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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김상헌과 최명길[선택! 역사를 갈랐다]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110 14.09.18 12: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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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역사를 갈랐다] (10)

김상헌과 최명길

 

국제사회 신흥강자 등장… 굽히느냐 맞서느냐

 

1637년 1월 18일 청군에게 포위되어 있던 남한산성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산성으로 쫓겨 들어온 지 한 달이 훨씬 지났지만, 돌파구는 보이지 않았다. 연일 이어지는 매서운 추위에 병사들은 얼어 죽거나 동상에 걸려 쓰러지고, 얼마 남지 않은 군량은 하루하루 줄어들고 있었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구원병이 끊겨 버린 점이었다. 시간은 자신들 편이라고 확신했던 청군 지휘부는 연일 출성과 항복을 독촉했다. 벼랑 끝으로 몰린 조선 조정은 결국 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조판서 최명길(1586~1647)이 청군 진영에 보낼 문서의 초를 잡았다. 문서는 ‘조선국왕은 절하고 대청국 관온인성 황제께 글을 올립니다.’라는 구절로 시작되었다. 조선이 처음으로 ‘오랑캐’ 청을 황제국으로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예조판서 김상헌(1570~1652)은 글을 보고 통곡했다.

그는 항복 문서를 빼앗아 찢어버린다. 그러자 최명길은 흩어진 종이 쪽을 주워 모아 풀로 붙인다. 처참하고도 희극적인 장면이었다. 왜 한 사람은 찢어버리고, 다른 한 사람은 도로 붙인 것일까?

 

 

▲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청군에 맞서 농성을 벌였던 남한산성. 청과 화친할 것인지, 결전을 벌일 것인지 갈팡질팡한 조정 때문에 청군이 내륙 깊숙이 진주함에 따라 백성들의 피해는 크게 불어났다.

 

 

●원칙을 위협했던 현실

 

17세기 초반,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 정세는 심하게 요동쳤다. 15세기 이래 패권국으로 군림했던 명의 몰락이 뚜렷해지고, 만주에서 급속히 떠오른 후금이 명에 도전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두 나라 사이에 낀 조선의 처지는 괴로웠다. 임진왜란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대륙 패권의 변동이라는 격변 속으로 휘말렸기 때문이다. 명은 조선을 끌어들여 후금과 싸움을 붙이려 했고, 후금은 후금대로 조선에 중립을 지키라고 압박했다.

 

명과 후금에 치여 ‘샌드위치’가 된 처지에서 1627년 조선은 정묘호란을 겪는다. 명과의 결전을 앞두고 조선을 묶어 두려 했던 후금의 침략을 받았던 것이다. 후금군 철기(鐵騎)의 돌격을 감당할 수 없었던 조선은 후금과 형제(兄弟) 관계에 입각한 화약을 맺는다.

 

조선 지식인들은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지닌 세계관으로 보자면 만주족 후금은 분명히 ‘오랑캐’이자 ‘금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금을 형으로 섬기는 것은 도무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갈수록 엄혹해졌다. 조선이 ‘임금’이자 ‘부모’로 섬기던 명은 후금에 계속 밀리기만 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명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하면서 기세가 높아졌다. 급기야 1636년 후금의 홍타이지 칸(汗)은 황제가 되기로 하고 ‘아우’ 조선에 그 사실을 통고한다.

 

칭제 사실을 알리려 후금 사신 용골대 일행이 입국하자 조선 조야는 정신적으로 공황 상태에 빠진다. ‘중화국 명의 천자(天子)만이 천지간에 군림하는 유일한 황제’라는 조선 지식인들의 믿음과 원칙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선 조정은 격앙되었다.

 

 

●주화냐? 척화냐?의 선택

 

대다수 신료는 “명은 부모의 나라이고 후금은 부모의 원수인 데다, 명은 왜란 때 조선을 도왔으므로 절대로 배신할 수 없다.”며 용골대 일행의 상경을 막으라고 촉구했다. “용골대 일행의 목을 베어 명으로 보내고 전쟁을 불사하자.”는 초강경론을 펼치는 사람도 있었다. 김상헌은 그 같은 주장을 폈던 척화파(斥和派)의 맏형 격인 인물이었다. 천자국 명을 섬겨온 예의와 명분을 수호하기 위해서도 후금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결전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명을 위해서라면 종사가 망하는 것도 감수할 수 있다.’는 주장이기도 했다.

 

소수파였던 주화파(主和派)의 의견은 달랐다. 주화파의 대표자 최명길 또한 ‘오랑캐와 척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론이자 원칙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문제는 당시 현실에서 ‘원칙’을 관철하려 할 경우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최명길은 ‘임금의 의리는 필부의 그것과 다르다.’며 ‘조선의 임금이 명을 위해 종사를 망하게 할 수는 없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묘년에 맺은 후금과의 형제관계를 유지하도록 끝까지 노력하되, 후금의 칭제에 대해 호오(好惡)의 감정을 드러내지 말자고 강조했다. 최명길은 ‘오랑캐가 칭제했다.’는 사실 자체에 흥분하여 기존의 관계를 무조건 파기하자고 했던 척화파들을 비판했던 것이다.

