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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15일 목요일 성모 승천 대축일
제1독서 : 묵시 11,19ㄱ; 12,1-6ㄱㄷ.10ㄱㄴㄷ
제2독서 : 1코린 15,20-27ㄱ
복 음 : 루카 1,39-56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 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의 묵상> 성모승천 대축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의 종착점을 보여 줍니다.
그 종착점은 예수님께서 당신 부활로 먼저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는 성모님의 승천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차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맏물”(1코린 15,23)이신 그리스도께서,
미완성의 상태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이르게 될 완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다음 성모님의 승천이 구원된 이들의 미래를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우리는 어떤 희망을 품고 있습니까?
삶의 많은 근심 걱정이 우리를 얽어매는 것은 사실입니다.
내일에 대한 희망도, 한 달 후에 대한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에게 하늘을 올려다보라고 말합니다.
하늘에 들어 올려지신 성모님께서는 오늘 감사송에서 말하듯이
“완성될 주님 교회의 시작이며 모상”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시고, 성장하시며, 천사를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시는 데에서 어려움을 겪으셨고,
그 계획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피난을 가시고 낯선 땅에서 사셔야 하는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과 함께하시는 삶에서도 이해할 수 없어도 그저 마음에 새겨야 하셨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 나서야 하셨으며,
예수님의 죽음까지 보아야 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그 모든 미완성을 거쳐 가신 성모님께서 ‘시작이며 모상’으로서
우리보다 앞서 하늘로 올라가셨기에,
우리도 우리의 삶 안에서 온갖 불완전함을 겪으면서도 하늘을 바라봅니다.
믿으셨기에 복되셨던 성모님처럼 우리도 믿음을 간직한다면 복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머리카락 색깔 측정기’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단순히 전 세계의 모든 머리카락을 인종을 구별한 것이 아닐까 했더니,
사실은 인종 차별에서 나온 측정기라고 합니다.
1927년 오이겐 피셔는 아리아인(독일인)의 인종적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인종 혼합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인종적 순수성을 평가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이 ‘머리카락 색깔 측정기’였습니다.
이 인종 차별적인 이론은 곧바로 사람들에게 거부되었을 것 같지만,
반대로 뉘른베르크법에 영향을 끼쳐서
1930년대와 제2차 세계 대전에 이르기까지 나치 체계를 뒷받침했습니다.
유다인, 흑인, 로마니인 등을 표적으로 삼아 박해하거나 살해하는 행동을 합법화한 것입니다.
당시의 아리아인들은 이런 생각과 결정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많은 아리아인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집단주의에 빠져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던 수많은 박해,
지금은 분명 당시의 사람들이 잘못 판단했다고 말하지만, 당시에는 오히려 예수님이 잘못되었고
또 국가 반대하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했고 단죄했습니다.
지금의 내 판단이 무조건 옳을까요?
아닙니다. 그 기준을 이 세상의 테두리에 맞춰서 따져 들어가면 옳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주님 기준으로 따져보면 틀릴 때가 더 많습니다.
따라서 자기 기준에 맞추는 교만의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교만의 마음으로는 제대로 판단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겸손의 마음으로만이
세상의 기준을 접고 주님의 기준에 맞춰서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기준을 철저하게 지켰던 분이 바로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이십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겸손을 보여 주십니다.
또한 태중에 하느님의 아드님이 계신대도 먼저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가십니다.
이에 엘리사벳은 깜짝 놀라서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라고 말하지요.
이 밖에도 성모님의 겸손은 끝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렸을 때, 카나에서 첫 번째 기적을 행했을 때,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셨고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끝까지 지키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하느님께 기준을 맞춰서 사신 분,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하늘로 불러올리셨습니다.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세상이 아닌 철저하게 하느님께 맞춰야 합니다.
겸손함으로 하느님을 바라봅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세주의 어머니를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어머니를 통하여 우리의 필요를 전구 해주시도록 안배하셨습니다.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을 맞이하여 성모님의 전구로 겸손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울러 성모님을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길에 있어서 모범이요, 안내자요, 동반자로
모실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자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하늘로 불러올리셨습니다.
