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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12일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에제 1,2-5.24-28ㄷ
복 음 : 마태 17,22-27
제자들이 22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24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25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26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늘부터 두 주간 동안 평일에는 에제키엘서를 읽습니다.
에제키엘은 대략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기 오 년 전쯤부터 예언 활동을 시작하여,
멸망하고 십오 년쯤 지난 때까지 활동합니다.
그는 멸망 전에 사람들이 설마 예루살렘이 파괴되지는 않으리라고 믿던 때에 멸망을 선포하고,
멸망한 뒤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구원을 선포하여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거스르는 예언자였습니다.
처음 그가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던 때는,
이미 바빌론이 한 번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여호야킨 임금을 비롯하여
꽤 많은 사람을 바빌론으로 끌고 간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지급의 상황이 다만 일시적인 어려움일 뿐이라고,
유배 간 이들이 곧 돌아오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제였던 에제키엘은 사회의 지도층에 속하고,
그래서 그도 유배를 가서 “칼데아인들의 땅”(에제 1,3)에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칼데아인들의 땅”에서
주님의 말씀이 에제키엘에게 내리고,그는 거기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오늘 독서의 네 생물들에게는 날개가 있고, 또 바퀴가 있습니다.(1,15. 21절 참조)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만 머물러 계시는 것이 아니라,
날개와 바퀴가 달린 어좌를 타시고, 어디라도 계시며, 어디에서도 당신 말씀을 내리십니다.
“칼데아인들의 땅”에 가서 살고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거기에서도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질 때가 머지 않았습니다.
왜 성전이 무너져야 할까요?
성전 파괴는, 하느님을 성전 안에만 가두어 두는 사람들의 생각을 허물어뜨릴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글을 쓰기 위해 산사에 머물던 시인이 어느 날 택배를 받았습니다.
기다렸던 물건이었고, 빨리 이 물건을 볼 생각으로
택배 상자의 끈을 가위로 자르려고 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던 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끈은 자르는 게 아니라 푸는 것이다.”
자르는 것이 편할까요? 아니면 푸는 것이 편할까요?
당연히 자르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그런데 자르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게 하는 스님을 보며,
별걸 다 나무라신다고 생각하면서 힘들게 매듭을 풀었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잘라버렸으면 그 끈이 쓰레기가 될 뿐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풀면 나중에 다시 쓸 수 있지 않느냐?
자르는 것보다 푸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인간관계처럼 말이다.”
택배 끈을 풀면 다시 사용할 수 있지만 잘라버리면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의 인간관계도 정말 그런 것이 아닐까요?
인간관계를 아예 잘라버리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와 맞지 않는다고, 자기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자기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듯이 관계를 잘라버리고 끊어버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택배 끈도 풀면 계속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관계 역시 풀어나갈 때 비로소 연결의 끈이 이어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관계를 너무나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단 한 명의 예외 없는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성전 세’ 논란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논란은 예수님도 성전 세를 내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사제와 라삐는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또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어떤 신원으로 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실 예수님의 몸은 성전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성전의 주인이 세금을 낸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사제와 라삐보다 훨씬 더 큰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때가 되지 않은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불필요한 논쟁과 충돌을 피하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또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으려는 것이 아니라,
계속 푸시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이기에 자기를 낮춰서라도 관계를 푸시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을 보면서, 우리의 사랑을 바라보게 됩니다.
너무 쉽게 관계를 잘라버리려고 하지 않았나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따른다면,
우리의 이런 모습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관계는 푸는 것입니다.
적절한 순서와 아량이 필요하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행동이 좋지 않은 사람은 서로 상종할 수 없으니,
이쪽에서 삼가서 피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상대가 되지 않으면 때로는 기다려야 하는 아량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전세를 거두는 이가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금은 로마 총독이 로마제국을 위해 거둬들이던 세금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징수하던 인두세였습니다.
스무 살 이상 성인 유다인 남자라면
누구나 해마다 영혼의 속죄를 위해서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임금들은 관세나 인두세를 남에게서 받아내지
자기 가족에게 부여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성전의 참 주인이시며
“성전보다 더 큰 분”(마태12,6)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속죄받을 필요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세도 바치셨습니다(마태17,27).
성전의 참 주인이신 분께서 성전세를 내신 까닭이 어디 있을까요?
그야말로 요즘 표현으로 스캔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세금을 내셨는데
예기치 않았던 돈으로 성전 세를 내셨습니다.
호수의 고기를 잡아 그 입안에 있던 돈으로 베드로의 몫과 주님의 몫으로 주도록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다.’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모습에는 손상을 입지 않으시면서도
하느님께는 영광이 드려지며 인간의 비위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 모습에 참 지혜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꼬인 사람에게는 우선은 한발 물러서는 것이 좋습니다.
