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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에제 2,8─3,4
복 음 : 마태 18,1-5.10.12-14
1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5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10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마태오복음서 18장은 교회의 삶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읽은 어린이에 관한 말씀 다음에는
그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고,
그다음에 다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대한 말씀 다음에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니 여기에서의 문제는, 나 혼자만 죄를 짓지 않고
나 혼자만 구원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백 마리 가운데 나를 포함한 아흔아홉 마리가
길을 잃지 않고 집으로 잘 돌아갔다고 하여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받아먹은 에제키엘에게도,
동족에게 가서 경고하라는 사명이 주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에게, 그가 경고를 하지 않는다면
악인이 죽은 책임을 그에게 묻겠다고 하십니다.
오래전 일이 떠오릅니다.
어떤 신부님과 꽤 먼 길을 가던 중에, 작은 휴게소 같은 가게에 들렀습니다.
가게에 있던 자매님은 자기가 오래전부터 냉담 중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그 자매님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결국 고해성사를 보게 하였습니다.
그때 저에게는 솔직히 신부님이 너무 강요하는 것처럼 보였고,
자매님은 그 자리에서 성사를 보아도 내일부터 다시 냉담을 할 텐데
괜히 마음에 걸리는 일을 더 만드는 것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십 년도 더 지난 그 일이 왜 이렇게 뚜렷이 기억날까요?
그 일을 저만 기억하고 있을까요?
그 자매님도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요?
혹시 그 뒤에 또다시 냉담하였다 하더라도,
그날의 기억은 이 자매님을 계속 교회로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그 신부님의 모습에서 저는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를 보았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난 7월부터 계속 바쁜 일정이었습니다.
7월 15일부터 27일까지 튀르키예, 그리스 성지순례를 다녀왔고,
지난 8월 2일부터 4일까지는 제가 소속되어 있는
연수지구 유소년 연합 캠프가 있었습니다.
(제가 연수지구 유소년 지도신부라서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8월 5일부터 9일까지는 서품 동기 은경축 기념 일본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이 모든 날짜도 길지만 제가 없는 시간을 위해 미리 준비했던 시간,
그리고 다녀와서 밀려 있는 일을 하느라 정신없을 정도로 바쁜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모든 일정을 마치고 밀린 일도 어느 정도 정리하면서 어제는 푹 쉬려고 했습니다.
월요일 새벽 미사를 마치고 곧바로 침대로 들어가서
하루 종일 잠만 자야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잠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피곤하니까 잠을 자야 해.’라고 머리에서 말하는데,
점점 정신이 맑아지면서 해야 할 일이 떠올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는 온종일 책 읽으며 공부하고, 또 글을 쓰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더 피곤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더 힘이 나는 것입니다.
사실 피곤하면 쉬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번아웃이 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는 정말 아무것도 안 해야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가 필요할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새로운 변화를 계속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냥 세속적인 과거의 습관적인 모습에 갇혀 있는 삶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야 할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오늘 복음도 그렇습니다.
당시의 어린이는 아직 인간으로 보기에 부족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를 무시했고, 어린이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사회적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여성이나, 병자들을 행해서도
거리를 두는 것이 당시 사회의 풍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회 풍조를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시고,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변화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세상이 원하는 변화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변화이고, 이 변화에 맞춰서 살아가는 모습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갈 때 더욱 힘차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며,
하늘나라에서의 영광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변화는 자기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변화는 사랑의 완성을 따르게 됩니다.
더 큰 영광을 위한다면 무엇을 따라야 할까요?
가장 큰사람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18,4).하시고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18,1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어린이를 중심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결국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과 순수한 마음,
어린이가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듯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미아 발생으로 부모의 애간장을 태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보면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는 어중간한 아이가 길을 잃고 헤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많이 소유한 것이 위대하게 보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진 것 없는 사람, 자신을 낮추어 비우는 사람이 위대합니다.
애당초부터 가진 것이 없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꾸만 더해서 많이 갖고,
현명한 사람은 자꾸만 덜어서 많이 갖습니다”(이규경).
노자도 “성인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므로 밝고, 자기를 옳다고 하지 않으므로 빛나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으므로 공이 있고 자기를 뽐내지 않으므로 윗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루카18,17).