교황 비오 12세는 1950년 교황령에서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었던 하느님의 모친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다음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으로 들어 올림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 된 신앙의 진리이다.” 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성모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이
장차 얻게 될 신분을 이미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모님께서도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하느님 안에서 누린다는 뜻입니다.
천국을 차지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성모승천은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 줍니다.
인간의 몸을 지니신 성모님께서 하늘로 올림을 받았기에
우리도 하늘로 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도 하늘로 올림을 받을 수 있도록 성모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믿음의 승리요, 모든 믿는 사람들의 예형이요, 모범으로서
죽음을 극복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과 더불어 하늘의 꿈을 이루기를 희망합니다.
성모님은 항상 아드님이신 예수님과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철저히 따랐습니다. 성모님을 예수님의 첫 번째 사도라고 말합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과의 특별한 일치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육신은 예수님의 육신처럼 썩지 않고 보호되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길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곧 육신과 영혼 모두를 구원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으로부터 받으신 몸과 함께 부활하셨으며,
변모되신 인성으로 하느님 아버지께로 올라 가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몸과 같은 몸으로, 하지만 변모된 몸으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창조된 인간이신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의 영광스러운 운명이 무엇인지 확증해 줍니다.
이미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간의 영혼이 죽음 이후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고,
그들은 육신을 멸시했으며, 육신을 영혼의 감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육체가 하느님 나라의 행복 가운데서
영혼과 일치하도록 하느님께서 준비하셨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변모된 육체는 하늘나라에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계시이며 우리 신앙의 핵심인 “육신의 부활”입니다.
성모님 승천은 우리가 몸과 마음, 우리의 모든 존재를 통해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육신으로만 하느님을 섬긴다면 노예와 같은 행동일 것입니다.
단순히 영혼으로만 하느님을 섬긴다면 우리 인간 본성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성 이레네오 교부(220년경)는 말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이고, 하느님을 보는 것이 사람의 생명입니다.”
형제들을 향한 관대한 섬김으로 표현된 하느님께 대한 기쁜 섬김 안에서 살아간다면
부활의 날에 우리 운명은 우리의 천상 어머니의 운명과 같을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강론 요약).
우리의 구원은 육체와 영혼의 결합체인 인간 구원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몸의 신학’을 통하여 영육의 소중함을 일깨우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성모님은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루카1,46). 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눈길을 마리아에게로 끌어당긴 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겸손이야말로 우리를 하늘로 이끄는 길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겸손을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재능, 재산이나 성과 때문에 우리를 들어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낮추는 사람, 섬기는 이를 들어 높이십니다.
사실 마리아는 자신에게 어떤 호칭이나 직함을 붙이지 않습니다.
그저 “주님의 종”이라고 부르실 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겸손한가? 칭찬받고 인정받기를 좋아하는가?
성모님처럼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가? 아니면 주목받으려 하는가?
살펴야 합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작음을 통하여 먼저 하늘을 얻었습니다.
자신을 비우는 만큼 하느님으로 채워집니다.
자신이 보잘것없는 사람임을 깨닫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만큼
하느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바로 자신의 겸손 때문에 은총이 가득한 분이십니다.
성모님은 일평생 집안일을 하면서 평범하고 겸손하게 사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우리도 평범한 일상 안에서 하늘에 불러올림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성모님의 전구를 통해 더 겸손하고,
더 낮아짐으로 하늘을 향하여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의 삶의 여정에 함께하여
누구보다도 철저히 주님을 뒤따랐던 성모님을
성자 예수님께서 누리신 영광에 동참하게 하늘로 불러올리셔서
천상 영광을 누리고 세상의 모든 이를 위한 전구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기를 원하는 이는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굳이 성모님을 통하지 않아도 되지만
통하지 않으면 그만큼 “전구하심”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모님께 의탁함으로써 더 큰 은총을 입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잉태에서 죽음까지 그리고 성령강림을 기다리며
제자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아드님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갖가지 모욕을 당하며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을 때
다른 모든 이의 믿음은 흔들렸지만,
성모님께서는 그분이 하느님이셨다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셨습니다.”(성 알폰소리구리오)
바로 성모님은 예수님의 삶의 여정에 누구보다도 가까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셨습니다.
