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수염귀뚜라미의 기억
옥수수수염귀뚜라미
80층 승강기 아래로 내려갈 땐 잠잠하다
울음을 뚝 멈추고 승강기가 기계음을 듣는다
첨단이 아닌 이런 것들이 기척할 때가 있다
수염귀뚜라미는 철봉대 근처에 있다
기계음은 그의 풀잎 가슴속으로 들어가
해마에서처럼 사라진다
해마에 기억의 흔적은 물방울 먼지처럼 남는다
소리는 사라지고 벌써 있지 않다
80층 체인이 출렁이는 소리가 벽 속에서 들린다
기술은 그 소리를 감추려고 혼신을 바친다
내 신문 같은 얼굴이 센서에 비치면
문은 비서처럼 얼른 옆으로 열린다 그리고
곁에 서서 내가 나가기를 기다린다
나가지 않으면 문은 계속 심리처럼 서 있는다
그때 햇빛이 내 파란 핏줄 손등에 닿는다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한다 늦여름 매미처럼
나는 갑자기 미열의 아득함으로
손바닥으로 유리창을 잡는다 가을 구름 하나
아파트 뒷산 위에 떠서 불타고 있다
마지막 불 칸나가 화려하게 단장했어라,
수염귀뚜라미 하나 내 허파꽈리에 초기 암처럼
마지막 광선 속에 울기 시작했다,
나는 너의 이름을 보고 싶어 만지고 싶어
옥수수수염귀뚜라미
비정치적 남양주시
나는 가끔 이 남양주시 메인도로를 통과했다
남양주시는 모른다, 이런 문장은 맞는 문장이 아니다
나는 이 안 되는 문장을 계속 만들려고 한다
나는 남양주시가 남양주시청과 남양주경찰서를
결코 모른다는 생각, 나는 이 이상한 생각에 막힌다
어느 시민도 이 모름을 눈치 채지 못한다
나는 오늘 정오의 햇살의 남양주시가 되고 싶었다
아니 남양주시의 햇살의 정오를 밀치고 장님의
남양주시가 되려 한다 마른 햇살의 남양주시 정오!
생각만 해도 개체의 죽음과 삶을 훌쩍 뛰어넘는 듯
시청 앞에 국화, 눈구름 냉기 알알한 늦가을
슬픔과 기다림의 감정이 삭은 남양주시의 가을 정오
하지만 남양주시의 가을은 남양주시를 알지 못해
자신이 어디 가고 있는지 모르고 통과하고 있다
나와 말은 절망 속에 햇살을 잡고 의문을 시작한다
남양주시를 방문한 나를 모르는 장님의 남양주시
남양주시가 남양주시에 있음을 나는 아슬아슬하게 믿어
그 소란한 가을빛과 언어의 남양주시를 빠져나간다
이 통과는 너무나 눈부셔, 차를 노변에 세우지만
남양주시는 가을 하늘 밑에 혼자 불타고 있다
할 말도 아주 없는, 가을도 모르는 나의 가을 남양주시
나도 남양주시가 되어가는 가을의 남쪽 남양주시
그대여 아는가 알 길 없는 내 마음의 이 가을의 언어가
오늘도 남양주시가 모르는 남양주시를 통과하고 있다
서서 별을 사진 찍다
ㅡ카메라와 나무의 12월 31일
이 지상의 마지막 저녁 해가 지고, 이 시를 발표할 땐
과거형으로 고쳐야 할까? 서쪽 하늘을 쳐다보는 이곳은
지구의 북반구 극동 반대편보다 이미 일몰을 맞는
서울 동쪽 작은 구릉,
정치와 시는 언제나 맞은편에서 미래의 이곳을 본다
나는 순간, 이 나라를 입에 담고 싶지는 않아졌다
고 말하고, 사진기를 어루만진다
매일 별을 보는 비정치적 천체물리학자가 아니지만
매일 말을 쓰러뜨리는 비천문학적 정치인도 아니지만
쉿, 조용 카메라를 별에 대고 사진을 찍는다
아비는 어둠에서, 걸레가 된 시간을 주워담는다
카메라가 별빛을 상대하면 가난한 일몰에 불과함을
비켜선 지상의 단 하나 소형카메라
배나무 쪽에 가까운 나의 작은 구석방 서쪽 벽
하늘은 허공의 피사체, 젊고 아름다운 모델
궤도를 지나가는 위성의 창 같아, 저녁 하늘은 순하다
서로 허공의 포즈를 취해준다,
한 해의 마지막 눈을 씻는 초저녁 新星이다, 봐 초점을
초점은 초점에게 뭐라 속삭이잖아! 공기는 얼지 않아
저녁의 저 첫 별을 어둠 속 공기 책자에 새겨두어라
마당에 서서 반짝이는 궁륭의 별을 사진 찍을 테니!
