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동계 전투의 특징
한겨울 장진호 주변은 매서운 바람과 눈으로 뒤덮여 버리는 극한지였다.
11월 초에 첫 눈이 내리고 얼마 되지 않아 기온이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장진호 주변은 평균적으로 해발 1000M가 넘는 산악지역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개마고원 지역으로 겨울철 평균 기온이 영하 30도이며 종종 영하 45도까지 내려가기도 하는 무시무시한 극한지였다.
이제 미군과 중국군은 상대방보다 더 무서운 적 동장군과도 싸워야 할 판이었다. 이 동장군은 병사들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혹한의 날씨는 식수와 음식 모두 얼어버렸고 모든 장비의 성능을 크게 떨어뜨렸다. 소총의 발사불능, 야포의 불발율이 크게 증가했다. 환자용 혈액과 몰핀도 얼어붙어 위생병이 몰핀 앰플을 얼지 않게 입속에 넣고 다닐 정도였다. 병사들에게 참을 수 없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장진호의 무시무시한 추위였다. 부상자는 잠시만 눈 위에 두어도 바로 동사했고, 대부분 병사들의 발은 동상으로 시커멓게 변해갔다. 혹한의 추위는 병사들을 무기력증에 빠지게 했다.
특히 중공군은 열악한 방한장비로 인해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멍하니 웅크리고 있다가 포로로 잡히기도 하고 집단으로 투항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중국군은 목화솜으로 누빈 잠바와 운동화 그리고 모포가 그들의 방한장비 전부였다.
4.장진호 전투의 개막
장진호 전투는 미군창설 240여년 역사상 가장 혹독한 추위 속에서 최악의 고전을 금치 못했던 참혹한 전투로 기록된다. 당시 뉴스위크 지는 “진주만 피습이후 최악의 패전이라고 까지 혹평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어 미 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이 전투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겨울 미 해병 1사단 만 2천여 명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당시 도피 중이던 북한 정권의 임시수도인 강계시를 점령하려다가 오히려 인근의 산악지대에 매복 중이던 7개사단 12만 명의 중공군 제9병단에게 포위되어 전멸의 위기를 뚫고 기적적으로 성공한 후퇴작전이다. 이 전투로 중공군 9병단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장진호는 장진강을 댐으로 막아 건조된 인공호수다. 장진강은 북한의 함경남도 장진군을 끼고 돌아 개마고원 하록을 흐르는 강으로 북위 40도 29분, 동경 127도 12분에 위치한다.
그 면적은 대략 64평방킬로미터로 여의도 면적의 약 22배에 이른다.
1950년 11월 25일∼26일 중공군 13병단 예하 18개 사단의 막대한 병력이 미 8군이 주도하고 있는 유엔군의 북서부 전선을 공격해서 유엔군의 우익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마어마한 대병이 장진호 부근에 배치되어 있는 것을 모르던 미 해병 1사단은 미 8군을 포위하고 있는 중공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려고 장진호 서안의 유담리로 이동한 해병 5연대 2대대로 하여금 11월 27일 아침 유담리 서쪽 60Km의 무평리로 진격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미 해병 5연대 2대대는 진격을 시작하자마자 엄청난 중공군의 압박을 받기 시작하여, 이들의 진격은 멈춰졌습니다.
중공군은 그날 11월 27일 밤 대대적으로 장진호 서안의 미 해병 5연대와 7연대를 공격해 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사에 길이 빛나는 장진호 전투의 시작이었습니다.
한편 미 해병 5연대가 빠져 나간 장진호 동안의 남쪽 지역에는 미 육군 7사단 31연대 3대대가, 북쪽지역에는 32연대 1대대가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이들은 한국인 카투사 875명을 포함한 2,652명으로써 바로 11월 27일 밤에 지난 이틀 동안 밤낮으로 쉬지 않고 225km를 달려와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 급작스럽게 장진호 동안에 배치되었다.
운명의 11월 27일 밤 21시경 유담리를 에워 싼 고지 능선을 따라 공격을 시작한 중공군 79사단이 유담리 지역을 공격하였다. 중공군 59사단은 유담리와 하갈우리 사이 도로 요충지인 덕동령 쪽으로 공격을 해 왔다.
숫적으로 워낙 많은 차이가 나는 중공군 2개 사단의 공격으로 미 해병 5연대와 7연대에는 큰 피해가 발생하였다.
