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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14일 수요일(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 에제 9,1-7; 10,18-22
복 음 : 마태 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늘 독서에서는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 문지방에서 나와”(에제 10,18) 떠납니다.
바빌론 유배가 있던 에제키엘이 본 환시이고, 예루살렘의 함락을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서, 심지어는 성전 안에서도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심판을 선고하시고, 그 선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때
결국 하느님께서는 성전을 떠나가시고 성전은 파괴됩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형제가 잘못할 때 일깨워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그가 “교회의 말도”(요한 18,17) 들으려고 하지 않을 때는
그를 더 이상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 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땅에서 교회는 푸는 권한만이 아니라 매는 권한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풀기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복음에서 내 마음에 드는 구절만 골라 읽는 것입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을 때, 그것이 차이를 가져옵니다.
예언자를 보내시어 경고하시고,
형제를 통하여 일깨우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닫아 버릴 때,
남은 길은 멸망밖에 없습니다.
현실에서는 그보다 더 심각한 경우도 있습니다.
듣지 않을 것을 이미 알기 때문에 아예 경고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다면, 분명 다른 사람도 나에게 그렇게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dleO에, 귀를 막아버린 나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의 잘못을 알려 줄 때에 어떻게 대응하였는지 돌아봅시다.
이것은 나를 회심의 길로 이끌거나, 아니면 교회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길로 이끌 것입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돌아갑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떤 직무를 맡는 도중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느끼고
직무에서 오는 열정과 성취감을 잃어버리는 증상,
곧 정신적 탈진을 소위 ‘번 아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번 아웃을 가장 많이 겪는 직업군 1순위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밖에 없는 서비스업 종사자일까요?
아니면 잠도 자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는 전문직에 있는 사람들일까요?
또 일의 강도가 심한 육체적 노동을 하는 사람일까요?
모두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전업주부라고 합니다.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전업주부는 자기가 일의 강도와 시간을 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번 아웃은 일의 강도와 시간에 비례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노동량에 따른 보상 정도에 따라 번 아웃이 온다는 것입니다.
주부는 노동량 대비 보상이 가장 적은 집단이었습니다.
보상은 단순히 급여의 많고 적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을 때, 일에서의 느끼는 보람을 느낄 때 보상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 삶에서 누군가에게 충분히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과 행동을 통해 얼마든지 힘이 되어 주고,
이에 따라 자기 역시 다른 이에게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외로운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그만큼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외로운 사람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어떠했을까요?
나와 맞지 않는다고 사랑을 거둬들이고, 나에게 상처를 준다고 해서 단절을 해버리고,
나보다 뛰어나다면 어떻게든 깎아내리려고 힘을 쓰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구원되기를 원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떠올려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한 형제자매를 고쳐주려고 서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올바르고 지혜롭게 그를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보다 둘이나 세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음을 합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잘못했다고 거부하는 사랑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하는 사랑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못한 사람도 구원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외로운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쉽지 않은 우리의 결정이고, 또 잘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완벽한 사랑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잘 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큰 박수로 응원해 주실 것입니다.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향기입니다. 아무리 숨겨도 멀리까지 퍼져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황홀하게 합니다”(이규경). 황홀한 사랑에로 열려있기를 바랍니다.
성무일도 기도에 보면,
“겹겹이 둘러싸인 어두움 속에 내 마음 거짓으로 가득하오나
하느님 전능으로 다스리시면 내 마음 백옥같이 희어지리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알면 빛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누군가 그것을 일깨워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바른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충고를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칭찬은 달지만, 충고는 한없이 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변의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쓰지만 약이 되는 바른 충고를 해 줄 수 있고 또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소중합니다.
더더욱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으니
한마음, 한 뜻을 이룰 수 있는 형제가 있다면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형제가 되어 주십시오.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선호하지 말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두를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믿는 이들에게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성녀 안젤라 메리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충고를 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따라서 남을 충고하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또한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그것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생각해 보십시오”(프란치스코 교황).
공자께서도 “충언은 사람을 바로 서게 한다.” 하였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고 백옥같이 희게 만드시길 기도하면
주님은 그 마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오늘은 나에게 주어진 쓴소리를 하느님의 소리로 듣기를 희망합니다.
깊은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마주 오는 사람이랍니다.
그리고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반가운 것 역시 사람이랍니다.
사람이 제일 좋기도 하면서 제일 힘든 존재이기도 합니다.
좋을 때는 더없이 편하지만 틀어지면 그것만큼 불편한 것이 없습니다.
