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당님이 강의방에 올리신 글인데 좋은 자료라서 옮겨 봅니다
국가 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했던 야자시 이야기입니다.
[야자시는 옛날부터 존재했습니다] 게시자: 현문 2007.02.21
명리학 고서에 야자시 사주가 없다고 해서 옛사람들이 야자시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건 명백히 틀린 말입니다. 임철초 선생이 적천수 주석에서 야자시를 언급했고(사주가 아님) 우리 고전 문헌에도 야자시 기록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사이며 문헌 중에서 가장 신뢰할만한 기록입니다. 여기에 역법에 관한 기록 중 야자시를 측정한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조선 시대에는 역법의 시간 측정을 굉장히 중요시했습니다. 세종조에는 시간 측정을 소홀히 한 관원을 바로 구속하라는 왕명을 내리기도 합니다.
세종조 기록을 보면 시간에 대해서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담당 관원들이 앙부일구(해시계), 금루(물시계)로 시간을 측정하다 보니 소홀히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종이 아예 기계장치를 해서 시간을 자동으로 알려주는 시계를 만들기에 이릅니다. 이게 장영실이 물시계를 이용해 만든 자격루(自擊漏)입니다.
매 시, 경, 점(시간 단위)이 되면 시간을 알려주는 알리미 인형이 그 시간에 해당하는 북과 종을 치는 인형을 바라보고 그때 인형이 시간에 따라 북, 종, 편을 치면 관원이 그걸 듣고 외부로 알리는 시스템입니다. 이 물시계를 맞추는 기본 시계가 <일성정시의>입니다. 낮에는 태양을 기준하고 밤에는 별을 기준으로 하는 시계입니다. 이 시계를 맞출 때는 동짓날 야반 자정에 맞춥니다.
세종 19년(1437년) 기록에 ‘성구환’을 사용하는 법은 첫해 동지 첫날, 새벽 전 야반 자정을 시초로 하여(用星晷環之術。 初年冬至初日晨前夜半子正爲始...)...
야자시의 또 다른 기록을 보면
영조 1년(1724년) "황해감사가 장계하기를....., 11월 22일 야자시에 뇌성이 크게 울렸다.(黃海監司狀啓... 十一月二十二日, 夜子時, 雷聲大作)"
본문 글 황해감사의 야자시 글 일진을 보면, 11월 22일 야자시는 壬戌일입니다. 23일이 癸亥일이고요. 그런데 실제 壬戌일로 기록했습니다. 즉 왕조실록은 壬戌일 야자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11월 22일 야자시를 뽑아보면 다음 아래와 같습니다. 일진이 임술이 나오죠
이러한 기록은 실록을 찾아 보면 확인 할 수 있습니다.
1724년 11월22일은 임술일이 됩니다 (조선왕조는 음력 사용함)
다음 아래 자료를 확인해 보세요
원본에 [임술]이라고 분명히 기록이 됩니다. 기록지이기 때문에 년대와 일진 시간등은 절대 엄수하여 기록하는 겁니다
만약 정자시로 기록을 한다면 다음 아래와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조선왕조실록과 날짜가 완전히 틀려지므로 거짓된 자료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기록에 의하면 조선관료들은
일상적으로 야자시를 사용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정조 24년(1800년) 기록을 보면
"9월 중기(中氣)의 상강(霜降)의 경우 청나라는 9월 초6일 야자시(夜子時) 3각 6분에 들고, 우리나라는 초7일 자정(子正) 2각 3분에 들어 하루의 차이가 납니다." (九月中氣霜降, 淸爲九月初六日夜子時三刻六分, 鄕爲初七日字正二刻三分, 差以一日)
이 기록은 청나라와 조선의 상강 입절 시각이 다르며 청나라는 야자시에 조선은 자정 후에 들어왔다는 것이므로 조선과 청의 시차 문제를 알고 있었으며 그 시간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현재의 시간 단위와 다름).
조선왕조에서 막연히 자시만 측정한 게 아니고, 위 기록들은 자시 가운데 자정을 맞추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조선의 시간 계산은 청나라의 입절 시각까지 서로 비교할 정도로 엄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역법 자료들이 모두 명, 청에서 넘어 온 것들이기 때문에 중국도 야반 자시를 측정했다는 겁니다.