믿는 이들의 모범이십니다.
그래서 “성모님을 통하여 모든 것을 예수님께로!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성모님께로!”입니다.
성모님의 시선이 늘 당신의 아드님을 향해 있었고 하느님의 뜻을 가슴에 품었기에 우리도
“성모님처럼 생각하고 그분이 바라신 것을 바라고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바를 행하고 그분이 지향하시는 바를 지향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님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먼저 성모님 안에 있으라는 뜻입니다”(알베리오네).
성모님 축일에 그분의 겸손과 믿음을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혁명 노래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성모승천 대축일임과 동시에 우리 민족의 기쁨인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성모송에 언급되고 있듯이, '은총이 가득 하신 분', 곧 참으로 복되신 분이셨습니다.
‘은총이 가득하다는 것’은 축복의 풍요로움과 구원의 완성을 말해줍니다.
사실 마리아는 구세주를 낳아 인류를 구원하는 계기를 마련하셨으며,
그러기에 하느님의 가장 완전한 구원의 도구가 되셨습니다.
또한 단순히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라는 혈연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이 칭송하고 있듯이,
'하느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신앙의 여인이었기에 행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요, 비운의 어머니셨습니다.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시골 처녀로 어린 아기를 안고 피난길에 올라야 했고,
뼈를 깎는 가슴 아픈 예고를 들어야 했던 어머니였습니다.
어린 아들을 잃고 3일 동안 애태웠고, 아들 예수에게 문전박대를 당했고,
아들이 십자가형에 처형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고,
아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울부짖었던 어머니셨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묻히셨지만, 부활하실 것을 믿으셨으니,
이 부활이 바로 구원의 완성이요, 우리의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분명 성모님께서는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시기 위해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로 원죄의 물듦이 없이 출생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원죄의 결과로 갖게 되는 죽음이 없이
곧바로 승천하여 하느님께로 가심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셨습니다.
그러기에 원죄 없으신 잉태가 진정 성모님께 베풀어진 자비라면,
이제 성모님의 승천은 온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진 자비입니다.
이토록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의 삶과 미래가 하느님 안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우리 모두가 성모님같이 영광을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성모님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와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구원을 노래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혁명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큰일을 이루시는 주님을 찬미합니다.
욥처럼 우리 안에서 그분께서 이루신
'측량할 수 없이 큰일,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일'(욥 5, 9)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사부 베네딕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미'(규칙서 머리말 30절)하는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우리 안에서 이루신 측량할 수 없이 큰일,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일들을 찬미합니다.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활동하심을 찬미합니다.
우리가 당신의 자비를 입은 존재요, 우리의 삶이 당신 안에 있음을 찬미합니다.
당신과 함께 저희에게 영광을 입혀주심에 찬미합니다.
복되신 성모님과 함께 우리 주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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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승천과 함께 우리 민족에게 베풀어진 기쁨인 광복을 기념합니다.
이 광복이 바로 우리에게 베풀어진 성모님을 통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마치 제1차 세계대전이 파티마 성모님의 전구로 종결되었듯이,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동란 역시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승천대축일에 종결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우리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와 축복을 찬미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또한 오늘은 해방의 기쁜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북이 분단된 불행한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형제적 화해와 평화를 이루지 못한 채,
많은 이들이 동포요 형제를 적으로 여기고 대적하며,
여전히 편협하고 경직된 사고로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평화를 원하고, 연대와 협력과 대화의 시대를 열어가야 할 때입니다.
상대방을 굴복시키려 하거나 내 편으로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상대방의 고통과 어려움에 공감하고 연민으로 다가가야 할 때입니다.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에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특별히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루카 1,54)
주님!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찬미합니다.
