻게 되느냐? 사랑의 전통이 설 뿐만 아니라, 그는 틀림없이 사랑의 중심자가 됩니다. (57-24)
완전복귀의 출발은 자기를 부정하는 데서부터
사랑을 중심삼고 출발할 수 있는 완전한 기준이 어디냐? 그것이 나입니다. 본래, 나는 태어나기를 남을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남을 위해주는 자리, 남을 위해서 출발하는 자리가 최고의 완전한 자리입니다. 완전히 복귀할 수 있는 사람은 남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상대를 위해서 존재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절대적인 기준에 도달한 상대가 없기 때문에 상대가 절대적인 기준에 도달할 때까지 수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완전복귀는 어디서부터 시작될 것이냐? 자기를 완전히 부정하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위대한 분이었습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얘기한 것을 볼 때, 예수님이 위대하고 성경이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걸 볼 때,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태어나기를 아버지를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또, 십자가에 달려서 “아버지여, 저들이 행하는 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면서 원수를 위해서 복을 빌었습니다. 그게 누구를 위해서였어요? 원수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는 예수님의 지배 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완전히 원수를 위해서 복을 빌었으니까 예수님은 완전히 남을 위해 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전통이 역사를 지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랑의 등급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더 큰 것을 위해서 희생할수록 사랑의 등급은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보다도 나라를 위하여 희생하는 사람이 애국자가 되는 것이고, 그 사람을 중심삼은 가정이 애국자의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국자의 가정만 되어 가지고는 안됩니다. 더 나아가, 가정과 종족을 이끌어 가지고 나라를 위하여 희생하게 되면 애국자가 될 뿐만 아니라 애국종족이 되는 것입니다. (57-27)
보다 큰 것을 위하여 희생하면 망하지 않아
더 큰 것을 위해서 희생하는 데에는 망하지 않고 남아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무리로 말미암아 완전복귀를 계획하실 수 있지 그 외의 것을 가지고는 완전복귀라는 것은 꿈도 못 꾸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의 사상은 “나는 그대를 위해서 있고, 나는 가정을 위해서 있고, 가정은 나라를 위해서 있고, 나라는 세계를 위해서 있고, 세계는 하나님을 위해서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서 계시느냐? 하나님은 사랑을 위해서 계십니다. 그래야 평화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위해서 계시느냐? 하나님은 상대를 위해서 계시는 것입니다. 그 주체와 상대는 무엇을 위해서 있느냐? 사랑을 위해서 있습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모든 것이 완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완성의 출발은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세계를 위해서 희생할 때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완전완성의 출발입니다.
성경에 보게 되면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 앞에 갈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사랑을 집어넣어야 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사랑이다.”라고 말입니다. 사랑을 집어넣게 되면 하나님도 좋아하시고 예수님도 좋아할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사랑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갈 자가 없고 하나님도 행복하실 수 없다.” 하는 이것이 원칙입니다. (57-29)
종교는 마루가 되는 가르침
성경에 보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놓아주리라.” 했습니다. 타락은 했지만 진리를 알고 진리대로 행하는 사람은 해방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성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 중에 자기를 위해서 산 사람이 있어요? 성인들을 보게 되면 자기가 잘났다고 자신을 주장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성인들은 신(神)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성인들은 전부 다 종교의 종주(宗主)들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독교의 종주요, 석가모니는 불교의 종주요, 공자는 유교의 종주요, 그리고 마호메트는 회교의 종주입니다. 그들은 전부 다 자기를 주장하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예수님이라는 분을 볼 때, 그는 갈릴리 해변에서 어부들을 데리고 살던 그때에는 믿을 수 없었던 사나이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주장했습니다. 독생자뿐만이 아니라 “나는 인류의 신랑이다. 나는 인류의 아버지다.” 했습니다. 그렇게 참된 아들의 사랑, 참된 부부의 사랑, 참된 어버이의 사랑 등 세 가지의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그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영웅은 세상에서 추앙하지 않습니다. 힘으로 세계를 내 마음대로 해보겠다고 하는 영웅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절대적인 그분 앞에 마이너스가 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악은 절대자 앞에 또 다른 플러스의 입장을 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반면, 선은 다른 플러스가 아니라 절대적인 플러스 앞에 절대적인 마이너스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나는 아무것도 없다. 남을 위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기압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고기압권이면 나는 저기압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저기압권이면 아무리 오지 말라고 해도 고기압이 오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되는 날에는 사랑의 태풍이 불어옵니다.
종교라는 것은 마루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종교의 가르침의 골자는 “희생해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망할 것 같지만 망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망하는 날에는 도리어 뒤집어집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주체, 절대적인 플러스 앞에 절대적인 마이너스가 되어 하나되는 운동입니다. 이 종말시대에 완성되기 위해서는 남을 위해서 존재하는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 데서만이 승리가 완전할 수 있습니다.
타락은 무엇이냐? 자기를 완성의 기준으로 보고 자기를 주장하고 자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높아진다는 생각으로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자랑이었습니다. 그것이 타락의 동기였습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을 다시 만나려면 자기를 중심삼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삼고 자랑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체이신데, 그 주체 앞에 자기는 상대적인 입장에서 자리를 찾아가야 됩니다. 완전한 자리가 무엇이냐 하면 상대적인 자리이기 때문에 남을 위해서 희생해야 됩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완전복귀가 출발되는 것이고, 그렇게 나가는 사람은 완전복귀의 과정을 가는 사람입니다. 완전복귀의 과정뿐만 아니라 완전복귀의 완성까지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57-31)
완전복귀의 출발지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이상(理想)의 나라를 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이상의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선한 일입니다.
완전복귀는 내 개인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밥을 먹어도 세계를 위해서 먹고, 호미로 땅을 파더라도 세계를 위해서 판다는 사상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사상에서만이 완전복귀의 길이 열리는 것이지 그 가외에서는 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 자신도 이 나라를 위해서, 이 세계를 위해서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일생 동안 빚을 지우고 살았습니다. 여러분을 고생시키더라도, 통일교회의 교인들을 고생시키더라도 민족을 구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희생시키고 나서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시키고 자기의 전체를 잊고 공적인 면에 나가려고 하는 사람은 발전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먹으나 자나 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됩니다. 이 원칙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완전복귀의 길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기 바랍니다. (57-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