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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18일 연중 제20주일
제1독서 : 잠언 9,1-6
제2독서 : 에페 5,15-20
복 음 : 요한 6,51-58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늘 두 독서와 복음 모두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잠언에서는 지혜가,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사람들을 부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만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각없는 이에게”(잠언 9,4) 자신이 주는 양식을 먹으라고 합니다.
어려운 점은, 지각없는 사람이 과연 그 초대에 귀를 기울이는가 하는 점입니다.
잠언에서는 지혜가 금보다 귀하다고 거듭 말하지만,
그 지혜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에게 지혜의 초대는 수고스럽게만 보입니다.
한편 에페소서는 술에 취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지 말며,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느님을 찬양하며 살도록 초대합니다.
이 초대도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지금이 악한 때라고 하면서 어떻게 모든 일에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고 말할까요?
어리석은 자라면 아마도 악한 때의 흐름에 휩쓸려 살거나,
아니면 악한 이 세대를 원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악한 세상 안에서도
지금 주어진 시간을 구원의 시간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복음 또한 초대입니다.
잠언의 초대에서와 비슷하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주시는 양식과 음료를 받아먹으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이 초대 때문에 “말다툼”(요한 6,52)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사람들에게 육신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소하여 주실 때는
말다툼이 일어나지 않고 많은 이가 모여들지만,
영원한 생명을 위한 참된 양식과 음료를 받으라고 하실 때는 사람들이 갈라집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고 있었습니까?
예수님에게서 다만 육신의 양식을 구하려 하는 이들은,
결국 예수님을 떠나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찾아서 얻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지혜를 구하여 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자를 풀이하면 장작 위에 눕고 쓸개를 맛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안에는 ‘복수’가 담겨 있습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오와 월이라는 두 나라는 서로 다투며 원한을 주고받았는데,
먼저 월의 왕이 급습해서 오나라의 왕을 죽인 것입니다.
아버지를 잃은 오나라의 새 왕은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며 복수를 맹세하지요.
시간이 지나 월을 공격한 오나라는 월나라를 철저하게 파괴합니다.
이후 월나라 왕은 곰의 쓸개를 핥으면서 복수를 다짐했고, 결국 오나라를 쳐서 복수에 성공합니다.
와신상담 끝에 복수에 성공해서 남는 것이 무엇일까요?
복수에 성공했을 때는 순간의 만족과 기쁨이 있었겠지만,
결국 아픔과 상처만을 남기고 또 다른 복수를 만들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피해는 힘없는 사람들에게 더 크게 다가옵니다.
역사 안에서 전쟁은 결국 모두 망하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평화를 쫓아야 합니다. 평화만이 모두를 살리는 길입니다.
하지만 자기만족만을 위해 복수를 다짐하고 실행하면서 어리석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길은 모두를 위한 길이었습니다.
특별한 사람만이 아닌, 죄인이나 의인이나 상관없이 함께 살아가도록 하는
그래서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모습이 내 안에서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 너무나 자주 보입니다.
국가 간의 전쟁도, 또 개인 간의 원한도,
또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모든 모습이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어떤 길을 선택해야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요?
제1독서의 잠언은 “어리석음을 버리고 살아라. 예지의 길을 걸어라.”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삶은 어리석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삶은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고 하시면서,
이 살을 먹고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당시의 유다인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면서 말다툼을 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직접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이 아닌,
성사적 표지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생명을 주고받는
그분의 신비에 참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미사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성체를 모십니다.
단순한 먹거리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2독서에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라고 하십니다.
당신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의 삶을 살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좇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받아 모시면서 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길만이 우리 모두를 위한 길입니다.
나는 참된 양식 참된 음료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당신의 사랑을 몽땅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하고 선언하셨습니다.
모두가 참된 양식과 음료를 먹고 마심으로써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미사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변화”, “영성체”.
예, 다 중요합니다.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되는 성변화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도 변화되십시오.” 여러분의 삶은 살아있는 미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신다면
그 은혜에 감사하고 나도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거듭 태어나 베푸는 삶을 살아갈 때 성변화의 의미가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분을 먹고, 마셨으니, 그분을 닮고, 아니 또 하나의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영성체는 개인적으로 볼 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을 먹음으로써
주님과 하나가 되고 영생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표현으로 하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2,20).