이런 기록들이 야자시 사주를 인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옛 술사들이 역법의 자료에 얼마나 깊이 통했는가의 문제는 제기할 수 있는데, 왕조의 역법은 매우 귀중한 자료이기에 일반 관원일지라도 함부로 손대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료에 접근하지 못한 술사들이 깊이 있게 야자시 명조를 연구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https://cafe.daum.net/2040/MgSK/6241
첫댓글 좋은글. 잘봤습니다. 수고하셨네요
몇차례. 제가 올린. 야지시. 명조들
정자. 로. 바꿨을때. 하나도. 맞은것이. 없었네요
지금도. 여전히. 정자. 올라오지요
아예. 읽지않습니다.
해서
정자. 볼사람은. 그냥보면. 됩니다
뭐. 할말이. 없음이죠.
네 고전 자료들 찾아 보시면
야자시에 대한 기록이 엄청 많습니다
그러나 정자시에 대한 기록은 거의 하나도 안나타납니다
다만 현대인들이 야자시를 모르니가 자시라고 왜곡 번역하는 사례들이 많이 보입니다
이게 현실인 겁니다
강의방
인당님 글. 사망수. 해석. 병술생
이곳으로. 옮겨서. 토론해. 보면. 어떨까요?
보이는게. 있어서
글좀. 올려볼까. 합니다.
댓글. 내릴겁니다
인당님 보시면
네
조선왕조실록에서
임술일 야자시로 기록됐나요?
임술일 임자시로 기록됐나요?
기록에서 살펴보면
[11월 22일 임술일에 기록하다]
이렇게 설명하는 겁니다
기록지는 역사서 이기 때문에 시간을 절대적으로 표기합니다 이게 실수가 되면 역사서가 아니죠
11월 22일이 야자시에 뇌성이 치다
黃海監司狀啓... 十一月二十二日, 夜子時, 雷聲大作
일단 이 역사서로 이해할 대목은
-야자시 사용을 하였다
야자시는 23시에서 24시이다(동경시 제외함)
그러면 23시부터인데 정자시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면
- 11월 22일 정자시(야자시)는 계해일주라고 표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역사서에서는 11월22일 야자시를 임술일로 표기했습니다
이 정도 설명에도 이해를 못한다면
그게 한계라서 저도 설명할 자신이 없습니다
알아서 하셔야죠
또한 역사서 보시면
시간도 나오는 대목이 있는데
-임술일 축시에 아이가 태어났다
-인시에 해와 달이 일식으로 어두워 졌다
는 기록도 보입니다
따라서 역사서 기록은 만세력과 똑같습니다
그러니 야자시로 표기하는 겁니다
누군는 이걸 억지 해석해서
사주보는 만세력 다르고 달력 다르다고 억지 주장하시는데
이걸 보면 그런 이야기 못하는 겁니다
과거의 달력을 한버 보시면
거의 다 만세력입니다
요즘 처럼 보는 일주일로 나눈 신식 달력은 식민지시대에 들어 온 것이니까요
아래 사진은 조선시대 달력입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만세력과 동일합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다방면에 두루 지식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임술일 임자시로 명확히 기록되지 않았네요.
黃海監司狀啓... 十一月二十二日, 夜子時, 雷聲大作
영조 1년(1724년) 11월 22일이 무슨 일인가 확인해 보세요
-임술일이죠
그럼 그날 야자시는 어는 시간대에 해당 하는가요?
- 야자시는 23시에서 24시 사이가 아닙니까?
그럼 정자시 주장하는 사람입장에서는 계해일로 나와야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23시부터 그 다음날로 계산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임술일로 어제 날로 계산이 된 것 아닙니까?
이 정도 정보이면
여기서 충분한 자료 추출을 할 수 있어야지요
무슨 임자시가 나와야 한다는 이상한 이야기 합니까?
중요한 것은 야자시에서 날자가 어디 소속으로 나오는가
이게 중요한 것이죠
그 일자를 기준으로 하여 시간의 간지가 결정이 되는 것이니까요?
서로가 모르는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그만하지요.
