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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무사-156
그의 노안에 어떤 걱정이 스쳤지만 젊은 장추삼은 대수롭지 않았나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세상을 정확하게 본다. 그러기에 어떤 일을 행하려면
진행기간보다 준비기간이 더 길어지는 법이다. 좋게 말하면 조심성이 많아
지는 거고 나쁘게 표현한다면 겁쟁이가 된다고 할까?
그러나 젊은이들은 다르다. 세상을 정확하게 보지는 못하나 매우 광범위하
게 본다. 그래서 꿈과 이상을 마구 부풀리게 되고 어떤 일을 행함에도 좀
더 과단성 있게 밀어붙이는 저력을 발휘하곤 한다. 좋게 말하면 패기만만한
행동이고 나쁘게 보면 뭘 모르고 설치는 아둔함이라 하겠다.
같은 사실을 같은 귀로 듣고 똑같은 결론을 내렸지만 한명은 걱정하고 다른
하나는 벌써 다른 생각으로 사고를 전이시킨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얘
기지만 장추삼이라는 인간이 아직 오지도 않은 일을 겁낼 리도 없다.
“정말로 애매모호한 말이니까 그냥 넘어가요. 모르는 건 모르는 거지, 괜
히 머리 굴리다가 정신만 황폐해 질 거 같아서 나는 애당초에 포기 했는걸?
아무튼 이런 말을 종합해보면 비천혈서라는 놈이 갑자기 튀어나온 괴상한
서적이 아니라는 건데... 정체가 뭐 길래 다들 불을 키고 달려드는 건지 모
르겠어.”
‘다들’은 아니다. 몇몇의 무리가 그렇다. 호기심으로 여기 저기 기웃거리
는 한량들은 논외로 친다면 비천혈서를 노리는 사람들은 무림에서 그리 많
은 수라고 하기 어렵다. 문제는 소수가 그저 소수만은 아니라는 거다.
다수보다 우월한 소수도 존재한다. 그게 세상의 이치다.
기댄 등 쪽이 울퉁불퉁하기에 허리를 굽혀 동굴 벽면과의 거리를 두고 어깨
를 틀던 장추삼이 재미난 무엇을 발견한 사람처럼 손뼉을 쳤다.
“아, 맞다! 노인, 노인!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줄까요?”
어차피 이놈에게서 무림맹주의 권위나 만승검존이라는 이름을 빌은 대접을
바라지 않았었다. 그러기에 지청완은 장추삼이란 인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노인, 노인 하니까 은근히 부화가 치밀어 오른다.
다른 의미로의 섭섭함...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건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했기에 잠자코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의 눈에 어린 어떤 감정을 읽고 일순간 주춤했지만 장추삼은
곧 무시했다. 만승검존이니 무림맹주니 하는 얘기들은 그들만의 세상이니까.
“음? 무슨 말인가?”
“내가 얼음덩어리들하고 같이 다니면서 나름대로 알아본 바가 있어요. 그
뭐시냐, 유한초자라는 사람에 대해 말이에요. 그리고 한 가지 진짜 웃기는
사실을 알게 됐지. 흐흐흐...”
흉물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연방 고개를 끄덕이던 장추삼이 이걸 말해 줄까,
말까 하는 표정으로 지청완을 쓰윽 쳐다보았다.
“그러게 뭐냐니까!”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시오? 이거 열 받네! 아니, 호의를 가지고 말을 해
주려는 사람에게 웬 성질이야, 성질은?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킁! 말 안 해
!”
저 녀석을 잘 알기는 뭘 잘 아는가? 지청완은 그의 머릿속에서 장추삼에 대
한 모든 판단 근거를 말소시키기로 결심했다. 언제나 상상을 초월하는 행동
으로 사람의 성질을 불태워주는 인간. 어디로 튀어나갈지 모르는 예측불허
의 심통.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일단 달래주고 하겠다는 말을 듣는 편을 택하며 지청
완이 장추삼 모르게 이를 갈았다. 만약 시덥잖은 얘깃거리로 깝쭉거린 거라
면 하늘의 심판을 몸소 실천해 주리라는 의지를 불태우며.
“그래, 그래. 내가 실수를 했네. 이렇게 사과할 테니까 하던 말이나 마저
하시게.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성질부리면 건강에도 좋지 않으이.”