제 안에 베푸신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당신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오, 주님!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여 찬미하는 일이 제 삶의 전부가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자비의 노래 외엔 아무것도 아니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008년 시흥5동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목사님이 성당엘 찾아왔습니다. 대화 중에 목사님은 제게 몇 가지 물어보았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성모님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가톨릭은 성모님을 믿느냐고 하였습니다.
개신교 신자가 그렇게 말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해 줄 수 있지만,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배운 목사님이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 답답했습니다.
먼저 흠숭과 공경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흠숭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공경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성인과 성녀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께는 좀 더 큰 존경과 사랑을 표현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이분이 이제 너의 어머니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성모님에게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톨릭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성모님을 어머니로 존경과 사랑을 드린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교회를 위해서 전구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가톨릭은 성모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은 저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저도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5살 때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있습니다.
큰길에 나갔다가 그만 버스에 타고 말았습니다.
내리고 보니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집에서는 난리가 났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제가 얌전하게 생겨서 누가 데리고 갔을 거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길을 잃어버리면 파출소로 가라고 했던 아버님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눈에 보이는 파출소로 갔고, 거기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아버님은 실종신고를 했고, 제가 있는 파출소로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머물면서 사제들과 대화를 하셨는데,
저는 파출소에 머물면서 경찰 아저씨가 사주신 순두부찌개를 먹었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었을 때입니다. 인사이동으로 제가 가야 할 성당이 정해지면
어머니는 저보다 먼저 성당에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아들 사제가 건강한 모습으로 사목에 충실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제가 외국으로 갔을 때를 빼고는 어머니는 언제나 저보다 먼저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4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는
13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아버지와 함께 저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이유는 교회에서 선포한 성모님께 대한 믿을 교리도 있지만
성모님께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순명’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이야기를 들었던 성모님은 당혹스러웠지만 하느님의 뜻임을 알았고,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순명은 원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순명은 원하지 않는 것이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따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열정’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마리아의 노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열정이 있었고, 가야 할 길을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 굶주린 이를 보살피시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세 번째는 ‘중재’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혼인 잔치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혼인 잔치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오지 않았지만, 성모님의 청을 받아주셨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사랑하고, 공경하는 성모님의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들 모두 언젠가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의 표징입니다.
누군가 이야기했습니다.
영원한 것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영원한 것은 채워짐이라고 했습니다.
희망이 채워지고, 사랑이 채워지고, 믿음이 채워지는 것이 바로 영원함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서 우리는 모두 사랑으로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 신앙인이 가야 할 미래를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충실한 응답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삶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자신보다는 이웃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다면
이 세상에 더 많은 평화가 이룩될 것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지혜롭게 극복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성모승천 대축일은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분단된 조국은 절반의 광복입니다.
언젠가 하나 되는 조국으로 진정한 광복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성모님의 전구를 청합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신 마리아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은 육신과 영혼이 함께 영광을 받으신 동정 마리아의 승천 대축일이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마리아에게서 결정적으로 완성되고 있다.
마리아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에 관련 되지 않은 것이 없다.
마리아의 영광은 마리아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일어나게 될 일의 표징으로
우리에게 기쁨과 희망을 준다.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인간 부활의 근거가 됨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 세상을 재건하는데
첫 결실로 다른 결실의 보증이 된다는 것과
둘째로 그리스도는 모든 구원받은 자들을 당신 안에 모아들이시는 새 아담이시다.
그러기에 모든 인간은 그분 안에서 죽음을 이길 것이다.
오늘 독서의 내용에 마리아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마리아도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로부터 부활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와 우리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마리아는 죽음의 지배를 전혀 받은 분이 아니다.
죄가 마리아를 스쳐 가기조차 하지 않았다.
마리아에게 있어 마지막 원수(1코린 15,26)는
이미 원죄에 물들지 않은 잉태의 순간부터 파멸되고 말았다.
