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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무사-153
옷감과 옷감의 이음새를 지탱해주는 실밥들이 툭툭 터져 나가고 정면에서
쏘아지는 압박에 의해 머리칼이 곤두서지만 운조의 몸은 쉴 사이 없이 움직
였다.
한발도 떼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이대로 있다간 힘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패한다. 운조와 태양광무존은 체득한 무학에서부터 전혀 다른 궤를 보이고
있다. 장엄한 꽃봉오리 가운데에 자신의 깨달음을 박아 넣었던 십팔 년 전
의 인물과 오로지 승리를 위해 깨달음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은 구름문양
의 중년인은 시작부터가 달랐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난 지지 않는다... 난 무조건 이길 거다...'
믿기 어렵지만 검강이라는 절대의 무학 앞에서 암경으로 다가오는 힘을 부
정하며 운조가 속으로 툴툴거렸다. 그는 회의를 모르는 자기완결형적인 인
물이다. 모든 사물을 자신이 수납하고 판단하여 결과를 도출해낸다. 그의
선이 세상의 선이다.
깨달음이 없어도 무학을 성취하는데 별 지장이 없다는 걸 알고 처음부터 염
두 하지도 않았다. 싸움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잘 드는 게 중요
하지, 칼에 금수실이나 은수실로 단장할 필요는 없다. 아무리 꽃단장해봐야
칼은 그저 무언가를 베기 위한 쇠붙이의 변형형이다. 무학도 마찬가지. 얼
마나 거창한 유래를 가지고 있는지 몰라도...
상대를 꿇어앉히기 위한 효율적 방편일 뿐!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뇌까리고 운조가 급히 신형을 틀었다. 여전히 꽃봉오
리는 아름다웠지만 더 이상 경외의 대상은 아니다.
빙글.
한바퀴 몸을 틀며 암경을 빌어 주위의 공간을 찰라적으로 확보한 운조의 두
손에서 사이한 빛이 일렁였다. 여태 한번도 쓰지 않았던 그의 양손은 이
순간만을 위해 예비 되었던 것처럼 무거운 기운을 응축해냈다.
'이, 이게 마지막이라면 날 이기지 못한다. 알량한 깨달음도 당신을 도울
수 없다!'
꽝!
어떻게 한 것일까?
폭음 속에서 백무량의 몸이 한번 비틀거렸다. 막대한 압력을 뿌려대던 미완
의 꽃송이도 급격히 힘을 잃었다. 놀랍게도 운조가 밀어낸 회심의 일격에
현 무림에서 가장 강한 무인의 정화가 무너지고 있었다.
부뢰가 깨졌다...
"쿨럭!"
한사발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선 운조가 백무량을,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
의 검 끝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채 피지 못하고 스러져 가는 봉오리의 슬픈
메아리가 요동쳤지만 어쩐지 그의 눈은 승자가 누리는 빛깔이 아니었다.
'이건... 아니다!'
무언가 있다. 검강이 파훼당한 백무량의 표정에서도 느껴지지만 절대 패배
자의 얼굴은 아니다. 노인과 생강의 뒷맛은 무시할 수 없다.
운조의 예상을 확인시키듯 더 이상 짜낼 무엇이 없어 보이는 백무량의 검에
서 검강이 다시 한번 뻗어 나왔다. 만약 같은 전개라면 그의 두 번째 장력
을 감당하지 못할뿐더러 치명적인 손해도 감수해야만 한다. 세월의 깊이 같
은 건 관심도 없었지만, 시무시종이라는 고리타분한 얘기 역시 마이동풍(馬
耳東風)격이었지만 운조에게 부뢰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으니까.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동화를 피워내지도 못했다면 뭘 더 이상 보여주겠다는 말인가.
필생의 심득이 발가벗겨진 마당에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건가.
꼿꼿이 상체를 펴고는 있지만 백무량도 적잖은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방금
전의 충돌에서 눈으로 손해를 본 쪽은 운조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외면적
으로 드러난 사실이고 초식이 파괴당하며 쏟아낸 힘 그대로를 되돌려 받은
백무량이기에 절대로 편안할 리가 없다.
백무량에 관해 많은 얘기를 듣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되지도 않는
무엇을 가지고 치사하게 뭉기적거릴 정도로 유치한 노인이 아니라는 정도는
안다.
스릉.
그의 검에서 시린 달만큼 아름다운 검강이 다시 한번 일렁이고 운조의 얼굴
이 굳어진다고 생각한 순간, 어떤 선이 그어졌다.
