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상드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혼자 남게 된 상드는
카지밀 뒤드방 男爵(Baron Casimir Dudevant, 1804-1876)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다.
남작은 보기드문 미남이었으며, 그녀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남편을 사랑했고, 1남 1녀를 낳았다.
그러나 아이를 낳은 이후, 남편에 대한 상드의 사랑은 식어갔다.
남편은 시골 지주 신분에 만족한 채, 술과 사냥에만 빠졌다.
상드가 좋아하는 문학이나 음악에 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게다가 아내를 배신하고 집에서 데리고 있는 하녀에게 손을 댔다.
이러한 남편에게 情이 떨어져버린 상드는 처녀시절 친구인 의학자 스테판(Stephen)의 연인이 되어
남편 몰래 파리에서 밀회를 즐기기도 했다.
상드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람은 금발의 젊은 학생 줄 상드(Joule Sand)였다.
스테판도 미청년이었다고 일컬어지는 것을 보면, 상드는 화려한 미남을 좋아했던 듯 싶다.
줄 과의 사랑이 계기가 되어, 상드는 남편과의 별거를 단행한다.
남편과 어린 자식은 시골의 저택에 남겨둔 채 파리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한때 카르멘(Carmen)의 작가 메리메(Prosper Merimee, 1803-1870)와 염문을 뿌린 뒤,
상드는 조숙한 시인 뮈세(Alfred de Musset, 1810-1857)와 만난다.
뮈세는 겨우 23세였으나 지나치게 예민한 그의 신경은
술이나 도박, 여자에 탐닉하는 나날 속에서 깊은 번민에 휩싸여 있었다.
상드의 넓은 가슴이야말로 자신을 쉬게 해줄 유일한 구원이라 확신한 뮈세는
자신의 마음을 상드에게 적어 보냈다.
이미 29세가 된 상드는 얼마동안은 그의 구애를 거절했으나,
그를 받아들여 두 사람은 함께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이탈리아 여행은 참담하게 끝나고 말았다.
뮈세 역시 외모는 미청년이었으나, 그 근성만은 그들과 전혀 달랐다.
애정문제에 있어서 상드가 하자는 대로 순순히 따라오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강한 개성은 쉴새없이 부딪히며 불꽃을 튀겼고,
두 사람의 싸움에서 뮈세가 번번히 밀렸으며 결국 뮈세는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게 되었다.
상드가 피아노의 詩人이라 일컬어지는 쇼팽(Chopin, Frederic Francois, 1810-1849)과
처음으로 만난 것은 뮈세와 결별한 이듬해였다.
병약한 쇼팽의 애처로운 모습은 상드의 母性愛를 흔들어놓았다.
쇼팽에게는 약혼자가 있었고, 상드 역시 나이 어린 연인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급속도로 사이가 가까워진다.
이들은 결국 다른 두 사람을 동반하여 함께 지중해에 떠 있는 마요르카 섬(Mallorca I.)으로 출발한다.
마요르카 섬, 마르세유, 상드의 영지인 노앙(Nohant─Vic)의 저택에서 약 10년에 걸쳐 상드와 쇼팽은 함께 살았다.
쇼팽은 인후 결핵(結核, tuberculosis)에 걸려 있었고,
병세는 악화되었지만 6살 연상의 강인한 생활력을 지닌 여성의 보살핌 속에서 수많은 명곡을 낳았다.
상드의 마지막 연인은 13살 연하의 조각가 알렉상드르 망소(Alexander manseau)였다.
망소는 상드의 좋은 이해자이자 협력자였으며, 그녀를배신하는 일 없이 지순한 사랑을 바쳤다.
그러나 상드의 나이 61살에 망소는 병으로 죽게 된다.
망소가 세상을 떠나 지 11년 후, 72세의 생일 한달 전에 상드도 세상을 떠난다.
그녀는 '사랑의 요정'(La Petite Fadette, 1849) 등 몇 개의 뒤어난 작품을 남겼지만,
지금은 뮈세와 쇼팽을 성공시킨 여인으로서 그 이름이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상드와 관련된 '드메 신드롬'(Demers syndrome)이란 말이 있다.
이는 年上女 - 年下男이 커플을 이루는 풍조를 이르는 것으로
19세기 초 파리에 살던 청년 드메가 조르주 상드 등 연상의 여인에게만 사랑을 고백하고 다녔다는데서 유래하며,
근래 우리주변에도 그러한 文化가 확산되어 가고 있다.
조르두 상드는 이른바 전원소설과 숱한 연애 사건으로 유명합니다.
결혼을 하긴 했는데요.. 남편이 너무 착해서 싫증을 느끼고 바람을 핍니다.
처음에는 젊은 행정관. 그다음은 이웃남자, 그다음은 친구.. 프로스페르 메리메, 알프레드 드 뮈세, 프레데리크 쇼팽 등등 엄청나죠;;
상드는 베리의 라샤트르 근처에 있는 노앙의 할머니 집에서 자랐다.