원리(原理)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실천하며 살아가는 데는 적절한 순서와 아량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많은 일들을 접하면서
그때마다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은지 신중히 고려해야 할 상황들이 있습니다.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하거나 일관되게 행동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릇이 되지 않는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 없습니다.
더더욱 비굴하게 물러서는 것 같이 보이는 때 정말 참 지혜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때로는 비유를 들고, 때로는 비유를 해설해 주시던 예수님,
손가락에 침을 발라 눈을 닦아주시고, 귓구멍을 열어주시던 예수님,
일어서라고 하시며 손을 잡아주시던 예수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 하시던
사랑의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내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넉넉한 마음으로 지혜를 갈망하는 날 될 수 있길 희망하며
눈높이를 맞춰가는 가운데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일 것이지만,
결국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사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계획, 하느님의 승리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선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미리 알려주심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그저 우연히 발생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섭리임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당신께서 하느님의 그 계획에 기꺼이 동의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제자들에게 수난에 대한 준비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시는
제자 교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시는 장면입니다.
‘성전 세’는 모세가
“누구나 자기 영혼의 속죄를 위하여 주님께 반 세겔을 내야 한다.”(탈출 30,13)고 말한 대로,
영혼과 육신의 속죄를 위해 내는 세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금은 자신이 다스림을 받는 왕에게 내는 것임을 일깨워주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니
‘성전 세’를 면제 받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곧 ‘어떻게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집을 위한 세금을 낼 수 있겠느냐?’는 반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께서 성전의 주인이심을,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도 ‘성전 세’로부터 자유로움을 밝히십니다.
그렇게 하시면서도 ‘성전 세’를 내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입니다.
자신이 옳긴 하지만 무모한 분쟁을 가질 필요가 없기에,
지혜로운 방법으로 세금을 내기로 하십니다.
곧 세금 낼 돈을 호수로 가서 낚시를 해서, 먼저 잡힌 물고기의 입을 벌려
거기에 들어있는 은전으로 세금을 내라고 하십니다.
이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당신의 놀라운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당신께서는 땅에서도 동전을 취하실 수도 있었지만, 호수에서 그 기적을 이루십니다.
‘물고기’는 교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당신 생명의 호수를 헤엄쳐 다니는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당신 사랑의 파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물고기입니다.
당신 그물에 걸려든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그리고 제 입에는 당신 형상이 새겨진 고귀한 동전이 물려있습니다.
당신 말씀이 물려있습니다.
제가 당신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 생명의 말씀이 저를 먹여 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영혼을 당신께 바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마태 17,27)
주님!
저는 당신 생명의 호수를 헤엄쳐 다니는 한 마리의 물고기이오니,
당신 형상이 새겨진 고귀한 동전을 입에 물고,
당신 파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우리가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따라서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루가복음 19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자캐오는 구원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구원받았음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자캐오는 행위로써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은 믿음과 그 믿음을 드러내는 행위로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죽음 이후 심판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 땅에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늘어나고, 신자가 늘어나지만,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없는 구원을 바라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재물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구원의 선물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건강하게 지내고, 원하는 게 채워지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믿음으로 하느님께서 변하기를 바라는 건 아닐까요?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구원은 명예, 재물, 권력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갈증이 나기 마련입니다.
그것들을 채우기 위해서는 양심을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들을 채우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던 아합왕이 그랬습니다.
충실한 부하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다윗이 그랬습니다.
동생 아벨을 죽였던 카인이 그랬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낙원에서 쫓겨났던 아담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보다, 나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게 쉽다.”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세상의 방법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몹시 슬퍼하였습니다. 왜일까요?
제자들은 죽음을 통한 구원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명예와 재물 그리고 권력을 줄 거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와 죽음이 없는 구원은 허상입니다.
믿음을 사랑으로 드러내지 않는 구원은 풀잎 끝에 맺힌 이슬과 같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께 우리도 십자가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청하며
예전에 읽었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놓아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성전 세
조욱현 토마 신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24절)
유대인들은 모두가 똑같이 이 성전 세를 반 세켈을 바쳤다(탈출 30,13 참조).
여기서 반 세켈을 내는 것은 자신을 바치는 것을 상징하며 세켈은 구원받은 사람을 상징한다.
주님께서도 성전 세를 내라는 요구를 받으신다.
성전 세를 바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약한 우리가
하느님의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복음에서 한 세금 징수원이 베드로에게 와서 예수께서 성전 세를 냈는지를 물었을 때
베드로는 내겠다고 대답하고 예수께 그 상황을 보고하였다.
베드로의 말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므로
다른 사람은 세금을 내어도 우리는 세금을 면제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위한 세금을 낼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셨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신다.