영성체보다 더 깊고 더 완전한 사랑의 일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성체를 갈망하고 잘 준비된 마음으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기 전에 내가 모시는 성체가 하느님이시라는 진리를 깊이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이 분명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하늘의 양식을 받아 모시면서도
하느님을 직접 모신다는 중대한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깊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모셔야 하겠습니다.
“각 사람은 자신을 살피고 나서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사람은
그렇게 먹고 마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1코린 11,28-29).
자신을 성찰하고 고해성사를 통해 예수님과의 유사성을 회복한 후 영성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하여 빵을 먹어야 하듯이,
우리는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성 가롤로 보르메오).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를 하지 못하는 것을 더 견디기 힘들어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13년간이나 감옥살이를 하셨던 구엔 반 투안 주교님은 감옥 안에서
‘위장약’이라고 쓴 꼬리표와 함께 작은 병에 담아 보내진 미사주와
습기를 피하도록 손전등 안에 숨겨 보내진 ‘제병’을 가지고
세 방울의 포도주와 한 방울의 물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미사를 거행하셨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이것이 저의 제대였고 주교좌성당이었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가 말했듯이
‘불사불멸의 약, 죽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언제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해독제‘ 였습니다.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저는 예수님과 함께 손을 펼치고
십자가에 저를 못 박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그분과 함께 가장 쓴잔을 마셨습니다.
날마다 축성 말씀을 암송하며, 제 피에 섞인 그분의 피를 통해
온 마음과 영혼으로 예수님과 저 사이에 새롭게 맺어진 영원한 계약을 확인하곤 했습니다.
제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사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 바오로 딸).
이에 비하면 우리는 미사참례를 얼마나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미사참례를 자주 하지 못합니다.
미사는 의무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빵으로 오시는 주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성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성체를 단 한 번이라도 받지 못하여
그로부터의 혜택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유리아노 예마르)
사람들에게는 체질이 있습니다.
그런데 체질은 선천적인 것도 있고 후천적인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후천적 체질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음식입니다.
고기를 많이 먹느냐 아니면 야채를 먹느냐에 따라서
알카리성 체질, 산성체질이 될 수 있고 몸짱이나 비만형이 되기도 한답니다.
요즘은 특별히 웰빙식품을 선호하며 건강을 챙깁니다.
그러나 육적인 건강 못지않게 영적인 건강을 먼저 챙겨야 합니다.
특히 영적인 양식인 성체를 잘 모시는 사람은 ’성체체질‘로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니 예수님의 성품, 예수님의 가없는 희생적 사랑을 살게 됩니다.
모름지기 향을 싼 종이에선 향내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모신 사람에게서 예수님의 향기가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약 성체를 모시면서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탓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일치를 이룹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유입니다.
준비된 마음 안에 성체의 은혜가 충만하여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일화입니다.
한국에 오셨을 때 어느 인터뷰에서 테레사 수녀님은 “하루에 성체를 두 번 모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루에 미사를 두 번 참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침 미사 때 성체를 모시며 예수님과 만나고 그 후에는 일을 하며,
즉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며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예수님을 두 번 모신답니다.
고통받고 소외받는 이들과의 만남이 두 번째 영성체라고 하신 수녀님의 말씀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내 것을 나누고 이웃과 함께할 때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주님 사랑은 이웃사랑으로 표현됩니다.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 때 그곳에서 이웃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혹 습관적으로 성체를 모시는 이가 거룩해 지나요?
그렇게 해서 사랑의 주님을 만날 수 있나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이라야 만날 수 있습니다.
매번 성체를 정성껏 모시고 성체를 모신 힘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라고 하셨습니다.
“머무른다”는 것은 “머물렀다”의 과거 얘기가 아니라 지속적인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늘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함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성체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게 된다면 바로 그곳이 천국입니다.
영성체로 “지상의 천국”(성녀 막달레나 소피아바라)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적 생명을 우리에게 선사하십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연중 20주일입니다.
지난 세 주일에 이어, 이번 주일에도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듣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예지의 길을 걸으라는 <잠언>의 외침을 들었고,
제2독서에서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하라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몸과 피가
어떻게 우리의 음식이 되는지를 말씀해 주시는데,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참으로 어마어마한 말마디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줄 빵'이라고 하시면서, 그 빵은 '당신의 살'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이 이 빵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빵을 먹었을 때의 일입니다.
