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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0일 화요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에제 28,1-10
복 음 : 마태 19,23-30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24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5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7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2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29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30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에제키엘서 25─32장은 여러 민족들에 대한 심판을 담고 있고,
오늘 독서는 그 가운데 티로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예언서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민족들에 대한 심판은,
각 민족이 저지른 일이나 특정한 시대를 언급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보다는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통치권이 주제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말하는 티로 임금에 대한 심판은 매우 전형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그 심판의 대상이 티로 임금이 아니라 누구라도 다르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사야서 10장에서는 아시리아에 대해서,
그리고 나중에는 바빌론에 대해서 비슷한 내용이 선포되고,
다니엘서 4장에서는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를 대상으로 하여 같은 주제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문제는 인간의 교만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계획에 따라 어느 나라 또는 어떤 임금에게 힘과 지혜를 주시는데,
인간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강하고 지혜롭다고 여길 때,
오늘 독서의 표현으로 “나는 신이다.”(에제 28,2)라고 할 때
하느님께서 그것을 잃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너무 전형적인 주제여서,
“나는 신이다.”라는 말을 보면 바로 멸망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내’ 힘, ‘내’ 능력, ‘내’ 지혜, ‘내’ 재산이라는 바로 그 생각이 어리석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보는 이들은 그것이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를 알아봅니다.
알아보지 못하고 착각 속에 사는 그 자신만 불행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이들의 것이고,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운지도 모릅니다.
과연 나는 어떤 것에 애착하고 있는가?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이 재물 때문에
당신을 따르지 못하고 물러간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4)
여기에서 '부자'란 단지 재물을 많이 가진 자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재물에 의지하는 사람, 재물에 집착하여 하느님을 멀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재물'이란 단지 물질적인 재화 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가정, 재능과 지식, 이념과 신념 등 자신이 애착하는 것이라면
모두가 재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하느님마저도 그것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에 대한 집착이라면,
버려야 하는 재물이요 우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은
곧 재물 때문이라기보다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느님을 멀리한 까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부와 재물은 하느님의 축복을,
가난과 빈곤은 하느님의 저주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태 19,25)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이는 구원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인간이 자력으로 스스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가진 재물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 됩니다.
부자든 가난한 이든 죄인이든 자신(우상)에 대한 애착을 끊고
하느님을 믿고 따르면 모두가 구원받을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마태 19,30)
그러니 오늘 우리는 자신을 들여다볼 일입니다.
과연 나는 어떤 것에 애착하고 있는가?
혹, 나 자신의 몸이나 소유물이나 재능, 지식이나 신념이나 이상,
자기 방식의 사랑이나 자기가 만들어 놓은 공동체 상이나 하느님 상에 애착하고 있지는 아닌가?
오늘 우리는 내가 바라는 가정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가정과 공동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바라고 믿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하느님이 되셔야 하고,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에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4)
주님!
재물이 없어도 고집과 완고함으로 제 자신을 채우고 있으니, 분명 저는 부자입니다.
힘과 능력이 없어도 제 자신의 뜻으로 가득 차 있으니, 분명 저는 부자입니다.
제 주장과 의견을 앞세워 결코 물러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자신을 가늘게 부수고 부수어 당신 바늘귀에 꿰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며칠 전입니다. 한 어르신이 면담을 원했습니다.
86세인 어르신은 신앙 체험을 들려주었습니다. ‘성체’ 체험입니다.
어르신은 미국 성당에서 미사에 참례하였다고 합니다.
마음도 불편하고, 다툼이 있었기에 그날은 성체를 모시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영성체 시간에 마지막으로 성체를 영하는 할아버지가 그만 성체를 땅에 떨어트렸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도 성체를 찾고, 신부님도 성체를 찾았는데 도저히 찾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어르신의 눈에는 성체가 땅에서 조금 떠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고 합니다.
모두가 포기하고, 미사를 마치려고 할 때입니다.
어르신은 성체가 있는 곳에 엎드려 혀로 성체를 모셨다고 합니다.
교우들이 박수치면서 기뻐하였고, 신부님도 고마워했다고 합니다.
어르신은 그렇게 성체를 모신 후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정한 여인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용서하셨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어르신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몸과 마음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불경이 왜곡되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와 스님들에 의해서 왜곡됩니다.
부처님은 자비와 보시를 이야기하는데
불자들과 스님들은 그 가르침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코란이 왜곡되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코란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슬람의 신자들과 이맘들에 의해서 왜곡됩니다.