 

인조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는 결국 다수파인 척화파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후금과 맺은 형제관계를 파기하고 절교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절교 ‘이후’에 대한 군사적 대책은 미흡했다. 청이 침략할 경우 서울을 떠나 강화도로 들어가 맞선다는 것이 주된 방책이었다.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이 얼어붙자 청군 철기는 서울을 향해 내달렸다. 12월 14일 청군 선봉은 지금의 녹번동 부근까지 도달했다. 청군은 의주에서 서울로 이르는 대로 주변의 산성에 들어가 청야작전(淸野作戰·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농작물이나 건물 등 지상에 있는 것들을 말끔히 없애는 작전)을 폈던 조선군을 무시하고 돌격을 감행했다. 허를 찔린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할 시간적 여유를 상실했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한산성에는 1만 4000여 명의 병력과 그들이 45일 정도를 버틸 수 있는 군량밖에는 없었다. ‘춥고 배고픈’ 산성은 청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고 남·북방의 구원병들은 산성으로 접근하는 족족 청군에게 궤멸하였다. 청은 처음에는 왕세자를 내보내야 항복을 받아 주겠다고 했다. 이어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고, 나중에는 척화신들을 묶어 보내야 한다고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포위된 산성에서도 ‘선택’을 둘러싼 논쟁은 지속되었다. 김상헌 등은 인조에게 “오랑캐의 신하가 되느니 최후의 결전을 벌여 깨끗이 망하자.”는 주장을 폈고 최명길 등은 “종사와 백성을 생각해야 할 임금은 은인자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성을 지키던 병사들도 동요했다. 추위와 굶주림, 공포에 지친 병사들 가운데는 항복하자고 시위를 벌이는 자들도 나타났다. 막다른 상황에 몰리자 인조는 결국 최명길 등의 건의를 받아들인다.

 

 

●‘선택’의 역사적 의의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삼전포(三田浦)로 내려와 항복했다. ‘오랑캐 추장’ 홍타이지에게 세 번 큰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항복이었다. 인조가 겪은 치욕보다 더 처참한 것은 수십만의 백성이 청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사실이다. 조선 포로들은 심양으로 끌려가 노비로 사역되었다. 많은 포로가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는가 하면 도로 붙잡힌 포로들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을 받았다. 포로가 된 많은 여인이 끌려가는 도중 청군의 첩으로 전락했고, 심양에 도착해서는 질투심에 눈이 먼 만주족 본처로부터 끓는 물 세례를 받은 여인도 있었다. 어렵사리 종사와 국체를 보전했지만, 전란 때문에 백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처절함 그 자체였다.

 

조선은 과연 이 처참한 국난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일까? 조야를 막론하고 당시 조선 지식인들 대다수가 “명은 중화이고 청은 오랑캐”라는 것을 원칙으로 견지하는 한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원칙’과 ‘현실’이 부딪칠 때 무엇을 가장 우선적이고 소중한 목표로 삼을 것인지를 고려하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남한산성의 함락이 임박했을 때, 김상헌 등이 제기한 주장은 “조선의 신료는 물론 임금도 명을 위해 ‘옥쇄’(玉碎·명예나 충절을 위하여 깨끗이 죽는다는 의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최명길 등은 “조선 임금은 명보다는 조선 백성의 운명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전자가 ‘무차별적 원칙론’이라면 후자는 ‘선택적 원칙론’이었다. 병자호란의 발생부터 종결까지 인조는 양자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병자호란 무렵의 국제질서 변동 과정에서 조선은 ‘독립변수’가 아니었다. 명과 청 사이에 낀 조선은 두 나라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전화에 휘말리고 말았다. 양국과의 관계를 모두 원만히 유지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명과 청이 계속 싸우는 상황에서 ‘종속변수’ 조선은 선택의 기로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처한 이 같은 엄혹한 조건을 잘 알고 있었던 최명길은 병자호란 직전 인조에게 ‘결단’을 촉구한 바 있다. 그는 청과의 화친을 강조하면서도 “척화파들의 주장처럼 청과 맞서 싸우려는 것이 ‘진심’이라면 강화도를 포기하고 압록강까지 전진해서 싸우자.”고 촉구했다. 인조가 거부하여 무산되었지만, 이 주장이 갖는 의미는 만만치 않다. 국경에서 결전을 벌이면 승패 또한 그곳에서 조기에 결판날 것이고, 청군이 깊숙이 남하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그렇게 많은 포로가 청군에게 사로잡히는 비극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최명길의 주장이야말로 ‘종속변수’ 조선이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명청 교체의 격변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대안이 아니었을까.

