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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16일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에제 16,1-15.60.63
복 음 : 마태 19,3-12
그때에 3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7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에게 베푸신 은혜들을 낱낱이 늘어놓지만,
그 맥락은 예루살렘의 죄악들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에제키엘서 16장 1절부터 15절까지 읽고 그다음에 60절로 가는데,
15절부터 59절까지는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았던 지난날을 상기시키면서 심판을 선고하시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그 긴 고발과 심판 선고를 앞두고,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계약을 기억하고”(에제 16,60)라고 하시며
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15절부터 59절까지 볼 때, 예루살렘이 지은 죄는 많고도 큽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처벌도 분명히 선포됩니다. 예루살렘은 멸망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 멸망은 다른 어떤 데서 오는 것이기 이전에 하느님을 배반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에게 심판을 선고하시고 실제로 치시기 전에,
당신께서 예루살렘에게 어떤 분이셨는지를 기억하게 하십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아기, 아무도 돌보지 않고 던져 버린 아기를 하느님께서 살려 주시고,
계약을 맺어 아내로 맞으시며 귀하게 꾸며 주셨습니다.
생명을 지킨 것부터 먹고 입고 왕비가 된 것까지 모두 하느님께서 하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심판은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계약을 깨뜨렸어도 하느님 편에서는
그 이스라엘이 아무것도 모르던 때에 당신께서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십니다.
지금이 비록 심판의 때라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피투성이를 살려 주시고 알몸을 덮어 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하느님께서는 심판과 함께 이미 용서를 약속하시고,
한번 맺으신 사랑의 관계를 끊어 버리지 않으십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책에 관한 관심은 많은데, 영화에는 영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극장에 가본 지가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동창 신부가 어떤 영화를 말하면서 반드시 봐야 할 영화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오랜만에 이 영화를 보려고 했지만,
이제까지 제 모습을 보면 극장에 가서 잠들고 말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결론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워낙 관심이 없는 분야인 SF 소설이고, 도대체 그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동창에게 이 점을 이야기하니 배경지식이 없어서라고 말합니다.
배경지식을 알아야 창작자의 의도도 이해되고 감동도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알면 보이고, 보이면 더 큰 감동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책 내용에 관심이 없어서 배경지식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또 관심이 없어서 대충 읽으니 더 모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동창의 이 말을 떠올리며 주님도 그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려면, 성경 안의 배경지식을 알아야 합니다.
이 배경지식이 있어야 주님의 의도가 이해되면서 지금 삶 안에서도 충분히 감동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전혀 알지 못하고 또 그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막연하게만 자기 필요를 청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의도를 모르니 불평불만만 늘어날 뿐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태 19,3)
사실 이혼에 관한 율법은 십계명 안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신명기(24,1-4)에 이유만 닿기만 하면 여자를 내몰 수 있었고 그때 이혼장을 써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유배 생활을 거치면서 결혼을 일종의 매매 계약으로 여깁니다.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 되었고, 여자는 재산 소유권과 상속권이 없었습니다.
이혼할 수 있는 권리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과연 하느님의 뜻일까요? 아닙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만드신 남녀 결합의 근본이념에도 어긋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혼인법을 없애고
하느님의 원래 뜻으로 되돌리기 위해 혼인의 불가해소성,
즉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의도를 모르니, 과거의 잘못된 관습에 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요?
우리도 잘못된 관습만을 따르면서 정작 주님의 의도인 사랑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을 아는 데 집중하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더 큰 감동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자.
반영억 라파엘 신부
남성은 결혼을 통해 정신적 안정을, 여성은 경제적 안정을 얻으려 한다고 합니다.
한 결혼정보업체가 미혼 남녀 56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결혼을 통해 보완하고 싶은 것으로 남성의 54.6%가‘정신적 안정 및 풍요’를 꼽았고,
12.1%는‘가사에 도움’이라고 답했습니다.
반면에 여성들은 47.2%가‘경제적 안정’을 꼽았고,
정신적 안정 및 풍요가 25%, 사회적 지위가 8.3%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남성의 지향과 여성의 지향이 다르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고 살겠다며 결혼합니다.
그러나 초호화 결혼식을 올린 부부도, 잉꼬부부로 알려진 부부도 쉽게 헤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많은 경우 ‘성격 차’ 때문에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며 각자의 길을 갑니다.