마호메트는 평화와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이슬람의 신자들과 이맘들이 그 가르침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왜곡되는 것도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우들과 성직자들에 의해서 왜곡됩니다.
모세가 시나이산으로 올라갔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론은 그 시간을 참지 못하고, 금을 모아 황금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은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서 왜곡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희생을 말씀하셨습니다. 겸손과 가난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교우들과 성직자들은 그 가르침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드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다면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모두 부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같은 물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부유함이 주는 편리함이 많기 때문입니다.
부유하면 좋은 집을 가질 수 있고, 부유하면 좋은 차를 가질 수 있고,
부유하면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했을까요?
재물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아서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심 때문에 남을 속이기도 하고, 남의 것을 빼앗기도 하고,
하느님과 멀어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였던 세리 자캐오를 만났습니다.
부자였지만 세리였던 자캐오는 사람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그런 자캐오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동네에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제가 빚진 것이 있다면 4갑절로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받았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부자라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부자일지라도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자신의 재물을 기쁜 마음으로 이웃에게 나눌 수 있다면
하늘나라의 문은 언제든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조욱현 토마 신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4절)
예수께서는 재물 자체를 나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재물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비판하신 것이다.
바늘귀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다.
도시는 성곽으로 둘려 있고 성문이 있는데,
성문에는 짐을 실은 낙타라든가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큰 문이 있고,
그 옆에는 작고 낮은 좁은 문이 있어서 밤에 큰문을 잠그고
수위 병이 지키면서 이 문으로 사람들을 통과시켰다.
이 작은 문을 흔히 “바늘귀 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치 거대한 낙타가 사람도 겨우 지나가는
이 작은 문을 들어가기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이렇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놀랐다고 한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25절) 한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해 주셔야만 가능하다고 하신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6절)
“보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27절)
베드로가 그렇게 물은 것은 우리가 모두 사도들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물었다.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은 어떤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완전히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렇게 큰 사랑으로 완전히 버린 분들이다.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28절)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는 뜻이다.
그분을 따르는 것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백 배는 하늘나라에서 누릴 상급을 의미한다. 현재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것이다.
즉 주님을 위해 육적인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영적인 것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30절) 하신다.
재물이나, 생각이나 이념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울 것이다.
100배가 주어진다고 믿는 것이 천국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 나라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십니다.
즉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반면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하늘나라는 행복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신학생 때 2주간 행려자들을 위한 서울에 있는 한 무료 급식소에서 봉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무료 급식소라고는 하지만 돈을 200원씩 받았습니다.
없는 사람은 안 내도 되지만 아예 받지 않으면 행려자들의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가끔 식사 후에 그들끼리 밖에 나가 싸웁니다.
제가 있을 때의 싸움은 신문지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겐 이불 역할을 하는 그런 신문지가 전 재산입니다.
한 노숙자는 신문지를 많이 가지고 있었고 한 사람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없는 사람이 많은 사람 것을 하나 슬쩍 한 것입니다.
저는 ‘과연 그들이 가난한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답은 ‘아니다’였습니다. 그들은 부자였습니다. 욕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왜 욕심이 많을까요? 자신이 내어주는 것이 100배로 돌아옴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내가 어느 환경에 있는지에 대한 믿음으로 결정됩니다.
같은 아이라도 고아가 있고 부모가 있는 자녀가 있습니다.
고아는 이 세상에서 자기 것을 내어놓아도 100배로 돌아온다고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부모에게 조금만 효도해도 100배로 돌아온다고 믿습니다.
부모가 있어도 가난할 수 있지만 그 아이는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좋은 고아원에 있어도 100배의 보상을 믿지 않는 아이는 그 집착 때문에 지옥에 삽니다.
사실 그런 아이는 가진 것마저 빼앗깁니다.
우리는 이솝 우화의 ‘개와 그림자’를 잘 압니다.
한 마리의 개가 고기를 물고 가다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물에 비친 고기가 더 크다고 착각합니다.
욕심을 부린 개는 물속의 고기를 차지하려다
결국 자신이 물고 있던 고기를 떨어뜨려 잃어버리고 맙니다.
만약 100배로 돌려주는 세상이라고 믿으면
‘불쌍하면 내가 주려고 했는데 이미 먹을 것이 있으니 줄 필요가 없겠네!’라고 하며
자신의 것을 잃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하늘나라로 사는 사람의 마음을 살펴봅시다.
워런 버핏은 2011년 포춘지 9월호에 ‘나의 기부 서약’을 실었습니다.
여기에 그가 내어놓는 무엇이든 100배로 돌려받는다는 믿음이 숨어있습니다.