카메라 눈동자는 찰칵, 영하3도?
그 별과 달의 빛이 셔터의 걸림에 놀람과 동시에
상자 속 너희 알몸 부서지지 않아 광속으로 뛰어든다
서로 피해 검게 찍힌 흑백의 공기와 시간의 흔적
삼만 년, 만에 돌아온 저쪽 여름의 우리은하처럼
현실의 렌즈를 굴절하는 아픔이 아닐지라도
찰칵, 찰칵...... 지문은 대기를 끊는다, 기침하는 빛이
잘려 들어온 별이 카메라 속에 오도독 떨고 있다
한낱 인화지에 남겨지며 정치에 관심이 사라지더라도
혼자 아슬한 그 옛날 같은 초저녁 뜰
뿔이 자라 나오는 태초의 기척을 고막의 뿔은 듣는다
어떤 미래보다 깊고 먼, 신성한 남색 하늘의 메타포,
어느 해 12월 31일을 넘기지 못하게 되더라도
훗날, 이 카메라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 저녁을 지구의 한 그루 나무 보고 있었던 일
수박
이상하다, 이번에는 수박이다. 줄기가 기어간다. 줄기가 어둠바닥까지 기어나갔다. 그 끝은, 가끔 개의 앞발이 돌무덤을 파던 곳. 굼벵이와 나비들이 몰래 노는 곳
어둠과 볕이 가까운, 눈멀기 쉬운 경계의 도로표지판이 서 있는 앞쪽,
그곳이 이 수박밭의 끝이다.
문득 수박줄기는 포복을 멈췄다,
더 갈까? 순이 뒤돌아본다. 참 오래 한 일이지만 무작정 간다고 되는 법이 없는 것을 안다. 잎에 가린 뿌리 쪽이 보이지 않는다. 둥지를 틀고 머리를 감아올린다. 저쪽에서 물 들어오는 소리 들린다. 두더지가 줄기라도 물어뜯는 날엔 끝장이다. 식물이라고 위험이 없는 건 절대 아니니까.
수박의 눈은 멀리 뻗어나온 귀여운 줄기 끝,
줄기 밑으로 마디가 있어, 실뿌리 마디는 땅내를 맡고, 오직 수원은 저 대한민국 양평 수박밭이다. 거기서만 물을 대준다. 그리고 아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하늘에 있는 법. 낮의 태양에 대해서 말해 뭘 할까, 그러나 수박은 태양 하나만 믿지 않는다.
그것이 제일 좋은 자율성
그러니까 이번에는 수박으로 태어났다,
뿔니는 깊지 않으나 표토의 모든 양분을 비로 쓸듯 가져간다, 퇴비, 죽은 벌레, 쇠똥, 계분. 수박이 좋아하는 이름들은 만나면 뒤섞인다.
이렇게 수박도 수박을 기르다 정이 들어, 수박밭은 골라지고 말문이 열린다.
이 평화 속에서 수박은 햇살을 수분에 섞어 당분을 만든다. 절묘한 기술
수박밭을 기웃대는 옥수수는 내년엔 수박이고 싶은 얼굴, 식물도 윤회하지만, 글쎄 아무나 수박이 되는 건 아닐 테지. 수박도 모르는 일이 있어, 내년엔 어디로 건너갈까?
그러나 이 밭은 내년에도 수박밭일 확률이 높다.