묵시록은 마리아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메시아가 태어나야 할 메시아 공동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메시아는 용, 사탄에 의해 죽음의 올가미를 쓰게 되지만,
하느님은 그를 보호하여 영광의 왕좌에 앉히실 것이고,
메시아 공동체에 신비스러운 광야의 피난처를 제공하시어 보호해 주실 것이다(묵시 11,1-6).
여기에 여인으로 나타나는 메시아 공동체는 박해와 전쟁의 소용돌이에 직면한 교회이다.
이 교회의 모습을 나자렛의 마리아를 연상케 한다.
그것은 요한이 마리아에게서 교회의 이상적 표상의 실현뿐만 아니라,
항상 다시 태어나야 하는 메시아 공동체의 모성적 기능도 인식하여
교회와 마리아를 친밀히 결합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교회 헌장은
“은총의 계획 속의 마리아의 모성은 천사의 아룀을 듣고 충실히 동의하신 그 순간부터
-이 동의는 십자가 밑에서도 망설임 없이 지속되었다-
뽑힌 이들의 수가 찰 때까지 영구히 끊임없이 계속된다.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후에도 이 구원의 역할을 그치지 않으시고 계속하여
여러 가지 당신 전구로써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얻어주신다.
당신 모성애로써 당신 아드님의 형제들이
지상 여정에서의 위험과 고통 중에 있는 것을 돌보시어
복된 고향으로 인도해 주신다.”(62항) 말하고 있다.
이제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마리아야말로
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싸움과 승리 권세의 가장 고귀한 전리품이라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사실과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믿음과 신적 모성에 대해 찬양하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42-45절).
마리아는 다른 여인들과 다름없는 여인이었지만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다.
그것은 자신의 위대성을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사용하기 때문이다.
우선은 마리아가 엘리사벳과 요한에게 봉사하시지만,
나중에는 인류 역사 안에서 모든 사람을 섬길 것이다.
오직 생명과 사랑을 나눌 수 있을 때만이 어머니가 될 수 있다.
마리아는 자신 안에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받아들임으로써 이 모든 것을 나누신다.
마리아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신적 모성에 대한 소식을 알리는 순간에 발하신 동의로
이미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어 하느님의 가장 충실한 도구가 되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마리아는 “사람이 되신 말씀”(요한 1,14)을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종이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승천에 이르기까지 마리아 안에서 충만히 실현되었다.
다음에 엘리사벳의 찬사에 대한 응답으로 “마리아의 노래”가 나온다.
모든 내용은 하느님께 다시 바쳐지고 있다. 그분만이 찬미를 받으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마리아가 이 세상의 역사의 한 가운데 있음을 깨달았음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48절).
그것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무슨 일을 맡기셨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마리아는 아무 쓸모 없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인간의 생각과 가치관과는 다른
하느님의 업적을 찬미하고 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 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51-53절).
하느님은 인간들의 길을 따르는 분이 아님을 마리아는 알려 주고 있다.
마리아의 위대함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당신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시고,
다른 사람을 위해 당신의 것을 나누시는 구체적 사랑의 행위이다.
거기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마리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그 마리아의 모습이 모든 생의 의미를 현세에서만 찾으려는 우리가
깊이 알아들어야 할 점임을 생각하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항상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닮을 수 있는 삶을 노력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여야 할 것이다.
은총으로, 은총으로, 은총으로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아들을 낳으실 때 아무 흠 없이 동정성을 간직하신 그분께서
사후 당신의 육신을 아무 부패 없이 간직하셔야 마땅했다.
태중에 창조주를 모셨던 그분은 하느님의 집에 거처하셔야 마땅했다.
성부의 정배가 되신 성모님께서는 하늘의 신방에 거처하셔야 마땅했다.”
성모 승천 교리를 믿을 교리가 되게 한 다마스쿠스의 요한의 이 선언은
흠 없이 주님을 낳으신 마리아가 부패 없이 승천해야 함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원죄 없이 잉태되시고 흠 없이 잉태하신 마리아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부패 됨 없이 하늘로 오르시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며,
은총으로 시작하신 주님께서 은총으로 끝맺음도 해주실 것이라는 얘기지요.