‘오오... 사형, 마침내 허상을 벗어던진 거요?’
회광반조의 징후인지는 모르지만 등 뒤에서 묘한 기운을 발산하던 계양의
살진 턱이 부르르 떨렸다.
단 한줄!
그러나 그 하나만으로 모든 걸 파(破)할 정도로 강력한 선!
너무도 뚜렷하여 애당초 허공에 걸쳐져 있었다고 생각이 들만큼 확실한 궤
적의 선!
부뢰의 형식미를 철저히 부정하는 단순하고도 기본적인 내리침이었기에 백
무량은 스스로의 심득을 등진 듯 했다.
... 피우지 못할 바에야 잘라버린다!
절뢰(切?)!
최고로 군림하면서도 단 한 송이의 꽃을 피우지 못했다. 평생을 불렀지만
화답은 없었다. 그렇게 또 보낸 이십 여 년.
이제 그 모든 질문을 봉합할 때가 왔다. 저마다의 생김이 다른 것처럼 그릇
의 크기가 다르다고 가정한다면 백무량의 한계는 여기까지 일지도 모른다.
집착으로 보낸 일평생이지만 과감히 정리할 때가 됐다.
그것이 그의 최대 심득일지도.
형상을 떠나 실체하는 베기를 따라야하는 노검수의 인생, 그 뒤안길을 누가
비난하겠는가. 장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지만 백무량의 내리 베기는 위
력 면을 떠나 충분한 멋을 담고 있었다.
환상적으로 현란한 검법을 쓴다고 해서 치무환검존이 아니다.
그가 백무량이기에 치무환검존인 것이다.
모든 걸 정지시켜 놓은 상태에서 마음 놓고 잘라낸 공간처럼 그가 그어놓은
선은 너무도 절대적이기에 장내의 어떤 사물이라도 양분할 것만 같았다.
운조의 놀라운 몸가눔도 이 순간에는 전혀 쓸모없어 보였다.
꿈틀!
선이 그어지고 얼마나 지났을까? 운조의 신형이 꿈틀 움직였다. 너무 느려
서 이동한다기보다 몸을 떠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무튼 그는 제자리에서 걸
음을 떼었다. 아니, 걸음을 옮겼다고 느낀 순간 어느새 환검존을 지나쳤고
그대로 사라진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제자리로 왔다.
검극을 지면 쪽으로 내린 상태에서 백무량이 희미하게 웃었다.
“자네들은 정말이지 노부를 언제나 놀라게 하는군.”
“그런가요?”
역시 땅을 바라보며 운조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물론이야. 이동제동이니 후발선착이니 떠드는 사람은 많지만 그건 과장된
측면이 많았었지. 결국 제자들에게 무리(武理)를 전수하면서나 언급되는
이론에 불과했었네. 그리고 오늘 눈으로 그 죽은 이론의 생환(生還)을 보니
감개무량하구먼.”
“과찬이오. 운이 조금 좋았던 것 같소.”
그리고...
백무량의 다리가 천천히 꺾였다.
입가에 머문 한줄기의 혈선이 아니더라도 그의 꺼져가는 눈동자와 담담하지
만 아직도 충분히 반짝거리는 운조의 눈빛을 대조하면 승패의 향방은 분명
해진다.
치무환검존이 패했다!
무림을 암묵적으로 지배하던 다섯 개의 절대명제 가운데 하나가 깨지는 순
간이었다.
백무량이 펼친 절뢰일식(切?一式)은 현존하는 최강의 검식을 모조리 베어버
릴 만큼 무서웠었다. 그 앞을 가로막을 것은 없었다. 허나 운조는 막지 않
았다. 먼저 때렸고 한발을 더 움직여 피했던 것이다.
“아무 곳에도 없었지만 또한 어디에도 존재 한다 라... 무서운 움직임이야
... 내가 알기로 이러한 무공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네.”
각혈 한번 하지 않고 운조를 바라보던 백무량이 마침내 한사발의 피를 토했
다. 그 속엔 치유 불능의 증거처럼 내장 부스러기가 섞여 나왔다.
“위대한 세 가지의 무공이라 불리지만 삼백년 동안 묻혀진 전설의 이름...
맞나?”
백무량의 탄식과도 같은 말을 듣던 운조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였다.
“일천마라형을 언급한 거라면 정확히 보신 거요.”