“저는 재산의 99%를 자선단체에 기부하겠습니다. 규모로 보면 큰 액수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매일 같이 저보다 많은 기부를 하고 있습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교회나 기타 기관에 기부금을 내고 있습니다.
제 주식의 1% 이상을 저희를 위해 사용한다 해도
저희는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지도 더 편안해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부한 나머지 99%는 다른 이들의 건강과 복지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제 가족이 걸어갈 길은 명확합니다.
저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만 취하고 나머지는 사회의 필요를 위해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보상을 믿는 사람들이 나눌 줄도 압니다. 그런데 정말 저렇게 많은 복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워런 버핏이 가진 돈의 1%를 가진 사람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1%도 조 단위의 액수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많게 되는 이유는 이미 지옥에 살기 때문입니다.
제가 유학 가서 말도 못 할 때 그 상황이 지옥 같으니 계속 내 것만 찾고 있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일부러라도 빼앗으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정말 100배가 주어지는지 보게 될 때 그 사람은 앞으로도 천국에 살 수 있습니다.
‘약속’이란 영화에서 박신양이 술에 취하여 노숙자의 가방을 빼앗으려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노숙자는 자신의 전 재산인 가방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지만 결국 빼앗기고 맙니다.
가방을 털어보니 신문지와 더러운 옷 몇 벌만 들어있습니다.
주인공은 웃으며 가방과 나머지 것들을 그의 앞에서 엎어버리고
대신 행려자에게 수표를 한 장 줍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 보따리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아?
먹다 남은 사과, 과자 부스러기, 곰팡이 쓴 떡, 순 못 먹는 것들만
잔뜩 싸가지고 맨날 얻어먹으면서 지것 빼길까봐 보따리 꼭 끌어안고 사는….
내가 거지야. 희주는 어떤지 알아? 나한테 주기만 해. 나만 쳐다봐.
절벽 꼭대기에서 눈 꼭 감고 그냥 자기를 내던지는 거야! 이런 사랑 받아봤어?”
주님을 이렇게 억지로라도 빼앗으려고 하십니다.
그래야 당신께서 더 큰 것을 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신학생이 되거나 수녀원에 들어가면 바로 100배로 받는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많은 부모님이 생기고 많은 자녀가 생기며 많은 집이 생기고 죽기까지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단지 내가 별거 아닌 것을 바쳤다는 이유 하나로.
그리고 그분은 대신 “모든 것”을 내어주십니다.
이것을 느끼며 사는 동안은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을 살게 됩니다.
베르나르도야? 너 여기 무엇 하러 왔느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은 12세기를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당시 그의 역할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12세기를 자신의 두 어깨에 짊어졌다.”라는 말까지 돌 정도였습니다.
베르나르도의 지혜와 경륜은 하늘을 찔렀는데
당대 교황님들을 비롯해 많은 왕들이 그에게 조언과 상담을 청했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사람의 모습을 한 천사’라며 우러러보았습니다.
동시에 베르나르도는 가톨릭 신앙의 옹호자, 수도생활 쇄신의 선구자,
교회 분열을 저지하는 든든한 보루, 탁월한 성서학자, 위대한 명 설교자,
그러면서도 겸손한 수도자로서의 삶을 동시에 살아갔습니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마지막 교부’ 또는 ‘꿀과 같은 혀를 가진 박사’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090년 프랑스 귀족 가문의 촉망받는 자녀로 태어난 베르나르도는
다정다감하고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22살의 나이에 시토회에 입회해서 수도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출중한 인품과 지도력,
그리고 놀라운 언변과 감수성의 소유자였습니다.
입회하기 전 그는 여러 형제들과 친구들을 영적으로 잘 지도하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30명이나 되는 동료들을 하나로 모았고 의기투합한 그들은
당시 개혁파 수도원으로 ‘뜨고 있던’ 시토회에 동반 입회를 하게 됩니다.
초기 양성 기간을 마친 베르나르도는 장상의 지시에 따라
동료 수도자 12명과 함께 그 유명한 클레르보 계곡으로 내려갑니다.
척박한 황무지였던 클레르보에 작고 소박한 수도원을 건립한 베르나르도는
오랜 기간 동안 철저한 고행과 단식, 집필과 일에 전념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았고, 숨을 쉬었으며, 또 그 결실을 형제들과 나누었습니다.
점차 클레르보는 수도생활 개혁의 원천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메마른 골짜기였던 클레르보는 점차 빛과 생명의 계곡,
기쁨과 구원의 골짜기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베르나르도의 성덕에 감화를 받고 클레르보로 몰려왔습니다.