중공군은 27일 밤부터 28일 새벽까지 미 해병 3개 중대를 격멸하고 많은 고지를 탈취했다.
또한 하갈우리와 고토리에 있는 미 해병 1사단 지휘본부와 해병 1연대도 중공군 58사단, 60사단, 76사단과 77사단에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이때서야 미 10군단은 자신들이 중공군이 쳐놓은 덫에 걸려 완전히 포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5.의문의 중공군 89사단 배치
애초에 중공군 89사단은 유담리의 미 해병 5연대를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배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11월 27일 중공군의 미 해병 5연대, 7연대 공격시 중공군 89사단도 공격에 참여했다면 아마 미 해병 2개 연대는 전멸하였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89사단은 원래 위치에서 이동하여 미 육군 3사단 7연대 1대대가 지키고 있던 함흥으로 가는 보급로 상에 있던 사창리를 공격했으나 저지당했다.
중공군 79사단이 유담리 전면에, 89사단이 유담리 후방을 동시에 기습 포위 공격했다면 미 해병 5연대, 7연대가 빠져나오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89사단이 갑자기 부대 이동을 단행 했을까?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대략 추측해 보면 9병단의 송시륜 장군은 성격이 불같이 급한 성격으로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은 것 같다. 아마 중공군 지휘부는 자신들이 공격하기로 한 날인 11월 27일경에 갑작스럽게 변경된 장진호 서안과 동안의 미 10군단 병력 재배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이미 장진호 주변에는 미 해병 1사단이 오랜 기간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공군은 미 해병 5연대가 장진호 동안에, 7연대가 장진호 서안에 각각 배치되어 있다는 기존의 정보만을 근거로 자신들의 병력을 배치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진호 서안에 배치된 미 해병 1사단 예하부대는 1개 연대가 아닌, 미 해병 5연대와 7연대의 2개 연대로 그들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공군은 79사단과 59사단으로도 충분히 미 해병을 결딴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 89사단은 유담리에서 완전히 빼내어 미 육군 3사단이 방어하던 사창리를 공격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정보부재에 따른 작전 실패는 향후 미군의 흥남철수 작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했다. 아니 흥남 철수 작전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전반에 걸쳐 결정적인 패착을 가져 왔다.
왜냐하면 해병 1사단이 전멸을 피했고, 그 후에 전개되는 전투를 통해서 중공군 9병단이 오히려 궤멸에 가까운 손상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공군 3차 공세에 9병단은 참여하지 못했는데, 만약 3차 공세에 9병단이 참가함으로써 중공군이 수원 아래로 진격할 수 있었다면 유엔군은 아마 한반도를 포기 했을 지도 모른다.
필자는 여기서 잠시 89사단의 부대이동은 인간의 역사의 배후에서 섭리하는 신의 미세조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문득 해 보았다. 그만큼 이번 중공군의 작전 미스는 전쟁의 향방에 있어서 어마어마한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첫댓글 해병과 미육군이 살인적 기상악조건과
중공군의 기습과 야습에도
끝까지
싸운것은 전사에 길이 빛나는
전투입니다
한편 중공군도 미해병과 육군에 맞서는
용의주도 작전과 지형지물 매복이용등
오합지졸 군대가 아니었고
국공내전과 항일전에 실전경험과
단련된 부대였고
미공군의 어마무시한 공중폭격과
대포와 탱크포등 막강한 화력에
엄청난 타격 피해를 당해도
결사항전을 하였다
중공군89사단의 부대이동은
미해병과 육군에게는 큰행운이 었네요
원래대로 작전했다면
해병과 육군이 막대한 피해를
봤을텐데 하늘이 도와 주었네요
하늘이 스미스장군에게 무운장구
행운을 주시길바람니다 하하하
다음 연재 편 기대되고
흥미진지 함니다 수고했습니다
정말 격전기이군요.
한강으로 유엔군이 들어와서
이북 거의 평양까지 갔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밀려서 휴전을 하게 되어
지금의 38선이 생기게 된것으로 생각됩니다.
격전 현장에서의 긴박감과
당시 통신시설도 잘 발달하지않아서
정보도 부족한 시절에
서로를 서로가 파악하지 못해서 더 피해가 많았지요.
요즘 전쟁은 저때같은 전쟁은 없을 것입니다.
우크라이나와 쏘련의 전쟁도 저리 인명투입은 많지 않은 듯합니다.
가자지구도 그렇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