가장 친했던 사람이 가장 어렵고 힘든 사람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내 기대와 상대의 바람, 그리고 허물조차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이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혹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진심을 주고받기까지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형제간의 교정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잘못한 형제를 어떻게 혹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 고쳐주어야 하는가?” 하는
교정 방법과 절차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것을 네 단계로 제시해 줍니다.
<첫째>는 혼자 단독으로 하는 교정이여,
<둘째>는 두세 사람이 함께하는 교정이요,
<셋째>는 교회를 통한 교정하는 것이요,
<넷째>는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는 것을 통한 교정입니다.
이를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규칙> 23장~30장에서 이렇게 다룹니다.
“우리 주님의 명령에 따라(마태 18,16-17), 그의 장로들이 한두 번 그를 남몰래 훈계할 것이다.
그래도 고치지 않거든 모든 이들 앞에서 공적으로 책벌할 것이다.
만일 이렇게 해서도 고치지 않거든, 파문이 어떤 벌인지를 아는 경우에는 파문에 처할 것이요,
그렇지 못하고 둔한 자일 경우에는 육체의 벌에 처할 것이다.”(수도규칙 23,2-5)
<복음>이나 <베네딕도 규칙서>에서 다 같이 말씀하시는 것은
단지 잘못한 형제에 대한 형식적인 교정방법이나 절차가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스며들어 있는 ‘사랑’과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곧 서로를 형제요, 자신의 일부로 여기는 마음이요, 타인을 ‘남’이라 여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의 지체라는 사실에서 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교정’은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이거나 처벌을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형제적 사랑’에서 나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 그가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그의 [규칙서](4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잘못한 형제를 고쳐주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살인 행위와 같다.
왜냐하면, 잘못한 형제는 마치 독 있는 뱀에 물린 상태와 같은데,
그 독을 빼내어 주지 않고 그대로 놔두는 것은 잔인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잘못한 형제의 ‘교정’이 지극한 형제적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불편을 제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적 사랑 때문에, 사랑으로 형제의 잘못을 꾸짖고 교정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형제를 꾸짖거나 교정할 때는 사랑이 아니면 차라리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직 사랑과 신뢰, 그리고 하느님께 의탁해서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섯 번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네 번째>까지 이르게 되면, 자포자기하거나 무관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가 잘못한 형제를 위해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 사랑으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마태 18,19)입니다.
‘땅에서 풀어야 하늘에서 풀릴 것이기 때문’(마태 18,18)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먼저 ‘마음을 모으는 일’이요, 다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로 청하는 일’입니다.
스스로가 해결사가 되려고 하지 말고, 아버지께 신뢰로 의탁하는 일입니다.
성 베네딕도도 [수도규칙]에서
“(잘못한 형제들에게) 사랑을 더 베풀 것이며,
또 모든 이는 그를 위해 기도할 것”(규칙서 27,4)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있는 공동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니,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마태 18,20)
그러니 결코 포기하거나 무관심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혹 잘못한 내 형제에 대해서 포기하고 무관심하고 있지는 않는지?
혹 사랑이 없어서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마태 18,15)
주님!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형제의 잘못을 앞세우기에 앞서
그가 잘 되기를 위해 기도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의 잘못이 드러나거든
그에게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함을 알고 힘을 모아 사랑하게 하소서!
그를 돕는 길이
죄를 찾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데 있음을 알게 하소서.
제 사랑만으로는 안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신문사에 있을 때입니다. 제게 가장 중요한 일은 구독자를 늘리는 거였습니다.
구독자를 늘리기 위해서 본당을 찾아가서 홍보하였습니다.
홍보하면서 교우들에게 창세기의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시려고 했을 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하느님 저 도시에 선한 사람이 50명만 있어도 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50명만 있어도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50명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점점 숫자를 줄여서 이야기했습니다.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내려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10명을 봐서라도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신문 구독자가 50명만 넘으면 좋겠다고 부탁하였습니다.
정 어려우면 40명만 넘어도 좋겠다고 부탁하였습니다.
이렇게 신문 구독자가 있으면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실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교우분들은 저의 이야기를 듣고 기쁘게 구독 신청을 하였고, 기부금도 내주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유일한 가톨릭 신문이라고 하면서 도움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5년 동안 팬데믹도 있었지만 그래도 임기를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후임 신부님이 10월에 신문홍보를 위해서 온다고 합니다.
저도 50명은 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입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그런데 밀밭에 가라지가 자라듯이, 이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에 ‘악’이 들어왔습니다.
교회는 그 악을 죄의 뿌리라고 합니다.
죄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하느님과 멀어지려고 하는 성향입니다.
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의 결과입니다.