곧 '그 빵을 먹으면' 그렇게 되겠지만, 먹지 않으면 아무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 빵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
예수님께서는 마치 어머니들이 건강에 꼭 필요한 음식이나 약을 자녀들에게 먹일 때에
으름장을 놓으며 먹도록 위협하거나 그럴싸한 약속으로 어르고 꼬이듯이,
‘당신의 살’인 이 빵을 우리에게 먹이기 위해 으름장을 놓으며 위협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최상의 약속으로 우리를 어르고 꾀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54)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라는 말씀은 세 가지 의미를 밝혀줍니다.
첫째는 당신께서 우리의 밥이요, 양식이며,
그 양식은 우리의 육체적 생명을 살리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잠언 9,5)
사실 우리는 오늘도 물과 피를 섞어 마십니다.
미사 중 <예물준비기도> 때 사제는 포도주가 담긴 성작에 물을 조금 섞으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가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그리고 '평화의 인사'를 한 후,
사제는 축성된 빵 조각을 포도주가 든 성작에 넣으며 혼자 기도합니다.
“여기 하나 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이를 받아 모시는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게 하소서.”
이처럼 오늘도 우리는 섞어 그리스도의 신성을 음료로 먹고 마시며, 신적생명에 참여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과 사귐을 말합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기리는 찬양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와의 사귐이요,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과의 사귐이 아니겠습니까?”(1코린 10,16)
유대인들에게 있어 ‘몸’은 ‘인간관계’를 말하며, 곧 ‘사랑의 사귐과 친교’를 말합니다.
그리고 ‘피’는 ‘생명’을 말하며, 곧 ‘일치와 유대’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몸’에서 친교와 사귐으로 사랑의 관계를 배우고,
‘예수님의 피’에서 유대와 일치를 이루는 사랑을 배웁니다.
셋째,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무름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시는 사람 ‘안에 머물며’,
당신의 신적 생명을 우리에게 선사하십니다.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증여하십니다.
당신의 살은 우리의 살이 되고, 당신의 피는 우리의 피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잠시 후에 “아멘”이라는 응답과 함께 예수님의 몸과 피를 영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살겠다’는 응답입니다.
곧 예수님이 가지셨던 그 사랑의 관계를 가지겠다는 응답이요,
예수님의 생명 안에서 살겠다는 응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
<오늘의 말·샘 기도>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주님!
당신은 제 안에 머무르되 저를 장악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게 먹혀 사라짐으로 제 안에 살아 계십니다.
당신 안에 저를 허용하시되 저를 가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숨결에 태워 드높게 날게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모든 것을 내어주고 그믐달처럼 자신을 감추신 그 오묘함과 놀라움으로,
오늘 제가 바람 부는 대로 흘러 다니는
그 가볍고 그윽한 당신 사랑의 숨결이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깨와 소금이 만나면 ‘깨소금’이라고 합니다.
깨와 설탕이 만나면 무엇이라고 할까요?
‘깨달음’이라고 하네요. 설탕이 달기 때문에 ‘달음’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운명처럼 만나서 세상을 변화시킨 인연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원효는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 후에 ‘일체유심조’라는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이순신과 유성룡이 만나서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선을 구하였습니다.
뉴턴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면서 ‘만유인력’이라는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을 만나서 ‘스마트폰’이라는 혁신을 만들었습니다.
2024년 저는 댈러스로 와서 여러분을 만났습니다.
남길 곳이라고 이름 지은 창고를 만들었습니다. 그 창고에 아름다운 벽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27기 사목회가 시작되었습니다.
27기 사목회는 신명 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27기 사목회는 말씀과 친교가 넘쳐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27기 사목회는 본당 설립 50주년을 준비할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지혜와 용기를 청합니다.
삶과 죽음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삶과 죽음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삶이 먼저고, 죽음이 나중이니 삶과 죽음은 순서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은 가치의 문제입니다. 삶과 죽음은 그래서 함께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사고락, 생사를 함께한 전우, 생사여탈, 생사확인’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죽음과 삶을 이야기한 말도 있습니다. ‘사생관, 사생결단’과 같은 말입니다.