쿠쿵!
드디어 마교삼대지학 가운데 하나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일천마라형, 다른 말로 그저 ‘형’이라고 칭해지는 가공할 몸가눔이 삼백
년의 시공을 뚫고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백무량은 여전히 운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듣고 싶은 대답이 나왔음에도 무
엇을 더 말하라는 건지 모르지만.
“아, 그리고 본인은 명교도가 아니라오. 그 점을 염려하셨다면 안심해도
좋소.”
그의 대답에 백무량의 마음은 일희일비(一喜一悲)가 교차했다. 마교의 재림
은 아니니 피비린내 나는 강호의 혈풍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마
교의 삼대지학을 가지고도 몇 십 년을 은연자중한 이들의 정체는 무엇이라
는 건가.
백무량의 생각과 달리 엄습하는 허탈감에 운조도 털썩 주저앉았다. 광무존
의 설욕이라면 더 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치러냈다. 십팔 년 동안 마음속을
괴롭혔던 빚을 한번에 갚았다.
통쾌한가? 후련한가?
‘이건 대체 뭐지?’
그의 마음에서 스믈스믈 피어나는 불쾌감의 실체는 무엇인가. 과연 그가 바
란 것은 무엇일까?
그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사람이 말문을 열었다.
“사형은 비록 패했지만 화산이 진 건 아니다.”
운조도 백무량도, 뜬금없는 계양의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이냐는 눈빛. 그리고...
“사제!”
비명과도 같은 백무량의 외침을 뒤로 하며 계양의 전신에서 핏빛 노을이 퍼
져나갔다. 사교(邪敎)의 주술처럼 음험한 내음을 풍기는 그의 변화에 운조
도 번쩍 정신이 들었지만 계양의 말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
“내 일생일대 최고의 주술이리라!”
파앗!
갑자기 천지가 피의 장막으로 가려지며 어디가 땅인지 어디가 하늘인지 분
간하기 어려워졌다. 몸을 일으키려던 운조가 순간적으로 드는 현기증에 잠
시 고개를 흔드는 순간 거짓말처럼 강력한 한방이 그의 배를 때렸고 반사적
으로 몸을 한바퀴 돌리는 그의 앞을 괴이한 형상의 사물들이 가로 막았다.
‘이런 허상에 현혹되다니!’
승리를 취한 쪽은 운조였지만 온전할 리는 없었다. 극심한 내공소모와 정신
적인 공백, 그리고 허탈감으로 사실 그의 상태는 최악이나 다름없었다. 백
무량의 엄중한 검강에 놀란 내부 장기들도 아직 다스리지 못한 상태였고 풀
어진 마음을 다잡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어디 있는 거야!”
주위는 오로지 붉었고 단 한 치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
“비겁하다! 나와! 나와서 겨루자고!”
미친 사람처럼 사방에 장력을 쏘아댔지만 손에 와 닿는 감촉은 공허했다.
팡! 파팡!
광풍 같은 그의 장세에 애꿎은 나무와 바위들이 박살나며 허공으로 비산되
었지만 정확하지 않은 공세에 운조의 평정심은 완전히 무너졌다.
다음에 보자...
꿈결처럼 들리는 전음. 게양은 아마도 죽음을 담보로 비술(秘術)을 펼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운조는 바짝 약이 오른 상태였기에 그런 구분을 하지
못하고 날뛰었다.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도 몰랐다. 그저 참기 힘든 울화가
치밀었고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에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부수고 싶었다.
“나오란 말이야!”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 속에서 신화를 무너트린 남자는 그렇게 발악처럼 절
규를 하고 있었다. 역사를 새로 장식한 사내의 뒤풀이라고 한다면 너무도
처연한 모습이었다.
***
“사형, 조금만 더 가서 쉽시다. 힘내시오!”
“네게 이런 모습을 보여서 정말 미안하구나. 쿨럭...”
“그런 말 하지 마시오! 오늘의 사형은 최고였었소! 단지, 단지 재수가 없
었을 뿐이오!”
백무량을 업고 나는 듯이 달리는 계양이 마구 고개를 저었다. 사실 오장육
부가 제 위치를 이탈한 상태에서 최후의 힘을 빌어 배교 최대의 비술이라는
혈루경(血淚鏡)을 펼치고 신법까지 전개한다는 건 무리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에 게양은 이를 악물고 뛰었다.
혈루경.
