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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17일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에제 18,1-10ㄱ.13ㄴ.30-32
복 음 : 마태 19,13-15
13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늘 복음의 바로 다음 구절에서는 어떤 사람이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라고 묻습니다.
어린이들은 그런 물음을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하늘나라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더구나 오늘 복음의 어린이들은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도 아닙니다.
다른 이들이 그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19,13)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그렇게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어린이들과 같은 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당하다고 하여야 할까요? 그러나 현실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어릴 때 부모님 손에 이끌려 세례를 받은 이들의 신앙에서,
나이 들어 교리와 신학을 연구한 이들의 신앙과
다른 무엇이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아직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직 하느님께서 부어 주시는 신앙이 그들 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어른들이 “데리고” 온 어린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늘나라를 차지하려고 먼저 무엇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 주시고, 당신 가까이 머물도록 곁을 내주십니다.
그 어린이들이 하는 일은 그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이 어린이들”의 것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19,14)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미 어른이 되었다 하더라도,
예수님께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 묻기 전에
먼저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늘나라를 거저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기도는 어떤 것일까요?
나의 바람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곧바로 ‘안 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포기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전자가 우리의 기도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기도를 특별한 장소에서만 하는 것이라면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시간적, 장소적 제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어디에서나 가능합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일 보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완벽한 장소, 완벽한 시간에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한 장소와 시간이 아니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상관없이 기도하는 사람만이
그 맛을 알고 또 기도의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계속 기도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기 엄마에게 매달려서 계속 칭얼거리는 아이를 보았습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무엇을 부탁했고,
엄마는 안 된다고 거절한 상황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끈기가 대단합니다.
저 정도 했으면 포기할 만도 한데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엄마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습니다.
이 아이를 보면서 저도 저럴 때가 있었음을 생각해 봅니다.
맞으면서도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쉽게 포기했던 것이 떠올려졌습니다.
그냥 쉽게 ‘안 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포기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어린이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지 쉽게 깨닫습니다.
한 시간도 되지 않는 기도를 하면서도 얼마나 많은 분심이 빠집니까?
이 분심에 빠지지 않기 위한 어떤 노력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에서 자기 삶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도
당연함을 알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어린이를 가리켜서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자기를 낮추고 끊임없이 하느님께 매달리는 사람,
바로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쉽게 포기하고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서도 안 됩니다.
끝까지 매달리는 우리이지만,
그 매달림은 겸손과 사랑의 마음으로 임해야 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는 많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엄마, 아빠’입니다.
우리 역시 많은 것을 찾는 삶이 아닌 주님 곁에 머무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늘나라가 멀리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어린이들과 같은 모습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오래전의 일입니다.
구역 미사를 봉헌하러 갔더니
어린이들은 따로 한 방을 차지하고 자기들만의 놀이에 열중했습니다.
어른들 ‘미사에 시끄럽게 굴지 말아라.’ 하면서 특혜를 준 것입니다.
그러니 미사참례는 어른이나 하는 줄로 압니다. 시끄러우면 좀 어떻습니까?
좀 더 거룩한 분위기에서 미사 봉헌 하기에 앞서
어린이들에게서 거룩한 미사참례의 기회를 빼앗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19,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을 통해 그들의 순수성을 배우려면 그들 곁에 있어 봐야 합니다.
시끄럽고, 철없고 교회의 거룩함의 수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진득하게 오래 견디지는 못할지라도
‘기도 손’ 한 모습이 아름답고 십자성호를 긋는 동작이 기특합니다.
진정, 어린이들로부터 하느님의 은총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미 새의 소리를 듣고 노래를 배우는 어린 새들과 같이,
어린아이들도 세상에서 그들을 가르치기로 되어 있는 아주 열심한 부모 곁에서
하느님 사랑의 숭고한 노래와 덕행의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성녀 소화 데레사).
또한 우리도 어린이의 단순함과 의존성을 배워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선뜻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이가 부모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주님의 가르침을 그렇게 받아들일 때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 다가오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막는 것입니다.
오히려 누구라도 예수님께 데려와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어린이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어른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시편131,2).
주님의 품에 안겨 평온함을 누릴 수 있길 희망합니다.
주일학교 미사 때 가장 신나고 크게 성가를 부르는 이들은
저학년 유치부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어린이를 데리고 와서 축복해주기를 청하는 사람들을
제자들이 꾸짖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줍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작심하시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벌어진 상황에 따라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부자청년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두 이야기를 다 같이 ‘하느님 나라’에 관련하여 이끌어갑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장(18장)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3)
“너희들은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을 가로막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친구로 여기건만 제자들은 그들을 업신여기며,
그들이 예수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이처럼,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는 성경에서 무력하고 힘없는 사람,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 수 없어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무능하고 약한 이를 표상하며,
동시에 사회에서 미천하고 버려진 이, 천대받고 소외된 이를 대변합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복음의 뒷장면에서 자기주장을 하는 부자청년(19,16-22)과
자신들의 성과에 목소리를 높이는 제자들(19,27)과 대조를 이룹니다.