성격이야 서로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상대의 성장 과정이나 환경이 다를진대 어찌 성격이 똑같겠습니까?
쌍둥이로 태어난 사람도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서로를 인정하고 부족함을 채워주는 가운데 더 깊은 사랑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너무도 쉽게 너와 내가 다른 것을 ‘네가 틀렸어’로 밀어붙이고 맙니다.
그래서 마침내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하며 등을 돌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19,6).
혼인을 하느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헤어질 수 없지만
단순히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혼을 쉽게 하게 됩니다.
혼인할 때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하느님과 일가친척 앞에서 서약합니다.
남녀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존재이지,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서로는 동반자이면서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존경받아야 할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입니다(예레31,3).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관계를 지켜야 합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부부간에 크고 작은 고민거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참고 견디면 성공하는 것이요, 인내하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남편 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고,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에페5,33).
“결혼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인데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 됩니다.
만일 헤어졌거든, 결혼하지 말고 혼자 지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남편과 다시 화해해야 합니다.
또 남편은 자기 아내를 버리면 안 됩니다”(1고린7,10-11).
서로 간의 관계 안에서 신의를 지키고 부족함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던히 참아주고 변화를 기다려주는 넉넉함이 우리를 풍요케 할 것입니다.
헤어지자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로 항해를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며,
결혼 할 때에는 세 번 기도한다”(러시아 속담).고 했습니다.
결혼해서 일생을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나 풍랑이 몰아치는 험한 바다보다도 더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 순간 기도하며 애쓰지 않으면
서로의 다른 점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상대의 부족함이 보일수록 더 많이 기도하고 사랑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 공동체 설교를 마치시고, 갈릴래야를 떠나 유다지역으로 가시자,
그곳에서도 많은 군중이 따랐고 그들을 고쳐주셨는데, 당신을 시험하려는 바리사이의 질문,
곧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태 19,3)라는 질문을 받고,
결혼과 이혼과 독신에 대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혼을 허락해 준 이유가 이혼이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창조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엄마와 아버지를 선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의 고유한 작품일 뿐, 내 자신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그분으로부터 건네진, 당신의 형상이 새겨진 까닭입니다.
서로가 부족하기에, 서로를 위하고 껴안아 주어야 하고, 내어주어야 하고,
서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남자와 여자로, 똑같은 권리와 의무를 지닌 서로의 동반자 만드셨습니다.
사실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이미 이혼당한 여성들을 그대로 놔두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이혼장'이라는 서류도 없이 버림을 받게 될 경우,
여성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사회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생활하다 붙잡히면
간통죄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마태 19,5)
교부들은 이 말씀을 단순히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나아가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로운 관계로 해석해 왔습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이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하여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하여 기뻐하시리라.”(이사 62,5)
이는 하느님과 인간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은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세례를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남편으로 맞이하고,
그분의 아내가 되는 혼인성사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이러한 깊은 관계가 우리를 가장 품위 있는 존재로 부각시켜 줍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며 '한 몸'이 되어 사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마태 19,5)
주님!
받아들여야 살 수 있음은 제가 부족해서만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한 까닭입니다.
함께 있어야 살 수 있음은 당신이 필요해서만이 아니라 당신이 소중한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이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떠나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이 되고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며칠 전 가슴을 움직이는 글을 읽었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입니다.
비슷한 말 같은데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은 삶을 주도하게 됩니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은 시행착오를 겪게 됩니다.
꿈을 이루는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생각은 인생의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
문명은 생각의 탄생으로 열렸습니다.
철학은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학문입니다.
인문학은 생각이 드러나는 통로입니다. 예술은 생각의 열매입니다.
윤동주의 ‘십자가’는 제 가슴을 뛰게 하였습니다.
조정래의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은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장엄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봉준호의 ‘기생충’은 우리 영화의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BTS의 음악은 K Culture의 우수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생각은 진화의 과정일 수 있지만,
생각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상(模像)’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능력으로 인간은 진리와 거짓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의지의 자유를 누리는 인간은 선과 악 중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영적 본성과 지적 인식능력과 선택과 행위의 자유 덕분에
인간은 처음부터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 속에 나타납니다.
“생각하는 대로 믿지 않으면, 믿는 대로 생각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비슷한 말 같은데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랐을 때입니다.