 

17세기 초반 조선이 명청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로 내몰렸던 사실은 미국과 중국이 맞선 오늘의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존의 패권국이 쇠퇴하고 새로운 강국이 떠올라 그에 도전하는 사태가 빚어질 때 한반도는 예외 없이 위기를 맞았다. 명청 교체를 비롯하여 14세기 후반의 원명 교체, 16세기 후반의 일본 굴기, 19세기 후반의 청일전쟁이 한반도로 몰고 왔던 결과들이 그 생생한 실례다. 다가오는 미·중 대결의 시대, 이른바 G2시대를 맞아 우리는 또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나아가 ‘선택의 기로’로 내몰리는 것을 피하고자 우리는 지금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한명기(명지대 사학과 교수)

 

 

 

 

 

전란(戰亂)속에 꽃핀 이상주의자 金尙憲

 

《전쟁중에 살아남는 것, 먹고 사는 것이 시급한 현실에 김상헌은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당대에는 크게 평가받지 못하더라도 백년 후쯤이면 평가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다.》
 

金尙憲(김상헌·1570∼1652)이 태어나 83세의 장수를 누린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의 시기는 조선왕조의 변혁기이자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재편된 격변의 시대였다.

대내적으로 조선전기 체제가 이완되어 뜻 있는 이들은 대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훈구파로 불리는 구 정치세력이 퇴조하고 사림파로 불리는 신 정치세력이 정치일선에 등장하면서 정치판이 물갈이되고 있었다.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학파는 동인정파로,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하는 기호학파는 서인정파로 전환되어 학파는 정파의 모집 단이 되었다. 
 

선조대에 사림이 전국적으로 포화상태를 이룬 상황에 학파가 정파로 결집된 붕당(朋黨)은 당파이자 곧 학파라 볼 수 있다. 선비의 집단인 사림에 학문집단의 성격이 강하다면 이들의 수기치인(修己治人)적 입장은 정치계로 열려 있는 것이 기본이었다. 
 

바로 이들에 의하여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조선의 정치권은 당연히 유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선조의 후원에 의하여 사림세력이 개혁의 기치를 들고 있었지만 기득권층인 훈구파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바로 이 시점에 일어난 임진왜란(1592∼1597년)은 조선의 정계재편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明) 청(淸)의 교체라는 국제질서 재편을 가속시켰다.

 

임진왜란은 당시의 세계대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전쟁으로 동아시아의 기존질서가 와해되면서 만주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여진족의 발흥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당시 동아 국제질서의 맹주였던 명나라는 전란으로 인한 국력 소모와 이전부터 누적되어온 내부적 붕괴의 여러 요인에 의해 급격히 쇠미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를 인지한 여진족은 족장 누르하치를 구심점으로 1616년 나라 이름을 후금이라 하여 중원을 넘보게 되었다.

광해군의 북인정권은 시세에 따라 향배를 달리하며 관망하는 실리외교를 폈지만, 1623년 인조반정에 의해 새로 수립된 신정부는 북인정권과는 본질적인 차별성을 보였다. 
 

순정 주자학도로 자처하던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서인과 퇴계 이황계의 남인이 연합한 연립정권은 임진왜란 때의 「재조지공」 (再造之功·조선을 도와준 공)을 들어 친명(親明)을 분명히 하고, 북방 오랑캐로 격하하던 여진에 대한 배금정책의 기치를 선명히 하였다. 
 

후금으로서는 명의 우방 조선을 선제 공격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1626년 화친을 표방하던 태조가 죽자 그 아들 태종은 주전론으로 선회하고 1627년(인조 5년) 정월 3만명의 군사로 의주를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안주 평양을 거쳐 황주에 이르렀다.

급보에 접한 인조 이하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하여 화(和) 전(戰) 양론이 비등하였는데, 중원 평정의 대업을 앞에 둔 후금이 강화 의사를 보여 3월3일 강화부 성 밖에서 이른바 형제의 맹약을 맺고 조공과 국경무역을 조건으로 후금군은 철병하였다.

이른바 정묘호란이다. 후금으로서는 우선 조선의 기를 눌러 명나라를 정벌하는데 있어 배후의 안전을 기하고 전쟁 수행에 소요되는 막대한 물량을 조달하기 위한 조처였다. 
 

정묘호란 후 후금은 명을 정벌하는 과정에 병선과 군량을 조선에서 징발하고 가도(假島) 토벌을 목적으로 자주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았기에 후금에 대한 조선의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내몽고의 여러 부(部)를 평정한 후금은 1636년(인조 14년) 2월 조선에 사신을 보내 기존의 형제 칭호를 버리고 군신(君臣) 관계를 맺을 것을 강요하는 국서에서 나라 이름을 청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임을 천명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다」(天無二日)는 명분론으로 그 존재를 부정하고 그 방약무인한 작태를 매도하여 주전론이 팽배하게 되었다.