회개하여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할 때
우리는 하늘 앞에서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많이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지니고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사랑이 담긴 일을 보시고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한 일에는 어린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1고린14,20).
주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천국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마음이 넓고, 속이 깊은 사람, 생각하는 차원이 높은 사람이 되려면
주님을 꼭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큰 사람은 키가 커서 큰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커서 큰 사람입니다.
하루를 허물로 누벼놓았어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주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자비를 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시는 주님 품에 안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큰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인 마태오복음 18장은 마태오복음사가에 의한 네 번째 설교 집성문으로
교회설교 혹은 공동체 설교라 불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야 지역에서 유다지역으로 가시기 직전에
교회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목표에 대한 설교인데,
교회공동체 안에서 차지하는 작은 이들의 가치(1-14절)와
공동체 안에서의 형제애(15-35절)를 다루고 있는데,
오늘 <복음>은 그 전반부로서,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1)
예수님께서는 이 물음에 세 가지 말씀을 주십니다.
<첫째>는 우선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먼저 밝히십니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 사람이라야 그곳에서 큰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어린이’란 열두 살이 되기 이전의 아이를 가리키는데,
고대인들은 ‘어린이’는 오늘날 우리가 여기고 있는 것과는 달리,
손이 많이 가고 책임감도 없고, 늘 어른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하찮은 존재요,
율법을 모르는 죄인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개하여 어린이 같이 된’ 사람이란
어른처럼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능력함을 받아들이고,
주인께 신뢰로 의탁하는 죄인을 말합니다.
이를 산상설교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마태 5,3)고 선언하셨습니다.
<둘째>는 ‘누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인지’를 밝히십니다.
곧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명예나 권력을 가진 이나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
결국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주님을 예배하는 이가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가장 작은 계명이라도 스스로 지키고 가르치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마태 5,19)이라고 제시하셨습니다.
<셋째>는 ‘누가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인지’를 말씀하십니다.
곧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5)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무력하고 미천한 이, 나에게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이를 받아들이는 일이요
나에게 상처를 준 죄인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먼저 미천하고 무력한 이들을 당신 제자로 받아들이셨고,
죄인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되찾은 양의 비유”(12-14절)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마태 18,14)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작은 것 하나마저도 귀중하게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말해줍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작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하찮고 비천한 이일수록 더 더욱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주님!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게 하소서.
아기가 어머니께 소중한 것처럼,
제가 당신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아기가 어머니께 속해 있듯,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제가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입니다.
앞에는 안덕 저수지가 있고, 뒤에는 높은 산이 있습니다.
집 앞에는 채석장이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돌을 캐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신 선산이 있고, 집안의 장손이 있어서 부모님을 모시고 가끔 다녀왔습니다.
말 그대로 해님만, 달님만 알아준다면 만족한다는 두메 꽃처럼 깊은 산골입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아랫마을에 쉼터가 생겼습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이라 아픈 사람들이 요양차 내려왔습니다.
입소문이 나서인지 외지에서 건강 회복을 위해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예전에 도시는 정주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교통이 발달하고, 도시화 되면서 도시의 형태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사망하는 사람이 출생하는 사람보다 적어지면서 도시의 기능과 모습도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 도시는 상주인구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외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과 잠시 머무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재편되고 있다고 합니다.
강남이 개발되면서 사람들이 강남으로 몰렸는데, 요즘은 강북으로 사람들이 몰린다고 합니다.
강북만이 가지고 있는 정과 문화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강북에는 고궁이 있고, 한옥이 있고, 오래된 문화가 있습니다.
거기에 젊은이들의 취향과 입맛을 끄는 콘텐츠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인적이 드문 마을들에 사람들의 생기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명동에서 8년을 살았기에 강북의 맛과 멋이 있는 곳을 찾곤 했습니다.
명동에서 나오면 바로 남산 한옥마을과 남산길이 있습니다.
을지로로 내려오면 도심 속의 쉼터인 청계천 물길이 있습니다.
종로로 나가면 광장시장이 있고, 혜화동으로 나가면 대학로와 낙산이 있습니다.