자유의지는 두 가지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문화, 문명, 예술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방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전쟁, 폭력, 야만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이 세상을 벌하지 않으시는 것은
선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살신성인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몰로카이의 다미안 신부님은 나병환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였고, 본인도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자신을 저격한 청년을 찾아가서 용서하였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아프리카 수단에서 선교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삶을 기록한 ‘울지마 톤즈’는 씨앗이 되어
많은 학생이 사제의 길을 가도록 이끌었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콜베 신부님은 죽어야 할 사람을 대신해서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198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를 ‘자비의 순교자’라 부르며 시성하였습니다.
신부님은 포로수용소의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넘어 희망을 전하였습니다.
신부님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셨고, 천국에서 빛나는 신앙이 별이 되셨습니다.
신부님은 이웃을 위해서 대신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콜베 신부님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욕망이라는 열쇠를 굳게 쥐고 있습니다.
교만이라는 열쇠를 굳게 쥐고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라는 열쇠를 굳게 쥐고 있습니다.
그런 열쇠로 세상의 문은 열 수 있겠지만 천국의 문을 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욕망은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생명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병들어 가는 지구에서는 인간 역시 병들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
계획한 것들, 생각한 것들을 실천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조욱현 토마 신부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15절)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을 때, 그래서 고통스러웠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힘으로써 자기 자신도 심한 상처를 입게 된다.
이제 우리의 상처보다도 형제의 상처를 치료해 주어야 한다.
그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야 한다.
그가 비난받는다고 느끼면 잘못해서 싸움이 될 수도 있다.
충고한다면서 몰아붙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충고할 때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말을 들으면 형제를 얻은 것이 된다.
그러나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불러 타일러야 한다.
공동체가 한 사람을 바로 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가 해결하도록 하라고 하신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7절)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이교인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처럼 대하라는 말씀이다.
그래도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절)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이 단죄를 받으면,
이것은 하늘에 계신 어떤 분이 무효로 해 주시지 않는 한, 그는 매인 채로 있다.
훈계를 받아들이고 공동체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면 그때는 풀리는 것이다.
매이는 사람은 충고를 한 사람이 아니라,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19).
하나가 되는 것은 사랑의 일치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무엇을 청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두 사람이 참으로 일치하지 못했거나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탓이다.
하느님께서는 형제들의 평화와 일치와 화합보다 기뻐하시는 것은 없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이 세 가지 있다.
형제들끼리 일치하고 이웃과 우정을 나누며 남편과 아내가 서로 화목하게 사는 것이다.”(집회 25,1)
주님께서 둘이나 셋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아버지께서 다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기도를 이루는 것은 사람의 수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의 신심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크기에 달려있다.
하느님께서 기꺼워하시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육신의 병보다는 영혼의 병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어제 복음은 백 마리 양 가운데 길 잃은 한 마리 양의 비유인데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짓거든 단둘이 만나서
그를 타이름으로써 그를 죄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주라고 하시고,
그래도 안 되면 둘이 타이르고 최종적으로는 교회에 알려서 고쳐주라 하십니다.
어제 아흔아홉 마리를 놔두고서라도 한 마리를 찾으라고 하심과 같이
한 사람을 구하는 데 온 공동체가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한 사람이 잘못하면 저의 누나들 모두를 혼내셨답니다.
특히 동생이 잘못했을 때 애꿎게 언니들이 같이 혼났는데 그것은
언니가 되어 가지고 동생의 잘못을 막지 않은 것 때문이었답니다.
이것은 저의 아버지만 그러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옛날 어른들은 거의 모두 이렇게 자녀를 교육했지요.
예를 들어 동생이 누군가에게 맞고 있는데
그것을 본 형이 그런 동생을 놔두고 저 혼자 돌아왔다면
그 얘기를 들은 어느 부모가 그런 놈을 가만 놔두겠습니까?
제가 아버지라도 그런 놈은 무지막지하게 혼쭐낼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교육을 제대로 받은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렇게 위기에 처할 때 모르는 체할 형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기에 처할 때 만약 모르는 체한다면
그것은 무관심하기에 어떻게 되든 관심 없거나
미움, 질투, 시기 등으로 형제가 잘못되기를 바라거나
아무튼 사랑하지 않기에 모르는 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영적으로 문제가 있을 경우입니다.
육체적이나 경제적으로 형제가 잘못되었을 경우 그러니까
형제가 병들거나 부도가 나서 쫄딱 망하게 되었을 경우는
그것을 딱하게 여기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는데
죄를 지을 경우, 특히 나에게 죄를 지을 경우,
이 경우에는 이상하게도 연민을 가지기보다는 분노하고 미워합니다.