어림잡아 이 둑 너머는 옥수수밭. 내년에도 이 근처 어디서 우리는, 지금처럼 수박이든 옥수수든 황금 땀방울
비가 올 것 같다, 주인이 삽을 들고 나온다. 수로를 낼 모양이다. 수박은 다 안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된다. 아프리카에서부터 수박은 늑대새끼들처럼 돌아다니며 아무 데서나 사냥하고 새끼 치지 않았으니까.
눈 내리는 겨울, 우리가 어디 있는지 가끔 궁금해 출출할 때 있지만,
수박은 평범한 다년생이 아니다. 녹색의 천둥 번개를 찍으며 한여름만 살다 가는 일년초다.
저 깊은 곳, 비밀 백화점에서
그 여자는 내가 얼마나 힘들게 숨 쉬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다
그 여자는 나의 숨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이 숨소리에 모든 남자는 폭력을 사용하고 그 폭력에 분노한다
그러나 여자들은 극히 단순한 결과를 선택했는지
복잡한 과정은 여성 소비자들에겐 금물
캄캄한 터널 속을 달려가는 무호흡 쇠의 발한증
기수가 검고 탐스런 경마의 두툼한 엉덩이를 채찍으로 내리쳤다
철썩, 달라붙는 채찍자국에 피가 모였다 광속처럼 흩어진다
어둠 속에서 피 흘리며 질주하는 천마의 숨소리가 절규한다
숨구멍 속에 돋아난 검은 털들이 안으로 휘어져 빨려들어간다
그후, 여자가 나의 숨소리를 듣는다면 나를 불러 추잡한 사랑을
강매할 것이다 여자를 욕망하게 하는 것은 저 백화점의 불빛들
그 여자는 결코 자신이 어디서 숨 쉬고 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폐습으로 발전하는 터널 속의 발한증처럼
한번 불러본 인간 송장의 노래
목구멍에 송장을 걸고 사는 나, 송장에 빌붙어 잠자는 자
송장을 먹여 살리느라 평생을 바치는 나
송장을 업고 다니는 자들, 대대로 송장을 따라다니는 가문
쥐가 되었다, 새가 되었다 변신하는 자들
송장의 송장들, 송장뼈의 송장뼈들
대퇴골이며 다리뼈며 복사뼈며 두개골이며 손뼈며
척추며 이백여 개 괴상한 돌출의 뼈들, 뼈들
혼란스런 존재들, 불가사의한 구조, 于變萬化의 아름다움
지금은 인간인 존재들, 잠시만 인간인 존재들, 의 책 같은
고단한 죽음의 꿈을 꾸는 자들, 저 문명 바깥의
페이지가 다 붙어버린 절어붙은 커버 같은
돼지가 된다는 건 꿈도 못 꾸지, 벌레가 도니다는 건 상상도 못할걸
돌이나 쇠붙이처럼, 인간들은
그런 인간들은 하지만, 화려한 변신을 돌리는 회전부채의 존재들
마술의 거짓말들, 도시 냄새를 풍기는
돌아도 돌아도 더 새로워져, 무한히 낡지 않는
무한궤도 같은, 죽어 새로 태어나는 존재들, 몸을 바꾸는 이상한
존재들, 원래부터 그랬던 이름들 나, 그들
인간, 그것의 사이에 있는 인간들
형상의 껍데기를 찾아 자신의 몸을 끼우고 송장을 허파 속에 거는
거지 생명들, 거지 행적들, 거짓 진실들, 거짓 실재들의 현실, 거리
어둠의 횡단보도를 절뚝이는 外套 속의 남자
이것만이 의심할 수 없는 나, 통쾌한 나, 나
저 자연의 여여함이 얼마나 싫증나고 아름다운가
죽음은 이런 꿈을 망각으로 처리하기 위한 게임임을 인정했다
목구멍에 송장을 걸고 돌아와, 평생 같이 잠잘 꿈꾸는,
곤한 자들
* 2010 제55회 現代文學賞 수상시집, 현대문학
첫댓글 좋은 시 잘 감상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