삶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라면 우리의 삶은 자칫 허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슬픈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알면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잘 죽기 위해서 잘 살아야 하는 이유가 생기게 됩니다.
생물학적으로 죽음은 흙이 되는 과정입니다.
사회학적으로 죽음은 관계의 단절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죽음은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한 줌의 흙이 되는 것도 아니고, 관계의 단절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은 우리를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으로 안내하는 이정표입니다.
삶은 그 이정표를 향해서 떠나는 순례입니다.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하려는 자영업자들에게 해 주는 ‘조언’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의 말은 믿지 말라는 조언입니다.
이곳에 투자하면 많은 수익이 나고, 성공할 거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수익이 나고, 성공할 거라면
본인이 하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 말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업은 경쟁자가 많아서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영업자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수고와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신만의 기술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수고와 헌신이 없는 성공과 재물은 마치 사막에서 보이는 ‘신기루’와 같습니다.
신기루는 허상일 뿐입니다.
회개와 십자가 없이,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뿌리지 않고 열매 맺는다는 신앙도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이정표를 따라 영원한 생명으로 나가는 과정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수고와 헌신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빵을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은 육신을 배부르게 하는, 그래서 또다시 배고프게 하는 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은 선과 악을 식별하는 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용기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먹는 사람들의 행동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그러면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언제나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늘 기도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빵’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조욱현 토마 신부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하셨다.
그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당신 살이라고 하셨다.
오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셔야 한다고 하신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뿐만 아니라,
당신의 피까지도 주시는 성체성사의 신비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구체적으로 그 빵이 당신 자신의 살이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신다.
“빵”(6,48.50)이라고 하셨을 때는 모호했지만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51절)이라고 하신다.
이 때문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라고 한다.
이 말씀 때문에 많은 제자가 떠나간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3.58절)
우리는 영성체를 통해 그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신다.
즉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
우리의 삶에서 이 두 가지 행위는 “생명”을 강하게 해 주고 새롭게 만듦으로써
“생명”을 유지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를 이제 성체성사와 연결하면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받아먹음으로써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며,
거기에서 그분의 구원이, 그분의 생명 자체가
우리를 통해 드러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이다.
그 생명은 시간과 우리의 죽음 자체를 넘어 계속되게 된다.
바로 죽음은 성체성사의 생명에 의해 극복될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54절)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을 통해 당신 자신이 충만한 생명이 되셨다.
즉, 부활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의 육체까지 완전히 가지셨다.
이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와 일치되심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몸 자체를 마지막 부활 때 변화시킬 생명력을 그분으로부터 얻게 된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를 오직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들에게 전하고 나누어주기 위해 받아 모신다.
그래서 활동적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고자 하는 신자들은
성체성사에 보다 열심히 참여한다.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의 최고의 표현인 성체성사를 올바로 이해할 때,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와 같이 우리도 우리 형제들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기 위해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고 느낄 것이다.
또한 피는 십자가 위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을 연상케 한다.
그분은 참으로 당신의 모든 피를 우리를 위해 흘리셨다는 사실을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최고의 희생의 순간을
신비스럽게 재생시켜 우리 신앙에 제시한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신비를 기억하게 할 뿐 아니라, 실제로 생생하게 재현시킨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자기 자신을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온전히 내어주는 행위를 최고로 표현해 주는 사건이다.
자기 자신을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온전히 봉헌하는 것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러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기에 성체성사는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데 필요한 활력소를 공급하는 심장과도 같다.
그래서 성체성사는 교회의 심장이라고 한다.
“형제 여러분,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에페 5,15-16절)
성체성사 거행에 참여하는 그리스도 신자들은 이기주의, 폭력으로 가득 찬 이 ‘악한 때’의
어두움을 없애기 위해 사랑과 봉사로 자신의 신앙인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바오로 사도의 마지막 말씀은 성체성사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 같다.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는 성체성사가 중심이 되는 전례적 모임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그러면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에페 5,18-20절)
우리가 항상 하느님의 은총에 대하여 감사드려야 한다면,
우리는 이미 그 성체성사가 감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체성사 안에는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 자신에게 감사하시는 하느님께서 현존해 계신다.
모든 일에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살로 오신 그분을 찬미하며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그분을 받아 모셔야 할 것이다.
성체와 에너지 보존의 법칙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성체성사의 신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하느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주셔야 하는 분임을 이해하지 못할까요?