사실, 어린이들에게 우리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우리에게 어린이들이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다가가면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복음화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회개하여 어린이 같이’ 되게 해 주고,
‘작은 자’ 되게 하고,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가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에게 다가가면, 우리가 그들에게 시혜를 베풀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복음화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단지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나 혹은 가난한 이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가난한 교회가 되어라’고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단지 ‘어린이에게 다가가라’
혹은 ‘어린이를 돌보라’고 하지 않으시고 ‘어린이처럼 되어라’ 곧 ‘어린이가 되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주님!
어린이같이 아래에 있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바다가 되게 하소서.
아래에 있기에, 떠받들고 존경하게 하소서.
어린이처럼, 이해하지 못해도 신뢰로 받아들이고,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진정 약하기에,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철학 시간에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배웠습니다.
영국 경험론의 석학 프랜시스 베이컨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을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거미형’ 인간입니다.
거미는 실로 그물을 만들어 놓고, 먹이가 들어오면 유유히 잡아먹습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라는 그물을 던져서 죽음으로 몰았던 대사제와 빌라도가 그렇습니다.
사기꾼들이 그렇습니다.
독재 시대에 ‘공산주의자’라는 그물을 던져놓고
민주화 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을 감옥에 가두었던 세력이 그렇습니다.
조작과 회유, 별건 수사와 압박으로 거짓 증언을 시켜놓고
무고한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는 세력이 그렇습니다.
진퇴양난, 사면초가의 궁지에 몰아놓고 사냥하는 세력이 그렇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은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성서는 그런 고난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는 ‘개미형’ 인간입니다.
개미는 누구를 해치지 않고, 열심히 일합니다.
이솝우화에서 개미는 배고픈 베짱이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개미형 인간들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가톨릭교도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가톨릭교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나를 덮쳤을 때,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공동선을 위한 연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이제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병들고, 감옥에 갇힌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지구 온난화, 환경 파괴, 전쟁과 폭력은 개미형 인간들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개미형 인간이었던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세 번째는 ‘꿀벌형’ 인간입니다.
꿀벌은 나무가 열매 맺을 수 있도록 꽃가루를 수분(受粉; pollination)시켜 줍니다.
꿀벌은 꿀을 얻는 대신에 나무의 번식을 도와줍니다.
남는 꿀은 사람이나 다른 동물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던 율법 학자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했던 레위와 사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라자로를 외면했던 부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가지 못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에 데려다준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침이슬과 상록수의 주인공 김민기 선생님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꿀벌 형’ 인간이었습니다.
그분의 노래는 암울했던 시대에 맞서 투쟁했던 이들에게 귀한 ‘꿀’이었습니다.
그분이 만들었던 소극장 ‘학전(學田)’은 젊은 연극인들에게 ‘꿀’이었습니다.
그분이 연출한 작품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꿀’이 되었습니다.
김민기 선생님이 천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그분은 달릴 길을 다 달렸기 때문입니다.
고인이 꿈꾸었던 ‘이 세상 어딘가에’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까 있을까
분홍빛 고운 꿈나라 행복만 가득한 나라
하늘빛 자동차 타고 나는 화사한 옷 입고
잘생긴 머슴애가 손짓하는 꿈의 나라
이 세상 아무 데도 없어요. 정말 없어요.
살며시 두 눈 떠 봐요. 밤하늘 바라봐요.
어두운 넓은 세상 반짝이는 작은 별
이 밤을 지키는 우리 힘겨운 공장의 밤
고운 꿈 깨어나면 아쉬운 마음뿐
하지만 이제 깨어요.
온 세상이 파도와 같이
큰 물결 몰아쳐 온다. 너무도 가련한 우리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 보아요.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 보아요”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
조욱현 토마 신부
어떤 사람들이 아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왔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13절)
제자들은 아이들 때문에 예수께서 피곤해지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얼마 전에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앞에 세우시고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하셨다.
이 말씀을 들었지만, 제자들은 어린이의 순수함을 잊어버리고,
그들이 예수께 올 자격이 없는 것처럼 막고 있다.
순진한 어린이들이 예수께 오는 것을 막는 것은
그분의 영광을 빛바래게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격이 없다면 누가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14절)
주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거룩한 삶의 방식으로
그리고 하늘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갖추라고 가르치신다.
우리가 어린이들처럼 죄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 되지 않는 한,
주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18절)
사도 바오로는
“생각하는 데에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1코린 14,20)라고 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
하느님께서는 어린이가 지닌 자질들을 우리가 선택하여 갖추기를 바라신다.
즉 순박함, 남들에게 당한 악을 악으로 갚을 줄도 모르는 것,
부모를 사랑하는 것 같은 자질이다.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으신 것은 바로 그 안수를 통해
그가 하느님의 권능으로 무장하게 해 주신 것이다.
아이들에게 축복하시고 떠나시는 예수께서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어린아이와 같은 자세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를 초대하신다.
이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도
순박한 어린이와 같이 앞뒤를 재가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즉시 실천하며 주님께 나아가는 삶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구체적인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이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평화와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는 우리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9,14)
어른은 예전에 모두 다 어린아이였습니다.