핏물 한줌으로 천하를 가린다는 전설의 주법(呪法)이다. 그러나 이 주술을
펼쳐내면 한동안은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극심한 내공력을 소진하기에 필히
방조자가 있을 때만 시전 한다고 했다.
얼마나 달렸는지 모른다. 사람이 많은 곳으로 숨을까도 생각했지만 그이 위
대한 사형이 이런 식으로 망가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어차피 백무량이나 자신이나 회생은 난망이다. 그러나 이대로 끝내기엔 너
무 억울했다. 무얼 어떻게 해야겠다는 방도도 없이 일단 그 자리에서 벗어
나야 한다는 일념에 내달리는 계양이 문득 고개를 숙였다.
‘미, 미안하오... 사형, 난 사형을 의심했었소...’
혈루경은 완전한 주법이기는 하나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다. 시전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의 준비가 필요하고 중간에 방해를 받으면 주법 자체가 깨
진다.
백무량과 운조의 대결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교환
한 초식이 겨우 다섯 번이라는 걸 감안하지 않더라도 겨룸의 순간은 매우
짧았다. 그렇다면 계양은 둘이 맞붙기 시작했을 때나 그 직후부터 혈루경을
준비했었다는 말이 된다.
슬픈 일이지만 상대는 너무도 강했고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예비한 술
법이었지만 뭐라고 하건 간에 사형의 패배를 염두 했었다는 거고 결과가 그
와 같이 나왔기에 어쩌면 잘한 행동이라고 불릴 수도 있지만 등에 업혀 애
처롭게 숨을 헐떡이는 백무량의 숨결이 어쩐지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았다.
“힘내시오, 사형!”
발작적으로 부르짖으며 떨어지는 눈물을 참으며 내달리던 계양이 문득 걸음
을 멈추었다.
“사... 사형...”
감자기 멈춰진 호흡. 싸늘해지는 체온.
“사혀엉~!”
그의 소리는 하도 애달파서 죽은 이라도 살아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일까?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입에서 귀찮음이 역력히 베인 소리가 터져 나왔
다. 터져 나왔다고 하기엔 너무나 가늘어서 게양의 마음을 후벼 팠지만 그
건 아무래도 좋았다.
“네 목청이 좋은 건 잘 알고 있으니 소리 좀 그만 지르거라. 그리고... 조
금 쉬어야겠다.”
“사혀엉~!”
똑같은 내용이지만 이렇게 색이 다를 수도 있을까? 웃는 와중에도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어린아이처럼 훌쩍거리던 계양이 급히 좌우를 살폈다.
얼마나 달려왔는지는 몰라도 어느새 이들은 청빈로를 벗어나 이름 모를 산
하나를 넘고 있었다.
‘여기면 나름대로 안전할 거다. 그자의 상태를 보아 바로 추적하지도 못할
형편이었으니 조금이라도 사형을 쉬게 해드려야겠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동작으로 주위를
살피던 계양이 텅 비어있는 동굴 하나를 발견하고 급히 걸음을 옮겼다. 백
무량의 안위도 안위거니와 사실 그도 한계점에 이른 체력이었기에 잠시라도
쉬지 않으면 쓰러질 판이었다.
그래도 내색하면 안 된다. 여기서 무너진다면 사형이 슬퍼할 테니까.
동굴 안은 의외로 넓었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어느 야생동
물의 보금자리였는지는 몰라도 퀴퀴한 냄새 때문에 그냥 몸만 숨겼다.
“사형, 괜찮소? 갑자기 왜 이러는 거요!”
백무량의 체온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너무나 돌발적인 변화라 계양으
로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사실 한번쯤은 의심을 했어야 했다. 아무리
치명상을 입었더라도, 그래서 내장 조각까지 뱉을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급작스러운 저체온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야말로 한
빙장(寒氷掌)계열의 냉기공(冷氣功0에 당하지 않은 이상 죽음을 목전에 두
지 않은 절정의 무인에게 이러한 신체변화는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니까.
그러나 지금의 계양에게 그러한 판단력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고 경황이 없
으니 추궁과혈이라도 하려고 두 손에 공력을 모았다.
단전에서 찢어지는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허나 곧 계양은 공
력을 풀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 보다 높은 수위의 내공력을 지닌 고수를
함부로 건드리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가 있다.
무엇이든 해야만 한다! 그러나 마땅한 방법이 없다!