당신을 따라온 이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며 말다툼합니다.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칙 중 ‘열역학 제1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믿어야 합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란
“에너지는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단지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환된다.”입니다.
이 법칙을 받아들인다면 사실 빅뱅으로 우주가 생겨나거나 무생물에서 생물이 생겨나고
또 하등동물에서 고등동물로 진화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존재는 에너지입니다.
어떻게 에너지가 없었는데 온 우주라고 하는 어마한 에너지 체계가 저절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생명체도 무생물보다는 높은 에너지입니다.
생명체가 죽어서 에너지가 빠져나가면 무생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등동물도 하등 동물보다 에너지 체계가 높습니다.
그래서 고등동물이 세포가 분해되는 건 있어도 무성생식을 하는 단세포동물이
양성생식을 하는 복잡한 체계를 가진 동물로 저절로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위반됩니다.
아무리 진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이 모든 게 확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음도 알게 합니다.
그런데 육체만 에너지가 필요할까요?
우리는 정신적인 에너지도 에너지라고 말합니다.
사랑도 에너지입니다.
사랑할 사람이 없고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죽고 싶어집니다.
에너지가 다 떨어진 것입니다.
특별히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이들은 자신 안에 사랑을 간직하지 못한 채
언제나 배고프게 살아갑니다.
톨스토이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자랐습니다. 두 분 다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사랑의 배고픔을 쾌락으로 채우려 했으나 채워질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자 50세가 넘어 자살 시도까지 합니다.
이때 그는 만들어진 것은 창조자에게서만 에너지를 받을 수 있음을 알고
그리스도께 기도하고 그분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는 “내가 진정으로 따르는 신앙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존재가 존재를 낳고 생명이 생명을 낳으며
사랑이 사랑을 낳는다는 말을 뒷받침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누군가 생명의 희생으로 받은 생명입니다.
보리스 콘펠드 박사는 러시아에 살던 유대인 의사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의사로서 죄수들이 병을 핑계하지 않고 죽도록 일하다가 일터에서 죽게 하는 일과,
난치의 환자는 목숨을 연장하지 말고 죽도록 하여 경제를 낭비하지 말라는 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고 한 장암 환자를 치료해 줍니다. 암 환자는
“왜 당신은 이렇게 위험한 시도를 하면서 나를 살리려 합니까,
당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의사 보리스에게 던집니다. 보리스는
“괜찮아요. 염려 마셔요. 이미 당신과 나를 살리고자 죽으신 분이 계시거든요.”라고 대답합니다.
“도대체 그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조용히 미소를 흘리며 의사 보리스는
“그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후 의사 보리스는 이 사람을 살린 것이 알려져 밤에 습격받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보며 솔제니친은 땅에 엎디어 흐느끼며
“보리스, 알겠습니다. 이제는 저도 저의 최선을 바쳐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분의 이름을 전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솔제니친은 197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합니다.
에너지도 저절로 생겨날 수 없는 것처럼, 사랑도 생명도 받아야 합니다.
톨스토이는
“뉘우치고 회개한다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악하며 약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자기가 지은 모든 잘못된 행위를 인정하고 영혼을 깨끗이 함으로써
신성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에너지는 저절로 생성되거나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확실한 죽음 앞에서 생명력이 풍부한 사람이 됩시다.
톨스토이는 마지막에 신상에 귀의했습니다.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충만한 의미로 가득한 시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우리는 참으로 은혜로운 주님 말씀을 접합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찾고 갈구하던 주님께서 멀리 다른 하늘 아래 계시는 것이 아니랍니다.
아주 가까이 지척에 현존하신답니다.
놀랍게도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안에 주님께서 계신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 56)
더 은혜로운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이 언제나
우리 안에 머물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 너무나 쉽다는 것입니다.
엄청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미사에 참석하면 됩니다. 지극정성으로 영성체를 하면 됩니다.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로 인해
나는 주님 안에 있고,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게 됩니다.