어린아이였을 때 우리 가운데 어떤 누구도 어린이다움이 무엇인지 알았던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른이 된 다음에 어린이들을 보면서 어린이다움을 정의하지만,
어린이다움을 한마디로 정의한다, 는 게 쉽지 않음을 느낄 것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모든 어린이는 다 다르고,
서로 다른 어린이가 각자 하나의 정체성만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한 어린이에게도 다양한 특성과 마음이 있는데도
대개 어른은 어린이에게서 보편의 어린이다움을 찾으려 합니다.
어린이들에게서 각자 다른 점을 보려 하기보다는 어른을 기준으로 해서
어른과 대비되는 어린이들만의 공통된 특성을 찾고 만족하고 기뻐합니다.
어린이가 어른과 다른 점이 분명히 있으며, 그 점들 상당수는 어른이 본받을 만큼 반짝이며,
그 점이 어린이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건 물론입니다.
아직도 저는 어린이를 잘 모르고, 어린이다움이 무언지 잘 모르지만,
다만 어른이 되면서 어른들을 볼 때, 어른을 두고 어른다움으로 묶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어른은 자기가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어린이는 자기가 기준이 아니고
여전히 어른이 기준이어서 어린이다움으로 묶으려 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어린이다움이라는 동일하고 고정불변한 속성으로 어린이를 묶고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어린이다움을 모른다고 인정하면서,
있는 그대로 어린이의 존재만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이스라엘에선 아버지가 아들에게,
율법 학자가 제자나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고 축복을 빌어주는 관습이 있다고 합니다.
사실 요즘 모든 본당에서 영성체 시간이 되면,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어른 예비 신자들과 어린이들이 축복받기 위해 나오기도 합니다.
축복을 내려주고 축복받고자 하는 마음 밑바닥에는
하느님께서 여기 함께 계시다, 고 하는 믿음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순수한 마음으로 청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19,14)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어린이들이 지닌 그 무엇이 하늘나라에 가장 최적화된 영성적인 면일까를 궁리하다가,
오래전에 읽었던 이현주 목사의 「예수에게 도를 묻다.」라는 책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그 책에 보면, 오늘 복음과 병행 구절인 마르코 10,13-16의 대목을 해설하는 부분인데
그 대목을 잠시 인용하려 합니다.
『어린아이의 순진한 마음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에게는 악과 선이 따로 없고 아름다움과 더러움이 따로 없으며 너와 내가 따로 없다.
그래서 악과 선이 따로 없고 아름다움과 더러움이 따로 없으며
너와 내가 따로 없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물이 물을 받아들이고 불이 불을 받아들인다. (...)
사람은 어른이 되면서 어렸을 때 지녔던 ‘순진한 마음’을 버리고
이것과 저것을 가려 좋은 것은 잡고 싫은 것은 버리는 ‘분별심’을 키우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고통과 절망을 가져다줄 뿐이다.』
이런 점 때문에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어린이들이 당신께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그들을 축복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이라 봅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우리 가운데 어떤 누구의 자녀이지만
동시에 하느님에게도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자녀보다 더 귀한 하느님의 선물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어린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 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프랑스의 종교 학자인 르낭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천국의 요소는 첫째로 어린아이이고,
둘째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 즉 소외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그 시대 가장 작은 자들에게 가장 친절하고 호의가 넘치셨기에
늘 그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함께 언제라도 어린이들에게 축복을 내리시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어 축복하시고 그곳을 떠나셨습니다.”(19,15)라는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며 축복입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 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1,25)
그들은 이미 지상에서 천국을 살고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요즘은 어린이들에 대한 인식이나 처우가 과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이곳 태안에서는 아기 한 명이 태어나면 마을 입구에 큼지막한 플래카드까지 내겁니다.
가정에서건, 학교건, 성당이건, 아동양육시설이건, 어디든지
아이들을 금이야 옥이야 하며 상전 모시듯이 정성껏 양육하고 동반합니다.
사실 이게 정상인데... 그간 너무한 부분이 참 많았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는 남자 성인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유아나 어린이 사망률이 높던 시절, 일단 성인이 되어야 비로소 한 인간 존재로 취급받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사도들은 예수님께 축복을 청하러 오는 어린이들과 부모들을 꾸짖었던 것입니다.
안 그래도 과도한 사목활동으로 몸에 과부하가 걸린 예수님이신데,
별 도움도 안 되는 어린이들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사도들은 언짢아하며, 그들을 물리친 것입니다.
그때 보여주신 예수님의 태도가 놀랍습니다.
어린이들을 무시한 사도들을 크게 꾸짖으십니다.
어린이들도 하느님께서 손수 창조하시고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신 소중한 존재임을,
그들 안에도 하느님께서 굳건히 현존하심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니 그들을 무시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는 그들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외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여름 내내 많은 어린이들,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어른들처럼 속이 구리지 않습니다. 겉과 속이 다르지도 않습니다.
노회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순수하고 반짝반짝 빛납니다.
그들은 이미 지상에서 천국을 살고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