그의 사과를 곁눈으로 받으며 거만하게 헛기침을 한번 하고 모로 틀었던 고
개를 바로하며 장추삼이 무슨 승상처럼 턱을 쓰다듬었다. 이 기가 막히는
순간을 차분한 쉼 호흡으로 버텨내는 지청완의 의지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가관이지만 어쩌겠는가! 참아야지.
“뭐 좋소. 그리도 간곡하게 사과를 한다면야 젊은 내가 참기로 하겠소. 노
인도 성격 좀 죽이시오. 잘못하면 제명을 채우지 못한다니까.”
‘네 녀석이나 제명을 채워라...’
“이건 참 골 때리는 사실인데 노인장은 혹시 유한초자에 대해 아는 바가
있소? 널리 알려진 대로 말 많고 참견 좋아한다는 식의 뜬구름 잡기 말고
말이오.”
“비천혈서에 대해... 아...”
“뭣 좀 알겠소?”
가끔가다가 예리한 장추삼이지만 지금의 지적은 매우 정확하다. 비천혈서라
는 희대의 기서를 처음으로 발설했던, 그래서 한때 전 무림인들의 주목을
받았던 유한초자는 이름 이외에 알려진 바가 전혀 없지 않은가.
그에 대한 외면적인 특징들도 어느 정도 고착화 된 소문꾼적인 묘사가 전부
다. 사파를 이끄는 고수라고 눈에서 혈광을 흘리며 인육을 먹지 않는 것처
럼 입 싸고 참견 좋아하면 전부 생쥐 같은 콧수염에 교활한 눈망울을 가지
지는 않을 터. 그렇게 돌아다니기 좋아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못하면 참
지 못한다는 목양생이라면 여타의 고착화된 모습과 다른 특징이 하나 정도
알려져야 옳다.
“그것 참...”
“그 뿐 아니라오. 이거 어이없는 일인데... 유한초자의 무성한 소문을 전
면적으로 부정하겠다는 건지 그를 보았다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더이다. 무
슨 말인지 알겠어요?”
무언가 머리 속에서 맴도는데 말로 풀어내지는 못하겠다. 이런 경우가 가장
짜증나는 일이라 절로 지청완의 안색이 찌푸려졌다. 이번에는 장추삼도 그
의 마음을 이해하는지 빈정거리거나 하는 여타의 농을 던지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이 늙은 무인의 생각이 정리되기를 기다렸을 뿐이다.
어쩌면 잊혀져가는, 현 무림의 중심부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던 이름이야말로
모든 사건을 대변하는 열쇠일지 모른다.
한번 떠오르지 않는 생각은 며칠을 생각해도 헛수고인 경우가 많다. 이내
생각하기를 포기한 지청완이 고개를 들어 장추삼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는 짧게 한마디 했다, 전혀 거만하지 않은 목소리로.
“소문이 소문을 만들었다면 너무 웃기는 일 아니오?”
소문이 소문을 만들었다!
갑자기 머리가 뻥 뚫리는 기분이라 지청완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내리쳤다.
바로 그 말이다. 그가 하고 싶었던 애기는.
무한대까지 뻗었던 비천혈서에의 소문. 그것은 흉몽지겁의 비참함으로 이어
졌기에 단 한명도 보지 못했던 책이건만 자연스럽게 실체를 인정받았다. 무
림삼대혈겁 가운데 하나의 배경으로 자리했으니 누가 의심하랴.
그 시발점을 장식한 유한초자 역시도 흉몽지겁이 없었더라면 그만큼의 파급
력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었을까?
얼굴조차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입에서 언급된, 표지도 내용도 모르는 책..
. 어찌 보면 황당하기까지 한 작은 사건 때문에 천년을 내려온 무림에 피바
람이 몰아쳤었다. 가장 무서운 이름으로 기억되는 세 개의 혈풍 가운데 하
나로 말이다.
“분명 거짓은 아니야, 분명...”
“호오-”
지청완의 혼란스러운 독백은 장추삼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역시
이 노인네는 무언가를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단순한 노강호가 이런 말을
했다면 반신반의겠지만 지청완이라면, 정도 무림의 영도자라는 만승검존의
혼잣말은 가치가 다르다.
그러나 캐묻지는 않았다. 그런다고 하지 못할 말을 내뱉을 사람이 아니다.
또한 반드시 마을 해야 한다면 귀를 틀어막더라도 문자로서 보여줄 노인이
지청완이다. 넌지시 의사타진을 하는 선에서 얘기를 마무리 지으려 했는데
지청완의 즉각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근거는 뭐...”
