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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19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에제 24,15-24
복 음 : 마태 19,16-22
그때에 16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18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9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20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21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복음이 잘 이해되지 않아 앞뒤로 다시 보았습니다.
십계명뿐만 아니라 이웃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라는 계명까지 지켰는데
무엇이 아직 불완전하였을까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것이
그 계명들을 모두 지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그는 왜 따라나서지 못하였을까요?
예수님을 따라오라는 말씀이 어려웠을 수도 있겠지만,
복음서에서는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22)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어려웠던 것은 그 재물을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그에게, 많은 재물을 가진 채 평생 자선을 베풀며 살라고 하였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면 이미 그렇게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요구하신 것은,
지금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흔들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부자 청년은 그리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가진 재물이 많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가진 것이 없었다면
겪지 않았을 어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가진 것이 많고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선한 일을 해서 하늘나라를 얻으려고 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것 없이 어린이처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재물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가졌다 하여도,
그것 때문에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19,21) 가지고 있는 것을 하늘나라를 위하여
모두 내놓고, 빈 몸으로 길을 나서야 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동네 산책을 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비둘기, 까치 등의 새를 쉽게 볼 수 있는데,
사람이 바로 옆을 지나가도 도망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둘기, 까치가 애완동물처럼 키우는 것도 아닌데,
야생동물이라 할 수 있는 이 새들은 도망가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 새들도 사람들이 자기를 해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섬에 들어가기 위해 배를 탔는데 기러기가 계속 배를 쫓아옵니다.
사람들은 갑판에 모여 기러기를 향해 새우깡을 던져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새우깡에 맛을 들인 기러기는 다른 먹잇감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또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노력 없이 편한 방법으로 먹이를 구하는 그 모습이 걱정되었습니다.
실제로 먹이 주는 사람이 없어져서 자생능력이 없어진 기러기들이 죽는다는
뉴스 기사를 본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나 지인에게 계속 도움만 받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두 번이야 도울 수 있겠지만, 계속된 도움 요청이 있다면 서로 상처를 받게 됩니다.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계속 도와주어야 하느냐며 화를 낼 수 있고,
또 반대로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도움 요청을 외면할 수 있느냐면서
화를 내면서 상대에 대한 상처의 골이 커지기만 할 것입니다.
도움에만 의존하면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무조건 우리의 도움을 다 들어주신다고 믿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성장을 위해 당신 손길을 거두시기도 합니다.
진짜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면 된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밖에 더 필요한 것이 없는지 다시 묻지요.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재산을 포기하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그가 슬퍼하며 주님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계명을 모두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열심히 살고 있던 젊은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예수님께 자랑하듯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본인의 결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젊은이가 예수님을 곧바로 따를 수 있도록 재산을 모두 없앨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알아서 모든 것을 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야 그가 진정으로 성장하면서 주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결단에 대해서 묵상했으면 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는 과연 어떤 결단을 하고 있을까요?
혹시 알아서 해달라면서 자신이 선택하고 해야 할 것을 주님께 미루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나를 옭아매는 것
반영억 라파엘 신부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니면 흐뭇합니다. 언제든지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쓰지 않아도 든든합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저는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닙니다.
평상시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간혹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을 알게 되면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주머니를 비워놓던 사람은 그런 것에 자유롭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답을 알려 주셨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19, 21).
그러나 젊은이는 답을 얻었으면서도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답을 얻었으면 그대로 해야 합니다.
답을 얻었으면서도 그대로 하지 않아 하늘의 보화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본인의 책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면서 길을 알려 주시고 동행하여 주시지만,
본인이 거부하는 데는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부자에게는 돈이 전부입니다. 그의 재산은 곧 목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은
단순히 자선을 베풀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이 있으니 문제입니다.
사람 나고 돈 났다는 것을 알지만 돈에 매이는 것이 사람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아프리카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 젊은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돈 때문에 형제 부모도 없는 사람처럼 싸우는 사람들의 추한 모습을!
주목할 것은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이라는 말씀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공로를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공로로 구원을 얻지 않고 주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재물로부터의 자유를 갖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님을 우선으로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학식도 명예도 권력도 재물에 속합니다.
그러한 것을 지니면 지닐수록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것은 다 재물로 볼 수 있습니다.
훌훌 털어버리고 먼저 따름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더 큰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그리고 항상! 주님”을 앞세울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5).
버림으로써 얻는 신비에 눈뜨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이라는 것은 또 다른 무엇으로부터의 옭아매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만을 갈망하여 세상 것에 자유로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주님께 속한 존재가 되는 길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질문을 해 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하는 질문은
루카복음(10,25)에서는 율법학자가 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
그는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혹시 우리도 그렇게 여기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 어떤 공로를 쌓고 그 공로의 대가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여기지는 않는지요?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마태 19,17)
생명을 얻는 길이 ‘계명을 지키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곧 ‘주님께 속한 사람’이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길은 ‘행위’를 하는 데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되는 데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러한 뜻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 19,20) 하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 19,21)
이 말씀은 잘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칫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자신이 가진 재산을 팔라',
'그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 그리고 '당신께로 오라', '그리고 당신을 따르라'는
네 가지 행동의 실행으로 알아듣기 쉽습니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더 깊은 차원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은 네 가지를 통한 ‘행동의 전환’을 말씀하고 계신다기보다,
그렇게 행동하게 하는 ‘존재의 전환’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곧 이 문장의 핵심은 뒤 구절에 있습니다.