그렇다면 저같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체성사에 참여하긴 하는데,
도통 주님 현존 체험보다는 부재 체험으로 기우는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관건은 타성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저 의무요 습관처럼, 후딱 해치워야 할 숙제처럼 성체성사를 대한다면,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마치 돼지 목에 걸린 진주 목거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는 타성에 빠지지 않기 위한 좋은 제안을 몇 가지 건네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시간을 잘 쓰랍니다.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충만한 의미로 가득한 금쪽같은 시간을 잘 사용하랍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미사 입당송의 한 말씀이 가슴에 사무칩니다.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오늘 우리의 매 시간들이 하릴없이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 뜨락에서 지내는 거룩한 시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권고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우리의 하루하루는 우리를 위한 주님의 놀라운 업적과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찬미가로 표현되어야 마땅합니다.
이웃을 향한 험담과 불평불만을 멈춰야 하겠습니다.
지난 시절 어두웠던 상처는 자비하신 주님께 맡겨드려야 하겠습니다.
내일에 대한 근심과 걱정도 모두 섭리의 손길에 맡겨드려야 하겠습니다.
그저 오늘 주님 현존 안에 기쁨의 찬가를 불러야 하겠습니다.
단맛의 쓴맛을 보고 난 뒤에 쓴맛의 단맛을 본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지지난 주일부터 계속되는 영원히 살게 하고,
살아 있는 빵이신 주님의 몸에 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 화답송도 지난주와 같은 화답송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이 시편과 함께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한 저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단맛의 쓴맛을 보고 난 뒤에야 쓴맛의 단맛을 보게 된다!!!
시편의 이 구절이 제게는 가장 사랑하는 시편 구절 중 하나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제가 그리고 여러분이 맛보고 깨닫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른 아무것도 필요 없고 그것으로 끝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 구절을 사랑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그때 저는 미국을 싫어했습니다.
그것은 그때 제가 국수주의적이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정치적으로는 물론 문화적으로도 거부감이 컸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영화도 보지 않았었고 음식을 먹을 때마다
미국 음식은 다 Junk Food(정크 후드) 곧 쓰레기 음식이라고 여겨
미국의 대표적인 음식인 햄버거는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시시 성지순례를 했고,
그때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던 저의 형제들이 제 입맛에 맞을 거라면서
올리브를 한번 먹으라고 권하였는데 먹어보니 과연 제 입맛에 잘 맞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미국에 있는 동안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먹었어도 미국 사는 동안 음식으로 덜 고생했을 것이고,
한 번 맛이라도 봤으면 맛 들이게 됐을 텐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그때 저는 머리를 한 대 맞듯 큰 깨달음이 왔고
그때부터 앞서 얘기한 시편 구절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한 번이라도 맛을 보면 진짜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왜 한 번 맛을 보지 않습니까?
그 한 번을 맛보지 않는 이유가 올리브를 안 먹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길들은 입맛, 맛 들인 입맛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길들고 맛 들인 입맛만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저처럼 먹던 것만 좋다고 하고 먹던 것만 고집하기에
새로운 것은 맛없다고 하며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맛의 전환 곧 새로운 맛 들임은
단맛의 쓴맛을 보고 난 뒤에야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단맛의 쓴맛을 보는 것,
단맛이 쓴맛으로 바뀌는 체험은 내가 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프란치스코에게서 볼 수 있듯이 이런 체험은
주어지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는 주님께서 자기의 회개를 시작하게 해 주셨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가 좋아하고 원하던 것을 주님이 좌절케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전쟁에서 지고, 병에 걸리고, 원하던 기사가 되지 못하는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는데
우리가 설상가상이요 엎친 데 덮쳤다고 하는 이런 일들은 프란치스코의 경우처럼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즉시 알아채야 하지요.
그런데 보통은 뒤늦게야 그것이 하느님의 개입이요 은총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단맛의 쓴맛을 봤다고 맛의 전환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쓴맛이 단맛으로 바뀌기까지 해야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쓴맛이 저절로 단맛이 되는 것은 아니고 그래서 이것도 은총에 의해서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 나병 환자를 보는 것은 쓰디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자기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셨다고 그는 회고하며,
나병 환자를 껴안았을 때 쓴맛이 단맛으로 바뀌고 비로소 세속을 떠났다고 합니다.
세속의 입맛은 이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포기하게 되고,
천상의 입맛은 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만 얻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고통스러운 것을 우리 스스로 택하지 않기에
주님께서는 고통이라는 은총으로 우리 입맛을 바꾸시고
당신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고통의 은총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는 오늘 우리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