청나라의 국서를 돌려보내고 사신을 잡아 가둔 뒤 전국 팔도에 선전포고의 교서를 내리니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순수 성리학적 입장에서 볼 때 이단적 노선이라 비판하여 광해군대 북인정권을 숙청하고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 주도의 순정 성리학자로 구성된 정부로서는, 이적인 여진족과 형제의 의리조차도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여겨왔는데, 이에 더하여 군신의 의리란 더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는 무리한 요구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독안에 든 쥐 조선」

위기를 모면하고 간신히 탈출하여 귀국한 사신 용골대로부터 조선의 태도를 확인한 청태종은 12월2일 10만 대군으로 친정(親征)에 나섰다.

청군은 기마민족다운 속전속결(速戰速決) 전법으로 경로의 수비가 강고한 성들(예컨대 임경업이 지키던 의주의 백마산성 등)을 비껴 진군하여 불과 10여일 만인 12월14일 서울에 육박하였다. 그들에겐 보급이 필요 없었다. 
 

말린 말고기를 안장에 매달고 말타고 달리면서 배고프면 말고기를 씹고 말젖을 짜 마시면 되었다. 따라서 탁월한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청군 내침의 보고를 조선정부가 받은 것은 12월13일 적이 안주에 이르렀다는 도원수 김자점의 장계에 의해서였다. 조정에서는 피란을 서둘러 분조(分朝·조정을 나눔)하였다. 우선 세자빈 강씨와 원손(元孫),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비롯한 비빈종실(妃嬪宗室)과 종묘 사직의 신주를 강화도로 피란시키고, 서울에 육박한 청군의 선발대에 의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힌 인조와 소현세자 및 조정대신들은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다. 
 

청군의 선발대가 12월16일 남한산성을 포위한 상태에서 청태종은 다음해인 1637년(인조15년, 丁丑) 정월 1일 도착, 탄천에 20만 대군의 진을 치고 전군을 지휘하였다.

성 안에는 군사 1만 3천여 명, 백관 1천여 명 합하여 1만 4천여 명과 50여 일분의 식량이 있었다. 완전히 고립된 성내에서는 다시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론과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론이 치열하게 백중하였다.

정묘호란 이후 주전론이 국론이었지만 급박한 상황 앞에서 현실론인 주화론이 고개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전자는 김상헌 정온 이경여 등이 주도하고 후자는 최명길을 위시하여 이경직 김류 등이 주도하였다. 
 

이미 체질화된 성리학의 기준에서 볼 때 북방 오랑캐인 여진족과 형제의 의리나 군신의 의리를 맺는 일은 가당치 않은 굴욕이자 치욕이므로 승패 불구하고 일전을 불사한다는 주장이 사림사회의 여론이자 국론이었으니, 이 주전론은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화친을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는 척화론으로 선회하였다. 척화론의 대세 속에 현실적으로는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피해를 줄이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출하여 국가위기를 수습하기 위하여 하루빨리 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의론이 당연히 제기되었다. 
 

「청」으로 국호까지 바꾼 여진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중원이므로 조선은 빨리 화의를 성립시켜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주화론이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이다. 
 

전자가 이상론 내지 원칙론이라면 후자는 현실론이었다. 오히려 이들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비교하고 「국론 분열」이라는 수식어로 설명하기에 이른 것은 후세의 일이다. 

그것은 이른바 근대사학이 성립된 후 현대적 가치관과 인식론으로 척화론자를 허황된 명분론자로, 주화론자를 현실을 직시한 역사적 사명에 투철한 사람들로 평가한 데 기인한다. 이 평가는 현대적인 실리주의와 힘의 논리를 대입시킨 시각이다. 
 

 

67세의 척화론자
 

남한산성이 포위된 지 50여일 된 1637년 정월 23일 강화도가 함락되어 원손과 세자빈 강씨, 두 왕자와 역대 왕들의 옥새가 적의 손에 넘어 갔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성내에 전해지고 기다리던 의병과 명군의 원조가 기대할 바 못된다고 인식한 조선정부에서는 주화론이 척화론을 압도하고 인조의 지지를 얻은 주화론자들이 청나라와 강화교섭을 시작하였다. 
 

김상헌 생애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 시점에 시작되었다. 그는 67세의 노구를 이끌고 척화론자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는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의 국서를 찢어버리고 분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신이 국서를 찢은 죄 죽어 마땅하나 오늘의 의론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소신을 먼저 죽여서 인심을 하나로 하십시오』 하였다. 그후 6일 동안 단식하다가 척화한 사람들을 청에 포로로 보낸다는 소식 을 듣고 비로소 일어나 음식을 들고 『내가 만약 먹지 않고 먼저 죽는다면 사람들이 적진에 가는 것을 피하려 한 행동이라 말할 것이다』라 하고 나아가 왕명을 기다렸다. 
 

