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을 키우며
콩나물을 키운다.
가을에 검은 기름콩(油太)의 눈이 좋은 것을 골라 물에 불려 싹을 틔우고 시루에 안쳐 놓고 물을 준다. 하루에 열 번쯤, 조금 더 정성을 들여 몇 번 더 물을 주고 콩나물시루 보자기를 덮어 햇볕을 받지 않도록 하고 정갈하고 따뜻한 곳에 둔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 <시루에 물 붓듯이> 라는 속담처럼 물을 줄 때 뿐, 물은 그 즉시 모두 밑으로 빠져나가고 콩나물은 샤워를 한 모습으로 잠시 촉촉할 뿐이다. 콩 눈에서 싹이 트고 올챙이처럼 꼬리를 내려 고개를 들면 콩들이 살아 숨 쉬는 것을 보게 된다.
혼자 욕심을 부리며 물을 머금고 있는 것도 아니고, 비좁다고 자리다툼하며 자신의 자리를 넓히려고도 않으며 포개어진 대로 서로 얼싸안고 다독거리며 자리를 잡는다. 이따금 받아 마시는 물은 목마를 때 목을 축이는 만큼으로 족하다. 지나가던 나그네가 냇가를 지날 때 손으로 흐르는 물을 떠먹고는 그저 길을 가듯 그만큼의 물로 만족하며 봄비 맞는 새싹처럼 고개를 세운다.
옛날 어른들은 먼 길을 떠날 때면 따로 물을 지니고 가는 것이 아니라 표주박 하나만 달랑 매달고 떠났다. 그런 나그네의 목마른 시간만큼 거리를 두고 물을 주면 콩나물은 한 모금의 물로도 행복한 듯 잘 자란다. 어둡고 비좁은 공간, 서로 어깨를 비비기에도 힘겨운 공간이지만 콩나물은 얌전하게 잘도 어울린다.
어느 날 아이들이 문득 자라 있듯이,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들이 나이만큼 행동하듯이 콩나물은 자신들도 모르게 그렇게 훌쩍 훌쩍 자라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학교에서 매시간마다 배우고 돌아서면 아무 것도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해도 알 것 다 알고 잘 자라는 아이들처럼 이따금 스쳐 가는 물을 머금고 있지 않아도 콩나물은 신기하게도 다른 모습으로 매일매일 잘도 자란다.
그렇게 자라 주는 콩나물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대견하기보다 엉뚱한 생각들로 콩나물에 욕심을 부려본다.
거름을 주면 더 잘 자랄 거라고 콩나물에 거름을 주려 한다. 거름을 주면 콩나물 뿌리에 잔뿌리가 생기고 더 시간이 지나면 거름에서 뿜어 나오는 열로 이내 몸이 썩어버리지만 그런 것은 모른 채 자기 생각대로 콩나물을 키워 보려 한다. 또, 찔끔찔끔 부어 주는 물보다 물속에 담가 두면 한꺼번에 많은 물을 먹고 콩나물이 더 잘 자라리라 생각하고 물 호스를 대어놓고 좋아라 한다. 그런데 콩나물은 물속에서 자라기는 고사하고 썩어버린다.
콩나물은 이따금 소나기처럼 부어지는 물에 자라는 것이고 그 이상의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 콩나물이 요구하는 만큼의 물주기, 그 정성 하나면 족한 것을 콩나물이 아닌 자신의 생각대로 콩나물을 키우려 한다.
콩나물이 바라는 만큼의 정성으로 지켜보면 스스로 잘 자라는 것처럼 그저 부모가 지켜보는 사랑과 정성만으로도 자신들의 모습으로 잘 자라는 아이들을 부모들은 거름을 주려하고, 물 호스를 대어 놓으려 하고, 무리 속에서 키 재기를 시키려 하고 욕심껏 물을 머금게 하려 한다. 그렇게 자녀들을 자기식대로 키우려는 사람은, 산 속에서 스님에게 칼을 들이대며 불법(佛法)을 보여 달라고 하던 도둑 같은 생각이 든다.
옛날 산길을 가던 스님이 도둑을 만났다. 그 도둑이 스님의 배낭을 빼앗가 풀어 보았지만 배낭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화가 난 도둑이 스님에게 말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이요?" "나는 중이니 불법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을 뿐이요."
"그 불법을 내어놓으시오."
그 말을 들은 스님은 시 한 수를 읊었는데.
해마다 봄이면
나무들은 꽃을 피우지만
그 나무를 베어 봐도
그 속엔 꽃이 없네.
아이들은 콩나물처럼 그렇게 자라는데, 또래들 속에서는 서로 어울리고 잘 자라 자신들의 인격과 품성을 지녀가고 세상을 살아가는 안목을 넓히고 삶의 길을 스스로 열어 가는 능력을 키우는데, 그들의 학습능력이나 결과만을 보여 달라고 달려드는 어른들을 생각하면 그 도둑과 무엇이 다를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배운 것을 어른이 된 뒤에도 모두 기억하는 바보는 없을 터인데….
- 변해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