동굴 벽에 기댄 채로 마냥 식어만 가는 사형의 앞에 무릎 꿇고 통한의 눈물
을 흘리는 계양은 오늘처럼 자신이 싫었던 언젠가가 떠올라 두 가지의 복합
된 상념 속에서 몸부림쳐야만 했다.
‘목숨을 바쳤던 문파를 지켜내지 못했었거늘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
는 사람의 죽음을 바라만 봐야 하는가...’
동굴에서 떨어지는 이슬방울의 소리가 유난히도 청명하고 크게 들렸다. 그
래서 계양의 작은 흐느낌은 묻혀갔지만 마음속에서 번지는 파문의 크기는
비례해서 커져만 갔다. 이순간 그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내게 조금만 더 힘이 있었더라면, 조금만 더 힘이!
작은 웅얼거림에 백무량의 눈이 떠졌다. 늙고 상처 입었지만 그는 여전히
호랑이의 기백을 품은 눈동자로 울고 있는 사제를 바라보았다.
자애, 연민, 그리고 슬픔...
천하를 호령하던 두 고수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사내에게 쫓겨 볼품
없이 숨어야 한다니. 그것도 생명줄까지 거의 놓은 상태로 말이다.
“사제...”
낮지만 위엄 있는 한마디에 계양의 고개가 번쩍 들려졌다.
“사, 사형! 깨어나신 거요? 몸은 괜찮은 거요? 왜 그리 차가운 거요?”
“괜찮을 리가 없지 않느냐.”
잔잔한 미소로 달려들 것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계양에게 빈정거리듯 말을
건냈지만 그 속에 담긴 온정이 느껴져서 다시 한번 통곡하는 계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녀석의 상태가 나보다 나아보이지도 않는데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내 참.”
“사형!”
어쩌면 둘의 만남 자체가 희극일거다. 배교의 대장로와 화산에서 낳고 자라
도인의 길을 걷던 화산의 얼굴은 묘한 운명의 장난으로 엮였던 것이고 그
래서 인간지사는 누구라도 예단하지 못하는 의외성을 가지고 있다.
문득 백무량은 화산에 처음 발을 딛던 계양의 모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즉선검인에게 끌려온 그가 지른 일성은 도가의 명문인 대화산
의 경내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음험함이 묻어있었고 당시의 백무량은
자신의 사형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받아친 한마디에 공전절후의 혈
투가 벌어질 뻔하기도 했다.
그리고 티격태격하며 흘러간 삼십년...
배교 출신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의 순진성을 보이며 계양은 화산의 문
화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의식하지 못한 어느날 백무량은 알게 되었다.
...계양은 이미 화산의 한 봉우리가 되었음을. 어느새 그가 가장 의지하는
동생으로 백무량의 곁에서 넉넉하게 웃고 있음을.
말없이 계양을 머리를 다독이던 백무량의 몸에서 한순간 햇살 같은 광휘의
기운이 퍼져나갔다. 이건 회광반조같은 일반 현상이 아니다. 무언가 인위적
으로 만들어낸 힘의 표출.
내가 네게 힘을 주겠다!
“사형!”
깜짝 놀라는 게양을 빙글 돌려 등판에 쌍장(雙掌)을 붙인 백무량이 짧게 말
했다.
“화산의 구명지공 가운데 차체환기력(借體換氣力)을 안다면 네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것이다.”
“사, 사형!”
“네 녀석이 처음 화산에 발을 딛었을 때 우리가 나눈 대화 기억하나?”
갑자기 바뀐 화제에 계양이 잠시 정신을 놓았을 때 그때까지 저항되던 공력
을 타고 백무량의 노도와도 같은 진기가 밀려들었다.
이제는 늦었다. 차체환기력은 발동되었고 여기서 멈추면 즉사다.
차체환기력이라 함은 화산에서 비밀리에 전수되는 구명지공이나 수법상의
문제 때문에 장로급이 아니면 전수되지 않는다. 이 갑자 이상의 내공력을
지닌 고수가 모든 진기를 치명적으로 부상당한 피시전자에게 주입하여 목숨
을 구하는 수법이기에 어차피 일반 문도들은 알아도 펼쳐내지 못하는 고등
수법이기도 하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비밀구명지공과 궤를 함께하나 차체환기력의 다른 점
은 피시술자의 혼탁한 진기를 자신의 몸속으로 전도시킨다는 결정적인 차이
가 있기에 시전 자체가 죽음의 길이기도 하다.