결국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젊은 언관들이 속죄양이 되어 청진에 잡혀갔고 이들 3학사는 척화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지만, 실제 척화론을 주도한 핵심인물은 김상헌으로 주화론의 핵심인물인 최명길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던 것이다.

 

『임금의 욕됨이 극한에 이르렀는데 신하의 죽음이 어찌 더딘가
목숨을 버리고 의(義)를 취한다 하더니 바로 지금이 그때인가 하노라.
임금을 모시고 투항하는 건 내 진실로 부끄럽네.
한칼로 인(仁)을 얻으리니 죽음은 집에 돌아가는 듯 여겨지네』 
 당시 그가 지은 이 시에 그의 정면대결 의지가 결연히 나타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치욕적인 상황에서 굴종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심회의 토로이다. 
 

마침내 조정여론은 현실론인 주화론으로 기울고 인조가 여기에 동조하여 이른바 「정축(丁丑)의 하성(下城)」이라 일컬어지는 항복절차를 밟게 되었다. 국체의 상징인 왕이 남한산성에서 삼전도에 내려와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다. 예조판서로서 외교업무의 총책임자이던 김상헌은 개인적으로 강직한 성향에다 자신의 업무수행에 대한 자책감까지 겹쳐 그 치욕감이 누구보다 심했을 것이다.

 

벼슬 사양하는 상소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리자 김상헌은 벼슬을 버리고 자신의 관향지인 안동으로 낙향하여 학가산(鶴駕山) 아래 깊은 골짜기에 목석헌(木石軒)이라는 초옥을 엮고 은거하였다. 이 때 조정에서는 왕을 호종하여 전쟁을 수행한 여러 신하들에게 위로차 직급을 올려주는 조치를 취하였는데 김상헌도 숭록(崇錄)대부로 높여주니 그는 이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전하께서 산성에 계실 때 모든 대신들이 적과 화친하여 산성에서 나갈 것을 권하였는데 신만이 사수해야 한다고 감히 아뢰었으니 신의 죄가 하나이며, 항복하는 글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신의 손으로 그 문서를 찢어버리고 묘당에서 통곡하였으니 신의 죄가 둘이요, 전하와 세자가 오랑캐의 진영에 나가실 때 신이 말 앞에서 죽지 못하였고 또 병 때문에 행차에 수행하지도 못하였으니 신의 죄가 셋입 니다. 
 

이렇듯 큰죄를 짓고도 아직 형벌을 면하고 있는데, 어찌 감히 처음부터 끝까지 말고삐를 잡고 호종한 여러 신하들과 같은 은상(恩賞)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추위와 더위가 없어지지 않는 한 갖옷과 갈포옷을 없앨 수 없으며, 적국이 멸망하지 않는 한 전쟁과 수비하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뜻을 가다듬고 요새의 방비를 더욱 닦으시어 국가로 하여금 두 번 다시 욕되지 않게 하십시오』 
 

이 상소의 요점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벼슬의 승급을 사양하는 이유로 자신의 죄를 세 가지로 열거하고 있지만 진정한 이유는 화친을 주장한 사람들과 동렬에 서서 굴욕적인 벼슬을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완곡하고 간접적이지만 치욕의 대가로 주어진 일시적 인 평화에 자신은 안주하고 싶지도 않고 동조하고 싶지도 않다는 의사표시인 것이다.

또 하나는 청나라와 대결이 끝난 것이 아니라 앞으로가 문제라는 선견지명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청나라를 적국으로 설정하고 있는 한 전쟁의 대비를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고 그 정신력은 와신상담에서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청나라를 토벌하겠다는 북벌론은 상처받은 국민적 자부심의 회복운동으로 제기되어 조선후기 사회 재건의 구심점으로 기능하였다. 그 논리의 핵심이 복수하여 치욕을 씻겠다는 복수설치(復讐雪恥)에 있고 그 논리를 최초로 「와신상담」이라는 말로 김상헌이 제기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과 역할은 결국 청나라에 알려져 1637년 2월 안동에 은거한지 3년만인 1640년 청의 강경한 요구로 심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70세에 적국의 인질로
 

인조는 이미 70세를 넘은 그가 북쪽으로 가는 사태를 자신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 사람을 시켜 표범털가죽으로 만든 외투와 친필 서한을 전하였다.

 

이 때 그가 지은 시조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 말동 하여라』이다.

 

고국 산천의 대표적 존재인 북한산과 한강에 이별의 인사를 하며 자신이 고국을 떠나고 싶지 않은 심정을 토로하였다. 더욱 이 시절이 수상하다는 말로 당시 시국의 어려움을 표현하고 결국 자신의 귀국은 어렵지 않을까 하는 뜻을 담았다.

의주에 도착하여 적장 용골대와 상면하게 되었는데 그는 몸을 가눌 수가 없어서 그 옆에 누워서 대담하게 되었다. 
 

