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장 : 풍운(風雲), 호위제(護衛祭) - 06
- 싸우려면 상대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스르륵 하는 느낌과 함께 호금명은 바람을 타고 나무위로 올라갔
다. 그리고 그의 시선 안에 드디어 목표물이 들어왔다.
우선 당진걸과 그의 식솔들이 불빛을 향해 서서히 다가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호금명의 입가에 비웃음이 맺혔다.
‘네놈들에게 돌아갈 묶은 없다.’
사십 년 만에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피 맛을 즐기는데, 당가는 방
해꾼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호금명이었다.
그의 시선은 당가의 무리들을 완전히 무시한 채, 그 위를 넘어 불
빛에 둘러 앉아 있는 자들에게 모아졌다.
살기와 살심으로 가득한 그의 눈은 먹이를 찾는 살쾡이의 그것처
럼 불빛에 노출되어 있는 인물들을 훑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그의 눈도 점점 벌어졌다. 아울
러 그의 다리는 바람에 부대끼는 앙상한 가지처럼 그렇게 덜덜 떨
리고 있었다.
호금명의 뒤를 헐레벌떡 쫒아온 조준광과 호대운은 조금 이상한
표정으로 후들거리며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당혹스런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멈추어 섰다. 지금 호금명의 모습은 두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혹시 풍기가 계신 것 아닌가?’
호대운은 그런 생각까지 하였다.
천금마옥에서 고생을 많이 하고, 제대로 먹질 못해 풍기가 있을지
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누가 어떤 생각을 어떻게
하던,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호금명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있었고, 전신이 마비되어 오는 공포에 이가 딱딱거리는 상
황이었다.
호금명은 손으로 불빛이 가득한 숲 한쪽에 둘러앉은 여덟 명의 무
리들 중 단엽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말을 하고 싶어도 겁에 질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혹시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그 소릴 듣고 단엽이 유령처럼 날아올
것 같았다.
호대운이 참지 못하고 호금명을 보며 물었다.
“할아버님, 왜 그러십니까? 소자와 당 낭자를 괴롭힌 시러배 놈
들 중, 바로 그 놈이.......”
호대운은 말을 끝까지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호금명이 그의 아
혈을 점한 다음 그를 허리에 끼고 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전음
하나가 조준광의 귀를 때였다.
- 무조건 도망쳐 와라! 내 뒤를 쫓아 와라.
그리고 그 순간부터 호금명은 쉬지 않고 무려 일백 오십 여리를
달리고 또 달렸다. 얼마나 죽어라고 달렸는지, 요검대와 조준광은
무려 오십 여리나 떨어졌고, 한참 후에야 그들은 호금명을 찾아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너무 놀란 호금명은 그때까지
호대운의 아혈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조준광은 그저 얼떨떨한 표정으로 호금명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
었다.
호금명은 한동안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야 호대운의 아혈을 풀었
다. 아혈이 풀린 호대운이 놀라고 당황한 눈으로 호금명을 보며
물었다.
“할아버님 어찌 된 일입니까?”
호금명은 길게 한 숨을 쉰 다음 호대운의 깨진 머리를 보면서 말
했다.
“그 정도면 하늘이 도왔다. 하늘이 도왔어.”
“무슨 말씀입니까? 할아버님.”
“네가 안 죽은 것은 하늘이 도왔단 말이다. 넌 호구에서 살아 돌
아온 줄 알아라.”
그 말을 듣고 호대운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의 조부를 보고 있
을 때, 조준광이 망설이며 말했다.
“림주님, 저희가 물러서는 바람에 당가가 곤란을 겪으면 차후에
서로 어색해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물론 당가의 능력으로 보아
큰일이야 없겠지만.”
“하하하, 뭐 당가가 어째, 그 놈들 제대로 임자를 만났지, 이제 우
리 청죽림이 사천의 패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조준광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저희가 말입니까? 하지만 사천에는 당가가.......”
“이 미련한 놈아, 당가는 염라대왕을 건드렸으니 곧 풍지박살 나
고 말거다.”
조준광과 호대운은 어안이 벙벙해 있었고, 호금명은 한 숨을 쉬며
호흡을 조절 했다. 놀란 가슴이 조금 진정되자, 호대운을 보면서
사나운 눈초리로 물었다.
“대운이라고 했느냐?”
“예! 조부님.”