“노부의 인생에서 가장 존경했던 분이 하셨던 말이니 어찌 의심하겠는가.
누가 뭐라고 해도 비천혈서는 반드시 존재할걸세. 반드시!”
힘주어 마지막의 말을 끝낸 지청완이 고개를 들어 동굴을 응시했다.
“오오, 전설적인 고수에 무림맹주씩이나 되시는 분도 존경하는 사람이 있
구나! 이거 신선한 충격인 걸? 불패의 고수 지청완도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
! 이거 호사가들이 알면 난리 날 얘깃거리다.”
악의 없는 장추삼의 이죽거림에 지청완이 희미하게 웃었다. 태어났을 때부
터 고수가 어디 있겠으며 설령 무학으로 일가를 이룬 이라도 누군가에게 존
경의 염을 보낼 수 있다.
누구나 없을까 만은 지청완에게도 아주 소중한 추억이 있다. 그 아름다운
기억을 지켜주는 든든한 얼굴들... 그들의 모습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한
줄기 눈물이 주륵 흘러 내렸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행복이란 놈은 이 늙은이가 영원히 가질 수 없
는 인생의 단면이란 말인가!’
“얼레, 우네? 뭐요, 그런 모습은! 하형 들어오기 전에 어서 눈물을 닦으시
오. 나야 뭐 상관없지만 하형 같은 사람이 노인의 그런 모습을 본다면 매우
실망할 거라구요. 무림맹주 식이나 되서 한순간의 감상 때문에 울면 어쩌
자는 게요?”
동굴 입구를 연방 훔쳐보며 부산을 떨던 장추삼이 석상처럼 굳어있는 지청
완을 재촉하다가 안 되겠다 싶었던지 직접 눈물을 닦아주려 무릎을 세웠다.
물론 몸 상태는 ‘아직’이었다.
‘악! 악! 악!’
천상천하유아독맷집이라고 떠들어 놨으니 소리도 못 지르고 고개를 푹 떨군
그가 너무 아파서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 했지만 이를 악무는 것으로서
겨우 참아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머리에서 김이라도 피어나는 착각을 느
꼈겠는가?
“내 참... 절대오존이니... 뭐니 해도 다... 소용없네. 뭡니까... 역시 늙
으면 돈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그저 등 뒤 시원하게 긁어줄... 마나님
이 최고지.”
지청완의 눈물을 닦으며 연방 주절거리는 장추삼은 통증 때문에 중간 중간
을 쉬어가야 했다. 그가 하는 양을 멍하니 지켜보던 지청완이 무슨 생각인
지는 모르지만 빙긋이 웃었다.
‘네 말마따나 가려운 곳 긁어줄 피붙이나 마나님 하나 없는 외톨리라고 생
각했단다. 소중한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남은 한 분은... 휴우... 그래도,
그래도 네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진심은 통한다. 말없이 바라만 보아도 말이다. 지청완의 마음은 장추삼에게
눈빛이라는 매개체로 전달되었다. 무언가 혼란스러웠지만 그는 경망스럽게
설치거나 하지 않았다. 외로운 노인네가 잠시의 친절에 감동 먹었나보다,
하고 넘어가는 편이 정신건강에도 좋고 여러모로 편하니까.
그래도 어색함은 지우지 못하는지라 괜히 눈을 피해서 여기저기를 두리번거
리던 장추삼에게 너무도 친숙하고 반가운 무엇이 눈에 띄었다.
“우와! 저게 아직도 있었네? 나 좀 일으켜줘요!”
“갑자기 왜 일어서려 하나? 조금만 지나면 스스로도 움직일 수 있을 테니
무리하지 말고 쉬게.”
“글세 그런 게 아니라니까! 암말 말고 일으켜 주기나 해요!”
“허...”
거의 방방 뛰는 장추삼을 제어하지 못하고 지청완이 어깨를 빌려주었다. 그
의 내공으로 사람 하나 일으키는 게 어려울 리는 없지만 어쩐지 그렇게 하
는 건 장추삼에 대한 실례라고 생각했기에 잠자코 몸으로 몸을 지지해 주었
다.
사람간의 정은 확실히 살을 맞대는 순간, 어떤 식으로든 몸과 몸의 부딪침
에 의해 커진다. 서로 반가울 때 어깨를 두드리거나 너무 좋으면 무의식중
에 부둥켜안기도 하고 연인들이 서로의 입술을 탐하는 것 역시 의식하지 못
하는 가운데 내재되어 있는 감정이 발현되어 벌어지는 행위가 아닐까?