그것은 자신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인 것으로서
신앙인은 타인에게 표양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세금 낼 돈은 어디서 구할 것인가?
복음에서 보면 낚시를 해서 첫 번째 잡히는 물고기의 입을 벌리면 은전이 들어있을 테니
그것으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세금을 내라고 하셨다.
물고기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 물고기는 한때, 불신앙과 미신의 물속 깊은 곳에 사로잡혀
세속적 쾌락이라는 폭풍과 불행에 싸여 있었다.
이제 물고기는 말씀의 가르침이라는 사도들의 낚싯바늘과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1베드 2,9) 주시는
말씀의 낚시 그물에 의해 하느님께로 높이 올려진다.
물고기 입에서 동전을 취하여 세금으로 내도록 하셨다.
예수께서는 땅에서도 동전을 취하실 수도 있었지만, 호수에서 기적을 이루신다.
우리는 모두 삶의 씁쓸한 혼돈으로부터 건져진 물고기이다.
우리는 사도들의 낚시 그물에 잡혀 온 물고기와 같다.
이 물고기들의 입에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동전이 물려있다.
이 동전은 우리 영혼의 빛과 육신의 빚을 갚는 데 사용되었다.
유대인들과 다른 민족들의 빚,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의 빚을 갚았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이 세금을 내라고 했기 때문이다(탈출 30,13).
성전 세를 받으셔야 할 주님께서 성전 세를 바치셨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와 관련해서 베드로 사도에게 아주 특별하고 기이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오늘 보여주시는 기적은 대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독특한 이적 사화는 아마도 후대에 가필(加筆)된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제정해놓은 편협하고 제한된 제도나 관습으로부터
철저하게 자유로운 분이심을 강조하는 기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목숨을 걸고 성전 세를 징수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 세가 어떤 사람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구린 관례나 시궁창 냄새 나는 악습을 완전 개무시하는 한 표현이 지니고 있는
돈주머니에서 성전 제를 내지 말고 물고기 속의 돈으로 성전 세를 바치라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는 세금 징수에 목숨거는 유다인들에게 큰 엿을 하나 먹이신 것입니다.
카파르나움 세금 징수원은 예수님께 성전세를 요구했는데,
사실 이것처럼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다시 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이스라엘의 주님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드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도 애지중지하는 성전의 주인이십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바치는 성전세를 수령하실 분은 사제나 랍비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세 징수원은 기가 막히게도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성전세를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는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서글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셨던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명하신 것이
갈릴래아 호수에 가서 낚시를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세를 바치셔야 할 분이 아니라 성전세를 받으셔야 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굳이 까칠한 유다인들의 비유를 건드릴 필요가 없으니
베드로 사도에게 꽤 웃기는 방법으로 돈을 마련해 성전세를 바치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번 예수님의 지극한 겸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왕 중에도 한참 아래쪽의 왕인 세상의 왕에게 겸손하게 세금을 바칩니다.
큰 나라 전체를 다스리는 황제가 한 고을을 다스리는 영주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부여해 주신 권한을
단 한 번도 남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겸손하게 하느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바로 그것만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라가십니다.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17,24)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종교인의 과세가 시행되고 있지만 아직도 미흡한 점이 많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종교인의 과세는 정의와 형평성에서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서에도 세금에 관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태22,17.21)라고
응답했다는 일화입니다.
여기서 황제의 것, 일명 카이사르의 것이란
다름 아닌 당시 통용 화폐,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은전을 말합니다.
또 다른 일화는, 오늘 복음의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17,24)라고 묻자,
베드로가 “내십니다.”(17,25)라고 답했다는 내용입니다.
아무튼 베드로의 답변을 통해 보면 두 경우 다 세금을 내셨던 것 같습니다.
수난 예고와 성전세 납부에 관한 일화는 분명히 별개의 사안처럼 보이는데
왜 마태오 사가는 두 번째 수난 예고와 성전세 납부 문제를
의도적으로 서로 연결했는지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마태오복음은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복음이 기록될 당시에 성전은 이미 불타 없었으므로 성전세 또한 납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세상의 임금들이 자기 자녀들에게는 관세나 인두세를 거두지 않는다.”(17,25)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과 성전과의 관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느님 신앙의 표징이자 정점인 장소이며,
모든 율법과 예언의 집합소입니다.
따라서 율법에 의해 제관들을 제외한 모든 유다인은 만 20세부터
반 세겔의 성전세를 바쳐야 하는 규정은 이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전뿐만 아니라 모든 율법과 예언 위에 군림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인 당신에게 성전세를 징수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들이 바로 새로운 성전이기 때문이십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2,19)하고
말씀하신 의도도 이런 맥락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을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당연히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는 셈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지 않으시고
때로는 실정법에 권위를 양보하십니다.