 

용: 너의 왕이 남한산성에서 내려올 때 너는 왜 따르지 않았는가.
김: 나는 병이 들어 걸을 수 없었기 때문에 따라가지 못하였다.

용: 벼슬을 받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김: 늙고 병들었으므로 조정에서 벼슬을 주지 않았다.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느냐. 
 

용: 네가 우리에게 수군을 보내지 말라고 임금에게 권한 것은 무슨 까닭이냐.
김: 수군을 보내지 말라고 임금에게 권했지만 조정에서 내 말을 듣지않았다. 내 말 때문에 이루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 그리고 임금과 신하 사이에 말한 것을 다른 나라 사람이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

 

이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김상헌은 70이 넘은 병든 몸으로도 적장의 위협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소신을 피력하였다. 의주를 거쳐 심양에 가서 청나라 형부관원의 심문에도 여전히 소신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므로 그들도 『참으로 어려운 노인이다』하면 서 그 충절에 감탄하였다 한다.

이 때는 주화론을 주장한 최명길조차 청나라의 의심을 사서 심양에 잡혀와 구금생활을 함께 하게 되었다. 처음에 최명길은 김상헌이 국난에 처하여 자신의 지조만 고집하여 이름을 낚으려는 마음을 가진 자라고 의심하였는데 죽음을 앞에 두고도 불요불굴한 그의 태도 를 보고 그 절의에 탄복하게 되었다. 
 

김상헌 또한 최명길이 왕을 오도하여 국가에 치욕을 안겨준 간흉이라 오해하고 있었는데 함께 인질생활을 하면서 국난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화친을 주장하게된 최명길의 참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김상헌은 『양대(兩代)의 우정을 찾고 백년의 의심을 푼다』고 시를 읊고, 최명길은 여기에 화답하여 『그대 마음 돌과 같아 끝내 돌리기 어렵고 나의 도(道)는 고리와 같아 믿음에 따라 돈다』고 하였다.

역시 척화론자의 한 사람인 이경여(1585∼1657년)는 두 사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비교 평가하였다. 
 

 

『두 어른 경(經) 권(權)이 각기 나라를 위한 것이니,
하늘을 떠받드는 큰 절개요,
한 때를 건져낸 큰 공적일세.
이제야 원만히 마음이 합치는 곳,
남관(南館)의 두 노인 모두가 백발일세』 
 

 

척화론을 주장한 김상헌이 변치 않는 원칙론인 경(經)을 이야기한 것이라면, 주화론을 주장한 최명길은 일시적인 방법론인 권(權)을 채택한 것이라는 인식이다. 전자가 절개를 높였다면 후자는 공적을 세운 것이며 양자는 국가를 위하여 상호보완을 한 셈이라는 평가였 다.

 

다시 말하면 주화론자들의 종전협상에 척화론자들의 강경론이 배후작용을 함으로써 조선측 주장에 뒷받침이 되었고 청나라에 조선사대 부의 만만치 않은 기개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상론 내지 원칙론인 척화론과 현실론인 주화론은 현실타개 방법론상의 이견이었을 뿐 기본적으로는 유교적 명분론자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청에 대한 인식은 같았다.

 

호란 후 조선사회가 명분론인 척화론으로 방향설정이 단일화되고 그 연장선상에서 북벌론이 제창된 사실로도 그 정체성의 실체와 노선을 확인할 수 있다.

 

김상헌은 서울 출생으로 돈령부도정 극효(克孝)의 아들이며 우의정 상용(尙容)의 동생이다. 3살때 큰아버지인 현감 대효(大孝)의 양자 가 되어 21세인 1590년(선조 23년) 진사에, 27세인 1596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임진왜란 중에 출사하였다.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로 벼슬길을 시작하여 1608년(광해군 즉위년) 39세로 다시 문과 증시에 급제하고 휴가를 주어 독서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기회를 얻어 독서당에 들어갔다. 청요직을 거치던중 광해군 정권의 문제점을 비판하다가 파직되어 은퇴하였다.

 

오리(汚吏)들의 시대

 

광해군 정권의 세 권신을 당시 삼창(三昌)이라 하였는데 광창(廣昌) 부원군 이이첨, 밀창(密昌) 부원군 박승종, 문창(文昌) 부원군 유희분을 지칭한 것이다. 이 세 사람의 권세와 영화는 당시 사람들의 혐오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는데 김상헌은 유희분과 이종형제라는 가까운 사이였지만 절교하고 왕래하지 않았다.

 

그들은 과거시험문제를 자기들의 자제(子弟)들에게 유리하게 출제하여 물의를 일으키는가 하면, 누가 더 힘이 센지 힘겨루기도 서슴지 않았으니 다음과 같은 일화가 그들 상호간의 치열한 권력다툼을 말해 준다.