움찔-
그를 받치는 순간 지청완의 몸이 떨렸다. 장추삼은 너무 말라있었기에 청빈
로에서 당당하게 활보하던 그가 아니었다. 첫 만남, 동굴을 뛰쳐나왔을 때
도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누워있어서 몰랐는데 이제야 장추삼이 겪었던 아
픔을 몸으로 이해하고는 지청완의 노안이 또다시 붉어졌으나 내색하지 않기
로 했다.
만약 그런 마음을 눈치 챈다면 가뜩이나 자존심이 구겨진 장추삼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질 테니까.
“역시 자네에게는 돼지고기가 어울려. 과일이나 죽 따위의 야채를 먹어서
아주 삭았구만, 삭았어.”
뼈들을 보라느니, 해골들이 친구인줄 알고 따라다닐 거라는 둥 쓸데없는 너
스레를 떠는 지청완의 말을 무시하고 비틀거리며 장추삼이 다가간 곳은 어
느 동혈의 입구였다. 막혀보였던 동혈이었는데 이제 보니 조금의 틈이 벌어
져있었다.
“이거 내가 전능관 비석 깨면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고 했었는데 뭔가 잘못
되었나보군. 흐흐흐... 진짜 사연 많은 장소였지.”
감회어린 얼굴로 틈 사이를 힐끗거리던 그가 주먹을 쥐고 무너져 내린 돌무
더기를 툭툭 쳤다. 평소의 장추삼이었다면 벌써 장애물을 박살내고 안으로
들어가겠으나 지금은 모기 한 마리 잡을 힘도 없다.
그 애틋한 마음을 어찌 짐작하지 못하랴. 무얼 하는 곳인지는 모르지만 이
곳이야말로 오늘날의 장추삼을 있게 해준 장소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당
연히 봐야하지 않겠는가!
장추삼을 위해서도! 또한 그분을 위해서도!
우르르...
지청완이 왼손바닥으로 돌무더기를 어루만지자 철옹성처럼 입구를 막아섰던
것들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분명 소리라도 지르며 과장된 놀라움을 표할 법도 한데 장추삼은 너무도 당
연하게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 지금의 그는 예전의 깐죽거림을 잊어버리지
도 않았고 노인들에게 말을 짧게 하며 투철한 개김성으로 무장한 장추삼 본
인임은 틀림없지만 무언가 달라진 것은 분명했다.
가로막았던 석벽이 항복을 하고 돌먼지가 가라앉자 그들에게 펼쳐진 동혈
안에는 그야말로 재미있는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재미라는 말은 물론 지청
완에게 해당하고 장추삼의 관점에서는 끔찍한 마물이니
시퍼런 날을 번뜩이며 천장에 매달려있는 두개의 거대한 도끼와 다수가 한
조를 이뤄 금방이라도 살아나서 무언가의 동작을 취할 것 같은 여러 조의
목각인형들, 일정한 간격으로 뻥뻥 뚫려있는 정체불명의 구멍들...
이외에도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기괴한 도구들이 여기저기에 방치되어 있었
다.
도대체 이곳은...
“여기... 고문실인가?”
“하하하하!”
지청완의 한탄석인 말에 장추삼이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었다. 누가 봐도 이
곳은 관아의 고문실보다 현란할 정도로의 살벌함을 자랑하고 있었으니까.
두개의 도끼는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몰라도 불괴지신(不壞之身)정도를 연마
하지 않은 이라면 걸리는 순간 어디든 댕겅 날아갈 판이다. 목각인형도 그
수상함에 있어서 전혀 뒤지지 않은 것이 언뜻 봤을 때는 그저 사람 키의 인
형정도로 생각되었으나 그것들이 위치한 방위가 심상치 않다.
‘뭐야? 이것들의 숫자도 기막히군. 점하고 있는 방위와 부합되는 개수의
집합 아닌가!’
삼재를 점하고 있는 목인형의 수는 세 개, 오행을 점하고 있는 수는 물론
다섯, 아홉이 한조를 이루는 목인형은? 물론 구궁을 완벽하고 밟고 서있었다.
이 정도로 일목요연한 설명방법이 어디 있을까? 모든 공격진법의 기본이 되
는 진식들을 비옥 사람을 대신하는 인형이지만 가장 적절한 위치에 세워놓
았기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작은 설명만으로 기본 방위도 모르는 바보 - 이
부분에서 지청완은 저도 모르게 장추삼을 쳐다보았다 - 조차도 진이란 무엇
인지 납득하게끔 해 놓았다.