발동된 상태에서 멈추면? 물론 공력이 헝클어져 시전자나 피시전자 모두 죽
는다.
“사형! 이건 미친 짓이오! 이런다고 내가 좋아할 것 같소?”
“너 좋으라고 이러는 거 아니니 걱정 말아라.”
끊임없이 밀려오는 진기의 안온함과 상대적으로 떨려오는 사형의 손바닥.
그의 위대한 사형은 못나디 못난 자신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 있다.
“어서 진기를 보내라!”
“사형!”
“그래, 여기서 둘 다 죽자꾸나. 나중에 세인들이 웃을 거야. 화산의 늙은
두 장로가 바보처럼... 쿨럭, 진기를 옮기다가 동굴에서 죽었다고 말이야.
전후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아주 재미있어 하겠지.”
탄식과도 같은 백무량의 말이 아니더라도 게양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고 있다. 그래도 이건 너무 잔인하다.
고개를 숙인 게양의 살진 턱이 떨리며 그의 몸에서도 밝은 빛이 솟아올랐다
. 슬픈 일일수록 모양새는 아름다운가? 두 고수가 뿜어내는 마지막 공력의
빛줄기는 암울한 동굴을 환히 비추고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꽝!
계양의 눈물과 백무량의 떨림이 최고점에 이르던 어느 순간 퉁기듯 밀려난
백무량이 동굴 벽에 뒷등을 받히고 각혈을 시작했다.
“쿨럭, 쿨럭... 쿠에엑!”
눈을 감고 운기조식에 들어간 그의 사제는 백무량의 각혈을 보지 못했다.
‘잘 한거야... 이걸로 됐어...’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백무량의 눈앞에 그가 걸어왔던 인생 여정이 주마등
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무 것도 모르는 홍안의 청년에서 절정을 바라보는
무인으로 거듭나기까지 수많은 역경과 시련이 있었지만 한번도 물러서지는
않았기에 당당했다.
칼끝 같은 성격 탓에 갇힌 인생이라고 생각도 들었지만 버린 부분만큼 다른
것에서 위안을 받았기에 쓸쓸하지 않았다. 어차피 무예로서 도를 추구하는
도가의 검수가 얻을 건 별로 없다.
...그럼 난 도를 얻었는가?
‘글쎄...’
이제는 안다. 얻으려고 할 때 도망가고 포기하여 마음을 비우면 어느새 찾
아드는 여인네처럼 변덕스러운 게 도라는 사실을. 깃들어 있는지도 모르고
나갔는지도 모르는 뜬구름이야말로 도라는 사실을.
‘공허하구나...’
급격히 사라지는 생기와 처절하리만치 다가오는 고통 속에서도 백무량은 웃
음이 터져 나와 견디기 어려웠다. 막연히 품었던 도에의 환상과 부동화라는
허상의 꽃송이가 모두 객체적으로 느껴지며 어떤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지
만 입에서는 헛웃음만이 맴돌았다.
...뭘 위해서 그렇게 집착했었던 거지?
“사형...”
조식을 풀고 계양이 눈을 뜨자 상념의 바다에서 노닐던 백무량이 그의 살진
사제를 응시했다. 생각해보면 이것 역시 부질없는 짓이었을지도 모른다.
무엇을 위해 이리도 아둥바둥 연(緣)을 이을까?
“미안하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미안해야 할 사람은 나란 말이오! 지금 장난치는
게요!”
말없이 백무량이 고개를 저었다. 계양으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부질없는 인생사에서 또 하나의 짐을 떠안은 모습에 연민을 느끼는 자신을
.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는 하지만 범속한 세상의 이치에서 한 발
벗어나기 시작한 그에게 모든 건 무가치했다.
그토록 숭앙했던 사문과 사형, 그리고 사제...
“왜 저였습니까?”
그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누군가가 짊어져야 한다면 포기한 사람보다 집
착을 풀지 않은 사람이 나은 것을. 물론 백무량으로는 대답을 해주어야한다
. 말하지 않는다면 평생을 회한에 빠져 허우적거릴 계양이니까.
“아까도 보았겠지만 나의 무공은 그들의 하나도 감당하지 못한다. 이제 절
대오존이니 하는 명성은 아무런 의미도 없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다른 무
림을 보았고 발이 넓은 네가 낫다. 우리의 시대는 끝났지만 아이들을 이끌
어줄 누구는 필요하니까.”