“이놈아, 왜 거짓말을 했느냐?”
호대운의 안색이 변했다.
“소자는 무슨 말인지?”
“이노옴.”
고함과 함께 호금명은 자신이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 던졌다. 조
준광이 어렵게 구해 준 가죽 신발은, 바람처럼 날아가서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호대운의 면상을 가격하고 말았다.
호대운은 아픔보다도 놀라움에 당황하였고, 조준광 역시 기겁을
한 채 허리를 숙였다.
호금명은 매서운 눈초리로 호대운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네놈이 아직도 거짓을 말하는구나? 네 놈의 한마디로 인해 우리
청죽림이 멸문의 위기에 처했던 것을 아느냐? 이놈아 네가 상대했던
그 덩치 큰 도적놈이 바로 천살마부 관패이니라.”
호대운의 안색이 파랗게 질리며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
의 악명은 지금도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조준광 역시 자신도 모르게 손이 머리위로 올라갔다. 꼭 어디선가
관패의 도끼가 자신의 머리를 찍어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
이다.
“내가 그 놈 뿐이라면 당가와 함을 합해 어떻게 해 보겠는데, 그
젊은 놈의 새끼는 으흐흐흐.......”
호금명은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려왔다.
호대운과 조준광은 그저 멍하니 호금명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
동안 실성한 듯 헉헉거리던 호금명은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서성
거리더니, 이번에는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당천걸, 당진걸, 네 놈들은 모를 것이다. 자고로 매도 먼저 맞는
사람이 나은 법, 나는 먼저 맞은 덕에 피해갔지만, 네 놈들은 이제
어쩔 셈이냐? 당의려인지 뭔지 그 어린 계집 하나가 가문을 멸망
의 구렁텅이로 모는 구나? 흐흐 덕분에 난 주인 없는 사천성의 패
주가 되겠구나? 관패 나는 너를 믿는다. 그 무식한 도끼로 잘 뽀개
다오. 흐흐흐, 크하하하하.”
호금명을 보는 호대운과 조준광은 먼지 몰라도 자신들이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났다는 사실 하나는 알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신으로
아는 호금명이 두려워하는 인물이 바로 관패의 주공이란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성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어도, 가슴은 도저히 그 현실
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패천이 누구인가? 한때는 용부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안하무인의 인물들이었고, 그들은 그 만한 능력
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명인 무영살이 누군가의
그림자만 보고도 꽁지가 빠지게 도망갔다고 하면 세상 천지에 누가
믿어 주겠는가? 그것도 상대는 겨우 30개 초반의 애송이 무사 아
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흔들던 조준광은 다시 한번 가슴
이 서늘해졌다. 그러고 보니 그 애송이라 했던 인물은 십대 사마
에서도 무공으로 치면 수위를 다투었고, 성질 더럽기로 최강이었던
관패의 주공이라지 않는가? 이건 더욱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인식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 부분을 생각
하고 나자 조준광의 머리는 터질 것 같았다.
‘호대운 공자가 말한 그 사람이 우내 육존이라도 된단 말인가? 아
니 우내 육존이라도 관패가 주공이라 할 수 있을까? 듣기로는 신도
죽이자고 덤빌 개백정이라고 하던데.’
조준광은 아무래도 당분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때 호대
운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조부님, 대체 그 젊은 자식이 누구 이길래....... 우내육존 중 한명
이라도 된단 말입니까? 관패가 누군데 그런 애송이에게 주공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
조준광역시 묻고 싶던 말이라 기대어린 눈으로 호금명을 보았다.
호금명은 조준광과 호대운이 가진 의문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특별히 해 줄 말이 없었다.
천금마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자니, 체면이 영 말이 아니었고,
다른 말로 이해시키자니, 그것도 쉽지 않았다.
호금명은 냉정한 눈으로 말했다.
“우내육존의 시대는 이제 갔다. 그 늙은이들이야 기다리면 이미
죽을 때가 다 된 고물들이고, 그....... 그....... 으으....... 그, 그래 그
놈은 유령신이다. 유령신. 관패가 아무리 개백정이래도 그.......
헉헉, 그 무자비한 놈 앞에서는 어리광이지. 암 그렇고 말고.”