“큭큭큭...”
어떤 상상을 했는지 개구쟁이처럼 지청완이 웃자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뚱
한 표정이 되었지만 밀려오는 감회에 장추삼도 작은 미소를 흘릴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도구들이 불분명한 사용처를 자랑하며 별로 아름답지 못
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지만, 동작되었을 때의 흉험함은 느낌으로도 팍팍 풍
기는 녀석들이었기에 사용한 당사자를 어떤 곤경으로 밀어 넣었는지 입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케 하는 광경이었지만 장추삼은 웃었다.
힘들었기에, 치 떨리도록 고달팠기에 더욱 감회가 새로운지도. 미치도록 어
려웠던 5년이지만 이제는 건넌 세월이고 다시 맞이할 일이 절대로 없기에
지나온 자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가 전능제일관(全能第一關)이에요. 이름만 거창한 게 아니라 무서움
도 상상을 불허하지요. 아무리 노인이 고수라고 해도 별호를 보니 검을 주
무기로 사용하나본데 이곳을 뚫기는 어려울 거요.”
무덤덤한 그의 말에 지청완이 피식 웃었다.
“과연 그럴까?”
“과연이라고 허세부릴 문제가 아니라니까. 여기는 자존심 가지고 덤벼볼만
한 곳이 아니란 말이오. 뭐 그래봐야 작동되기나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목인형들을 쓰다듬으며 독백처럼 뇌까리는 장추삼에게 다소 황당한 대답이
들려왔다.
“작동될 걸세.”
“엥?”
지청완의 확신에 찬 발언에 그가 깜짝 놀랐다. 만승검존이 기관지학에 능하
다는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은 바가 없다. 동혈의 상태만 보고 한눈에 작동
여부를 파악해내었다면 지청완은 여느 기관지학의 대가보다도 뛰어나다는
말인데.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노인은 검만 잘 다루는 게 아니라 기
관진식에도 조예가 깊었구려? 강호인들은 몰랐을 거요. 만승검존이 기관진
식에도 통달한 문무겸전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말이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내 비록 진식을 조금 알기는 하나 기관 쪽은 하나
도 모른다네.”
어처구니없다는 지청완의 대꾸에 더욱 오리무중이 되어 장추삼이 툴툴거렸
다. 무공이 좀 쎄다고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야말로 한심한 경
우다.
“그럼 어떻게 알아요! 목인형들이 기라도 발산하면서 지가 움직인다고 소
리라도 치고, 멍청한 칼날들이 살기라도 뿜어댄답디까?”
“아니.”
“그럼 뭐요!”
“그냥 감이야.”
“끙!”
말을 말자, 하면서 제일관의 구석에 앉은 장추삼이 낮게 노래를 부르기 시
작했다. 워낙에 혼자 잘 노는 인간인 걸 아는지라 그냥 내버려두고 지청완
도 제일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세세하게 조형물들을 살폈다.
장추삼은 모르겠지만 지청완에게도 이것들은 나름대로의 추억을 불러일으키
는 소도구가 되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어느 때의 기억과
떠오르는 얼굴들... 그 가운데 하나의 얼굴이 선명하게 부각되어 지청완의
옆에 섰다.
...어때? 괜찮지 않나?
...제자를 잡으려고 들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걸 만든 거요? 그나저나 예전
부터 알았지만 손재주 하나는 정말 죽여줍니다. 어떻게 이리 잘 만들었대요?
...늘 봐왔던 일이었을 텐데 갑자기 금칠할 필요는 없네. 그리고... 뭐? 우
리 추삼이가 이따위 난관을 극복하지 못할 성 싶었어? 자네의 눈은 아직도
멀었구만.
...하긴 제자 하나는 똘똘한 놈으로 들였더이다. 내가 그거 하나는 인정하
지요.
...사부가 누군대? 당연한 말이지.
눈시울이 절로 적셔져서 몸을 돌리고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분이 이렇
게 살아 잇다. 비록 육신이 없더라도 이렇게 말이다.
...그곳은 그런대로 지낼 만한가보오? 신수가 어떻게 더 훤해지신 거요?
...아, 아, 자네는 아직 이곳으로 올 생각 말게. 아직 어림도 없지.