홍대, 연남동, 경의선 길, 성수동, 이태원에도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은 비단 서울에 한정된 게 아닙니다.
전주에는 한옥마을이 있고, 여수에는 벽화 거리가 있고, 남해에는 독일마을이 있습니다.
순천에는 습지가 있습니다. 양양에는 서핑 해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늙음과 낡음은 다릅니다.
비록 오래되었을지라도 멋지게 늙어가면, 새로운 콘텐츠가 접목된다면
사람들은 그곳을 찾기 마련입니다.
미주 지역에는 140여 개의 한인 성당이 있습니다.
이민과 유학생들이 많았을 때는 한인 성당이 늘어났고, 공동체도 활기가 넘쳤습니다.
몇 가지 이유로 한인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첫째는 공동체 인원의 감소입니다. 고령화되면서 고인이 되는 분들이 늘어납니다.
젊은이들은 미국성당으로 가거나, 성당에 나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민과 유학생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둘째는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와 공동체의 갈등입니다.
사소한 이유도 있지만, 본당의 신축과 이동이 관련된 갈등도 있습니다.
사제의 독선과 권위주의가 더해지면 갈등의 폭도 커지기 마련입니다.
한국과는 다른 사목 환경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그렇습니다. 먼저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이제 나의 뜻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에서 시작됩니다. 회개는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밀면서 시작됩니다.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보잘것없은 사람들이라도
조욱현 토마 신부
제자들은 주님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1절) 물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3절)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셨다. 그 어린이는 성령을 지닌 어린이이다.
성령을 지닌 그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어린이는 부모를 따르고 사랑한다. 이웃에게 해를 입힐 생각도 못 하고, 재산에도 관심이 없다.
교만하지도 않고 미워하지 않으며, 거짓말하지 않고,
자기가 들은 말만 믿고 진실이라고 들은 것을 지키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4절)
누구든지 당신을 본받고 당신처럼 자신을 낮추면,
즉 당신이 종의 모습을 취함으로써 당신을 낮추었듯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5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겸손과 순결을 본받으며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신다.
순결하시고 어떠한 죄도 없으신 예수께서는 우리도 거룩하게 살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어린이를 본보기로 세우셨다.
어린이와 같은 모습은 어떤 것인가?
어린아이는 말을 들으면 믿는다. 무엇을 가르치면 따지지 않는다.
아이는 온 마음으로 부모님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어린아이가 가진 순수함을 되찾아야 한다.
이렇게 죄 없는 어린이가 된 사람은 당연히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누구든지 이런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10절) 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라고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10절) 하셨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은 바로 이러한 작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고 인류를 죽음에서 삶으로 구원하셨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인간이 죄를 지었지만,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이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도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
이 세상은 언제나 호기심 천국이요 즐길 거리로 충만한 멋진 무대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여름 신앙 학교 시작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차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하루 쉬는 날이라 만사 제쳐 놓고 ‘방콕’을 하며 밀린 잠을 실컷 잤습니다.
그런데 웃기는 일이 생겼습니다.
잠을 자는 동안 본인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아이고 아파라! 아이고 쑤셔라!”
잠을 자면서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오래전 주택공사 현장에서 막노동을 세달 정도 한 적이 었었는데,
일 시작하고 일주일 내내 밤마다 그렇게 앓았습니다.
온몸이 쑤시고 아프고, 그런데 딱 일주일 지나니 적응이 되더군요.
요즘 산업 현장에서 땀흘리며 일하시는 노동자들, 참으로 고생이 많으십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힘든 때인데, 두꺼운 작업복에 작업화, 작업모에
안 그래도 더워죽을 지경인데, 철판 위는 복사열로 달구어져 계란프라이를 해도 될 정도입니다.
다시 한번 현장 근로자들의 노고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신 주님께 깊이 감사드리는 요즘입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찐하게 체험하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덥다 덥다 하면 더 덥습니다. 왜 나만 이래야 해, 하고 불평불만 하며 더 힘듭니다.