 

이이첨에게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준마가 있었는데 병조판서로 있던 유희분이 밤중에 사람을 시켜 빼돌려 자기 집에 숨겨두었다. 이이첨이 부하를 시켜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끝내 찾지 못하였다. 그 꼴을 즐기던 유희분은 말이 비쩍 말라버린 후에 돌려보내주니 이이첨이 놀라 졸도하였다는 것이다.

 

유희분은 광해군의 왕비 유씨의 오라비로 척족이라는 특권으로 이이첨을 놀려 주었지만 이이첨의 권모와 술수는 따를 수가 없어서 다시 화풀이를 당하여 상호불신속에 권력유지를 위하여 이합집산을 되풀이하였다. 이이첨이 대북, 박승종과 유희분은 소북으로서 상호 인척관계로 얽혀 있으면서도 권력에 관한 한 눈에 불을 켜고 대립하였다.

 

이 때 명나라에서 온 사신이 광해군 조정 신하들의 관상을 보고는 『이이첨은 가을 바람에 우는 여자의 상이요, 허균은 늙은 여우가 묶여 있는 상이며 그 밖의 신하들도 모두 불길하여 많은 신하들이 살기를 띠고 있으니 당신 나라의 국왕이 무사하기 어렵겠다』고 말 했다고 한다.

 

상호 권력투쟁에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 어떻게 살기를 띠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인조가 반정으로 왕이 되기 전 능양군으로 있을 때 그의 동생 능창군이 반역했다는 무고로 투옥되어 목숨이 위태롭자 백방으로 구명운 동을 하였다. 유희분의 애첩이 그 기회를 타 뇌물을 요구하였다. 능양군이 가재를 다 털다시피하여 뇌물을 주었지만 만족한 빛이 없었다.

생각다 못한 능양군이 잔칫집에 놀러간 유희분을 만나러 10리가 넘는 먼 길을 찾아갔지만 만나 주지도 않았다.

 

인조반정 후 유희분은 폐모론(인목대비를 폐비로 하자는 논의)에 동조하지 않았으므로 살려주자는 여론이 있었다. 이에 인조는 『희분의 첩은 내 아우 능창이 변을 당했을 때 위협하여 뇌물을 요구하는 것이 끝이 없었다. 내가 부모님께서 선대에 하사받은 보화를 있는 대로 다 갖다 바쳤는데도 부족하여 끝없이 요구하였으니 부모님의 심정이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었겠는가.

희분이란 자가 첩을 시켜서 이런 짓을 했으니 어찌 죽음을 면하겠는가』하니 의론이 대역죄로 결판났다.

 

인조는 왕손이었다. 그의 아버지 정원군(뒤에 원종으로 추존)이 선조의 아들이었으므로 선조의 직계손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 의 죽음 앞에서 외척이며 권신인 유희분의 첩에게 뇌물을 바쳐야 하는 상황에 그는 절치부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동생은 구명되지도 못하고 외딴섬에 귀양가서 독약을 먹고 자살하고 말았다. 그는 동생의 죽음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괴감과 기생출신인 유희분의 첩에게 당한 치욕감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후에 인조가 죽음을 무릅쓰고 반정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게 된 원인의 상당부분도 이 사건에 있지 않았나 추측된다.

 

 

의리의 원칙주의자

 

김상헌은 사람됨이 정직하고 엄격하여 우스갯소리를 잘하던 그의 아버지조차 친구들과 놀다가 아들이 밖에서 돌아오는 기척을 느끼면 손을 저어 그치며 『우리집 어사또 오신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다.

 

그렇게 강직한 그는 인조반정 후 유희분이 사형당하자 상복을 입고 문상하려 하였다. 사람들이 말리며 『이런 때 가서 곡을 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지만 『유희분이 처형된 것은 반역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권세를 탐하고 미혹하여 깨닫지 못한 것 뿐이다.

 

살아 있을 때에는 비록 그 집에 드나들지 않았으나 죽은 후에는 친척간에 끊어야 할 의리가 없는 것이다』라 하며 가서 문상하였다. 공과 사를 분명히 하고 인정과 의리를 따져 행동하며 권력에 영합하지는 않으나 참혹하게 처형당한 친척에게 의리는 지켜야 한다는 그의 원칙주의가 돋보이는 일화다.

 

김상헌이 대사헌 직책에 있을 때의 일이다. 장약관 박시량이라는 관리가 조회때 진흙이 신발에 묻을까봐 큰 덧신을 신은 것이 법에 저촉되었다. 또 부유한 역관 장현이라는 사람이 집을 지으면서 국법에 금하고 있는 부연(附椽)을 달아 위법행위를 하였다.