...아이고, 가고 싶은 생각 따위 눈곱만큼도 없다오.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도 좋소. 별 상상을 다하네.
말없이 지청완의 푸념을 들어주던 그의 추억이 하얀빛으로 소멸되어 점점이
흩어지려 하고 있었다. 잡으려 해도 절대로 이르지 못하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 어쩌면 먼저 간 사람은 편할지도. 남겨진 자는 기다림보다 독한 추억
의 잔을 마셔야 하니까.
...부탁한다.
무엇을 부탁하고 싶었을까? 강호의 안녕? 무림의 평화? 그런 관념적인 대상
을 하늘 위에서 까지 굽어보려 했었을까?
...고맙소.
무엇이 고마웠을까? 순간의 추억으로 다시 살아나줘서? 이런 공간을 구경시
켜 주었기에? 이런 건 지청완에게 있어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정말로 고마
운 건...
“정말... 고맙구려.”
빛은 서서히 흩어지고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는 다시 닫혔다. 이것을 환상
이라고 부른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적일 것이다.
“뭐래는 거야?”
뜬금없는 지청완의 말에 장추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일관에 들어오면
서부터 서서히 맛이 가기 시작하는 것 같더니 이제는 드러내놓고 헛소리를
하고 있다.
기관진식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안다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모
습이야 노인들 특유의 아집이라고 감안해줘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자기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부의 피조물을 보며 마냥 무게 잡다가 이상한
소리까지 내뱉는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원래부터 비정상적인 사고로 무장하고 있었다는 걸 충분히 감안해준다고 치
더라도 이건 좀 심하다.
그렇지만 드러내놓고 큰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비록 막말을 하고 예의바
른 인간들에 비해 조금, 아주 조금 버릇이 없는 자신이지만 한 번 쯤은 양
보할 용의도 있다. 해서 대놓고 이빨을 드러내지는 않기로 했다.
그래서...
“저게 뭔 일이야?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라는 말로 대신했다. 물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을 따름이다.
그런데...
“너는 절대로 나와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말이야.”
“엑!”
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청완의 대답은 너무도 명쾌했다. 가슴을
도려낼 듯한 선명함이 단어 마다 묻어 있어서 장추삼은 비명 같은 탄성 이
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귀신같은 노인네. 그런 말까지 어떻게 잡아낸다는 거야,’
알고 있을까? 지청완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는 것을. 정말 하고 싶었던
얘기였기에 순간적으로 입에서 터져 나왔을 뿐임을.
일단은 미안해서 고개를 숙이고 괜히 땅바닥에 동그라미를 연신 그리고 있
던 장추삼의 귀에 또 한번의 황당함이 울려 퍼졌다. 농담이라고 여겼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말이었다.
“이제 기관을 한번 작동시켜 볼까?”
“정말로 된단 말이오? 그럴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어!”
“뭐가 그렇게 그럴 리 없다는 게야?”
지청완의 심드렁한 대꾸에도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는 장추삼이었지
만 어쩐지 확신 없는 자세였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권위라는 놈은 무
시하기 어려운 마물임에 틀림없었다. 정도무림맹주 만승검존의 느닷없는 한
마디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길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렇다면 사부는 그에게 또 구라를 쳤다는 말인가? 분명히 관문을 통과하는
순간 모든 기관은 제 기능을 잃는다고 했다. 다른 말은 몰라도 그런 얘기
는 믿기로 했었는데 그마저도 사기였다면 저승에 쫓아가서라도 따질 용의가
있다.
허나 권위도 권위지만 확신에 찬 지청완의 눈빛을 보니 뭔가 죽어 들어간다
. 어떻게 오년을 허비한 인간보다 잠깐 견식 하는 사람이 이곳의 사정을 더
잘 꿰뚫을 수 있다는 말인가.
“정말 움직인단 말이오? 정말로?”
“아, 그렇다니까 그러네. 평소에 사람을 잘 사귀었으면 이런 의심도 품지
않았겠지. 사람이 살면서 대인관계처럼 중요한 것도 없다네.”
“그게 아니라 여기는...”
“됐네!”
“이익!”
딱 자르는 지청완의 무시성 발언에 순간 열 받았지만 뭐라고 변명할 말이
없다. 그의 눈에서 노화의 광망이 번뜩이든 어떻든 지청완의 손은 부지런히
기관을 건드렸고 그러던 어느 순간 나룻배가 뭍을 떠나는 소리가 동혈에
울려 퍼졌다.
끼이이이-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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