호금명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말을 하는데,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
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한
채, 멍청하게 자신을 보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호금명의 안색이
다시 한번 싸늘해졌다. 그리고 그는 가장 무서운 눈으로 호대운
과 조준광을 노려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앞으로 네가 객점에서 만난 그 두 인간을 보면 무조건 백리 밖으
로 도망쳐라! 혹시 그와 싸운다거나 시비를 걸거나 하는 인간이
우리 청죽림에 있으면, 그 인간의 구족을 못살 시킬 것이며, 나의 직
계 가족이라도 목을 치고 말겠다. 그리고 앞으로 단씨나 관씨에
대한 살수 청부가 들어오면 무조건 거절이다.”
호금명은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기상천외한 말에 조준
광과 호대운의 입은 벌어질 만큼 벌어져 있었다.
청죽림 역사상 이런 일은 없었다.
호남성을 향하는 관도는 인적이 드물었다. 평소 많은 마차들이 붐
볐을 것 같은 관도였는데 별반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차가운 늦겨울 바람은 쌀쌀한 한기를 내포하고 지나는 나그네의
발목을 부여잡는다. 아직 겨울이라 노숙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종종 걸음이었다.
그 관도에 거대한 목관을 짊어진 사내가 걸어가고 있었다.
사내의 분위기는 메고 있는 관과 아주 비슷하게 닮아, 그의 묵직
한 걸음 하나에 큰 사연이 있는 듯 보였다. 그 사내가 걷고 있는
앞으로 약 백여보 앞에는 약 이십여 명의 인물들이 몰려가고 있었다
. 그들의 앞에는 칠성표국이라는 깃발이 바람에 부대끼고 있었다.
칠성표국은 비록 크고 유명한 표국은 아니었지만, 국주 칠성검(七
星劒) 오자인은 악양에서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었다. 특히 인의를
알고 나름대로 대의를 아는 인물로 무공에 비해 그 인물됨으로 더
욱 유명했다. 몰론 진충은 그를 모른다.
칠성표국이 처음 문을 연 것은 팔년 전이고 그때 진충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던 터였다.
표행을 하고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볍게 마련이지만, 현재 칠성표
국의 국주인 오자인의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운이 좋아서 표물을 운송한 바로 그 곳에서, 칠성 표국이 있는 악
양까지 가는 표물을 다시 맡을 수 있었는데, 그 표물이 상당한 액
수에 해당하는 비단과 금괴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다행히 국주인 자신이 직접 나섰고, 믿을 수 있는 표두가 두 명
그리고 표사가 십여 명에 쟁자수가 다섯 명으로 이루어져 어느 정도
안 심은 되었지만, 혹시라도 자신들의 표차에 무엇이 있는지 소
문이라도 나면 큰 문제가 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단 한번 털어서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이 생긴다면 목숨 걸고
달려들 간 큰 도둑들은 지천에 널려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칠성검 오자인은 자신들의 백보 뒤에서 묵묵히 쫒
아오는 이 이상한 사내를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불러다
누구냐고 물어 볼 수도 없고, 피해가기도 애매했다.
표차일행이 사내를 만난 것은 평산현에서 들어오는 길과 만나는
곳에서부터였다.
국주인 오자인은 평산현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철마방과의 마찰을
꺼려 우정 그 곳을 돌아오는 중이었고, 쓸 대 없는 시비를 더 이상
일으키기 싫었던 진충은 간단하게 자신의 실력을 보임으로서 철
마방이 더 이상 자신을 쫒지 않게 하곤, 바로 평산현을 뜬 상황이었다.
진충은 검기로 그들의 혈을 짚는 실력을 보여주어, 그들이 더 이
상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철마방의 방주가 생각이 있는 자라면 쉽게 자신을 쫒아 오진 못할
것이다. 그렇게 평산현을 떠난 후, 중간에 한번 노숙을 하고 길을
떠나, 이른 오전에 칠성표국의 일행을 만나게 되었고, 우연찮게 이상
한 동행이 되어 버렸다.
‘무척 신비한 분위기의 사내다. 대체 저 관에는 누구의 시체가 들
어 있기에 저리 소중하게 다룰까?’
오자인은 그 점이 궁금했다. 나름대로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자
부하는 오자인은 관을 맨 사내가 결코 도적이 아님을 알 수 있었
지만, 세상은 가끔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을 해 할 수밖에 없는 경우
가 있다. 그래서 오자인은 사내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는데, 우선
상대가 무공을 익혔는지 안 익혔는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무공을 닦았다고 하기에는 내 비치는 내공의 힘이 없어 보였고,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나 탄탄한
몸매가 오자인의 어림짐작을 위배하고 있었다.