제자들은 빵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그러자 제자들은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우리가 빵을 적게 가져왔다는 말씀인가?”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열둘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룩은 빵을 많게 하는 효소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룩은 바리사이의 교만과 헤로데의 욕망이었습니다.
생각이 없는 믿음은 미신이 되고, 광신이 되고, 사이비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없는 믿음은 폭력과 전쟁을 하느님의 뜻으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생각이 없는 믿음은 공동선의 가치를 무시하기도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과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다른 신들을 섬기곤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오도록 기다려주시고 용서를 해주신다고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혼인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혼인은 하느님 앞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책임을 다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혼인의 약속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독신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신부님은 왜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
독신생활의 참된 이유는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때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독신으로 사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을 온전히 내놓으신 주님을
갈림 없는 마음으로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의 독신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그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입니까!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혈연관계보다 예수님을 더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단순히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먼저 생각하고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한다면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이웃을 비난하고, 원망하는 삶의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무소유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도 같습니다.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한다면 혼인하여 사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네가 저지른 모든 일을 내가 용서할 때,
네가 지난 일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며, 수치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남자는 제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리라.
조욱현 토마 신부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3절)
바리사이들은 갑작스럽게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다.
예수께서는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4-5절)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셨다고 하시며,
남자는 아내와 결합하여서 한 몸이 되라고 분부하신 것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혼인으로 하나가 된 부부는 갈라져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더 큰 결합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6절)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한 몸이 되게 하심으로써 둘을 결합하셨다.
하느님께서 결합하신 이 결합은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하고 명령하였습니까?”(7절)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8절).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9절)
불륜이란 배우자가 아닌 자와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이 불륜은 하나이신 하느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는 것도 포함되며,
우상숭배도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불륜으로 여겼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창녀로 표현하는 부분이 성경에 많이 나타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제 발로 이단으로 넘어가지 않는 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10절)
주님은 이 말에 동의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11절)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12절)
이들은 온전한 남자가 될 수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고자가 된 사람들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12절)
즉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싸워서 승리하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갈림 없는 사랑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부부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부부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19,6)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시작부터 불편합니다.
왜냐하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19,3)라고 묻습니다.
바리사이들이 거론한 신명기엔
“그 여자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 눈에 들지 않을 경우,
이혼증서를 써서 손에 쥐어 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24,1)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는 철저한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회였고 시대였습니다.
여성이 남편의 눈 밖에 나면, 그 여성은 학대당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모세는 이런 여성을 남편의 학대에서 구출하기 위해,
아내를 집에서 내어 보내라, 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모세가 남성들에게 준 특권이 아니라, 지켜야 하는 법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기에 그 사실을 감안한 모세가 그 법을 제정해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법을 남성들에게 허락된 특권이라 생각하였고,
예수님은 그것이 남성들의 학대에서 여성들을 구출하기 위해 모세가 제정한 법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 부부 관계에서 어떤 관계가 바람직한 관계일까요?
하느님은 시초부터 인간을 홀로된 존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른 성을 지닌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 더불어 살아갈 때
자신의 존재 이유를 깨닫게 되고, 창조 목적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님께서는 “부부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19,6)하고 말씀하신 요지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부부가 한 인격체임을 깨닫기를 촉구하고,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자들에 대한 남자들의 횡포를 비판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결혼의 신성함과 존엄성을 예수님은 강조하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혼인 관계는 어떤 경우에도 일방적이거나 불평등해서는 안 되고,
서로 사랑하며 존중하는 관계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만 인간을 만드실 때 서로 돕도록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한 몸이 되게 하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부부란 서로 다른 존재이고, 그 역할이 다릅니다.
보완과 보충의 관계로 남편이 가정의 머리라면 아내는 가정의 심장과 같이
상호보완과 보충의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는 의미는
곧 혼인 불가 해소성의 근거입니다.