사실 육신이 병든 것보다 영혼이 병든 것이 더 불쌍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죄를 지은 것, 특히 나에게 죄를 지은 것을
영혼의 병이라고 생각지 않기에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병인 죄를 육신의 병보다 더 안타깝게 생각하고,
더 고쳐주려고 해야 하고 어떻게든 그러니까 혼자 안 되면
둘이서, 둘이서도 안 되면 공동체적으로 고쳐주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합니다.
죄도 병입니다.
아니 죄가 더 안타까운 병이고,
죄야말로 신자인 우리가 더 고쳐줘야 할 병입니다.
나한테 죄지은 것이 영혼의 병 때문이라고 이해한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렇게 인식의 전환이 이뤄진다면
그의 죄 때문에 같이 미워하고 분노하기보다 안타까워할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박해하고 중상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따라서 자기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害)로 말미암아 괴로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태우는 사람입니다.”
면죄부와 대사는 어떻게 다른가?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교회의 권위에 대한 마태오 복음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하늘나라는 죄와 벌이 모두 사해져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교회에서 파문당하면 하늘나라에서도 파문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개신교는 그러나 교회의 이 죄 사함과 벌까지 면해주는 권한을 교회에 주었음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며 가톨릭은 돈을 받고 죄를 용서해 준다는 뜻의
‘면죄부’를 팔아 바티칸 베드로 성당을 지었다고 주장합니다.
우선 교회에 죄와 벌의 모든 용서의 권한이 주어졌음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며 그 치유가 죄의 용서의 권한이
사람에게 주어졌음을 보여주는 표라고 하신 복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영화 ‘나라야마 무사시코’에서는 고려장과 같이
70세가 넘으면 먹을 것을 줄이기 위해 부모를 산에 버리는 옛 일본 풍습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는 어머니가 아들이 주저하는 것을 보고
일부러 몰래 튼튼한 앞니를 부러뜨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머니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둘째 아들이 첫 경험을 하는 날 큰아들의 지게에 실려서 산에 오릅니다.
새로 태어나면 누군가 죽어야 하는 상징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한 일본의 전설에서는 자기 아내를 살리기 위해 노모의 간을 빼서 달리는 아들에게
어머니의 혼령이 나타나 “천천히 가라. 넘어질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습니다.
하느님도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다는 뜻입니다.
나라야마 무사시코에서는 어머니를 버리고 왔더니 슬퍼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어머니의 옷을 이미 나누어 걸쳐 입고 있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영화가 마무리됩니다.
하느님께서 교회를 낳으셨고 교회를 통해 구원의 백성이 탄생하기를 원하셨다면
‘다’ 주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면죄부는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면죄부는 죄를 사해준다는 뜻인데, 죄 사함을 돈으로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가 천국에 갈 수 있는데 그 은총을 죄인에게 돈을 받고 팔 수는 없는 일과 같습니다.
죄와 벌은 개인의 몫이기 때문에 돈을 받고 죄를 사해준다는 식의 ‘면죄부’라는 말은
가톨릭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고 개신교가 만들어낸 말입니다.
그들이 면죄부라고 말하는 단어는 라틴어 ‘은총의 문서’(Litterae indulgentiales)의 번역입니다.
이는 분명 ‘대사’(Indulgentia)와 차이가 있습니다.
대사는 본래 ‘은혜, 자비’의 뜻으로
로마 제국 시대 특별한 날에 이뤄지는 형벌의 사면을 가리키는 법률 용어입니다.
대사는 죄의 용서와는 관계없고
일정한 전제조건(기도와 회개, 성지순례, 자선, 교회에 대한 기부 등)을 채울 때
죄에 대한 보속을 감면하거나 전부 없애주는 은총입니다.
대사는 교회가 죽은 이들의 잠벌을 없애주려는 목적도 있지만,
더 큰 목적은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신앙인의 신심의 발전에 있습니다.
16세기에는 대사 관행이 널리 퍼졌고 종종 남용되었습니다.
일부 성직자, 특히 독일의 요한 테첼(Johann Tetzel)과 같은 인물은
베드로 성전 재건을 명목으로 사람들이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을 사거나
미래의 죄에 대한 용서를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면죄부를 판매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방침이 아닌 당시 돈으로 잘못을 되갚는
게르만족의 전통과 결합한 잘못된 관행이었습니다.
교회는 트렌트 공의회(1545~1563)에서 공식적으로 은총의 문서 판매를 금지하였고
1570년에는 대사를 거래하고자 하는 자들을 파문시킨다는 조항을 추가하였습니다.
정리하자면, 하느님께서는 교회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과 벌을 없애주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죄와 벌을 함께 용서해 주지 않는 이유는
죄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느껴봐야 죄의 무거움을 느끼고 다시는 죄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다윗이 병적조사를 한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흑사병이 들게 하시는 벌은 주셨습니다.