다소 긴 말이 벅차 가쁘게 숨을 쉬던 백무량이 빙긋 웃었다. 여태 그의 미
소를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토록 무색무의미의 투명함은 처음이기에
계양은 마주 웃어야만 했다.
“다 두고 갈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너와 사형과 어울렸던 추억만은
버리지 못하겠다. 역시 난 우화등선(羽化登仙)같은 걸 바랄 팔자는 아니야.”
“사형은 말이 너무 많소!”
“크하하하하!”
이 말이었다. 백무량이 계양에게 처음 건냈던 한마디가...
기분 좋게 한바탕 웃고 고개를 돌린 백무량이 찬연히 빛을 뿌리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이제 저 햇살 속에서 호흡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만큼의 추억은
가슴속에 살아 숨쉬지 않겠는가?
‘그래, 이것만은 버릴 수 없어.’
또 하나...
“칼을 다오...”
애써 눈물을 참던 계양이 한구석에서 나뒹굴고 있던 백무량의 애검을 가져
왔다. 그의 인생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칼을 놓은 적은 없었으리라.
힘겹게 칼을 무릎에 올려놓고 백무량이 눈을 감았다. 더 이상의 갈등도, 더
이상의 집착도 없었다. 가져갈 건 모두 모았으니 후회는 많지만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들을 부탁한다...”
꼬집어서 누구라고 말하기 싫었다. 그래도 은연중 가장 측은했던 아이가 요
즘 들어 활기를 되찾았기에 내심 기꺼웠지만 드러내놓고 말 하기는 싫었다.
화산의 모든 아이들은 이제 홀로 서야만 할 것이다. 사형이 있지만 드러내
놓고 활동을 하지 못하는 처지다보니 게양이 바빠질 것이다.
슬픈 눈으로 고개만을 끄덕이는 사제에게 나직하지만 항거하지 못할 박력으
로 그가 명령했다.
“이제 가라... 쉬고 싶구나...”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 몸을 일으키고 백무량에게 천천히 세 번을 절한 계양
이 몸을 돌렸다. 사형은 이제 피안의 세계로 떠나려나보다. 그가 할 수 있
는 일은 오직 하나, 사형의 마지막을 지키는 정도였다.
동굴 입구로 나와 가부좌를 튼 계양이 멀리 떠가는 구름과 새소리가 아름다
워 절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울어서는 안 된다. 그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지만 사형에게 폐가 될까 두려워 감히 소리 내지 못했
다.
쪼로롱- 쪼로롱-
대신 불러주는 것일까? 산새 몇 마리가 서로를 희롱하며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 다녔다. 무척이나 한가로운 정경이건만 계양에게 그 소리는 너무 슬
펐고 어느새 흐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크! 소요를 방해하면 불호령이 떨어지는 분이거늘... 이, 이런!’
금방이라도 동굴에서 큰소리가 날 법도 한데 아무런 말이 없다. 벌써 짜증
섞인 일갈이 나왔어야 했다. 발작적으로 일어난 계양이 동굴로 들어갔지만
백무량은 아까의 모습으로 좌정해 있었다. 한없는 고요 속에 몸을 맡긴 사
형이기에 감히 말을 붙이지 못하던 계양이 쭈뼛거리다 마침내 용기를 냈다.
“사, 사형... 주무시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 짜내 물었지만 백무량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사형...”
다시 한번 용기를 내서 불렀다. 이제 사형은 벌떡 일어서서 호통을 치리라.
그리고...
“사혀엉!!”
무릎을 꿇은 게양의 애처로운 부르짖음에도 백무량은 끝내 눈을 뜨지 않았
다. 입가에 새긴 미소만큼 괜찮은 삶을 살았던 화산의 노검수는 그의 소원
과는 달리 아름모를 야산에서 영면을 했다.
그게 중요할까? 그는 충분히 풍요롭고 선택적인 마지막을 택했다. 가는 순
간까지 위엄을 잃지 않았으니 떠나가는 모습조차 아름다웠다. 계양의 구슬
픈 부르짖음이 동굴에서 이리저리 메아리쳤지만 백무량의 미소는 언제나처
럼 걸려있었다.
부모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고아에서 화산의 기둥으로 우뚝 솟았던, 무
에 미쳐 검에 관한한 최고의 정점에 섰던 노강호가 눈을 감았다.
향년 79세. 마지막으로 가져간 건 늘 그의 동반자였던 검 한 자루와 백의
한 벌, 그리고 추억이 전부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