뭘 모릅니까
이렇게 설명을 해주는데에도 모르쇠로 일관하니
--이런 정보 제공해주는데에도
이해가 안되면
받아드리질 못하는 것이죠
이해가 왜 안되겟습니까
여기서 확인할 내용은
11월22일 야자시는 무슨날인가?
입니다
1번 임술일이다--정답
2번 계해일이다
만세력을 뽑을 줄 모르시면 원광력 만세력 프로그램에서 야자시로 뽑아 보세요
(정자시로만 사주를 뽑던 분들은 야자시 뽑는 방식을 모를 수도 있음)
본인 주장대로라면 정자시라면 당연히
2번 계해일이라는 기록이 나와야 합당한 것 아닌가요?
그런데 실록에는 임술일이라 기록이 되어 있는 겁니다
곧 야자시 표기로 된 것이죠
내용 설명을 해주어도 이해 못하시는 분들을 위해
돌직구로 설명해 드리겟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11월 22일 야자시(23시에서 24시)를 임술일로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ㅡㅡㅡ 일진 자료
11월 21일-신유일
11월 22일-임술일
11월 23일 계해일
?
무슨 날로 기록하는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맇게 사주풀이해서 맞느냐는것이다.
역사를 기록하는데 날짜를 바꿀수는 없으니 당연히 임술일로 기록함이 맞지 않겟는가?
그게 역학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지금도 "22일 2350분에 포성이울렸다로 기록하는게 맞지, 23일 전날 2350분에 포성이 울렸다"로 기록하는가? 이기록으로 야자시로 역학을 푸는것이 맞다는 기록인가? 아니다. 혼돈하지 마시라.
우리는 역학자로서 그런 역사적 사실을 적어 놓은것에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게 역학과 무슨 관계가 있단말인가?
만세력으로 뽑아 일진과 야자시를 만든 겁니다.
생활역학이니 생활이 그렇게 진행되는데
명리는 다르게 뽑아 한다면
그게 사람 운명과 일치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아주 억지들을
씁니다..ㅋ
육합격국도 억지..
야자시도 억지..
야자시로 해서 안맞으면 본인 공부를 점검해야죠
나와 다른 분들은 특히 역대 선배 고수들은 그게 다.잘맞으니까 야자시로 한 것 아니겟습니까.
만민영.유백온 임철초 사럭오 원수산 박도사..
명리의 맥을 이어온 핵심 인물들이
다 야자시로 한다고 하는데...
본인이.안맏으면 본인 것을 재검토하셔야 합니다
@갑진 그러면 그 시절 그시간을 무엇으로 기록해야 할까요?
지금 23일 2350분에 포성이 울렸다고 신문에 기록됫다고 야자시가 맞다고 할것인가요?
생각의 발상이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왜자꾸 만세력이 그렇다고우기는 것입니까?
조금 생각해보면 될것을...
그건 갑진님이 아상에 젖어있기 때문에 그리 받아 드리는 것이라 봅니다.
@昰倫之山 그러면 만민영 임철초 유백온 서락오 원수산이 모두 아상일까요?
그들의 생각을 따라야죠
무슨 우리가 이러쿵 저러쿵...
[지금 23일 2350분에 포성이 울렸다고 신문에 기록됫다고 야자시가 맞다고 할것인가요?]
이러한 질문을 하시는 것은 야자시에 대한 배경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런 황당한 질문을 하는 겁니다
현대 시간 측정은 24시각으로 나누는 겁니다
과거 조선 시대에서는 시간측정은 12시진으로 하였는데
곧 1시진이 현재 2시간에 해당하는 겁니다
그리고 달력은 곧 만세력 달력 이였습니다
그래서 시간 측정과 만세력 달력에서는 초초, 초초각등으로 야자시 표현이 존재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사양의 현대 달력이 들어오면서 시간을 24시간제로 정하므로
이러한 과거 표기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죠
그러니 이러한 배경을 이해하시면
본인의 질문이 너무 황당한 질문이라고 깨닫을 실 겁니다
ㅋㅋ 야반자정이면 그냥 늦은밤 자시죠.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1468&ref=y&cid=41826&categoryId=41826
한국고전용어사전
야반[ 夜半 ]
= 밤 12시.
매일신전야반성행수차 =
매일 매일의 야반(夜半), 즉 자정(子正)에 5성이 천구상에 머물러 있는 수차(宿次)를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