베르나르도는 가톨릭교회 쇄신에 대한 강한 열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병약한 몸을 이끌고 교회의 개혁을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했습니다.
교황청의 폐단과 고위성직자들의 세속화를 신랄하게 경고했습니다.
교회 당국으로부터 공인받은 순회 설교자로서 수많은 지역을 다니며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했습니다.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베르나르도는 스스로에게 그 유명한 질문 한 가지를 던졌습니다.
“베르나르도야? 너 여기 무엇 하러 왔느냐?”
그가 남겨준 수도자로서의 모범을 바라보며 같은 수도자로서 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는 교도권으로부터 부탁받은 중요한 임무를 완수하는 즉시 고향집으로 달려가듯이
부지런히 클레르보로 돌아와 평범한 수도자로서의 삶을 계속했습니다.
그가 수도원으로 돌아올 때는 절대 혼자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누군가를 데리고 왔는데
그의 삶에 매료된 나머지 수도 생활을 선택한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순례와 나그네의 가난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어제 복음에서 부자가 주님 추종에 실패하자
주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답하시는데
이 말씀을 들으면서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지금 가난한가?’ 성찰케 되었습니다.
저의 가난에 대해 성찰할 때 지금은 많이 무디어졌지만
옛날에는 집착 수준이었다고 할 정도로 무척 가난 하려고 했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무척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난은 물질의 가난보다 아버지가 없는 가난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없으니, 기가 꺾인, 아니, 기가 아예 죽은 가난이었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안 계시니 물질적으로도 가난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하루 세 끼를 먹은 것이 드물 정도로 늘 배가 고팠고,
시내 아이들은 도시락을 싸 와 밥을 먹을 때 슬쩍 나와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돈이 없어 등록금을 못 내는 것은 물론 미술 시간에 스케치북을 사 가지 못해
미술 시간마다 손바닥 열 대를 맞고 때우는 서러운 가난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학생의 서러움을 이해하지 못하고 매를 대신
부잣집 딸 미술 선생님이 너무 원망스러웠고
지금도 그 선생님 이름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수도원에 들어와, 프란치스칸 가난을 배운 다음에는
한편으로는 너무 행복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것은 고귀한 가난을 제가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가난은 내몰린 가난이었다면 이때의 가난은 제가 선택한 가난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보물을 나만 소유한 듯 제가 오히려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렇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저는 가난에 너무도 집착했고 가난치 않은 사람을 무시하였으며,
저의 형제들에게는 왜 가난하지 않냐고 질책하고 더 가난해지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니 괴로워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저로 인해 괴로웠고 관계는 최악이 되어 괴로웠습니다.
그러다가 가난에 대한 집착과 영적인 교만이 그 원인임을 깨닫고
수련에 들어가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가난이 아니고 사랑임을 또한 깨달았습니다.
이후 저의 가난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랑의 가난이었으며
그래서 수련 마치고 올라오자마자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녔고,
그것은 선교 열망과 결합 되면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의 가난 여정을 정리하면
내몰린 가난,
선택한 가난,
집착과 교만의 가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지금 그리고 앞으로 저의 가난은 어떤 것이어야 하고 어떤 것이 될까요?
제 생각에 순례자와 나그네의 가난이 되어야 하고 그런 가난이 될 것입니다.
어제 주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을 따라 하느님 나라로 가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도 순례자와 나그네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저세상 곧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도 순례자와 나그네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순례자와 나그네로서 이제 하나하나 다 내려놓아야 하고
내가 스스로 내려놓지 않아도 잃게 되고 내려놓게 될 것입니다.
건강부터 잃게 되고,
욕심은 말할 것도 없고 자그만 집착이나 애착도
하나하나 내려놓게 되고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순례자와 나그네의 이 가난이
우리가 마지못해 선택하는 가난이 되지 않고,
하느님 나라로 가는 즐거운 길에 기꺼이 선택하는 가난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19,25)
예전 자주 들었던 광고,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 라는 표현 기억하시지요.
아마도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어떤 누구도 부자 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자가 되면 정말 좋은 이유를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고 봅니다.
여러분 생각에, 부자가 되면 좋은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셨나요.
어느 투자가의 글에 부자가 되면 좋은 이유를,
첫째로 똑똑한 사람을 부릴 수 있는 특권이 생기며,
둘째 쓸모 있는 유능한 사람들이 모이고,
셋째 남들보다 많은 정보를 통해 자신감을 얻게 되며,
넷째 노후생활이 안정되고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표현했더라고요.