교회가 벌을 사해주는 대사 제도를 시행하는데 은총은 돈을 주고 사고팔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제도는 결국 신자들의 신심을 높이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인이신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박상대 마르코 신부
마태오복음 18장이 전하는 공동체 설교에는 모두 7개의 교회 규범이 들어있다.
그 7개를 차례로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①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어라.”(1-5절)
②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6-9절)
③ “보잘것없는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10절)
④ “율법상의 죄인들과 윤리상의 죄인들을 소외시키지 말라”(12-14절)
→ 잃은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 삽입(12-13절)
⑤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바로 잡아 주어라.”(15-17절) → 매고 푸는 권한 확대(18절)
⑥ “두 명 이상 함께 아버지께 청하라”(19-20절)
⑦ “몇 번이고 용서하라”(21-22절) → 무자비한 종의 비유 삽입(23-25절).
오늘 복음은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바로잡아 주라:는 것과
”두 명 이상 함께 아버지께 청하라“는 규범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언뜻 보기에 오늘 복음의 두 규범은 서로 다른 내용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규범을 서로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형제가 ”너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우선 가해자와 피해자가 단둘이 만나서
그 잘못을 타일러 주는 것이 첫 번째 할 일이다.
여기서 “너”는 제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잘못은 당사자에게만 국한된 잘못이 아니라 교회와 관련된 잘못이다.
물론 한 신자의 모든 잘못은 그것이 공적이건 사적이건 간에
교회 전체와 관련이 있으며, 나아가 하느님과 관련이 있다.
잘못을 한 형제가 타이르는 말을 들으면 일단 거기서 사건은 마무리 되지만
말을 듣지 않을 경우는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複數 증인을 택하라는 것이다.
증인을 복수로 택하라는 지시는 이미 유다인들 사이에 널리 통용되는 관습이다.(신명 19,15)
죄인이 증인들의 말도 듣지 않을 경우는 3단계로 넘어간다. 즉 교회 앞에 데려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는 마태오복음 공동체를 의미하는 지역교회를 말한다.
죄인이 교회 당국의 말도 듣지 않으면 최종단계로 넘어간다.
최종단계는 죄인을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 지역교회에서 추방하거나 파문하는 것이다.
유다인들이 다른 신을 믿는 이방인들이나 로마 제국을 위한 세리들을 업신여기고 냉대하며,
그들과 絶緣하는 것은 당연한 태도였다.(마태 5,46-47; 6,7 참조)
그러나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친구로 지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마태 11,19)
교회당국이 최종적으로 죄인을 추방하고 파문하는 권한은
베드로에게 주어진 매고 푸는 권한(마태 16,19)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여기서 마태오는 이 권한을 제자들 모두에게 확대시키고 있으며,
나아가 교회전체까지 확대시키고 있다.(18절)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잘못한 사람을 단죄하는 일은 이미 산상설교를 통해서 금지되었다.(마태 7,1-5)
그 이유는 자신도 단죄 받기 위함이며 하느님 앞에 어느 누구도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태오가 매고 푸는 권한을 교회 구성원 모두에게 확대시키는 것은
그 권한을 제한하려는 逆說이다.
내가 땅에서 매거나 풀면, 하느님께서도 하늘에서 매거나 푸실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태오가 비록 자신의 공동체를 위하여 한 죄인을 다루는데
1~3단계의 과정을 제시하고 최종단계로 파문을 지시하고 있지만,
마태오 자신은 공동체 안에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죄인을 바로잡아 주라”는 규범은 “둘 이상 함께 아버지께 청하라”는 규범과 연결된다.
즉 죄인을 만나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함께 기도하라는 것이다.(19-20절)
따라서 둘 이상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아버지께 청하면
무슨 일이든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 오늘 예수님의 복음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는 예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은
이방인과 세리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친구로 대하시고 사랑하시는 예수께서
사람들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하신다는 말이다.
교회 안에는 의인들과 선인들이 많다. 하지만 지상 교회는 그들만의 교회가 아니다.
교회 안에는 언제나 죄인들이 공존한다.
누가 죄인인지는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결정한다.
교회의 의인들은 보통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는 죄인들뿐이다.
따라서 교회가 할 일은 죄인들을 골라 최종적인 처방전을 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죄인인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죄인인 우리가 함께 모여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면
그 안에 오로지 의인이신 예수께서 함께 기도하시기 때문에 그 기도는 꼭 이루어진다.
사랑하는 아들의 기도를 아버지께서 외면하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기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 비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