뒤 구절은 당신께로 와서 당신을 따르는 존재,
곧 ‘당신께 속한 사람’, ‘당신의 소유’가 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 구절은 그러한 존재가 되는 전제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부자청년은 자기 자신에게 속해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쥐락펴락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기의 재물에 속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따르고, 재물을 따랐던 것입니다.
곧 '자신이라는 우상', '재물이라는 우상'을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 속한 사람,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존재적 전환을 요청받은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이 그 부자 청년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를 가리고 있는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겨지고,
자신의 실상이 드러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마태 19,22)
오늘 우리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 청년처럼 머뭇거리고 주저하다가
슬퍼하고 자신에게로 되돌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무슨 위대한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소유,
주님께 속한 존재가 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
주님!
주님께서는 저의 허울을 벗기십니다.
제 자신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위해서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이기심의 옷을 벗기십니다.
이제는 이기심과 자애심을 버리고 가진 것을 다 나누게 하소서.
나아가, 낮은 이를 섬기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 당신을 위하여 하고, 당신께 찬미와 영광이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인터넷에서 감동을 주는 글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그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먼저 보낸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2009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퍼져나갈 때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처럼 공포의 대상은 아니었지만, 사스에 걸리면 사망률이 높았습니다.
딸이 사스에 감염되어서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딸은 아이를 가진 산모였습니다.
산모의 남편은 딸과 함께 임진 중에 있는 아이도 하늘나라로 보내자고 했습니다.
엄마도 사위의 의견에 함께했습니다.
그런데 의료진은 산모가 2달만 버텨주면 아이는 태어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산모는 그렇게 2달을 버텨주었고, 드디어 아이는 태어났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서 산모는 모든 힘을 바친 후에 하느님께 갔습니다.
의료진과 아이와 산모를 위해서 기도했던 사람들은 기뻐했지만,
산모의 남편과 산모의 부모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어느덧 중3이 되었다고 합니다.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닙니다. 생사불이(生死不二)입니다.
음악인 노영심씨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노영심씨는 2009년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이 선종하신 후에 추모 음악회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처음 나온 기획안은 예술의 전당에서 음악회를 개최하는 안이었다고 합니다.
비용은 5,000만 원 정도였다고 합니다.
노영심씨는 김수환 추기경님을 추모하는 음악회를 좀 더 의미 있게 하고 싶었고,
전국 교도소를 순회하면서 음악회를 개최하는 안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한 번의 음악회도 좋지만, 김수환 추기경님의 추모 음악회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준비 위원회도 그 안을 받아들여서 전국 교도소를 순회하면서 음악회를 하였고,
서울에 와서 사형제 폐지 음악회로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노영심씨를 잘 모르지만, 노영심씨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도소와 세상도 둘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밀과 가라지가 밭에서 같이 자라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선악불이(善惡不二)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미래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과거도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의 차원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존재의 차원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은 바로 지금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
지금 감동이 없다면, 지금 기쁨이 없다면,
지금 감사가 없다면 영원한 생명은 허상(虛像)일 뿐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옷’이라는 이야기를 남겨주었습니다.
“그대의 옷은 그대의 아름다움은 많이 가리면서도 아름답지 못한 것은 가리지 못하는 것.
그대는 옷으로 개인의 자유를 얻으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갑옷이 되고 사슬이 됨을 깨닫게 되리라.
그대가 옷을 좀 덜 입고 살을 좀 더 내놓아 태양과 바람을 더 많이 만날 수 있기를.
생명의 숨결은 태양 속에 있고, 생명의 손길은 바람 속에 있으므로. 잊지 말라.
부끄러움은 순수하지 못한 이의 눈을 가리는 방패일 뿐.
순수하지 못한 것이 거기 더는 있지 않을 때,
부끄러움은 오히려 마음의 족쇄, 마음의 얼룩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잊지 말라.
대지는 그대 맨발의 감촉을 기뻐하고, 바람은 그대의 머리카락과 장난치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오늘 복음에서 한 젊은이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젊은이에게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살인해서는 안 됩니다. 간음해서는 안 됩니다. 도둑질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해야 합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젊은이는 규율과 율법이라는 옷을 잘 입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예수님께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체면, 가식, 율법이라는 옷까지 벗으라고 하십니다.
욕심, 시기, 질투라는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진정한 자아를 보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자아를 보면 누군가에게 묻지 않아도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보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하느님 나라와 부자 청년
조욱현 토마 신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16절)
돈 많은 젊은이가 예수께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청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 계명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8~19절)
젊은이는 그 계명들을 지켜왔다고 말한다.
그는 그것 외에 영원한 생명을 위해 또 다른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에게 더 큰 계명이 주어진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절)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그것을 잃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율법을 따르면서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는 슬퍼하며 떠나갔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의 선택만이 남아있다.