이왕 일하는 것, 짜증 내지 않고 환하게 웃으면서, 여름에는 땀 흘리는 것이 정상이지,
건강에도 좋고 다이어트에도 좋다는 생각으로 기쁘게 일하면,
그것이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이요, 주님께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너무 복잡하게, 너무 인상 쓰면서 살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어린이처럼 단순하게, 철부지처럼 희희낙락하면서 재미있게 살아가라고 당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3-4)
인생의 고수는 사실 매사를 재미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만사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만사를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큰 고통이나 시련이 다가온다 할 지라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며,
이 고통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밋밋한 내 일상에 자극을 주시는구나,
나를 재미있게 해주시려나 보다 하고 생각해야겠습니다.
고수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 세상은 언제나 호기심 천국이요 즐길 거리로 충만한 멋진 무대입니다.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사람입니까?” (18,1)
남보다 높은 지위, 남보다 더 귀하고 막중한 책임을 맡기 위해서 수도원에 입회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살다 보면 자기의 소임과 직책에 따른 미묘한 갈등과 유혹은 남녀 수도자를 불문하고,
그로 인해 겪을 수 있는 갈등이며 상처이기도 합니다.
때론 동기 사이에 그리고 선후배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싸움은
이미 가정에서부터 비교와 경쟁을 은연중에 받았고 주입된 결과물입니다.
관구장으로 봉사하고 있을 때, 이미 죽은 형제가 술로 인해 침대에 누워서 제게
“아오스딩 신부는 수도원에서 해 볼 것(=직책) 다 해봤지만,
나는 지금껏 아무 직책을 맡은 적이 한 번도 없다.”라는 그의 속 깊은 말을 들었을 때,
무척 당황스러웠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남녀 수도자들은 무엇이 되어 누구와 비교 경쟁하기 위해서 입회한 것은 아니고,
분명 하느님을 살기 위해서 수도 생활을 선택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다른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서 살다 보면,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외부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시선과 질문을 받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누가 큰 사람이며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지?’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오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마르꼬 복음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 도착하셔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하고 묻자,
그들이 답변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9,33~34 참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갈등을 전제로 마태오 복음은 제자들이 자신들의 의문을 먼저 묻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18,1)
조금은 생뚱맞은 질문입니다. 웬 하늘나라!
그들의 현실적인 문제는 지금 여기서 주님을 따르면서 누가 더 큰 사람인가에 대한 갈등인데
막연히 하늘나라를 핑계 대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제자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최측근으로 12명을 사도로 선임하였고,
이들은 분명 다른 제자들보다 더 큰 사람, 크다는 것은 키가 크다는 의미는 아니겠지요.
아마도 소임이나 책임에 따른 표현임에 분명하고,
12명 중에서도 일단은 베드로가 더 큰 사람인 듯싶지만,
당시엔 다른 제자들 사이에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계급이나 직위
그리고 연장자순으로 서열이 정해집니다만,
당대 유다 사회는 그 우위가 뚜렷했고 그에 따른 대우받는 것을 즐긴 풍조가 있었기에
제자들 가운에서도 이런 서열논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는 지금도 지속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던진 질문의 심각성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그냥 말씀으로 대답하기보다 확실히 이 문제를 매듭지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셨기에,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확답을 내리십니다.
말씀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시기 전에 하신 예수님의 작은 몸짓이 중요합니다.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셨다.”(18,2)
이 광경이 눈에 들어오시나요.
실제 키가 큰 어른들 가운데 키가 작은 어린이 하나가 서 있는데 이 얼마나 대조적인 모습입니까?
어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이 어린이는 낮추지 않아도 실제로 어른들에 비해 작고 낮습니다.
작고 낮은 어린이는 자신의 처지를 알기에 낮출 필요도 없었고,
어른들의 키에 맞추려고 발꿈치를 들을 이유도 없었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 앞에선 이런 어린이와 같은 존재임을
예수님께서 깨우치기 위해 이런 구도를 만드셨다는 점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 가장 크시고 크신 존재인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작은 자, 낮은 자일뿐입니다.
이런 이해 맥락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먼저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18,3.4)하고
제자들에게 명백히 제시하십니다.
여기서 회개는 통상적인 죄에서 회개라기보단 지금껏 관습과 인습에 젖어 살아왔던
사고와 행동양식 곧 존재 방식을 바꾸라는 의미로 알아듣습니다.