혼인은 부부들의 노력만으로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들 안에 사랑과 치유 그리고 화해할 능력을 선물로 주셨고
이를 얼마나 잘 선용하느냐에 따라 하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혼인은 둘이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부부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잃어버리고 놓쳐버릴 때 부부는 하나가 아닌 정말 남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사로 맺어진 부부라도 부부생활을 하다가
여러 사정에 의해서 갈라선 부부도 예전보다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참으로 본인들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이고 아픔이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이혼한 신자는 민법상 재혼하지 않을 경우에 성사 생활에 지장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그들이 교회 안에서 충실히 성사 생활을 받을 수 있도록
교회는 그들을 유도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결혼 생활이든 독신 생활이든 만족한 삶, 행복한 삶이 중요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분들에게
기꺼이 교회 안에서 성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혼이 곧 죄가 아니며 고통을 겪었고 상처로 부서진 영혼들이기에
교회에서 상처받은 그들이 치유되어 충실히 신앙생활에 매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결혼한 부부가 삶의 마지막까지 살아갈 수 있기를 저는 간절히 바라고
그렇게 힘든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하는 분들에게 아낌없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제가 예전 베트남에서 생활하고 있었을 때 즐겨 봤던 주말 연속극이 ‘넝굴째 굴러온 당신’이었습니다.
극 중 후반에 슬픔을 당한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가족 앞에서 두 번째 결혼식을 하던 날
국민 남편 ‘방귀남’이 가족들에게 고백한 말이 참 마음에 와닿더라고요.
『더 열심히. 더 대단하게. 더 닭살 돋게.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가슴 벅차게.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모든 부부가 방귀남과 차윤희 부부처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가슴 벅차게 사랑하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통치자와 권력자의 모델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성모승천대축일이자 광복절이니 경사 중의 겹경사 날입니다.
우리나라의 해방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 목숨 바친 분들에게 깊이 감사하며,
그들의 애국심에 가슴 뛰고 설레야 할 광복절인데,
오늘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초라하고 굴욕적입니다.
제대로 된 통치자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실감하는 하루였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멋진 국왕이 한 분 있습니다.
축일을 맞이하시는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975∼1038)입니다.
헝가리에 가면 얼마나 스테파노가 존경받는 인물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헝가리의 수호성인이면서도 정교회 쪽으로부터도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헝가리 국민들 가운데 스테파노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닮은 점이 많았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무척이나 청빈했습니다.
왕으로서 화려한 복장을 피하고 아주 소박하고 단출한 옷을 즐겨 입었습니다.
백성의 필요성에 언제나 활짝 열려있었기에 굶주리던 백성들을 위해
왕실의 곳간을 활짝 열어 아낌없이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자신의 왕관을 하느님께 봉헌했으며 자신의 손에 맡겨진 헝가리 왕국 안에
하느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또한 세상과 하느님 나라를 자신의 생애 안에 잘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더불어 신앙과 삶, 기도와 활동 사이에 균형을 유지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는 현대 성인의 선구자요 리더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테파노의 성모님을 향한 사랑은 각별했습니다.
그는 헝가리 왕국이 성모님의 푸른 망토 안에 머물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더불어 헝가리 모든 백성들이 성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도록 적극 장려했습니다.
그래서 성모승천대축일을 국경일로 정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성모님을 사랑했던지 그는 가급적 성모님 축일에 임종하기를 간절히 원했는데
마침내 그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1038년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에 선종했습니다.
임종의 고통 속에서도 그는 신생 헝가리 왕국을 성모님께 맡기고
성모님의 보호를 청하는 기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숨이 멈추는 순간까지 성모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렇게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테파노는 하느님 앞의 한 신앙인으로서 성모신심에도 투철했지만,
왕으로서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도 각별한 성모신심을 드러냈습니다.
그도 세상을 통치해야 하는 왕이었던지라 불가피하게 군대를 동원할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공포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 영주들이 반기를 들었는데
어쩔 수 없이 군대를 파견하게 되었습니다.
출정식 전에 스테파노는 성당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 뜻에 따라 평화로이 이루어지도록 오래도록 기도를 올렸고
성모님의 특별한 중재와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던지 사태는 원만하게 해결되었고,
반군을 진압한 후에도 그는 패장들을 관대하게 끌어안는 여유를 보여주었습니다.
왕권의 상징이었던 왕관과 홀, 그리고 검까지도
하느님과 성모님께 봉헌했던 참 신앙인 스테파노였습니다.
성모님께 자신의 왕관을 봉헌한 스테파노의 오른손은 아직도 잘 보존되어
매년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 대축일 때마다 부다페스트 거리를 순회하며
헝가리 백성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