여기서 판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즉, 악을 끊고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그분을 본받고 그분이 가신 길을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따라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이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도움을 주는 사람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영적인 부를 나누어 받아
자신에게 모자라는 것을 채움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해도 영적인 선물은 풍성히 받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일 것이다.
그 젊은이는 이 말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22절)
그는 재산을 아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계명들을 잘 지켜왔다고 했지만,
그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던지 아직은 미성숙한 사람이었다.
젊은이의 비극은 그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이웃에게 봉사하기보다는
그 재물에 더 아까워하고 마음이 집착되어 있다.
당연히 예수께 등을 보이지 않을 수 없으며,
무엇인가 둘 중의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데, 결국 재물을 포기할 수 없을 때,
오늘 복음의 젊은이처럼 슬픈 얼굴로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가르치고 있다.
재물과 관련해서 때로는 용기도 필요하고, 때로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재물과 관련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늘 고민해야 할 질문 한 가지가 있습니다.
과연 재물이 주님 나라 입국과 영원한 생명을 획득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재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하는 고민입니다.
오늘 복음이 풍기는 뉘앙스는 재물이 천국과 영생으로 가는 길에
큰 장애물이 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 대한 보다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것입니다.
재물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듯한 저희 수도자들에게도 이 부분은 참으로 큰 고민거리입니다.
적극적인 홍보 활동과 목숨을 건 후원 회원 확보로 막대한 부를 창출하는 공동체들이 있습니다.
그를 바탕으로 엄청난 규모의 수도원과 시설을 건립하고,
본인들도 모르게 서민들은 엄두도 못 낼 럭셔리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물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한 사랑의 실천도 많이 하십니다.
그러나 규모가 확장되면 될수록 청빈과는 거리가 먼 생활로 전락하고 맙니다.
벌써 그 공동체는 천국이나 영생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탁발과 섭리에 의존하기에,
내일 먹을 양식도 확보되지 않고, 매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면,
거기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과 위화감이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청빈을 사는 데 있어서도 조화와 균형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관건은 재물을 어떻게 모으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대 부자들을 미워하거나, 경멸하지 않으셨습니다.
정직하게 일해서 모은 재물은 주님이 주신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그 재물을 통해 가족을 부양하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관대하게 나눌 때,
그러한 재물은 축복이요 선물로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경계하시는 부는 부정한 방법으로
남을 짓누르고 축적한 천박한 부, 절대 나누지 않는 이기적인 부입니다.
그저 한도 끝도 없이 모으기만 모았지,
죽어도 나누지 않은 재물을 주님께서 슬퍼하실 부끄러운 부입니다.
가끔 형편에 맞지 않게 과도한 기부나 헌금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즉시 따로 모시고 가서 차근차근 설명해 드립니다.
바야흐로 백세시대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자식들, 절대 확실한 보험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건강과 노후를 위해 지혜로운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다 퍼주고 나중에 쫄쫄 굶다가 무료 급식소 신세 지면, 누구 책임입니까?
재물과 관련된 오늘 주님 말씀, 때로는 지혜가 필요하고 때로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재물에 너무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지?
재물이 주님보다 상위에 위치하고 있지는 않은지 잘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 수도자들도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어찌 보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24시간이라는 시간이 재물입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하루하루 우리네 남은 인생이 재물보다 더 중요한 자산입니다.
이 소중한 자산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잘 계획해 봐야겠습니다.
기껏 사랑하고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오늘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이랄까 단계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른 복음에선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라고 달리 말씀하십니다.
둘을 합치면 완전한 사람이란 부족함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고,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부족을 하나하나 메꿔가야 할 것입니다.
첫 번째로 십계명의 대인 계명 준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십니다.
대인 십계명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 외에 나머지 계명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처럼 다 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이것도 이웃 사랑이긴 하지만 소극적이고 그래서 부족하지요.
그래서 대인 십계명을 다 지켰다는 부자에게 더 적극적인 사랑을 주문하십니다.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이 말씀만 가지고는 팔아서 다 주라는 것인지 일부만 주어도 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폐나 해를 끼치지 않는 정도의 사랑이 아니라
이웃 특히 가난한 이웃에게 보탬이 되는 적극적인 사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완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직 아닙니다.
이것을 다 했어도 마지막 한 가지 곧 주님을 따르는 것,
이걸 하지 않으면 작은 것 하나 놓친 것 정도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는 불완전입니다
사실 앞의 모든 것 곧 대인 십계명의 준수, 자기 소유물의 포기, 이웃을 위한 자선,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해야 하고,
그래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곧 주님 따름, 이것을 위한 것이니
아무리 앞의 것들을 모두 다 했어도 이것을 하지 않으면 다 헛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잘못은 가난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을 않은 것이고,
가장 잘못한 것은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것은 다 천국 가기 위한 것이고
천국 가기 위한 것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단한 사랑을 했지만, 인간적인 세상 사랑에 그치는 사랑,
그래서 기껏 사랑하고도 천국에 가지 못하는 사랑을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