사실 오늘 축일의 의미도 마리아가 당신의 능력이나 공로로
하늘에 오르셨음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불러올리셨음을 기념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원죄 없이 잉태되어 나시고,
죽어 부패 없이 하늘에 오르실 때 마리아가 한 것은 없습니다.
적어도 주도적이고 능동적으로 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해야겠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한 것은 무엇입니까?
정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까?
무염시태와 승천에 있어서 마리아의 몫은 위대한 믿음과 위대한 수동태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대로 되어지는 것이고
하느님 명령에 순명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하고 내 힘으로 하려고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그리고 나를 통해서 하시려는 것을, 하실 수 없게 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가장 완전한 수동태가 되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하신 다음,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셨는데
아버지 뜻이 땅에서 가장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이 마리아에게서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렇게 바꿔 기도하곤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제 안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아무튼 마리아는 자신이 주님의 종이 되겠다고 함으로써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데,
종으로 낮추니까 하느님께서는 그를 주님의 어머니로 높여 주신 것이고,
주님의 어머니이기에 원죄 없이 잉태되기도 하셨지만
주님의 어머니이기에 부패 없이 승천하게도 하셨지요.
이 지점에서 다마스쿠스의 요한과 프란치스코의 같은 점과 차이점이 갈립니다.
같은 점은 두 분 모두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에 방점을 둔다는 점입니다.
교회의 오랜 전통은 마리아의 동정성을 너무 강조하면서
마리아를 따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정배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데
다마스쿠스의 요한이나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어머니이심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마리아가 성부의 정배가 되셨다고 하였지만,
프란치스코는 성령의 정배가 되었다고 했는데 이점이 차이점이고,
이보다 더 중요한 차이점은 동정을 간직함으로써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다고 함으로써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 데에 마리아의 공로가 있었음을 암시하지만
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칸들은 은총으로 어머니가 되셨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굳이 마리아의 공로가 있다면
오늘 엘리사벳의 칭송처럼 주님의 말씀을 믿으신 것이고,
그럼으로써 천사의 말처럼 은총이 가득한 여인이요 어머니가 되신 점입니다.
은총으로 잉태되시고,
은총으로 어머니 되시고,
은총으로 승천하신 마리아를 기리며 본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나의 마니피캇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우리가 지내는 ‘성모승천 대축일’은 주님성탄, 주님부활, 성령강림 대축일과 더불어
교회의 4대 의무 대축일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성모승천 대축일이 이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도
다른 세 가지 대축일과는 달리 많은 신자들에게
조금은 멀리, 그리고 낯설게 여겨지고 있다는 생각이 앞선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두 가지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는 전자의 3대축일이 하느님 예수와 성령에 관한 대축일인 반면에
오늘의 대축일은 마리아에 관한 대축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모승천 대축일’을 정확히 표현하여 ‘성모몽소승천 대축일’이라고 한다.
‘성모몽소승천’이란, 성모 마리아께서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신 후
그 육신과 영혼이 마리아의 자력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하늘에 올려짐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주님성탄, 주님부활, 성령강림 대축일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스스로 세상에 펼치신 인류구원사건인데 비하여,
성모승천 대축일은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인간 마리아에게 베푸신 최고의 은총을 기념하는 사건이다.
둘째는 오늘의 대축일이 3대 대축일과는 달리 성서상의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의 죽음이나 승천에 관한 기록은 성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거룩한 전통인 聖傳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마리아에 관한 축일은 동방교회에서부터 시작되는데,
4세기 중엽 ‘복되신 동정녀 기념일’을 제정하여 마리아의 죽음과 승천을 기념하였다.
