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해설] 스크램블드에그를 만드는 여자 / 강인한
스크램블드에그를 만드는 여자
강인한
달걀에 우유를 섞어 당신은 힘차게 휘젓는다
차려 자세의 벚나무 두어 그루 창밖에서
스크램블드에그를 기다리는 동안
만성소화불량의 기색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다
내 사랑, 한때는 멋진 남자였는데
비의 씨앗을 잉태한 보랏빛 구름은
추억을 기울여 과일 접시 속으로
사월의 꽃향기를 가만가만 흘려 넣는다
시들어버린 야망, 시들어버린 사랑을
뱃속에서 지우고
당신은 붉은 핏방울을 방울방울 떨군다
번져가는 불길한 소문처럼 카펫이 붉게 물든다
당신이 내다보는 남쪽
창밖으로 초록빛 느린 시간이 흘러가고
한꺼번에 붉은 물감이 쏟아진다
죽은 포도나무 가지는 붉은 식탁보를 넘어
당신 몸을 뚫고 주방의 붉은 벽지를 타고 오른다
벽에 걸린 새빨간 태피스트리의 문양에
검은 번개가 긁힌다.
<현대시> 2009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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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방'에 출렁이는 아라베스크 검은 문양
앙리 마티스의 그림 「붉은 방(The Red Room, 1908)」의 강렬한 색감이 문득 시 한 편을 촉발시킨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선홍빛 색채일까. 검정 정장에 하얀 에이프런을 두른 여인이 고개를 가만히 숙여 꽃병인지 과일 그릇인지 매만지는 매우 조심스런 동작. 선홍색은 식탁 위로, 그리고 그 너머 벽 전체에 가득하다. 방 전체가 선홍색으로 온통 충만한 상태다. 이 방을 ‘붉은 방’이라고 명명해도 될 것이다. 이 방에서 왼쪽 구석에 의자 건너 큼직한 창이 하나 숨통을 틔워주는 구실을 하는 셈으로 그 창 밖에 푸른 정원과 잔디밭이 보이고 세 그루의 벚나무가 환하게 꽃을 피우고 섰다. 정원의 위쪽으로 비를 머금은 보랏빛 하늘이 펼쳐져 있다. 이 방에서 역동적인 리듬을 느끼게 하는 건 아라베스크 문양의 구불거리는 나무 가지일 것이다. 검은 가지가 물결치듯 출렁이며 테이블로, 다시 벽을 타고 뻗어가고 있는 게 심상치 않은 느낌을 준다. 어떤 불길한 징조처럼 느껴지는 문양의 움직임을 통해 한 편의 영화 속 서사를 불러오고 싶어진다.
두 사람은 레볼루셔너리 로드(혁명길)에 집을 얻었다. 거기 살면서 자기들에게도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날 거라고 기대했을까. 자그마한 정원이 있고 현관 문 밖에 벚나무가 봄이면 하얗게 꽃잎을 날리는 집. 뉴욕 중심가에서 한 시간 거리에 살며, 티격태격 반복되는 일상. 일상의 탈출을 위해 파리로 가자고 프랭크와 에이프릴 부부는 파리에서의 새로운 삶을 꿈꿔본다. 변화를 기대하며 들떠서 생각하는 자체가 좋았다. 정작 회사를 그만두려다 프랭크는 승진 권유를 받는다. 파리 이민을 포기하고 눌러앉을까, 그럼 월급은 오르겠지. 에이프릴은 간단한 계란 부침을 조반으로 요리한다. 출근하는 남편을 현관에서 배웅한다. 정원은 벌써 가는 봄을 알리는 벚꽃이 어지러이 흩날린다. 현관문을 잡고 여자는 격심한 통증을 느끼며 하혈을 한다. 피가 종아리를 타고 흐른다. 바닥에 떨어져 원을 그리다가 급기야 피의 원은 점점 더 범위를 넓힌다. 피의 흐름은 마침내 범람한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1997년 타이타닉 남녀 주연배우들의 10년 지난 모습이 이 영화에 들어있다. _강인한 (*)
첫댓글 태피스트리; 다양한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 주로 벽걸이나 가리개, 실내 장식품 등으로 쓴다.
이 태피스트리는 중세의 작품으로 성경의 한 장면을 표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