‘만약 저자가 무공을 익힌 자라면 정말 무서운 고수일지도 모른
다.’
오자인의 생각이었다.
호남성을 반나절 거리에 두고 칠성표국 일행은 자리에 멈추었다.
그들은 자리를 펴고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관을 맨 사내는
무심하게 그 옆을 지나치려 하였다.
오자인은 갑자기 갈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무엇인가 지금 저 사내가 이 곳을 지나치고 나면, 아주 귀한 사람
하나랑 그 연이 없어질 것 같은 기이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특히
가까이서 보니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이 아주 깊고
맑았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은 절대 악인이 아니란 것을 오자인은 경험과
연륜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표행의 옆을 그냥 스쳐가는
것으로 보아도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할 사람은 아닐 것 같았다.
잠시 주춤하던 오자인이 사내를 불렀다.
“이보시오, 바쁘지 않으면 함께 식사나 하고 가시오.”
진충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오자인을 보았다.
상대가 호의로 한 말임을 알았다. 진충은 잠시 망설였다. 혼자 관
을 메고 가는 것은 눈에 너무 뛰지만, 저들과 묻어가면 상당히 도
움이 될 것 같기도 했다.
오자인은 사내가 망설임을 보이자, 자리를 하나 마련해 주면서 그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진충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와 두 손을 모아서 정중하게 읍을 하며
인사를 하였다.
“관이라고 합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정중하고 예의 바른 그의 모습을 보면서 오자인은 자신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기뻐하였다.
그는 흐믓한 미소를 지으며 역시 두 손을 모았다.
“오자인이라고 합니다. 칠성표국의 국주입니다. 마음 편히 앉으십
시오.”
진충은 상대가 표국의 국주란 말에 조금 뜻밖이란 표정을 지었다.
호탕하게 생긴 오자인은 뚜렷한 눈썹과 크고 둥근 눈을 지니고 있어,
누가 보더라도 호감 가는 모습이었다.
진충은 다시 한번 표두들과 표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관을 그 옆
에 내려놓은 다음 자리에 앉았다.
오자인과 표두들은 아주 경건한 태도로 관을 내려놓는 진충을 보
면서 사뭇 관에 대해서 궁금함이 치밀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따로 물어볼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한 탓이기도 했지만, 사내의 분
위기가 그것을 가로 막고 있었다.
관을 내려놓는 진충을 보면서 오자인은 관 뒤에 가로로 묶여 있는
검 한 자루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정강이 안쪽에도 각각 한
자루씩의 단검이 바지 안쪽에 묶여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 중
외쪽 정강이 안쪽에 있는 검은 단검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큰 편이었다.
‘검사다. 그럼 무공을 익혔다는 말인가? 한데 내공을 익히진 못한
것 같다. 그럼 검격을 익힌 것인가? 아니면 그냥 호신용?’
오자인은 거기까지만 추측하기로 했다. 세상의 이치가 지나친 추
측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진충이 앉고 나자 쟁자수들이 준비한 음식이 차래로 그들의 앞에
놓여졌다. 준비한 음식들은 뜻밖에 푸짐했고, 무엇보다도 잘 익은
죽엽청의 향기는 진충의 울대를 위 아래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아
쉽다면 아직 서늘한 바람과 이파리가 없는 앙상한 가지들이 무엇인
가 삭막한 분위기를 만들어 준 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술이 몇 순
배 돌아가자, 표두들과 표사들은 서로 이런 이야기 저런 정담들을
주고받으며 늦겨울 날씨를 무색하게 하였다.
한 동안 정담을 주고받던 때였다. 나이 육순을 바라보는 칠성표국
의 표두 유노삼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올해도 호위제를 보러 가긴 글렀구나? 특히나 올해는 볼거리
도 많고 재미있는 일도 많을 텐데. 참으로 아쉽다.”
유노삼의 한탄을 들은 젊은 표사 한명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표두님은 그 나이에 거기 가서 무얼 하시려 합니까? 나 같이
젊은 놈이 가야 무엇인가 신나는 일이 있을 텐데. 이거야 목구녕이
포도청이라, 에구 내년이나 어떻게 가 볼까 생각 중입니다. 물론
국주님이 휴가라도 좀 주신다면....... 헤헤.”