이를 본받아 서방교회에서도 7세기 초,
로마의 황제 마우리씨오(582-602)가 ‘복되신 동정녀 기념일’을 8월 15일로 정하였다고 한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에 의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강림 후에
성모 마리아는 소아시아(현재 터키)의 에페소 지방에서
요한 사도와 다른 몇몇 사도들과 함께 사시면서,
그곳의 신자들에게 당신 아들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나날이 덕행과 믿음에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셨다고 한다.
당시 마리아의 소망은 단 한 가지로서, 천국에서 당신 아들 예수를 다시 뵙는 것이었다.
성모 마리아는 15년 동안 이곳에서 사시다가 6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마리아가 임종할 그때에 공교롭게도 부활하신 예수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와 같이 토마 사도를 뺀 다른 모든 사도들이 모여
마리아의 임종을 지켜보았고, 돌아가신 후 무덤에 안치했다고 한다.
3일이 지난 후 마리아의 임종 소식을 들은 토마 사도가 급히 돌아와서,
성모 마리아께 마지막 인사라도 드려야 한다면서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다른 사도들과 함께 무덤을 다시 열어보았더니
마리아의 유해는 온데간데 없었고 수의만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목격한 사도들은 마리아께서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여
당신 아드님처럼 하늘에 오르셨다는 사실을 믿고,
이러한 영광을 베풀어주신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면서
이를 선포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성모몽소승천은 초대교회 때부터 사도들과 교부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믿어 왔던 은혜로운 신앙 조목으로서, 여러 차례 성모님의 발현과,
레지오 마리애의 창설과 더불어 성모께 대한 공경과 신심에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해온 것이다.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전승에 힘입어 ‘성모 무염시태 교리’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이는 천주의 어머니이시며 동정여이신 마리아가 그의 양친 요아킴과 안나로부터 잉태되는
그 순간에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온 신자들이 믿어야 할 교리로 선포한 것이다.
나아가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가장 풍요로우신 하느님’이라는 사도헌장을 반포하여,
마리아가 죽은 후 하늘에 올림을 받았다는 교리를 믿어야할 신앙교의로 선포하고
전통에 따라 8월 15일을 성모몽소승천 대축일로 정하였다.
이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께서 지상 생활을 마치신 후
원죄의 결과가 가져다 주는 죽음에 예속되지 아니하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셨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로써 전 세계의 교회는 나자렛의 마리아가 하느님의 특은으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함께 나누고 있음을 경축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마리아보다 앞서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권능과 업적, 그리고 공로로서 부활 승천하셨지만,
마리아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의하여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시는 은혜를 받으신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의 부활과 승천은 마리아의 개인적인 영광일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인간이 미구에 받게 될 부활과 승천의 원형이며 모델로서,
우리에게 약속된 영광이며 희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오늘 우리가 기뻐하며 기념하는 대축일의 크나큰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한낱 인간인 마리아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틀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영광이며,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최대의 영광과 은총은 마리아 편에서 볼 때 거저 주어진 것이지만,
하느님 편에서 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마리아의 굳건한 믿음과 겸손이다.
인간의 눈에는 불가능하게 보였던 동정녀의 잉태였을망정
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에 전적인 신뢰와 온전한 믿음을 걸었던
마리아의 태도가 구세주의 탄생을 가능케 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구원 사업에 지대한 협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찬미를 받는다.
엘리사벳의 찬미에 이어서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를 노래하는 마리아의 ‘마니피캇’에서
우리는 그분의 지극한 겸손을 알 수 있다.
주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레어 기뻐했던 마리아의 겸손,
자기에게 주어진 온갖 영광과 은총을 다시금 주 하느님께 돌리면서
모든 것이 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이라고 말하시는 마리아의 겸손,
이는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덕행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생활 속에서 나의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기뻐 설레어지는가?
우리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와 은총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다시금 돌려 드리면서,
내가 하는 모든 일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그분께서 나에게 해주신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대답이 ‘그렇습니다.’라면, 우리도 틀림없이 성모 마리아 곁에 성큼 다가서 있을 것이며,
마리아의 마니피캇이 바로 우리의 마니피캇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광복절을 함께 경축 하면서....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