이는 불필요한 갈등과 문제를 야기하고 싶지 않은 의도도 있겠지만
아직 당신의 때가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봅니다.
당대 성전세는 이스라엘 은전 반 세겔이었다고 합니다.
스승님도 성전세를 낸다고 베드로가 대답했기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17,27)라는
말씀을 통해 성전세를 내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사실 불교계나 개신교의 일부 스님들과 목사들을 제외하고
사실 많은 종교인은 경제적인 어려움에 놓여 산다, 고 합니다.
개인이 할 수 없으면 소속 종파에서 대신 납부하는 방안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세금은 형평과 정의의 맥락에서 접근해야 하며, 종교세는 결코 성역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라. 주님은 기름진 밀로 너를 배 불리신다.” (시147,12.1참조)
수난 예고와 성전세의 관계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내용이 한데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에 관한 내용이며,
다른 하나는 성전세를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들이 누리는 자유에 관한 말씀이다.
우선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예고 말씀은 공관복음 모두에 보도되지만
마태오는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마르코와 루카는 그 말씀의 뜻을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였다고 한다.(마르 9,30-32; 루카 9,44-45)
반면에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마태오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매우 슬퍼하였다는 말로 고쳤다.(23절)
이로써 마태오는 예수님의 제자교육이 한 단계 진척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제자들의 귀엔 수난과 죽음은 크게 들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부활은 그냥 스쳐 지나가기 때문이다.
크게 들리는 것에 마음이 가기 마련이다. 그러니 슬퍼할 수밖에 없다.
제자들이 매우 슬퍼하였다는 것은 스승의 다가올 운명에 대한 애도이다.
예수께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자신의 수난, 죽음, 부활을 예고하시므로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운명에 대한 애도이다.
그러나 그 애도 뒤편에는 안타까움과 섭섭함이 숨어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을 것인데 하는 마음 말이다.
이 마음이 제거되지 않는 한 예수님께서 가야 하실 길과,
제자들이 가고 싶은 길 사이에 갈등은 언제든지 생길 수 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예고와 연결된 성전세 납부 문제는 마태오복음에만 수록된 고유자료이다.
기원후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기 전까지
제관들을 제외한 20세 이상의 모든 유대인 남자들은 일년에 한 번 성전세를 바쳐야 했다.
따라서 예수님은 물론 베드로도 성전세를 내야 했다.
성전세는 이스라엘 은전 반 세겔이었다.
성전세를 징수하는 사람의 물음에 베드로도 예수님도 성전세를 낸다고 말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처음 낚아 올린 물고기 입 속에서
두 사람 몫의 성전세 한 스타테르(이스라엘 은전 한 세겔)를 발견한 것이다.
이 사건이 베드로에게는 기막힌 일이었겠지만, 예수께는 대수가 아니다.
사람은 다 그렇지 않더라도 세상 만물은
언제나 말씀이신 예수님을 위해 쓰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베파게의 당나귀: 마태 21,2-3, 최후 만찬을 위한 방: 마르 14,13-16 등)
그렇다면 왜 마태오가 두 번째 수난 예고의 말씀과
성전세 납부 문제를 서로 붙여놓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언뜻 보기에 수난 예고와 성전세 납부는 분명히 별개의 것이다.
그러나 마태오가 이 두 가지를 의도적으로 한데 묶어 놓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마태오복음이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즉 복음이 기록된 당시에 성전은 이미 불타고 없었으므로 성전세 또한 없었다.
세상의 임금들이 자기 자녀들에게는 관세나 인두세를 물리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과 성전과의 관계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야훼 신앙의 표징이자 정점이며,
모든 율법과 예언의 집합이다.
따라서 율법에 의해 제관들을 제외한 모든 유다인은 만 20세부터
반 세겔의 성전세를 바쳐야 하는 규정은 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야훼의 아들로서 성전뿐만 아니라 모든 율법과 예언 위에 군림하신다.
하느님께서 아들에게 성전세를 징수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들이 바로 새로운 성전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하신 말씀도 여기에 근거한다.
(요한 2,14-21; 마태 21,12; 26,61; 27,40; 마르 14,58; 15,29)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을 사람들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는 셈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권리만을 찾지 않으시고 때로는 實定法에 권리를 양보하신다.
입법자와 집행자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그리하셨다지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이다.
때가 오면 새로운 성전이 지어져 하느님께 바쳐질 것이며,
모든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무한한 자유가 선포될 것이다.
이는 人子가 자신의 죽음으로 취득한 자유이며,
아버지의 뜻을 죽기까지 지켜낸 아들에게 선사 된 자유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는 누구나 이 무한한 자유를 나누어 누리게 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