표사가 오자인의 눈치를 보면서 이야기를 흐리게 마무리 하자, 오
자인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전칠, 내년엔 우리 함께 가서 보세나, 그러니 그때까지는 열심히
일이나 하게.”
순간 표두들과 표사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호위제가 무엇인지 모르는 진충은 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오자인
과 표사들을 보았다. 그러나 굳이 묻고 싶지는 않았다.
모두들 호위제에 대해서 한동안 이야기꽃을 피울 때 진충은 묵묵
히 그 옆에 앉아서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 호위제가 누군가를 기리기 위한 제사겸 축제고, 용부
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용부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진충은 바싹 긴장하기 시작했다.
오자인은 진충이 호위제에 대해서 상당히 관심을 지니고 듣는 것
을 보자 그것으로 만족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객이 주인의 이야기가 지루하면 그것은 참으로 실례라고 할 수 있
었다. 다행히 한 무리에 끼어 든 낯선 사람이 자연히 흥미 있을 이
야기를 하게 되면 생소함이 덜 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기 불편하진
않을 것이다.
오자인이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유표두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였
다. 유표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호위제 이야기를 하니 말이네만, 참으로 아까운 대협 한 분이 젊
은 나이에 요절을 했네 그려. 그렇지 않은가?”
마지막에 유노삼이 역시 같은 표두인 강운이란 사십대의 대한을
보면서 물었다.
유노삼은 칠성표국의 표두들 중에 나이가 가장 많았고, 강운은 같
은 표두였지만, 유노삼을 존경하고 잘 따르는 후배 표두였다.
강운은 입가에 고소를 짓고 말했다.
“형님도 참, 그런 이야기를 해서 무엇 합니까? 사실 살아 계신다
면야 꼭 한번 뵙고 싶은 분이지요. 특히 풍백과 일대일로 겨루고
천마대를 몰살 시키다 시피 하던 그 모습을 못 본 것은 참으로 한
이 됩니다.”
진충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제야 지금 이들이 이야기하는 사
람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설마 했었는데, 풍백이란 이름이 나오자
진충은 온 몸에 소롬이 돋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호
위제라니, 진충은 아득한 느낌이 엄습해 왔다. 그러나 가까스로 마
음을 진정시키고 심호흡을 하였다.
‘주공이 어떤 분인가? 무엇인가 잘못 되었다. 그렇게 쉽게 돌아가
실 분이 아니다. 특히 주모님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아시는
분이 자신의 생명을 쉽게 포기할 분이 아니다. 그럼 호위제는 무
엇이고 저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도망을 다니며 세상 소식에 어두웠던 진충은 마른 침을 삼키고 애
써 담담한 표정으로 유노삼을 보며 물었다.
“혹시 좀 전에 말한 그 분이 사공운 대협을 말하시는 것이 아닙니
까?”
유노삼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야 물론일세, 사공운 대협이 아니라면 그 누가 호위제의 주인
공이 될 수 있겠는가?”
진충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한 동안 말을 하지 못한 채 그 자
리에 움직이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차츰 그의 가슴을 차고 오르는
아픔이 그를 견디지 못하게 만든다.
‘주공, 정말 변을 당하신 것입니까? 그럼 주모님은, 그리고 나는
어쩌란 말입니까?’
진충은 가슴을 헤집고 나오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채, 고개를 숙
였다. 그의 눈가에 물기가 번지고 있었다.
잠깐이지만 숨을 몰아 쉰 진충은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이를 악물었다.
‘담사우, 기다려라! 만약 주공께서 정말 너에게 변을 당하셨다면,
내가 죽을 때까지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너를 괴롭혀, 네
명대로 살다 죽게 하진 않겠다.’
진충은 이를 악물었다. 숙인 그의 고개를 쫒아 진한 살기가 베어
나와 바닥을 치고 사라진다. 그리고 조금 더 그 자세로 있던 진충의
고개가 흔들렸다.
‘아니다. 세상이 뭐라 해도 나는 주공을 믿는다. 담사우 따위에게
쓰러지실 분이 아니다.’
진충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엔 믿음이란 단단한 바위가
굳건하게 앉아 있었다.
첫댓글 즐독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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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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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