 

김상헌이 두 사람을 처벌하려 하는데 박시량의 처가 남편의 선생인 고관 오윤겸에게 구명운동을 하니 오윤겸이 말하기를 『내 아들이 범법하였더라도 김공은 용서하지 않을 터인데 어찌 부탁할 생각을 하겠느냐』고 하며 거절하였다. 김상헌과 오윤겸은 절친한 사이였지만 공사구별이 상호 추상 같았던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처벌받았다.

 

어떤 공자가 둥근 기둥을 사용하여 정자를 지었다가 곧 기둥을 깎아 네모나게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둥근 기둥은 궁궐에만 쓰게 되어 있었는데 월권하려다가 김상헌의 칼날 같은 공직수행 자세에 겁을 먹은 것이다.

 

김상헌은 인조반정(1623년) 후 공신들에게 편지를 보내 광해군에게 후하게 할 것을 권고하였다. 앞의 유희분에 대한 처사와 마찬가지로 억강부약(강한 자는 억누르고 약한 자는 부추겨 도와준다)하는 조선선비의 가치지향성을 보여주는 예화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공신세력의 상호보합위주 정치에 반대하여 시비선악을 엄격하게 가려야 한다는 주장을 펴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반정에 참여한 사람들이 공신이 되어 훈작을 받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부귀를 도모하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었다. 즉, 하사받은 토지 이외에 사적으로 전지와 노비를 불리고 호화롭게 저택을 지어 분수에 어긋나는 등 권귀화(權貴化)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자연히 이에 대한 견제세력이 생겨나게 되어, 인조반정의 주동세력인 서인정파내에서 공서(功西·반정 공신세력)와 청서(淸西·비판세력)의 노선분립이 가속화하였다.

 

김상헌은 초야에서 학문하던 산림(山林)의 주도자로서 청서파의 비판세력을 대변하였다. 그가 처한 상황과 그의 강직한 성품으로서 당연한 귀결이었다. 공신 중 한 사람인 김류조차 『그를 만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등이 땀에 젖는다』고 하였다.

 

적국 淸조차 경외

 

심양에서 돌아와 1645년(인조 23년) 76세로 좌의정에 제수되고 고관을 지낸 노인만 들어갈 수 있는 기로사에 들어갔다. 효종이 즉위하자 북벌론을 채택하여 국가지도이념으로 삼고 그를 이념적 상징으로 떠받들어 대로(大老)라는 존칭을 받았다.

 

병자호란 중 척화론의 주도자로 활약하면서 죽음을 불사하는 의지로 국론을 이끌었고 그의 형 김상용(1561∼1637년)은 강화도에서 순절함으로써 김상용 김상헌은 대표적인 충신열사로 조선후기 사회에서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김상헌은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경사를 수학하였고 우계 성혼의 도학에 연원을 두었다. 본관은 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 또는 석실산인(石室山人)이라 하였다. 이 호들은 중년이후 양주의 석실에 은거할 때 사용하였다.

 

또 하나의 호인 서간노인(西磵老人)은 만년에 은퇴하여 안동에 살 때 사용하였다.

 

김상헌은 1570년(선조 3년) 6월3일 서울에서 태어나 1652년(효종 3년) 6월25일 83세를 일기로 양주 석실 별장에서 별세하였다. 본래 사람됨이 대쪽같이 곧고 정직하여 무슨 일이 있으면 끝까지 밝히고 주저하는 일이 없었다. 6년동안 청나라에 잡혀가 있는 동안에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 청나라 사람조차 『김상헌은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고 하면서 존경하였다.

 

그 강직함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여 청백리에 올랐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양주의 석실서원을 비롯하여 광주의 현절사에는 3학사와 함께 제향되었고 전국의 15개 사우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장은 간엄(簡嚴)하고 시는 전아(典雅)하였으며 글씨는 동기창체를 잘 썼다.

 

일찍이 스스로 마음에 새겨 두려는 명문(銘文)을 지어 『지극한 정성은 쇠와 돌에 맹서했고/ 대의(大義)는 해와 달에 걸렸네/ 하늘과 땅이 굽어 보고 귀신도 알고 있네/ 옛것에 합하기를 바라다가 도리어 오늘에 어그러졌네/ 아, 백년 뒤에 사람들은 내 마음 알아 줄까』 하였다.

 

자신의 지극한 정성과 대의를 추구하는 자세는 천지와 귀신도 알고 있을 만큼 분명한 일이건만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당대에는 크게 평가받지 못하더라도 백년 후 쯤이면 알아줄 것이라는 예견이었다.

 

전쟁중에 살아남는 것,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한 현실에서 김상헌의 이상주의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의 예언과 같이 그는 그의 살아 생전에 다음에 즉위한 효종으로부터 그 노선을 인정받고 18·19세기까지 추앙받았다.

 

사신(史臣)은 그의 졸기(卒記)에서 『옛 사람이 문천상이 송나라 3백년의 정기를 거두었다고 했는데 지금의 논자들은 문천상 뒤에 동방에 오로지 김상헌 한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고 평하였다.
 

/ 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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