이곳에서 그녀는 시골을 깊이 사랑하고 이해하게 되었는데,
이런 애정과 이해는 그녀의 작품 대부분의 특징이 되었다.
1817년에 그녀는 파리의 수녀원으로 보내졌고, 이곳에서 신비주의에 열광했다.
이 열정은 곧 줄어들었지만 그녀에게 오랜 흔적을 남겼다.
1822년에 그녀는 카지미르 뒤드방 남작과 결혼하여 몇 년 동안은 행복하게 지냈다.
그러나 착하지만 다소 둔감한 남편에게 곧 싫증을 느낀 그녀는
처음에는 젊은 행정관과 나눈 정신적인 우정 속에서,
그리고 그다음에는 이웃 남자와 나눈 열정적인 밀애에서 위안을 찾았다.
1831년 1월에 그녀는 노앙을 떠나 파리로 가서
〈피가로 Le Figaro〉지의 중역인 앙리 드 라투슈와 좋은 친구가 되었다.
이 언론인은 그녀가, 쥘 상도와 함께 쥘 상드라는 필명으로 쓴 기사를 신문에 실어주곤 했다.
1832년에 그녀는 쥘 상도와 관계 없이 혼자 쓴 소설 〈앵디아나 Indiana〉를 발표하면서
조르주 상드라는 새로운 필명을 채택했다.
그녀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이 소설은
아내를 억지로 남편에게 묶어놓는 사회적 인습에 열렬히 항의하는 한편,
불행한 결혼생활을 버리고 사랑을 찾는 여주인공을 옹호하고 있다.
자유분방한 교제라는 이상은 〈발랑틴 Valentine〉(1832)·〈렐리아 Lelia〉(1833)에서
좀더 광범위한 사회적 관계와 계급관계에까지 영역을 넓혔다.
상드는 농부나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많이 썼는데, 〈발랑틴〉은 그 첫번째 소설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상드와 연애관계를 맺은 남자들의 명단은
차츰 늘어나, 급기야는 프로스페르 메리메, 알프레드 드 뮈세, 프레데리크 쇼팽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이런 태도 때문에 상드는 애인을 차례로 바꾸며 그들의 견해에 맞추어 자신의 철학과 정치관을 바꾼
이상성욕자라는 인상을 일반에게 심어주었지만,
이런 관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상드는 한 남자한테서 완벽에 가까운 무엇인가를 찾아냈다고 여겨지면,
그와 여러 해 동안 동거하면서 애인이라기보다는 어머니 같은 애정으로 상대를 보살폈다.
예컨대 상드는 쇼팽이 말다툼 끝에 자기 곁을 떠날 때까지 8년 동안 쇼팽과 동거했다.
상드는 뮈세의 회의주의적 견해나 쇼팽의 귀족적 편견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반면,
애인이 아닌 철학자 피에르 르루의 견해는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렐리아〉·〈모프라 Mauprat〉(1837)·〈스피리디옹 Spiridion〉(1839)·
〈리라의 7현 Les sept Cordes de la lyre〉(1840) 등 초기 작품이
대부분 그녀와 관계를 맺은 남자들의 영향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결국 상드는 전원소설에서 자신의 진정한 형식을 발견했다.
이 전원소설들은 평생 동안 계속된 시골에 대한 애정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에서 주로 영감을 얻었다.
〈악마의 늪 La Mare au diable〉(1846)·〈사생아 프랑수아 Francois le Champi〉(1848)·
〈어린 파데트 La Petite Fadette〉(1849)에서는
조르주 상드 작품의 낯익은 주제(인습과 계급의 장애를 뛰어넘는 사랑)가 낯익은 베리의 시골을 무대로 하여
고장의 자부심을 되찾았다.
이 시골 이야기들은 아마 상드의 소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일 것이다.
말년에 상드는 나무랄 데 없는 도덕성을 가진 보수주의적 소설과 희곡을 썼다.
후기 작품 가운데 기억될 만한 작품은 자서전인
〈내 삶의 이야기 Histoire de ma vie〉(1854~55)와 상드가
손자들을 위해 쓴 단편소설집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 Contes d'une grand-mere〉(1873)뿐이다.
상드가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고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위대한 작가로서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곧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상드는 너무 많이, 그리고 너무 빨리 글을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확실히 상드는 놀랄 만큼 유창하게 글을 썼다. 작가로서 상드는 이상주의자였고,
회고록에서는 현실의 불쾌한 측면에 눈을 감은 반면 소설에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순결하고 매력적인 인물들을 창조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그러나 상드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고,
어린이 같은 낙천주의와 삶에 대한 천진한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소설들이 동화 같고
주인공인 농부들이 선량하고 친절하며 행복한 결말을 맺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상드는 이렇게 선언했다.
"소설이 반드시 현실의 표상일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