주입되고 교육되어 당연시하고 살아왔던 유대인의 삶의 태도처럼,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대우받고 자만하면서 늘 높은 자리에 연연했던 존재의 태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 곧 하늘나라에 적합한 존재의 태도로 태어나야 하고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실제로 지금 여기 제자들 가운데 서 있는
‘어린이와 같이 실제로 작고 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것의 참뜻은 그러기에 높임과의 상대적인 낮춤이 아니라,
이분법적인 높임과 낮춤의 개념이 없는 순수한 상태의
지금 여기 있음으로써 높임도 낮춤도 없는 작은 자로, 낮은 자임을 깨닫고
그것 때문에 전혀 열등감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존재가 되는 것일 겁니다.
그럴 때 어떤 누구도 다른 누구보다 더 높아지려고 발버둥 치지 않고
자신이 지금 여기 서 있는 어린이와 같은 상태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제자들 가운데 서 있는 어린이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 낌새조차도 의식하지 못한 채 다만 예수님 앞에 서 있다는
그 자체, 하늘나라에서 행복했으리라 믿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하늘나라에선 어떤 누구도 큰 사람도 작은 사람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으로 저는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처럼 되라, 는 말씀은
다 큰 어른이 다시 어린이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도 정말로 나이 들면,
정말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사리 분별 못하시는 분들을 저는 노인병원에서 많이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어른이면서도 철딱서니 없는 어른이 되시지 마시고,
어른이면서도 어린아이처럼 마음만은 순수하고 무심한 듯
비교하지 말고 주어진 현실에서 만족하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저도 이제 나이 들어가면서 주책없고 철딱서니 없는 어른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11,29)
옵션(option)이 아니라 기본(Basics)
박상대 마르코 신부
마태오 복음사가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업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산상설교“(5-7장), ”파견설교“(10장), ”비유설교”(13장),
“공동체 설교”(18장), “종말설교”(25장)로 엮었다는 것은 이미 누차 밝혀두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공동체 설교의 첫 부분이다.
공동체 설교는 교회 안에서 신자들 간에 지켜져야 할 규범을 담고 있어 “교회 규범”이라고도 한다.
이는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작은 교회로 통하는 가정교회의 규범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으로 시작되는 공동체 설교는 당장 예수님 주위의 제자들에게 향하기보다는
마태오 복음공동체를 포함한 초대교회를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마태오의 편집 의도가 많이 첨가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의 공동체설교는 세 가지의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라는 것”(1-5절)이고,
둘째는 “보잘것없는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10절)이며,
셋째는 “율법상의 죄인들과 윤리상의 죄인들을 소외시키지 말라”(12-14절)는 것이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 제외된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6-9절)는 규범도 있다.
첫 번째 규범의 도입부에 마태오는 제자들이 예수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1절)하고 물었다고 하지만,
마르코는 제자들이 途上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하고,
루카는 제자들이 서열을 놓고 말다툼을 벌였다고 한다.(마르 9,33-34; 루카 9,46)
잃은 양 한 마리를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는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온정과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묘사하는 것으로서 예수 어록집에서 따온 것이다.
루카는 이 비유와 함께 다른 비유들을 한데 모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루카 15장)
마태오복음 공동체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 교회공동체 안에도 똑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성직자와 수도자들 사이에 권위주의와 서열 다툼이 팽배하고,
형제적 사랑이 부족하여 후임자가 전임자를 마구 흠집 내는 일도 많다.
“미사 예물 단가가 비싸서 미사 봉헌 한번 제대로 못 하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신자들은 소외받고,
혼인법상 조당에 처한 신자들을 마치 중죄인 취급하며,
조그만 잘못도 부풀려 입에 담아 회자(膾炙)하고,
나서서 단죄하기를 즐겨하는 신자들도 종종 있다.
뿐만 아니라 남을 죄짓게 만들고, 스스로도 죄지을 기회를 피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일도 있다.
오늘 예수께서 내리시는 공동체 內規는 옵션(option)이 아니다.
여러 개를 놓고 여건을 고려하여 마음가는 대로 고르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기본(basics)에 속한다는 것이다.
기본은 곧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하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