그러면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부자가 되면 좋은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면 좋겠네요.
우리는 어제 복음에서 일찍부터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하며 살아온
어떤 부자인 젊은이가 이미 영원한 생명의 문턱 가까이 왔었으나,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19,21)라는 예수님의 권고를 듣고
슬퍼하며 떠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국 그 젊은이는 영생의 문턱에 도달하였지만, 그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 걸림돌은
하느님보다 재물을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실존이며,
영원한 생명과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가장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관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이냐, 재물인가”(6,24)라는 선택과 결단의 문제는
결코 생각만큼 쉬운 선택과 결정이 아닌 자신의 온 존재를 다 걸고 해야 하는 절박한 선택이며,
이는 단지 그 젊은이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런 내용을 전제하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19,24)하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대목은 자칫 잘못 이해하면
많은 오해와 갈등을 빚을 수 있는 미묘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훨씬 더 쉽다, 고 표현하십니다.
알아듣기 쉬운 표현이지만 상상이 잘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잘 아시는 것처럼 바늘귀에 실을 통과하는 것도 여간해서 힘든 일인데,
덩치가 제법 큰 낙타를 바늘귀로 통과시킨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과장된 표현의 밑바닥에는 그러니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한마디로 가능성 제로 상황으로 즉 거의 불가능하다는 강조이겠지요.
이런 예수님의 극단적인 표현에 제자들이 경악하며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19,25)라고 당연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어쩌면 부자인 젊은이의 실망한 모습을 보면서
그에 대해 스승이신 예수님의 민감한 반응이 아닐까, 라는
의구심이 들 만큼 강한 표현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의문처럼 정녕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일어납니다.
이런 제자들의 놀란 표정과 태도를 눈여겨보시면서 예수께서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19,26)라는 해법을 제시합니다.
어쩌면 이 과격한 비유 이면의 초점은 바로 구원이란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한
예수님의 의도된 표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있는 실낱과 같은 가능성의 해답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만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곧 어떤 인간도 자신의 힘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구원 곧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노력(=자력 구원),
곧 세상의 재물이든, 권력이든, 선행이든 자선이든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4,12)라는
베드로 사도의 재판정에서 증언은 그 자신의 삶을 통해 체험되고 터득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존재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그 젊은이는 그가 그토록 원하는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이 자기 앞에, 자기 가까이 와 있었는데도,
그 구원의 문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소유한 세상적인 재산에 대한 애착과 미련 때문에 구원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하느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5,45) 분이시기에
원하시면 누구든지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도 부자들을 단죄하신 것도 아니고 구원에서 배제하신 것이 아니라, 고 봅니다.
그들 또한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당연히 구원될 것이며 구원하실 것입니다.
다만 젊은 부자를 바라보면서, 부자들이 흔히 겪는 문제
곧 세상의 재물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을 위한 수단일 뿐인데
마치 재물이 구원해 주는 것인 양, 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경고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부자가 상대적으로 구원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인간 내면에 뿌리 깊은 소유욕과 재물의 노예가 될 수 있는 소지가 많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많이 소유하였으면서도 그 재물에 대한 집착과 욕심에 빠지지 않고,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섬김과
자신의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는 삶을 살아간다면야
이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없다, 고 봅니다.
물론 이처럼 자신의 소유로부터 자유롭고 재물을 통해서
올바른 곳에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전연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실례가 성서 가운데 예리코의 자케오입니다.(루19,9)
그는 자신이 소유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부당하게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횡령한 것에 네 곱절로 갚아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이 미덕도 아니며, 부요함이 그 자체로 죄악도 아닙니다.
또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부자는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저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하늘나라는 들어가는 곳, 장소가 아니라 누리는 것,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양적인 물질이나 재물의 소유 여부에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소유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얼마만큼이나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을 누리느냐,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참된 섬김과 나눔을 누리며 사느냐에
관심을 두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주어진 삶에서 비록 많은 재물을 소유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이 행복한 까닭이 무엇인지 그렇게 느끼지 못한 사람은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또한 남들보다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왜 그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진 듯싶은데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볼 일입니다.
가지고 있음에도 누리지 못하면 아니 가짐만 못합니다.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주어진 삶 가운데서 하느님을 누리며 산다면 그게 참 행복이겠지요.
아마도 그런 영혼들은 주어진 모든 것을 감사하면서
남과 비교하지 않고, 주어진 작은 것에도 자족하며 살아가리라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 (2코8,9)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우리가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